2부 217화.
채앵!
전투의 시작을 알린 건, 검과 검이 부딪히는 파공음이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허공을 누비던 마법검 ‘옴므’가 내리꽂히는 것과 도현이 횡 베기를 하는 과정이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다.
휘이이-!
설화(雪花)검에서 일어난 하얀 눈보라가 주위를 뒤덮고.
크르르……!
거대한 설원의 맹수가 사납게 날뛴다.
하나 닿기만 해도 살갗을 찢어버릴 듯 매서운 송곳니와 발톱은, 애석하게도 멸살에게 닿지 못했다.
화르륵, 슈악-
전투기처럼 허공을 누비는 마법검들이, 모든 공격을 차단했으니까.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던가.
그 말처럼 자유롭게 하늘을 누비는 여섯 자루의 검은, 가장 무서운 공격 수단임과 동시에 최고의 방어 수단이기도 했다.
눈보라와 사자만으로는 막기 버거울 정도로.
‘……확실히 까다로워.’
저건 단순한 염동력이 아니다.
검의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어지간한 검사 이상의 날카로움과 묘리가 담겨있다.
[바람의 마법검 풍화검(風華劍)의 특수 옵션 ‘청풍참(靑風斬)’이 발동됩니다.]
슈아악-!
서양 검술의 대가였던 시르간의 검을 연상케 하는 풍화검.
거친 칼바람처럼 휘날리는 저것에는 ‘쾌검(快劍)’의 묘리가 담겨있다.
[업화의 마법검 ‘염화검(火華劍)’의 특수 옵션 ‘염화(火華)’가 발동됩니다.]
화르륵!
세상을 불태울 듯한 겁화를 일으키는 염화검에는, 검은 악몽 라온이 떠오르는 파괴력과 움직임이.
[빙설의 마법검 ‘서리날 라타샤’의 특수 옵션 ‘글레이셜 팽’이 발동됩니다.]
[미지의 마법검 ‘환영검(幻影劍)’의 특수 옵션 ‘환영난무(幻影亂舞)’가 발동됩니다.]
라타샤에는 레피아스와 비견해도 결코 밀리지 않는 위력의 냉기가.
환영검(幻影劍)에는 까다로운 환검(幻劍)의 묘리가.
그리고,
[천상의 마법검 ‘옴느’가 별의 재림을 시전합니다.]
—!
번쩍, 하는 순간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옴느.
유독 강한 저것에는 대마법사의 마법을 보는 듯한, 거대한 마나의 밀집이 느껴진다.
이건 이기어검(以氣御劍)으로 취급할 정도가 아니었다.
지금 도현이 상대하는 건 단순히 여러 검을 다루는 한 명의 유저가 아니었으니까.
각 분야의 상위에 오른 실체 없는 고수들이, ‘검’의 형태로 도현을 압박하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이러니 멸살이랑 붙은 놈들이, 저 능력 하나를 감당 못 해서 다 쓰러지지.’
심지어 그런 검들이, 쳐내도 쳐내도 서로를 도우며 빈 시간 없이 연계를 가해온다.
여섯 개에 불과하나 실상은 여섯을 상대하는데, 정작 이쪽은 저 검들에게 피해를 입힐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선 이것이야말로 불사의 군단인 셈.
“하, 딸깍도 정도껏 해야지.”
이쯤 되면 보라아재가 아니라, 저놈이 딸깍충 소리 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매번 가만히 서서 마법검들로 다 해 먹는 거 같은데 말이다.
하지만.
카앙! 저벅.
‘못 막을 정도는 아니야.’
종말의 탑에서 마주친 사신(死神) 데미서스의 불합리한 공격에 비하면, 이 정도는 신사적이다.
카앙!
쾌검과 환검의 경지에 오른 검술들?
‘검성 녀석의 검에 비하면…… 느리고 뻔해.’
이 분야의 정점에 한없이 가장 가까운 그 녀석에 비하면 미약하다.
차라리 그 녀석 하나를 감당하기가 더 벅찼다.
카앙! 캉!
쳐내고, 흘려내며 도현이 앞으로 나아갔다.
반격하기 시작하자 점점 더 매섭게 압박을 가해오지만, 도현은 주춤거리는 대신 도리어 기어를 올렸다.
[역천기(逆天期) 제1초식, 시(始)를 사용합니다]
[천변(千變)에 페리엘의 선물 – 질풍을 두릅니다.]
[움직일수록 질풍의 기운이 거세지며 움직임이 빨라집니다.]
그런 도현은, 어느덧 뛰고 있었다.
고개를 젖히고, 물리적으로 가능한가 의심될 만한 각도로 몸을 비틀면서도.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트럭처럼 달렸다.
챙! 챙챙! 챙챙챙!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 퍼지고, 연신 튀는 불똥에 시야가 번쩍거린다.
무수히 쏟아지는 마법검의 공격들을 쳐내고 흘려내며 앞으로 거침없이 달려가는 모습이 가히 영웅 소설의 호걸과도 같다.
그러던 그 순간.
탓.
마지막 검 한 자루를 쳐내려는 듯 검을 들던 그의 신형이, 돌연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동시에 멸살의 위에 뜨는 표식.
[표식이 생성됩니다.]
하나 이조차 예상했다는 듯, 대기하던 마법검이 미간을 노리고 찔러온다.
휘익- 빠악!
고개를 젖혀 피하며 내지른 발차기가, 멸살이 쥔 대검의 검면에 막힌다.
그와 동시에 흐읍, 위로 쳐올리자 도현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파바바박!
그와 동시에 비처럼 내리꽂히는 마법검들.
마치 유도 장치라도 달린 듯 신속한 반응이었지만, 그 사이 뒤따라온 눈보라와 하얀 사자가 공격을 대신 맞아주었다.
물론 채 몇 번도 버티지 못하고 뚫렸으나, 그로 인해 번 찰나의 시간.
그거면 충분했다.
[무변자(無變者)가 발동됩니다.]
……
[‘암벽을 뚫은 궁수의 활’의 옵션 ‘괴랄한 사격’을 선택했습니다.]
[‘진(眞) 하얀 사자의 노래’에 ‘괴랄한 사격’의 효과가 더해집니다.]
[괴랄한 사격 : 직선 궤도의 장애물을 뚫고 나아가는 화살을 날린다. 뚫을 수 있는 사물의 종류와 범위는 착용자의 근력에 비례한다. (쿨타임 : 10분)
[바이란 검술 제4초식, 일검(一劍)을 사용합니다.]
‘그래, 너라면 반응할 줄 알았다.’
줄곧 이 순간만을 기다렸으니까.
콰아아아아-!!
날카로운 참격이 직선상의 모든 것을 뚫으며 나아간다.
그렇게 생긴 빈 공간을 비집고, 도현이 빠르게 돌진했다.
슈아아악-!
다시금 마법검이 회전하며 공격해왔지만, 이미 도현은 그 자리에 없었다.
[스킬 ‘뒤잡기’를 재사용합니다.]
[표식에 비례하여 다음 일격이 강화됩니다.]
멸살이 들고 있는 검은 무겁고, 긴 리치를 가진 대검.
이런 가까운 거리에선 일반적인 롱소드 길이인 도현의 검보다, 멸살의 대검이 불리하다.
그걸 의식한 것일까.
이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발을 내디뎌 거리를 좁혀버리는 멸살.
둘 사이의 공간이 사라졌다.
차라리 둘 다 검을 휘두르지 못할 거리를 만든 것이다.
도현의 모든 노림수를 허투루 넘어가 버리게 만드는 전투 센스였으나, 도현은 도리어 웃었다.
엎어지면 코 닿는 걸 넘어, 주먹을 뻗을 수나 있을까 싶을 만한 초근접 거리.
최적의 거리였다.
[+15 천변(千變)이 ‘하얀 사자의 설화(雪花)검’으로 변형됩니다.]
촤라락-!
“애초에 이걸 노렸다, 새끼야.”
“!”
사슬을 휘감기엔 말이다.
검에서 검붉은 사슬이 된 천변이 뱀처럼 멸살의 몸을 휘감았다.
[제3계 사슬 – 죄박형계(罪縛刑界)를 시전합니다.]
[10초간 묶인 대상에 한하여 죄인을 묶는 형벌의 세계를 구현화합니다.]
[구속당한 대상은 이동기를 사용할 수 없으며, 묶인 동안 시전자에게 받는 피해가 20% 증가합니다.]
[또한 격의 차이가 나지 않는 한, 자력으로 사슬을 끊어낼 수 없습니다.]
완벽한 노림수.
하지만 멸살은, 발버둥 치긴커녕 실망이라는 듯 짜게 식은 눈으로 볼 뿐이었다.
[플레이어 ‘멸살’님의 격이 시전자를 상회합니다.]
[제3계 사슬이 격에 짓눌려 약해집니다. 시전 시간이 대폭 감소하며, 데미지 증폭 효과가 사라집니다.]
플레이어 최초이자 유일하게 세 번째 신대륙에 도달한 남자.
가장 많은 초월을 이루었으리라 추측되는 만큼, 격의 차이가 현격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안 통하는 거 같군. 설마 이게 끝인가?”
“…….”
‘설마 겨우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거냐? 이런 걸 보여주려고 그 생쇼를 펼친 거였냐’고 묻는 듯한 표정.
조금씩 흥이 달아올랐던 멸살의 얼굴이, 지금은 분명한 실망감을 드러내고 있다.
아주 재수 없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다.
“이렇게 성깔 급한 놈이, 어떻게 그간 조용한 척했는지 몰라.”
그러나 다음 순간.
멸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도현의 비아냥거리는 말 때문이 아니었다.
[루팔로의 보옥의 특수 능력 ‘혼화(魂和)’가 발동됩니다.]
[격의 차이를 일부 상쇄시킵니다.]
[현격했던 격의 차이가 완화되어 감소가 사라집니다.]
“……뭐?”
“역시.”
아더 때는 발동되지 않았던 능력.
‘여신의 능력이라서 안 통했던 게 맞았네.’
아무리 아더가 강해졌어도, 전 심연의 강자였던 베헤모스보다 격이 높을 리가 없다.
통하지 않는 건 다른 이유가 있던 것이고, 멸살에겐 통하리라는 생각이 정확히 적중한 순간이었다.
[제4계 사슬 – 무사부옥(無赦縛獄)을 시전합니다.]
[죄박형계에 구속당한 대상이 사슬을 끊으려 시도할 시 강한 반발력을 가하며, 3계 사슬의 효과가 증폭됩니다.]
[반발 중첩 시마다 상태 이상을 1개 부여합니다.]
곧장 연계를 이어가는 도현을 보며, 멸살이 처음으로 칼자루를 꽉 쥐었다.
“왜, 이제야 좀 조졌다 싶어?”
“우습군. 이 정도로는…….”
“부족하겠지, 그래.”
실시간으로 여섯 자루의 마법검이 도현을 노리며 거세게 쇄도하고 있었으니까.
그중에서도 유독 빠른 건 역시나 옴느.
슈아아아-!!
도현의 뒤통수를 노리고 유성우처럼 강렬하게 내리꽂히는 그것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천상의 마법검 ‘옴느’가 ‘일곱 번째 별의 재림’을 선사하는 중입니다.]
[일곱 번째 별, ‘종말의 별’의 기운이 담긴 별의 재림입니다.]
[주의! 현재 격으론 대항할 수 없습니다.]
“저걸 맞으면 죽는 건 내가 될 테니까.”
도현도 알고 있다.
저건 결코 쳐내거나 막을 수 없다는 걸.
자리를 피하고 나면, 그 틈을 타고 마법검들이 재차 공격해오겠지.
그럼 철쇄천겁의 지속시간이 날아가게 된다.
“그래, 피한다면 말이지.”
“?”
드물게도 멸살의 담담했던 얼굴이 풀리며, 선명한 의문이 피어오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현은 냅다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다.
휘익, 슈우우!
콰아아앙!
옴느의 궤도가 급격하게 비틀어진다 싶더니, 애먼 벽을 전력으로 처박는 게 아닌가?
경기장의 결계가 금이 가다 못해, 균열이 퍼질 만큼 살벌한 위력.
멸살의 눈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옴느가 내 통제를 따르지 않는군. 무슨 마법을 부린 거지?”
“내가 최근에 쓸 일이 없다 보니 잠시 잊고 있었는데…… 너 같은 템빨한테 딱인 게 있더라고?”
도현이 손을 허공에 휘젓자, 의지를 따라 벽에 처박혔던 ‘옴느’가 멸살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자 마법검 세 자루가 날아와 옴느의 공격을 가로막는다.
옴느의 위력이 어찌나 강한지, 세 자루의 검이 막아서고 있음에도 튕겨나지 않고 힘겨루기를 가한다.
이건 마법 같은 게 아니었다.
[‘옵션 포식’을 발동합니다.]
[천상의 마법검 ‘옴느’의 ‘별의 재림’ 옵션을 포식하여 천변(千變)에 부여합니다.]
[강화된 에고를 시전합니다.]
[옵션을 포식한 검에 의지를 부여하여 조종할 수 있습니다.]
“검 좋네.”
15강을 달성하던 과정에서 얻어낸 천변의 강화 옵션일 뿐.
씨익 입꼬리를 말아올린 도현이,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여태껏 선보인 자세와 비슷하나, 달랐다.
[천왕진기(天王震氣)를 시전합니다.]
“그런데…… 내 검도 꽤 쓸만하거든. 너도 후기 좀 알려줘라.”
흘러나오는 기세는 태산을 넘어, 정상에 선 기사왕의 그것과 흡사했고.
[특성 ‘웨폰 마스터’의 초월 특성 ‘무장해방(武裝解放)’이 발동됩니다.]
[조건이 충족된 무기의 혼을 일깨워 ‘철의 의지’가 깃들며, 무기 안에 잠재된 숨겨진 능력을 이끌어냅니다.]
[‘+15 하얀 사자의 설화(雪華)검’이 조건을 충족하여 ‘철의 의지’가 깃듭니다.]
[기본기를 다룰 때 초식에 따라 검이 보다 예리해지고, 단단해지며 무거워집니다.]
검에 담은 기운은 사람들에게 잊혀진 왕의 그것과 같았으니.
[‘하얀 사자의 설화(雪華)검’의 철의 혼에 ‘잊혀진 왕’의 의지가 느껴집니다.]
[‘잊혀진 왕’의 영향을 받아 특별한 능력이 발현됩니다.]
[‘설화열개(雪花烈開)’가 발현됩니다.]
“버텨낼 수 있다면.”
도현이 검을 내리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