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0화 세계 회의 (4)
수왕의 이간(離間)으로 상당한 소란이 일어날 뻔했으나 섭리자가 회의 진행에 집중하자마자 분위기는 금방 잦아들었다.
감정은 남아 있으나, 섭리자의 권위를 무시하지 않는다면 첫 번째 대의제를 마치기 전까지는 섣불리 표출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세계 회의 시작으로 펠디안느가 피울음 역병으로 인한 대륙의 사상자를 추산해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개혁의 선동가라는 이명답게 거침없는 설명이 이어졌다. 아티슨 마탑이 직접 준비한 설득력 높은 자료가 기반이 되니 공신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젠티르 마탑주, 시그릴 라비니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 이상으로 피해가 크긴 하네요…….”
역병의 특성상 기도 마력도 신성력도 깨우치지 못한 일반인 사상자가 대부분이었지만 그 숫자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다크워튼 마탑에서 피울음 역병 초기 감염자의 시신을 분석한 결과, 본래는 전염병의 전파력이 더 강하고 잠복기가 더 짧았다고 합니다. 루아스교의 기적이 없었다면 피해는 단순히 몇 배일 거라고 예상할 수 없는 수준까지 치달았을 겁니다.”
“역병 사태를 보다 신속하게 종식시키지 못한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교황, 로마누스는 진심으로 애석해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마음이 교황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그의 인품을 대변했다.
펠디안느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에온의 식별 골렘과 역병 완화제가 있어 감염자로 하여금 희망을 잃지 않게 만들 수 있었지요. 인공 골렘의 원리야 당연히 알려 주지 않으시겠지만 대체 그 완화제는 어떻게 제조하셨는지 개인적으로 참 궁금합니다.”
“에온의 연금술사들이 노력한 덕분이다.”
“정말로 뛰어난 인재들이시군요.”
“두말할 것도 없지.”
실제로는 죽음의 죄인이 준 제조법이 이정표의 역할을 했지만, 재료 입수나 제조 방법이나 어지간한 연금술사는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었다.
베르덴의 간접적인 칭찬에 이자벨라는 마음이 간질거렸다.
화산섬의 마탑주, 벨트로아 리움 솔라스텔이 제 턱을 어루만졌다.
“음, 그만한 규모의 역병이 몰아쳤는데 이 정도면 선방한 것이겠지.”
“결과적으론 나쁘지 않군요. 이런 전염병이 다시 돌지 않는 한 인구는 수십 년만 지나도 원래 이상으로 회복될 테니까.”
“흠, 그건 조금 낙관적인 전망 같소만.”
“낙관적이지 않을 것도 없죠. 설마 그런 재해가 몇 번이고 발생할까요? 너무 과한 우려는 차라리 안 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원의 마탑주들의 의견을 주고받는다.
아직도 마탑주가 제대로 정해지지 않은 보헤미른 마탑과 디아문 마탑을 노골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오스테아 마탑주이자 수호의 현자이기도 한 메드란트 케덴은 그런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저 듣고만 있었다.
그때, 서약자가 묻는다.
“언데드 사태는?”
“일부는 상당한 손해를 입었지만 전반적으로는 그리 심각하지 않습니다. 루아스 교국만이 아니라 모험가 길드와 10대 마탑 또한 대륙을 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움직여 주신 덕분이죠. 역병과는 다르게 언데드는 분명한 실체가 있으니 말입니다.”
“글쎄, 과연 역병에도 실체가 없었을까.”
서약자가 팔짱을 꼈다.
“모두 잘 알 텐데. 피울음 역병과 언데드 사태가 대륙 전역에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는 것 자체가 대놓고 인위적으로 느껴진다는 거. 마냥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공교롭지.”
“…….”
“그렇다면 대체 어떤 세력이 무슨 목적으로 이런 짓을 꾸몄을까. 궁금하지 않나?”
다시 침잠하는 분위기에 하원의 왕들은 머리가 아파 왔다. 겨우 덫을 풀었는데 얼마 못 가서 덫을 또 밟은 기분이랄까.
흑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륙을 전복시키려고 했다? 왜?”
“내가 알고 싶은 게 그거다”
서약자는 참석자 중에 관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는지…… 아니, 확신하는지 스산한 눈빛으로 좌중을 쭉 훑어보았다.
그런 와중에 모험가 길드 본부장과 흑해를 호위하는 ‘완벽한 모험가’가 베르덴이 있는 방향을 몰래 주시했다.
“뭐,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다. 일단은 넘어가지.”
직전의 상황 때문에 서약자는 완강하게 나서지 않고 한발 물러섰다. 섭리자의 경고를 무시하는 건 세계 회의에서 아주 불리하게 작용한다.
서약자는 늘 고산 지대에 자리한 하이랜디아에 머물렀기에 소문이 적었고, 그렇기에 꽤 평판이 높은 편이었다.
굳이 남을 핍박하지 않으려는 성격도 평가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유리온 하이로스의 하이랜디아 건국기를 아는 사람은 그를 단순히 성격 좋은 대륙의 지배자로 보지 않았다.
서약자도 초월자다.
언령의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여행하는 아내와 딸 주변에 먹잇감을 탐하는 이형종이 어슬렁거렸다는 이유로, 그 지역의 위협적인 생물 전체를 아주 몰살한 건 광기의 일환이었다.
……꿀꺽.
리비안트 공왕이 침을 삼켰다.
상원만이 아니라 하원도 느끼고 있다. 이번 세계 회의는 초월자들이 자중하지 않는 만큼이나 혼돈으로 몰아칠 것이라는 걸.
이윽고 펠디안느가 설명을 마쳤다.
다음 마그누스 은행장, 웬델 마그누스 차례가 되었다. 그 역시 3대 은행에서 만든 자료들을 가져와 배포했다.
과연 은행장답게 세계가 보는 앞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언변은 일절 흔들림도 없이 그리고 과장도 없이 정제되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세계적인 침체가 다소 길어지긴 하겠지만 뿌리가 위태롭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리 전망은 좋지 않아 보입니다. 이 세계 회의의 분위기를 보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겠지요.”
“주제넘게 구는군, 배금주의자.”
마울러가 경멸 어린 시선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마그누스 은행장은 움츠리거나 하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돈을 최고의 가치로 보는 배금주의자가 아닙니다.”
“호오, 대륙의 돈을 쓸어담고 있는 그 은행장이 말이냐? 소문과 괴리가 심한데.”
“소문은 어디까지나 소문입니다. 물론 제 태도가 돈에서 비롯되는 건 맞습니다. 저는 세계 회의에 3대 은행의 대표로서 참석한 것이니. 그러니 나중에 돈이 필요하면 말씀해 주십시오. 대출 심사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심사?”
마울러가 눈썹을 씰룩였다가 이내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웃었다. 마그누스 은행장의 힘은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수준이나, 그 당당함은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저 새끼, 뭔가 있군.’
세계 3대 은행은 언제나 중립을 고수한다고 하나 마울러는 믿지 않는다. 인간이라면 결국에 한쪽으로 치우치기 마련이니까.
‘……잠깐.’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동안 3대 은행은 기묘할 정도로 조용했다.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니 적어도 한 번쯤은 특정 세력에 붙거나 거하게 사고를 쳐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하다못해 3대 은행장이 피로 이어지는 가계도 아니고.
‘근데 왜 이렇게 일관적이야.’
아노니움 은행.
다이나 은행.
마그누스 은행.
마울러는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작금의 세계 화폐 경제를 구축한 3대 은행을 뒤에서 지배하는 뭔가가 있는 듯했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마그누스 은행의 현황 보고도 끝났다.
이로써 최근의 사태로 인해 타격을 입은 대륙의 상황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 마침내 안건에 대해 논할 때가 왔다.
대의제와 소의제의 시간이다.
“주인 없는 땅의 권역 논쟁은 사안이 사안이니 만큼 잦은 충돌이 예상된다. 그러니 비교적 마찰이 적을 거라고 예상되는 적룡 사르칸드라의 비늘을 첫 번째 대의제로 삼겠다. 그리고 첫 번째 대의회(大議會)에 앞서 첫 번째 소의회(小議會)를 갖도록 하지.”
개별적인 소의제를 논하는 건 소의회.
대의제를 중심으로 논하는 건 대의회.
순서는 소의회로 시작하고, 소의회와 대의회를 번갈아 가면서 진행해 두 번째 대의회에서 끝을 맺는다.
하루 만에 마무리될 수도 있고.
며칠이 걸릴 수도 있다.
지금까지 세계 회의가 가장 길게 이어진 기록은 12일이었다. 논의할 게 많아지면 그보다 더 길어질 수 있는 게 세계 회의다.
대륙의 권력 판도를 좌지우지하는 초월자들조차 심사숙고해서 결론을 내린다.
“다시 한번 알리겠다. 각각 대의제와 소의제에서 발의할 수 있는 안건의 횟수는 공유되며. 하원의 참석자는 하나의 소의제를, 상원의 참석자는 두 개의 소의제를 상정할 수 있다. 간단한 규칙이니 실수를 하는 불상사는 없길 바란다. 그리고.”
섭리자가 손가락을 들어 지적했다.
“과자의 섭취는 자유지만 가능한 다른 참석자를 배려하도록 하라.”
“엥? 주변 애들도 나눠 줬는뎅?”
“조용히 섭취하란 뜻이다.”
“아하하하, 좀 시끄러웠나? 근데 너무 재밌잖아! 어쨌든 주의할게. 자자, 이건 사죄의 표시야. 우리만 먹으면 미안하니까?”
이그나시아가 손짓하자 모두의 앞에 와인과 과자가 나타났다.
아는 사람만 안다는 마그누스 은행산 레드 와인과 고소한 풍미가 일품인 특별한 크래커, 이는 참석자들을 위한 다과였다.
베르덴이 물었다.
“처음부터 준비해 놨었군. 근데 왜 이제야 주는 거지?”
“나 혼자 과자 먹고 있으면 너희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서. 재밌을 것 같잖아. 봤지? 볼거리 생기니까 나한테서 주섬주섬 과자 챙기는 거. 안 그래, 제라클 황제?”
“날 끌어들이지 마라.”
“봐 봐, 재밌다니까? 저기 세계 의장도 침 흘리는 것 같은데?”
“…….”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베르덴도 황당했다.
섭리자의 엄격 근엄한 표정을 본 이그나시아가 과장스럽게 두 손을 들었다.
“아핫핫, 방금 한 말은 취소. 계속해. 방해하지 않을게. 가급적이면 말이지.”
“……다음은 경고다.”
쿵.
섭리자가 의사봉을 대신하여 손끝으로 새로운 개회를 알렸다.
“첫 번째 소의회를 시작하겠다. 표결은 모든 소의제가 건의된 이후에 진행하겠다. 제의자는 거수하라.”
곳곳에서 반응이 있었다.
섭리자의 눈에 올곧게 펴진, 혹은 반쯤 펴진 오른팔들이 비쳤다. 그중에는 그가 가장 주시하는 인물도 있었다.
섭리자로서도 꽤나 궁금했기에 차례를 넘기지 않고 바로 지목했다.
“베르덴, 발언하라.”
정식으로 발언권을 얻은 베르덴이 주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과거 세계 회의에서 이형종에 대한 대의제가 이루어졌다고 알고 있다. 기준 이상의 지성과 윤리를 갖춘 이형종만 모험가 길드의 허가를 받아 사회에서 공존할 수 있다고. 나는 그 범위를 조금 늘리고자 한다.”
……??
느닷없는 이형종의 사회 공존 이야기에 대부분의 참석자가 눈을 깜빡였다. 정말로 예상에서 벗어난 안건이었기 때문이다.
“이형종의 종족 제한 철폐. 그리고 에온의 권역 내 이형종 거주 구획 인정. 나는 지난 대의제의 수정을 제의한다.”
* * *
세계 회의 규칙에 따르면 대의제의 부분 수정은 참석자로서 주어진 소의제 권한을 하나 차감하는 것과 동일하다.
‘이로써 내게 주어진 소의제 제안권은 하나뿐.’
투표로 거부당해도 횟수는 줄어들다. 그야말로 귀중한 기회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덴은 과감히 뜻을 표명했다.
‘여러 가지 이점이 있지만, 무엇보다 언젠가 초대 네크로맨서의 정체를 의도치 않게 들킨다면 문제가 된다. 특히 루아스교.’
성자는 미숙하고, 교황도 분쟁을 좋아하지 않는 듯하지만 성녀는 위험하다. 광기를 논리로 설득하는 건 지극히 어려운 일이니까.
그것이 종교에 대한 광신적인 믿음이라면 더욱이 그렇다.
저 반응을 보라.
“신성.”
“듣고 있다.”
“에온의 권역에 이형종 거주 구획을 원하는 건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런데 대의제에 명시된 종족의 제한을 철폐하다니. 혹시…….”
성녀의 고개가 기울었다.
“언데드까지 받아들이겠다는 뜻일까요?”
베르덴은 확신했다.
만약 초대 네크로맨서가 옛 왕을 대비해 루아스 교국을 찾아갔다면 반드시 토벌당했다. 성녀의 눈과 귀는 믿음으로 닫혀 있다.
베르덴이 말했다.
“언데드 중에도 지성을 가진 개체는 있다. 굳이 예외로 두어야 하나?”
“언데드는 생명을 증오하는 존재입니다. 그만한 지성과 윤리를 가졌음을 우리에게 증명한다면, 그건 우리를 현혹하고 기만하고 있다는 뜻이죠. 심지어 언데드 사태가 일어난 건 최근입니다. 그리고 신성의 제안대로 대의제가 수정되면 악마까지 포함되는데, 이건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여긴 논의하기 위한 자리다. 추가하든 제외하든. 제안이야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지. 물론 타당한 근거만 있다면.”
베르덴이 다른 사람에게 의견을 구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크워튼 마탑주.”
언데드를 비롯한 사령 계열을 다루는 흑마법계의 절대 세력, 다크워튼 마탑.
루아스교가 거부한다?
하나 모든 건 투표로 결정된다.
베르덴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루아스 교국.
에온.
둘 중 누구의 인맥이 더 대단할지.
베르덴이 미래 운명의 일부 폭로를 위한 첫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