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렙 플레이어의 100번째 회귀 외전 1화
1. 101회차의 서아린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정신이 멍할 때가.
“아린 씨? 아린 씨.”
“…예?”
“멍하니 뭐하십니까? 곧 있으면 타종행사입니다.”
“아…… 죄송해요, 경호원님.”
“저한테 죄송할 건 없죠.”
“네…….”
그리 말하며 서아린은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안상철.
기업에서 마련해 준 매니저.
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하는 감시역이자 경호원.
그 사실을 안 이후로 둘 사이엔 좁힐 수 없는 벽이 생기고 말았다.
친해지기도 어려운 타입이고.
‘지금은 내 일에 집중하자…….’
애써 안상철의 시선을 피하며 다른 선배 연예인들과 무대 뒤에서 대기했다.
곧 있으면 새해가 밝아온다.
그것이 지옥의 시작일 줄은 몰랐지만.
[킥킥킥. 인간들은 재미있군요. 자신들이 어떤 처지에 있는 줄도 모르고 새해를 축하한다니.]
“겨, 경호원님! 저건……!”
“…….”
하늘 위에 떠 있는 천사를 보며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무표정을 고수하던 안상철의 얼굴에 당혹이 서린 것에, 서아린은 덩달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안상철은 과연 안상철이었다.
“진정하세요, 아린 씨. 일단 천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봅시다.”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을 되찾은 걸 보면.
[어디 보자…… 만 15세에서 29세까지의 인간들을 따지면 참가 인원은 1,801,029,290명이 되겠네요. 그럼 대충 설명도 끝났으니 가볼까요? 쿄호호호.]
천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아린의 정신이 어딘가로 날아갔다.
그곳은 텅 빈 공간이었다.
커스터마이징을 하라는 소리가 들렸지만 당황해서 시간초과로 하지 못했다.
그 탓에 본얼굴로 초원 위에 서야 했다.
새로운 환경에 들어서자마자 서아린은 자신의 단짝부터 찾았다.
경호원인 안상철이 다행히 옆에 있었다.
조금 달라진 얼굴로.
“경호원님. 그 모습은……?”
“스타일을 좀 바꿔봤습니다. 아린 씨는 그대로시군요.”
“네…… 당황해서 아무것도 못 했어요.”
“대부분이 그럴 겁니다만 이제는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여기까지 온 걸 보면 꿈은 아니라는 소리니까요.”
“알겠어요. 정신 단단히 차릴게요.”
진중한 표정으로 끄덕인 뒤 천사의 말에 경청했다.
랜덤 룬조각이라는 걸 받았고 시키는 대로 사용해 봤다.
[랜덤 룬조각을 사용하셨습니다.]
[축하합니다! ‘소환수의 룬’이 나왔습니다!]
[획득한 룬이 플레이어의 신체에 자동으로 각인됩니다!]
‘소환수의 룬? 좋은 건가?’
어떻게 쓰는지 확인해 본 서아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소환수의 룬]
-효과 : 소환수의 스탯이 50% 증가한다. 소환수가 없을 때는 자신의 스탯이 25% 증가한다. 훗날 소환술사로 전직할 확률이 높아진다.
‘소환수의 스탯이 올라? 나한테 소환수 같은 건 없는데?’
하지만 좀 더 읽어보니 소환수가 없을 때도 스탯이 증가한다.
비록 25%였지만 이것만 해도 어디인가?
전체적인 스탯이 오른다는데.
상당히 좋은 룬이라는 걸 알아본 서아린의 입이 조금 벌어졌지만 이내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표정을 드러낸다는 건 룬에 대한 정보를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
기뻐하는 티를 내면 안 된다.
‘연기라면 자신 있지.’
애써 표정을 지우면서도 혹시나 룬에 관해 물어보면 뭐라고 답해야 할지도 생각해 놨다.
하지만 안상철은 딱히 관심 있어 하는 눈치가 아니다.
“아린 씨. 1라운드 퀘스트 보셨습니까?”
“네. 고블린 100마리를 잡아야 한다던데…….”
“보기엔 개인전 같지만 서로 협동해야 잡기도 더 쉬울 겁니다. 그러니…….”
“알겠어요. 최대한 옆에서 도울게요.”
서아린은 안상철과 동맹을 맺었다.
이세계에서 믿고 의지할 사람이라곤 옆에 있는 경호원뿐이다.
‘살아나가야 해. 어떻게 해서든.’
각오를 다지는 사이, 1라운드가 시작되었고 아비규환의 참상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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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 수도 없이 많은 고블린 무리가 인간들을 학살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안상철은 침착했다.
“보니까 몽둥이를 든 녀석도 있군요. 가능하면 그 녀석을 상대하세요. 설사 다른 녀석과 싸우게 되더라도 손에 든 단검만 조심하면 어려운 것 없습니다. 일단 떨어진 단검부터 주우세요.”
“네!”
고블린이 남기고 간 단검을 주워든 두 사람은 이내 필사의 격투를 벌였다.
생명체의 살갗을 찢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그것도 몇 번 반복하니 무뎌지곤 했다.
아니,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해야 하나?
그만큼 처절하고도 치열한 현장이었다.
목숨이 걸린 일이니, 그도 당연한 일이다.
“아린 씨, 여기!”
“네!”
푹! 푹!
두 사람이 합공하여 쓰러진 고블린을 찔렀다.
혼자보다 둘이 협동하니 죽이긴 어렵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여기엔 안상철의 덕이 컸다.
안상철은 경호원답게 수준급의 실력으로 고블린들을 처리해 나갔다.
‘나처럼 스탯이 증가하지도 않았을 텐데…… 대단하네.’
회피와 동시에 반격하는 기술은 아무리 스탯이 오른 서아린이라도 따라 할 자신이 없었다.
‘조금만 더하면…… 조금만…….’
그렇게 차근차근 숫자가 쌓였고 서아린은 간신히 안상철과 함께 1라운드 생존자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다음 라운드다.
‘이번엔 운 좋게 살았지만, 과연 다음 라운드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2라운드 미션을 모르니만큼 불안감이 커졌다.
그러던 중 초인종이 울렸다.
아래층에서 떡을 돌리러 온 것이다.
“안녕하…… 어? 배우 서아린 아니에요?”
“아, 맞아요.”
“와아, 윗집에 연예인이 살고 있을 줄이야. 반가워요.”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의 이웃 남자는 종종 뵙자는 말과 함께 시루떡을 남기고 떠났다.
‘우움. 맛있네, 이거.’
이때까지만 해도 서아린은 몰랐다.
이 남자와 2라운드에서 만나게 될 줄은.
이 남자가 1라운드에서 랭킹 1위를 찍은 검은 낫일 줄은.
그리고 그 검은 낫이 먼저 자신의 정체를 밝힐 줄은.
“시루떡은 맛있게 드셨어요?”
“아…… 네. 정말 맛있었어요.”
“그런데 제 뒤는 왜 밟고 계신 거죠?”
“아, 죄송해요.”
2라운드에서 한 미행이 들키고 말았다.
어쩌지?
“저희가 나쁜 의도로 미행한 건 아니니 부디 화를 가라앉히셨으면 합니다.”
안상철이 변명과 함께 사과했지만 검은 낫은 별로 화난 기색이 아니었다.
그저 순수하게 물었을 뿐.
화를 내기보다 오히려 정보까지 준다.
“조금 있으면 서아린 씨를 추적하는 무리가 나타날 겁니다.”
“예? 저를요?”
“기다려 보면 아실 겁니다.”
뜬금없는 말에 안상철은 못 미더운 눈치였지만 기다리니 정말로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검은 낫의 예언대로였다.
황용민이라는 닉네임의 무리는 검은 낫과 함께 있는 우리를 보고 흠칫 놀랐다.
뭔가 범죄를 저지르려다 들킨 사람처럼.
“왜 쫓아왔지?”
“쪼, 쫓아오긴 누가 쫓아왔다고…….”
“서아린을 노려야겠다고 시시덕거리며 걸어가는 걸 봤는데 시치미 뗄 건가?”
“…….”
검은 낫의 말이 사실이었는지 황용민 무리는 꿀 먹은 듯 입을 꽉 닫았다.
이후로 일방적인 폭행이 이어졌고, 우리는 검은 낫 덕분에 사달을 막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검은 낫 님.”
“그런데, 검은 낫 님. 황용민 무리가 온 방향과 달랐던 것 같은데 어떻게 녀석들이 하는 얘길 들으신…….”
“듣지 못했습니다. 상황을 봤을 뿐이죠.”
“예?”
“제가 예언의 룬이라는 걸 얻었거든요. 미래를 보여주는 룬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검은 낫의 이야기에 안상철도 서아린도 놀랐다.
좀처럼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미래를 볼 수 있는 룬이라니.
미래가 불안한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혹할만한 룬을 검은 낫이 가졌단다.
이 순간 서아린과 안상철, 두 사람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비슷했다.
‘이 사람과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다녀야 해.’
‘검은 낫은 절대로 놓치면 안 돼.’
검은 낫과 함께해야 한다고.
무슨 수를 써서든 그의 협력을 이끌어야 한다고.
그걸 인지한 안상철이 먼저 제안했다.
“검은 낫 님. 이 은혜를 보답하고 싶은데 어떻게, 저희 대표님을 한 번 만나 뵙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죠.”
의외로 쉽게 수락한 검은 낫은 그날로 마경록 대표를 만났다.
라운드가 끝나고 마련된 자리에서 마경록은 우리 이야기를 듣고도 예언자란 말을 쉽게 믿지 않았다.
본래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으니까.
그걸 알고 있었는지 검은 낫은 두 가지 예언을 했다.
첫째로 코인의 폭등.
둘째로 3라운드에 대한 정보.
믿고 안 믿고는 자유라며 정보를 주고 떠난 검은 낫은 이제는 빼놓을 수 없는 아군이 됐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으니까.
‘예언이 아니더라도 검은 낫 님은 믿을 만해. 실력에서나, 다른 면에서나…….’
그와 함께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갔다.
정보의 우위를 바탕으로 이후의 라운드를 순조롭게 클리어했고, 또 다른 도움도 받았다.
“친구 중에 홍선아라고 있죠? 그녀를 위시한 배우들이 아린 씨의 뒤통수를 칠 겁니다.”
“예? 저, 저를 왜요?”
“목적은 골드 및 아이템 갈취입니다. 동료나 선후배 연예인들을 끌어들여서 클럽에서 몰래 죽일 예정이죠.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그, 그런 사람 같지도 않은 짓을 한다고요?”
“못 믿겠으면 당하는 척해보시죠. 제가 옆에서 투명화를 쓰고 지켜드릴 테니 걱정은 마시고.”
검은 낫의 예언을, 서아린은 확인해 보고 싶었다.
친한 동료 연예인이 자신을 배신할 리 없다는 믿음을 증명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홍선아에게 먼저 연락을 걸었다.
만나자고.
하지만, 둘 사이에 우정은 없었나 보다.
홍선아가 자신을 배우들이 있는 클럽으로 유인한 뒤 본색을 드러낸 걸 보면.
“X발 년아. 지금 상황 파악 안 돼? 빨리 아이템 뱉으라니까?”
“우리 장난하는 거 아니다, 아린아. 선배들이 말하면 들어야지?”
“이참에 옷도 싹 벗어라. 죽기 전에 서로 즐길 거 즐기면 좋잖아?”
역겨운 배신자들.
믿었던 동료와 선후배가 한순간에 타인의 목숨을 담보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 한다.
쓰레기도 이런 쓰레기가 어디 있을까?
“이 년이 눈빛 보소?”
“존나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는데?”
“안 되겠다, 얘들아. 강제로라도…….”
“검은 낫 님.”
서아린의 말에 검은 낫이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귀신 보듯 놀라던 배우들은 안중에도 없는지 서아린을 보며 말한다.
“이제 믿죠?”
“네.”
“처우는 어떻게?”
서아린은 서늘한 눈빛으로 배우들을 바라봤다.
“죽이죠.”
이후 서아린은 완전히 검은 낫을 신뢰했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하기도 했다.
라운드가 진행될수록 검은 낫에 대한 마음이 커졌으니까.
‘20라운드는 끝났고, 이제 파이널 라운드야.’
자신을 포함한 97명의 플레이어가 소원의 방에 입성할 준비를 마쳤다.
카오스라는 강적을 상대해야 했기에 모두가 떨리는 마음이었지만 반대로 희망이 보였다.
이번 라운드만 제대로 공략하면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소원을 이룰 수 있으니까.
‘검은 낫 님의 말대로만 하면 돼.’
이윽고 치러진 대망의 파이널 라운드이자 7차 천마 대전.
[잠시 후 천족 100,921명(+플레이어 97명) VS 마족 283,078명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우렁찬 함성과 함께 시작된 전쟁에서, 서아린은 최선을 다했다.
“공명의 울림!”
벽처럼 세워져 있던 소환수 전원이 무적에 걸리며 카오스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 한 턴이 검은 낫의 시간을 벌어줬고 비로소.
[마족의 병력이 10% 이하로 줄어들었습니다.]
[7차 천마 대전은 천족 진영의 승리로 마무리됩니다.]
서아린을 포함한 97명의 플레이어는 오색빛깔의 염원석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걸 만지면…… 검은 낫 님이 말한 대로 소원의 방으로…….’
서아린은 홀린 듯 염원석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 순간.
[플레이어 ‘서아린’이 소원의 방에 입장합니다.]
백색의 공간에 왔고, 서아린은 자신의 소원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