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21화.
하지만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는 끝이 없어.’
자신이 패링이 없는 전투에 적응했듯.
녀석 또한 변화한 자신에게 적응해나가고 있다.
점점 서로가 서로에게 피해를 주는 횟수가 극히 적어진 게 그 증거였다.
이대로 더 이어 가봐야 서로 적응할 시간만 늘어날 터.
그렇게 되면 결국 체력전이 되겠지.
‘먼저 지치는 쪽이 진다.’
그걸 멸살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아쉬웠다.
모처럼의 피를 끓게 하는 승부의 끝이 그리 허무하게 끝나가는 게.
그 순간 녀석과 눈이 마주친 건 우연이었을까.
“…….”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우뚝 멈춰섰다.
반으로 갈라버릴 기세로 맹렬하게 휘두르던 검과 폭우처럼 내리꽂히던 마법검들도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그 자리 그대로 정지했다.
“재밌네. 같은 생각인 거라 봐도 되는 건가?”
“……그렇다.”
“그래, 너도 싱거운 결말보다는 화끈한 마무리가 좋다 이거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말로만 돌아오지 않았을 뿐.
그는 답을 했다.
스윽.
천천히 대검을 집어넣고 보폭을 좁히는 행위로.
그러자 녀석의 기세가 달라졌다.
고오오오-
묵직한 바위처럼.
서서히 보폭을 좁힐 때마다 그에게서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한 기운이 풍겨 나온다.
사람이 아닌 자연의 무언가를 마주한 듯한 느낌.
이건 마치…….
‘검황…….’
제국의 일곱 별이자 최강의 검이라 불리는 검의 황제.
검황, 가필드 드류.
성질은 달랐으나 그 괴물 같은 노인의 검을 처음 받았을 때 느꼈던 것과 흡사하다.
본능적으로 경계할 때, 멸살이 불쑥 입을 열었다.
“……거인족의 땅에는 약속의 바위가 있다. 선조들의 혼이 담긴 무덤이자 후세에 힘을 주는 산물이기도 하지.”
“?”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 결코 부서지지 않는 그 바위를 수없이 두들겨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멸살은 불헌 듯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단순한 변화가 아닌 내면의 무언가…… 아니, 더 나아가 혼을 이루는 구성 자체가 바뀐 듯한 기묘한 감각.
그건 현실에선 결코 느낄 수 없는 아득함이었다.
“비록 완전하지 못하나, 확실하게 손에 쥐었다.”
이건 그것을 담은 검격.
흐릿하게 말을 덧붙인 멸살이 검에 무게를 실어 움켜쥐었다.
이젠 거대한 바위를 넘어서 산을 마주한 것 같은 기세가 느껴진다.
또한, 그 아득함 너머에 도사리고 있는 날카로운 예기가 전신을 벨 듯이 휘감았다.
‘……저놈. 그걸 넘은 건가.’
지고의 경지에 들어서기 위한 첫 단추는 무언가의 경지를 넘어서는 것.
그것을 검황(劍皇)은 이리 표현하곤 했다.
-문을 여는 것. 우리는 그리 표현하곤 하지.
그렇다면, 그 경지의 문을 넘어 첫발을 내딛는 것은 뭐라 하는가.
마지막으로 검성과 연락이 닿았을 때 건넨 물음에 그녀는 이리 답했었다.
-지고(至高)의 길을 걷는 자.
이는 단순히 그녀나 검황(劍皇)이 내린 정의가 아니었다.
[플레이어 ‘멸살’님이 지고(至高)의 영역에 발을 들어섰습니다.]
[영역에 들어선 동안 고유 특성 ‘지고(至高)의 길을 걷는 자’가 활성화됩니다.]
[아득한 경지가 검에 깃듭니다.]
[경고! 감당하기 벅찬 격이 느껴집니다.]
[일격을 조심하십시오.]
실제로 아브타르텔에 신화의 경지로 남아 그리 전해지고 있었으니까.
모든 검사들의 꿈의 경지이자, 최강으로 향하는 영역.
검황마저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 그 영역의 편린이 지금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초월 고유 능력 ‘검의 주인’이 발동됩니다.]
[모든 검의 주인이 될 자격을 얻으며 검의 성능과 위력이 주인의 수준에 비례하여 성장합니다.]
[마법검 ‘열계(裂界) – 도’가 ‘검의 주인’의 효과를 받습니다.]
[지고의 영역에 한 걸음 더 깊숙이 나아갑니다.]
검의 주인을 통해서.
“이건 내 모든 것을 담은 검격이다.”
피부가 오싹하게 저리며, 전신의 세포가 위험을 알리고 있다.
도무지 유저를 상대하고 있다곤 생각되지 않는 강함.
하나 그 앞에서 도현은 웃었다.
즐겁다는 듯이. 더없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그래, 이 정돈 되어야지.”
그래야 최강 자리를 쟁탈할 맛이 나지 않겠는가.
입꼬리를 말아 올린 도현이 그와 마찬가지로 자세를 잡았다.
태산처럼 단단하고 거대해 보이는 자세.
얼핏 멸살과 비슷하지만, 그 기운을 이루는 근간은 전혀 다른 성질을 띠고 있었다.
[특성 ‘투신(鬪神)’을 발현합니다.]
[전투에 돌입할 시 전투가 끝나기 전까지 신체 능력이 상승합니다.]
[전투와 관련된 능력에 한하여 한 단계 한계를 뛰어넘는 힘을 얻게 됩니다.]
[소드 오러 – 참격이 특성의 영향을 받아 강화됩니다.]
[투신(鬪神)을 발현하여 다음 경지의 길이 보다 선명해집니다.]
이건 인간의 몸으로 신을 멸하고자 했던 남자의 의지를 이어받은 검.
적어도 도현이 알고 있는 최고의 검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은 부족하다.
4초식을 완성하지 못했으니까.
반면 녀석은 지고의 길을 걷는 건 물론.
주위로 열다섯에 달하는 마법검이 칼끝을 겨누고 있다.
졸지에 16대1을 하게 생긴 판이지만…….
씨익.
상관없다.
이 순간을 위해 아껴둔 게 있었으니까.
“너만 남겨둔 수가 있는 건 아니지.”
도현이 자세를 더욱 굳건하게 취하며, 입술을 달싹이자 곧이어 알림이 울려왔다.
[전설 스킬, ‘운명의 부름’의 추가 부여 능력 ‘강명(強命)’을 발동합니다.]
[아직 감당하지 못할 자의 운명을 강제로 불러냅니다.]
[한 단계 높은 경지의 특성을 불러낼 수 있습니다.]
[현재 저장된 ★급 특성의 개수는 6개입니다.]
[불러낼 수 있는 특성은 ‘★★’급까지입니다.]
-고통 [무법자의 왕] ★★
-존재를 삼키는 자 [거대한 재앙] ★★
-파멸의 권능 [파멸의 제4군단장] ★★★
-어둠의 권능 [흑기사 가리온(어둠의 마용종) (융화)] ★★★
-지고의 경지 [잊혀진 왕] ★★★★
-근원을 베는 낫 [바탄] ★★★
-빈 슬롯
파괴하는 내면의 마창이 소모되고 남은 슬롯은 6개.
‘역시 이게 좋겠지.’
그중 도현이 고를 선택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띠링!
일말의 고민 없이 고르자, 도현의 주위로 서늘한 한기가 감돌더니 눈이 붉게 물들었다.
그것은 피의 참상이었다.
무수한 생명체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 저, 저건!
-리자리자! 리자!
-오오!
그에 뒤에서 지켜보던 가디언들이 곧장 반응했다.
그중에서도 지하드의 반응이 가장 컸다.
그도 그럴 게 이곳에서 녀석만큼 이 능력에 익숙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급 특성 ‘고통 [무법자의 왕]’을 불러옵니다.]
[동족의 모든 고통을 떠안은 왕의 온전한 특성이 깨어납니다.]
-고통이의 능력이잖아!
-리자!
-과연, 탁월한 선택입니다! 주군.
본 대륙에서 도현을 가장 크게 몰아붙였던 보스 중 하나이자,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던 왕.
비록 지금은 지하드의 부하로 전락해버렸지만, 녀석의 능력은 진짜였다.
[고통의 힘이 깃듭니다.]
[상대에게 일정 수치 이상의 고통을 줄 시 해당 부위를 파괴합니다.]
[한 번 당한 공격에 20초간 피해를 입지 않습니다.]
[빙설의 마법검 ‘서리날 라타샤’에 피해를 입지 않습니다.]
[업화의 마법검 ‘염화검(火華劍)’에 피해를 입지 않습니다.]
……
[심기(心器)의 마법검, 공명검(共鳴劍)에 피해를 입지 않습니다.]
능력을 발동하자마자 녀석의 마법검들에게 면역이 되어버렸으니까.
어지간한 초월 특성을 발라먹는 사기 특성.
‘이게 고작 별 두 개라니. 혜자가 따로 없다니까.’
하물며 그 당시 고통이는 현세에 강림한 리스크 때문에 이 힘을 온전히 다루지 못했었다.
온전하게 발동된 고통의 힘이 어느 정도일지는 도현조차 모를 정도.
“……이런 재주도 있었나.”
“어, 내가 좀 다재다능해.”
“상관없다. 그 능력조차 이 검은 막을 수 없을 테니.”
“글쎄, 맞아보면 말이 달라지지 않을까.”
한 차례 말을 주고받은 도현이 검을 겨눴다.
고통의 효과도 있으니 버티기만 해도 승리에 가까워진다.
조금 더 전략적으로 들어가면, 차라리 피해를 최소화하며 받아치거나 흘려내는 게 안전할지도 모르겠지.
하지만.
‘그따위로 끝낼 수는 없지.’
겨우 그런 반쪽짜리 승리로는 만족할 수 없다.
놈이 죽든, 자신이 죽든.
한쪽이 끝나야 비로소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것이다.
[천왕진기(天王震氣)가 투신(鬪神)의 영향을 받아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기사왕, ‘루슬레인 발레몽’의 기 운용법을 활용한 기세가 폭발적으로 발현됩니다.]
도현의 내면에 태산처럼 무겁게 자리하던 기운이, 폭발할 기세로 솟구쳤다.
거세게 일렁이는 기운에 반쯤 가린 시야 너머로, 멸살의 부쩍 커진 눈동자가 보인다.
‘그때랑 비슷하네.’
처음에는 벽처럼 느껴졌던 동료들.
그들에게 끊임없이 맞서고 부딪힐 때마다 도현은 성장했고, 그럴수록 검을 받아치는 그들의 표정은 시시각각 달라지곤 했다.
지금의 멸살처럼.
그리고 끝내 녀석들과 동료가 되었을 즈음…….
그러니까 마지막 순간엔.
“내가 다 이겼어.”
그 사실에 오늘이라고 예외는 없다.
입꼬리를 비튼 도현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고.
타앗,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달려들며 검을 휘두르는 멸살을 향해, 도현도 검을 내리그었다.
그렇게 두 검이 부딪힌 순간.
—–!!!!
귀를 멎게 하는 아득한 충격파가 경기장을 뒤덮었다.
* * *
-ㅁㅊ;;
-와……
-방금 충격파 실화냐. 경기장 전체 다 뒤덮은 거 같은데.
-ㄷㄷㄷㄷㄷ
-웅장이 가슴해진다…… 이게 내가 해오던 PVP가 맞나.
-나 PVP 길드장인데 그냥 PVE길드로 바꿔야겠다…… 내가 하던 건 PVP가 아니라 소꿉장난이었어.
-와, 기저귀 4장째 갈아입는 중…….
-난 5장.
-누가 이긴 거임? 누가 이긴 거임?
-멸살 카이저 둘 다 진짜 조호오오온나 세네.
-이건 진짜 누가 이겼어도 이상할 거 없다.
-졌잘싸 ㅇㅈ;;;
-ㄹㅇ이걸 까면 걍 벌레 인증임 ㅋㅋㅋ
-그래서 누가 이긴 거임?
-좀 기다려라 Xㅂ 같은 방송 보는 중인데 우리가 어케 알아. 시야 다 가려서 보이는 게 없는데 지금.
화면을 통해서도 전해지는 강력한 진동과 굉음에 채팅창이 크게 들썩였다.
그들 모두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이 일격으로 승패가 정해졌으리라고.
꿀꺽.
그에 관중석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과연 승자가 누구일지.
조금이라도 빨리 알아채기 위해 먼지투성이가 된 경기장을 응시할 뿐.
해설자들마저 해설을 멈추고, 집중했다.
-아!
-누군가 서 있습니다!
영겁 같은 시간이 지나고, 흐릿한 실루엣이 드러나자 해설자가 곧장 반응했다.
아직은 잘 보이지 않는 형체에 관중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보고 싶은 본능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아……!
시야를 가리던 먼지 바람이 걷히며 서 있는 자의 정체가 드러났고.
숨을 들이켠 해설자들이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승자는 카이저 선수입니다!!
-카, 카이저 선수가! 당당히 집행 길드의 멸살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최강의 길드…… 더 나아가 갓오세 최강의 플레이어가 정해지는 순간입니다! 전 세대의 주인이 왕좌를 탈환하고 당당히 왕관을 씁니다!
-어느 누가 예상했겠습니까! 1년 반이 넘어서야 복귀한 과거의 왕이, 새로이 역사를 쓰게 될 거라는 것을!!
-왕의 귀환, 아니 신의 귀환입니다!!
그에 보답하듯 관중들 또한, 줄곧 참았던 함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이 온 세상을 집어삼킬 듯 요동친다.
고막을 찢을 듯한 소리가 폐부를 찌르고, 공간 전체를 진동시키는 울림이 지면을 타고 올라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이어진다.
“카이저! 카이저! 카이저! 카이저!”
“카이저 펀치! 카이저 펀치! 카이저 펀치! 카이저 펀치!”
“카이저, 그는 신이야! 카이저, 그는 신이야! 카이저, 그는 신이야!”
“카메에에에엔!!”
“와아아아악! 미쳤다!!”
“믿고 있었나이다, 신이시여!!”
모두가 자신을 외치고 있다.
피투성이에 상처가 가득한 채로, 그 전율을 만끽하던 도현이 당당히 손을 뻗었다.
와아아아아-!! 와아아아!!
신의 귀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