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9화 세계 회의 (3)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세계 회의에서 역병 따위를 견디지 못한 약자들을 논하는 건 결국 시간 낭비라는 뜻이다. 그리고 인간도 지배 체계를 갖추고 있다면 마음대로 해도 될 텐데. 자국의 인간을 죽이든 말든. 그거야말로 왕이니까.”
수왕의 송곳니가 반쯤 드러났다.
“그렇지 않나, 로니아 국왕?”
“……?!”
갑자기 수왕에게 불린 로니아 국왕은 당혹감에 빠졌다. 멍청한 얼굴이다.
로니아 왕국에서 그야말로 왕처럼 군림하고 있는 그였지만 권위가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는 왕관을 쓴 뚱뚱한 사내에 불과했다.
“으, 으음.”
로니아 국왕이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면서 슬쩍 마울러를 보았다.
도시 연합 카일리언스와 로니아 왕국의 가장 거대한 뒷배…… 델하룬에 종속되라는 명령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따로 재거나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덜컥 제안을 받아들였을 정도로.
물런 애초에 거절은 선택지에 없었지만 초월자의 권력을 빌릴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런 강요쯤이야 지극히 사소한 일이었다.
“흥.”
마울러는 로니아 국왕에게 그딴 것 일일이 묻지 말라며 눈총을 준 뒤 주먹을 쥐었다.
전완근이 근육의 결을 따라 갈라졌다.
“짐승 놈, 예전보다 말이 많아졌구나. 답지 않게 설교라니.”
“늙은 울음은 헛되이 울리지 않는 법이지.”
“시도 때도 없이 속담 지껄이는 건 여전하고.”
“너는 꽤 달라진 듯하군, 가레스.”
수왕이 감춰진 거대한 손톱을 꺼내 서로 긁으며 날을 다듬었다.
명검을 연마하는 듯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분명 내가 심장을 갈랐고, 너는 바닥조차 보이지 않는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즉사하지 않았다 해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었어야 정상일 텐데.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그 무저갱에 뭐가 있었던 건가?”
“네놈의 직감력이 무뎌진 거겠지.”
“과연 그럴까.”
포악한 눈동자가 기울어졌다.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다, 로니아 국왕.”
“아, 그게, 저.”
로니아 국왕이 머리를 굴리려다가 지레 겁을 먹고 되는 대로 내뱉었다.
“무, 물론입니다! 진정한 왕이라면 응당 그리해도 되지요. 하물며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서였는데 말입니다. 하하……! 그게 비판받을 일이라면 저는 기꺼이 비판을 받을 것입니다!”
궁지에 몰리면 본성이 나온다고 했던가.
로니아 국왕은 평소에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평민 따위야 국가에 차고 넘치는데 얼마나 ‘방역’했는지는 몰라도 끽해야 수천 명 정도 죽인 게 무슨 문제인가?
그냥 처분한 것도 아니고 전염병이라는 명분까지 있는데 말이다.
‘마울러께서 뭐라 하지 않으시는 걸 보니 이렇게 대답하는 게 맞군……!’
수왕과 말 몇 마디 주고받은 것만으로도 로니아 국왕은 자신감이 샘솟았다.
굽어 있던 허리를 조금 폈다.
“과연 제정신이 박힌 인간 왕이로군. ‘쓰레기’나 다름없는 약자들을 희생해 나라를 지키다니. 그래, 누가 너를 비난할 수 있을까.”
“저로서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그래도 이참에 로니아 왕국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마음으로 쓰레기들을 쓸어버렸지요.”
“오, 그렇군.”
수왕이 희미하게 야성을 발현해 로니아 국왕이 대화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포식자에게서 감히 시선을 떼지 못하는 피식자처럼.
다른 곳에 신경을 쓰지 못하게 해 그의 속마음을 끄집어냈다.
“개중에 살아남은 쓰레기들이 있을 텐데. 그것도 치울 건가? 방치할 건가?”
“물론 치울 생각입니다! 하, 정말로 염치가 없는 것들이죠. 쓰레기면 쓰레기답게 버려지면 될 것이지. 귀찮게───”
콰아아앙!!!!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레온하르트가 테이블을 내려쳤다. 상원에서 터져 나온 충격파에 주변 대기가 진동했다.
세계 회의의 시선들이 신성력이 들끓는 자리를 향했다.
“누가, 쓰레기라는 거야.”
성자의 분노가 넘쳐흐른다.
수왕이 보란 듯이 루아스 교국을 보고 웃으며 꼬리를 움직였다. 아직 준비한 미끼를 던진 것도 아닌데 제대로 먹혔다.
잠시 구경할 차례다.
* * *
피울음 역병이 발생하고 티르 마을은 쑥대밭이 됐다. 썩은 피를 토해 내고 죽어 나간 마을 사람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졌다.
피난길도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고 싶어서 길을 나선 사람들이 죽고, 또 죽었다. 자식의 시체를 끌어안고 울부짖던 이웃 아저씨는 그날 밤 나무에 올라 밧줄에 목을 매고 뛰어내렸다.
사람의 혀가 그렇게 길게 나올 수 있는 건지 처음 알았다.
그래도 악착같이 희망을 잃지 않고 에므라든 타운에 도착해 도움을 요청했으나 돌아온 건 선의가 아닌 악의였다.
로니아 왕국의 방역대가 마을을 불태웠다.
머리만 빼고 화형당한 사람들의 시체가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마지막까지 모두를 구하려고 했던 롤랑 아저씨는 토막 났다.
세리아는 범해질 뻔했고, 어머니는 장난스럽게 살해당할 뻔했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누구도 구할 수 없었으리라.
전부 로니아 국왕이 시킨 짓이다.
티르 마을 사람들에게 비극을 안겨 준 건 성검이 아니다. 하원에 앉아 있는 로니아 국왕이 모든 불행의 원흉이다.
성녀는 되도록 평정을 유지하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참아야 하나?
다른 누구도 아닌 로니아 국왕의 입에서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이 인간이 아닌 쓰레기로 취급당하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하나?
‘그럴 수 없어. 적어도 나만큼은.’
꾸구구국.
레온하르트가 상원 테이블을 누른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긴장감은 사라졌다. 타오르는 건 믿음과 분노뿐.
“로니아 국왕.”
“……아, 아?”
로니아 국왕이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당신에게 티르 마을은 쓰레기나 다름없을지도 모릅니다. 당신 같은 왕에게 그런 평민들은 보이지도 않았을 테죠.”
레온하르트가 울분을 실었다.
“하지만 내겐 가족이었어.”
얼마 전까지 농부에 불과했던 청년은 신인이 되었다. 서투를지언정 그 존재감은 종족의 한계를 벗어났다.
베르덴과 아드리안을 호위 중인 군림자가 작게 웃었다.
“돼지 새끼. 제대로 걸렸군.”
격노한 신앙계 초월자를 맞닥뜨린 로니아 국왕이 덜덜 떨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 루아스 교국과 로니아 왕국 사이에 뭐, 뭔가 사소한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오해 말입니까.”
“저는 대체, 티르 마을이 무엇인지…….”
“뭐?”
로니아 국왕은 진심으로 티르 마을을 몰랐지만 애석하게도 그 발언은 오히려 레온하르트의 역린을 건드렸다.
그래도 통제되고 있던 신성력의 밀도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로니아 국왕이 움찔 떨고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높였다. 수왕은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는 듯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분위기가 고조되자 이그나시아가 허겁지겁 과자를 꺼내 먹었다.
작용이 발생했다.
반작용이 일어날 때다.
“시발, 아까부터 무슨 개소리를 하나 했더니 이걸 노린 거냐? 짐승 새끼가.”
마울러가 미간을 구긴 채 수왕을 노려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어이, 핏덩이.”
“…….”
“원한이 있나 본데. 적당히 해라. 로니아 국왕 놈 당장 처죽일 거 아니면.”
로니아 국왕이 흠칫했다.
“그, 그게 무슨 말씀……!!”
“닥쳐라. 어디서 같잖게.”
마울러는 초월자 미만의 존재에게서 존중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로니아 국왕이 평민을 쓰레기 취급하는 것보다 훨씬.
로니아 왕국이 자신의 지배하에 있지 않았다면 당장 패 죽였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마울러는 그런 사내였다.
하지만 설령 죽어서 영원히 고통받을지라도 가족이 훨씬 더 중요한 레온하르트의 감정도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다.
“의장님께서도 중재하지 않고 계시는데 왜 제가 당신 말을 들어야 합니까. 잠시라도 좋으니 외부인은 빠져 주세요.”
신경전이 벌어졌다.
제라클 황제가 말없이 이그나시아에게서 과자를 받았다. 신앙계 초월자와 무투계 초월자가 부딪치는 경우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내가 너무 오래 잠적하긴 했나 보군.”
마울러의 어조가 격해졌다.
“4대 신물로 선택받는 신앙계, 그것도 초월자로 각성하고 얼마 되지도 않은 자식이 어디서 뻗대. 이 애송이 새끼야.”
기파가 일었다.
마울러의 무거운 존재감에 레온하르트가 조금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아직 초월에 적응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두려움을 품고 물러나지는 않았다.
루아스께서 곁에 계신다.
레온하르트는 현 루아스 교국의 단 한 명뿐인 성자였다. 그리고…… 그 올곧음은 광신적인 믿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4대 신물로 선택받는 신앙계, 라. 그건 저희를 초월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뜻으로 들리네요.”
성녀, 에르세티아가 일어섰다.
부드러운 손길이 아직 미숙한 성자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그제야 조금 진정된 레온하르트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앉았다.
“죄송합니다. 교황, 그리고 성녀.”
“사과하지 마십시오.”
“그렇습니다.”
성녀가 웃었다.
“저는 되도록 평정을 유지하라고 했지 참으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자부심을 갖고 행동하세요. 레온, 당신은 루아스교의 성자입니다.”
곧 신성한 빛을 품은 눈동자가 상원 테이블 반대편을 향했다.
“묻겠습니다, 가레스 시릴리아드. 루아스교의 초월자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무런 노력도 없이 4대 신물에만 의존하는 반쯤 거짓된 초월자.”
마울러가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듯 흉악하게 입가를 끌어 올렸다.
“내 말이 틀렸냐?”
“후후후후.”
성녀가 다소곳이 입가를 가리며 작게 어깨를 들썩였다.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으나 그녀의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신의 선택을 무시하지 않나, 자신만의 규율을 교리라도 되는 양 강요하지 않나, 이간질하지 않나, 그게 재밌다며 간식까지 먹고 있지 않나……. 아무래도 그간 저희 루아스 교국이 여러분을 너무 온건하게만 대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드네요.”
성녀가 한 손을 내밀었다.
“이 전부를 ‘신성 모독’이라고 봐도 좋을까요?”
오싹.
신앙으로 이루어진 격은 너무 드높아서 하원은 거의 느끼지 못했지만, 상원 대부분은 압도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존재감을 감지했다.
그 편린을 목도한 유니아가 휘청이며 이자벨라의 부축을 받았다.
인드렌, 마스터, 리반데일 대공, 반젤리스가 거의 동시에 말했다.
“슬슬 개입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은데.”
“의장.”
“시작부터 과하군.”
“회의가 아니라 경연을 하자는 건가?”
섭리자가 답변했다.
“케케묵은 감정이 있다면 처음부터 털어 내는 편이 옳다. 그래야 회의 진행에 방해가 되지 않을 테니.”
고름을 어설프게 짜면 염증은 더욱 악화되고 더 큰 고름으로 발전할 수 있다. 꽤 아플지라도 강하게 압박하는 게 장기적인 측면에서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아티슨 마탑주와 마그누스 은행장이 자료를 발표하기도 전인데도 갈등은 해소되지 않고 깊어지기만 하는군. 참석자들이 나름대로 준비해 온 게 많은 것 같은데, 순조로운 세계 회의를 위해서 첫 번째 대의제가 끝나기 전까지 감정적인 마찰은 최소화하도록 하겠다.”
섭리자가 말을 이었다.
“그 전에 용건이 남은 참석자는 마저 하도록.”
수왕은 잠시 고민하다가 맛있는 건 나중에 먹겠다는 듯 물러섰고, 마울러는 강하게 혀를 차며 팔에 힘을 풀었다.
레온하르트는 여전히 로니아 국왕에게 할 말이 많았지만 분위기를 보고 화를 삭였으며, 성녀도 차분하게 다시 착석했다.
그때였다.
“수인족 고금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생물로서 경외받는다더니, 확실히 수왕의 혓바닥 하나는 꽤 위대하긴 하군.”
“?”
“덩칫값이나 해라.”
아드리안이 수왕을 노려봤다. 그는 수왕이 감히 주군을 이간질의 발단으로 이용해서 상당히 열이 받은 상태였다.
수왕은 턱을 괸 채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귀를 쫑긋거렸다. 그 모욕에 수왕을 호위하는 부족장들이 이를 갈았다.
“마울러, 넌 짖을 거면 제대로 짖어라. 사사건건 주군께 시비 걸지 말고. 초월자라는 새끼가 가볍게 굴기는.”
“이 새끼가…….”
“입 닥쳐.”
아드리안이 으르렁거리는 와중 베르덴도 시선을 옮겼다.
벽안에 광신자가 담겼다.
“에온의 계명이 마음에 안 들었나 보군, 성녀.”
“지난번에 말씀드렸을 텐데요.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지만, 우리는 율법에 따라 심판을 대리하는 존재지, 율법을 제정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우리?”
베르덴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건 너희 신자들한테나 하도록.”
“저는 여전히 믿고 있습니다.”
성녀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여러분이 언젠가는 빛의 신앙자가 되리라고.”
하지만 그 화사한 미소에는 예전과는 달리 약간의 불편함이 담겨 있었다. 마치 라인델 넥스레온을 대할 때처럼.
남들은 성녀와 현 네크로맨서와의 관계가 실제로 어떤지 잘 몰랐지만, 지금 성녀의 심기가 상당히 좋지 않다는 것만큼은 이해했다.
“깔깔깔깔.”
이그나시아가 대놓고 웃는다.
라인델은 진지한 척 몰래 입가를 가렸다.
에스티리아 왕국 측에 있는 칼리아와 보헤미른 임시 마탑주로 착석해 있는 로벨린, 그리고 베르덴 뒤에 있는 이자벨라가 동시에 생각했다.
‘시작부터 뭐 이런 개판이…….’
쿠웅.
정적이 이어지자마자 섭리자가 세계 회의를 재개했다.
“아티슨 마탑주, 계속하도록.”
“아, 예.”
펠디안느가 재빨리 이그나시아가 준 과자를 삼키곤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