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29화.
[일정 시간 동안 생존하는 것에 성공하여 ‘권왕(拳王)’이 개입합니다.]
[권왕(拳王)의 개입을 적극 이용하십시오.]
[권왕(拳王), 드란 그라디트와의 인연이 확인됩니다.]
[권왕(拳王)의 개입력이 상승합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상황을 타개하려 할 것입니다.]
눈앞을 어지럽히는 시스템 창.
그건 심각한 상황임에도 헛웃음을 짓게 하기 충분했다.
‘어쩐지 난이도가 지X 맞더니만.’
누군가가 개입하기 전까지 버티는 게 관건이었나보다.
하기야 아무리 3년 후에나 일어날 메인 퀘스트를 앞당긴 거라곤 해도, 이건 도를 넘어선 파워 밸런스긴 했다.
이런 초인적 NPC의 개입이 있어야 말이 되지.
하지만 방심해선 안 된다.
‘아직 퀘스트가 끝나지 않았어.’
시스템 창에서도 권왕의 개입을 적극 이용하라고 했지, 두 손 놓고 있으라곤 하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지금 자신의 상태는 과장이 아니라 툭 치면 죽을 상황.
이럴 때일수록 더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그 생각이 들리기라도 한 것일까.
파앙-!
“흐읍!”
단장의 손바닥과 주먹을 맞대고 있던 권왕이, 기합을 가하며 밀어내자 단장이 그대로 뒤로 날아갔다.
투포환처럼 날아가면서도, 단장은 당황한 기색 없이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그런 단장을 향해 곧장 달려가 재차 주먹을 휘두르는 권왕.
콰앙!
금방 자세를 잡고, 가볍게 막아내는 단장이지만.
그 덕에 안전거리를 확보한 도현을 향해, 가디언들이 허겁지겁 달려온다.
-리자!
-주인!!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주군! 이제부터 이 미천한 검이 엄호하겠습니다.
따닥, 딱.
순식간에 도현을 둘러싸며 곁을 지키는 가디언들과 언데드 군단.
“이게 무슨 난리냐, 어우…… 저 노인은 또 뭐고? ”
“권왕이 개입했다고 알림이 오지 않나. 샌드백이라 불렀더니 눈이 없어지기라도 했느냐.”
“아, 그러네. 정신없어서 못 볼 수도 있지 참나.”
“……저게 권왕, 강하군.”
그리고 아스트와 천마, 멸살까지.
차례대로 말을 걸어오곤 있으나, 그들의 시선은 모두 단장과 주먹을 맞대고 있는 권왕에게 꽂혀 있었다.
월령단의 단장은 무려 수십 명의 유저들이 달려들어도 피해를 입힐 수 없었던 괴물.
그런 괴물을 상대로, 밀리지 않고 맞서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 강함이 피부로 와닿았던 것이다.
그 시선엔 도현도 포함되어있었는데…… 그들과는 조금 다른 이유였다.
좀 전에 들었던 말이 떠오른 것이다.
‘……사제? 내가?’
집중하지 않으면 놓칠 만큼 짧은 시간.
스쳐 가듯 향한 시선이지만, 도현은 확실하게 느꼈다.
저 말을 뱉는 순간, 권왕의 시선이 일순 자신에게 머물렀다는 것을.
무엇보다 이곳에 자신 말고 또 누가 있는가?
죄다 도망치는 놈들이나, 골골대며 죽어가고 있는 놈들뿐인데.
그렇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권왕과 스승을 공유하고 있다는 소리인데…….
‘음.’
워낙 다이나믹한 일들이 많았기에 스쳐 가는 인물들이 많았지만, 이내 한 명으로 좁혀졌다.
저 권왕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면서 자신에게 무언갈 알려준 사람.
그런 인물은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르시아 그란델.’
아크라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대영웅.
그녀에게서 극복 특성을 깨우치는 법에 대해 배웠으니 말이다.
-드란, 그 녀석 말고도 극복을 가진 인간을 만날 줄이야.
당시 그녀가 했던 말이 뇌리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두 사람이 과거 무척 친해 보였다는 건 많은 님프들이 알던 사실.
그러니 무슨 사이이긴 한가보다 싶었는데, 설마 사제 관계였다니.
아마 유저 최초로 알게 된 사실 아닐까 싶다.
[사제 관계? 아아. 르시아 그란델의 제자인가 보군.]
“그래, 그 양반 최근에 깨어났다고 들었는데…… 오랜만에 온 연락이 저 녀석 얘기뿐이었어서 말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살벌하게 힘을 겨루고 있던 두 사람.
그중 권왕이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그러니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어떤가? 나도 체면이라는 게 있어서 말이야.”
물론 어조만 그럴 뿐.
기세는 오히려 더 흉흉하게 끌어올리고 있었다.
단장의 기운이 전신을 짓누르며 위압감을 주는 느낌이라면, 권왕의 기운은 마치 절벽 위에 서 있는 듯한 위태로움이었다.
한 번이라도 헛디디는 순간, 목숨이 끊어질 거라는 원초적인 공포감.
그렇기에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흐억!”
“갑자기 무슨…… 저 노인은 뭐야?”
“잠깐만, 저 붉은 피부에 저 근육질의 노인…… 설마 권왕 아니야?”
“미친, 권왕이라고?”
그에 정신없이 도망치던 근처 유저들의 발마저 멈출 정도.
-저 할배. 어중이떠중이들과는 다르군.
-……문턱을 몇 개나 넘어섰어. 지금의 인간이 저 정도 경지를 이룰 수 있다니.
-흐으, 오싹오싹한 게 몸이 달아오르는데.
-마침 패션도 똑같네. 노출광끼리는 뭐가 통하나 봐? 다칸.
월령단의 단원들마저 장난치듯 벌이던 학살극을 멈추고,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 넓은 경기장 위로, 수많은 이들 사이에 한 명이 등장했을 뿐인데.
그 한 명이 주는 위압감은 모두를 합친 것보다 거대했다.
특히 바로 앞에서 바라보는 도현이 느끼는 감상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권왕(拳王) 드란 그라디트가 극성에 이른 극양진권(極陽眞拳)을 발현합니다.]
[극한의 양(陽)에 도달한 기공입니다.]
[극성에 이르러 적신(赤神) 상태에 돌입합니다.]
[전신의 열이 한계까지 팽창하며 신체 대사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신체 능력을 몇 배로 증폭시킵니다.]
저것이 권왕이 독자적으로 개발했다는 극양진권(極陽眞拳).
양(陽)의 기운을 지닌 모든 무투가들의 정점이자, 재능의 한계를 극복하여 만들어낸 유일무이한 무공이자 권법.
과연 그 이명답게 엄청난 기세다.
‘……검황, 그 양반과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아.’
현재까지도 자신이 보아온 최강의 NPC.
신대륙의 누굴 만나도 밀리지 않던 검황이, 저 남자에겐 어쩌면 질지도 모른다고 생각될 만큼.
5대1의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도, 전혀 기세에서 밀리지 않는다.
[……물러나라고.]
“그렇네.”
[흐음…….]
무언갈 생각하는 듯 멈춰있던 단장이 의뭉스럽다는 듯 말했다.
[왜 그래야 하지?]
그리 말하는 단장의 얼굴은, 마치 너 하나 왔다고 뭐가 달라지냐고 말하는 듯했다.
“…….”
강자에 속하는 유저들은 대부분 리타이어 되었고, 남은 유저들도 혼비백산해서 도망치고 있다.
도현 또한 죽기 일보 직전.
반면 그들은?
-내가 먼저 싸워봐도 될까, 단장? 너무 흥미로운데.
-어찌 싸움이 그리 좋은지 이해할 수가 없네. 그래도…… 단장을 방해한다면 죽음을 선사할 수밖에.
-싸움광이나 집착광이나 거기서 거기다, 레비.
-맞아, 맞아.
-…….
단장을 제외하고도 네 명의 괴물 같은 단원이, 멀쩡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어느새 권왕과 도현을 포위하고 있는 상태.
그중에서도 사자 갈기를 한 권투가, 다칸이 한 발짝 더 내디딘 순간이었다.
고오오오오-!!!
권왕의 기세가 순간 폭발했다.
가뜩이나 붉었던 피부가 뻘겋게 달아오르며, 동굴 속에서 괴물이 울부짖는 듯한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
다칸이 눈을 부릅떴다.
무언가 오고 있다.
그것을 자각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극양진권(極陽眞拳) 2성 – 파공웅조(破空熊爪)]
무어라 표현할 수가 없는, 기이한 형상을 한 괴물이 발톱을 휘두르고 있었으니까.
공간 전체에 새겨진 거대한 발톱 자국.
-……!
뒤늦게 일전의 그 기이한 태극권 자세를 취해보지만, 제대로 방어가 안 되는지 발톱 모양으로 상처가 생기는 다칸.
-멍청한 놈, 피해야지.
-왼쪽이야. 휘둘러.
곧장 뛰쳐나간 뿔이 달린 인외의 검객이 검을 휘둘렀다.
두 인격이 한 몸을 쓰고 있는 듯이.
사각으로 이동하여 휘둘러오는 권왕의 주먹을 읽고, 그에 맞게 푸른 검강을 날리는 검객이었으나…….
[극양진권(極陽眞拳) 4성 – 파천사아(破天蛇牙)]
—–!!
마치 거대한 뱀의 아가리를 닮은 형상이 입을 쩌억 벌리더니.
콰아아아아앙-!!
푸른 검강과 맞부딪쳐 강력한 충격파를 만들며 사라졌다.
-우리 검강을 맞받아쳐?
-제법인데, 저 노인.
힘 대결이라면 자신 있던 인외의 검객으로선 상당히 인상적인 결과.
얼굴에 흥미로움이 깃든 검객이 다시금 자세를 잡을 때였다.
-나와, 저 영감은 내 거야.
다칸이 어깨를 잡아당기며, 다시 앞으로 나섰다.
-아니, 한 번에 끝내. 괜히 시간 낭비야.
-비켜, 레비. 경고다.
-뭐? 하, 죽을래?
-해보든지.
레비까지 살벌한 기세를 뿜으며 끼어들었고.
블랙 일족의 거한도 입만 열지 않을 뿐, 거대한 날개를 펼치며 합세하려는 의사를 보였다.
그리고,
저벅.
고고하게 다가오는 단장까지.
다섯 명 모두가 권왕을 향해 살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위험하단 생각에 도현의 머리에 경종이 울리던 찰나.
“이거 참. 늙은이 한 명 상대로 너무들 하는구만.”
좀 전까지 살벌하게 기세를 뿜어내던 권왕이, 돌연 기운을 거두었다.
그리곤 못 당하겠다는 듯 손을 탈탈 턴다.
항복 의사라 볼 수 있는 모습에, 단장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남길 말은 그게 끝인가.]
“아니, 하나 더 있네.”
씨익.
입가에 긴 호선을 그린 권왕이 돌발행동을 한 건 그때였다.
콰아아앙-!!!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냅다 지면에 주먹을 때려 박은 것이다.
전신을 통해 휘두른 동작이 어찌나 균형적인지, 힘의 분산 없는 권격이었다.
그야말로 권왕의 권법이라 할 수 있는 일격은 단번에 경기장 지면에 균열을 만들었고.
그 균열은 빠르게 커지며 양옆으로 갈라졌다.
-저 노인 갑자기 무슨…… 어?
-잠깐만, 설마.
한데 그들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마치 당했다는 듯, 잔뜩 일그러진 얼굴에 지켜보던 도현이 다 혼란스러울 정도.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진리의 눈이 발동됩니다.]
[경고! 압도적인 격을 지닌 존재가 감지됩니다.]
[메인 퀘스트와 관련된 인물이 인지됩니다.]
[천왕진기(天王震氣)가 반응합니다.]
요란하게 울리는 알림과 함께, 갈라진 균열 너머로 보이는 붉은 존재들을 보며 도현이 낮게 중얼거렸다.
지면을 잠식한 어둠.
끝이 보이지 않는 그 지독한 어둠은 벌레가 기어가는 듯 끔찍한 이 느낌.
‘이런 미친…….’
상상도 못한 놈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것도 아브타르텔 역사상 가장 최악의 존재들이.
“약조가 깨진 걸 알게 된 게 너희들뿐인 줄 아는가? 예상컨대 지금쯤 모든 종족이 알게 되었을 것이네.”
그리고…….
“이 순간만을 기다린 놈들이 너희들 말고 또 있지 않겠나.”
[……그대가 부른 건가.]
“그게 가능했으면 진작 세계 제패했지 뭐 하고 있겠나. 반응을 보니 정말 모르고 있었나 본데…… 이 늙은이가 만들어낸 무공이 감지력만큼은 니들보다도 뛰어난 듯하니 기분이 썩 좋구먼.”
슬며시 웃은 권왕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러게 말하지 않았나.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어떻냐고.”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대화는 단절되었다.
지하 전체를 잠식한 어둠 속에서, 이내 그것이 열렸으니까.
[심연의 눈이 뜨였습니다.]
“아아…….”
일전에 브리온의 대신전에서 보았던 그 괴이한 눈.
보는 이로 하여금 절망감을 느끼게 만드는, 그것이 다시금 현현한 것이다.
[심연의 통로가 열렸습니다.]
[잠들어있던 심연의 마수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실루엣으로만 느껴지던 이전과 달리, 선명하게 형태가 보인다.
건물 하나 크기의 거대한 괴물과 하나하나가 5M는 족히 넘어 보이는 흉흉한 괴수들.
그리고 그들의 앞에 서 있는 세 개의 무언가.
[불멸의 주인]
지독한 어둠으로 이루어진 형체에 붉은 눈을 한 자와.
[분노의 주인]
격노를 표현한 듯 붉게 일렁이는 아지랑이가 돋보이는 남자.
[파멸의 주인]
그리고 몸 곳곳이 부서진 거대한 자줏빛의 갑옷 기사까지.
여태껏 실루엣으로 엿보던 그들의 진짜 형체를 처음으로 보게 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