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4화 소외자 (1)
아침의 해가 밝았다.
다크워튼 마탑의 유일한 후계자───할디른 데이라스가 가르간트에서 멀리 떨어진, 팔자에도 없는 눈 덮인 들판을 거닐었다.
그와 몇 걸음 떨어진 앞에서는 다크워튼 마탑주, 라인델 넥스레온이 걷고 있었다.
“풍경이 좋습니다, 스승님.”
“그래.”
“세계 회의가 끝나고, 베르덴과 따로 이야기라도 하고 가실 줄 알았습니다만…… 급한 용무가 있으신 겁니까?”
“그랬다면 여기서 이렇게 느긋하게 산책하고 있진 않겠지.”
겨울바람이 불며 잔디 위에 앉은 눈발이 조금 휘날렸다.
“그저 생각을 정리하는 중이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고.
햇볕은 맑았다.
주변 어딜 둘러봐도 태양의 눈길이 직간접적으로 닿아 있다. 사람도 그랬다. 세상에 속한 그 누구도 예외는 없었다.
“…….”
라인델이 가만히 천상(天上)에 시선을 둔다.
할디르만이 아니라, 일대를 수호하는 다크워튼 마탑의 장로들과 고위 마도사들도 마탑주의 행동에 의아해했지만 선뜻 묻진 않았다.
수십 년 동안 이런 기행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대의 네크로맨서께선 죽음에 통달한 초월자.’
‘단언컨대 우리 같은 범인이 이해할 수 없는 깊은 뜻이 있으실 터.’
라인델을 오랫동안 보아 온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라인델이 하늘을 보듯, 그들은 라인델을 올려다보았다.
죽음의 이해자는 이미 역대 다크워튼 마탑주를 통틀어, 어쩌면 초대 네크로맨서에 필적하는 별격의 존재로 평가받고 있었다.
“흐릿해졌군. 그리고 명확해졌고.”
당연하게도 라인델의 조용한 혼잣말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도 준비해야겠구나.”
“주검의 영광에 대해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마 그게 시작이 될 테지.”
시작……?
대체 무엇의 시작이란 말인가?
할디른은 흑마법을 포함한 세상의 공부를 멈춘 적이 없었으나, 여전히 스승님이 바라보는 세상의 편린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 라인델이 물었다.
“존재는 어떤 식으로 실체적 죽음을 맞이한다고 생각하느냐.”
할디른이 즉답했다.
“죽음의 방식에 대해 말씀하신 거라면 자연사나 참살 같은 유형이 있고, 죽음을 앞둔 이들의 감정에 대해 말씀하신 거라면 대개 두려움을 품겠죠. 어쩌면 반대로 기쁨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죽음은 다변적이고 복잡한 개념이지.”
라인델이 눈을 감았다.
“역전의 용사가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져 목이 부러진 것처럼 허무하고, 폭정을 일삼는 왕을 죽이기 위해 희생한 것처럼 숭고한 그런 것. 여기서 명심해야 할 점은 그 불확실성에 있다.”
“불확실성…….”
“내가 수명이란 껍질을 벗어 던졌을지언정 죽음은 따라온다.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살지도 모른다. 본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은 까닭이다.”
그가 눈을 떴다.
“그것이 이제부터의 죽음이 될 것이다.”
사방이 숨을 죽였다.
“마탑으로 복귀한다. 그리고 보물고에 있는 용의 소재 중 7할을 반출한다.”
“……!”
다크워튼 마탑의 금고에는 지난 유골룡 사태에서 할디른이 분배받은 것 외에도 약 5세기 전에 확보한 용골도 보관되어 있다.
그것들은 무려 수백 년 동안 묻혀 있던 다크워튼 마탑의 극비였다.
“스승님, 그 말씀은…….”
“초대 네크로맨서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옛 왕은 강대한 드래곤을 다뤘다고 한다. 네가 공화국에서 맞닥뜨린 유골룡은 그 전조일 테지. 그러니 우리도 준비해야 하지 않겠느냐.”
라인델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더 강한 녀석으로.”
* * *
루아스 교국의 신성 비행정 함대가 환한 창공을 가로지른다. 그중 기함에 탑승해 있는 에르세티아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여러모로 많이 어렵고 불편한 자리였을 텐데. 고생하셨습니다, 성자.”
“아, 아닙니다, 성녀.”
레온하르트가 따뜻한 칭찬에 부끄러워하며 괜히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초월적인 신앙을 가진 농부의 순수함이었다.
로마누스가 그에 동감했다.
“두 번째 하인을 향해 달려드셨을 때는 제법 놀랐습니다. 특히 성녀에게서 배운 움직임을 곧바로 실전에서 사용하시다니…… 역대 성자들과 비교해도 뛰어난 자질입니다.”
“과찬이세요, 하하.”
레온하르트가 애써 웃으며 한껏 붉어진 얼굴을 감췄다. 이렇게 대단한 사람들에게 대단하다는 말을 들으니 몸 둘 바를 몰랐다.
이대로 가면 고개도 못 들 것 같았던 그가 이내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가레스란 분은 정말로 주검의 영광과 관련이 있을까요?”
마울러───가레스 시릴리아드가 거론되자, 에르세티아와 로마누스는 그 주제에 맞게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신성의 말마따나 혈맹을 통한 접점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결국에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관계에 불과하겠죠. 로니아 국왕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마울러는 세계 회의에 참석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가레스는 동대륙을 두고 베르덴과 권역 싸움을 예고하고 있다. 단순히 초월자의 숫자만 비교하면 에온의 우위인 상황.
그런 와중에 루아스 교국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짓을 하고도 뻔히 모습을 보이는 건 상식적인 행동이 아니다.
주검의 영광에 대해 자세히 몰랐거나.
주검의 영광과 옷깃만 스친 정도이거나.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둘 중 하나로 귀결될 것이다. 가레스는 명백하게 루아스교와의 마찰을 성가셔했다.
“물론 조사는 해 봐야겠지만요. 혹시 또 모르는 거니까.”
“그럼 로니아 국왕은 조사에 문제가 없다면 그냥 넘어가는 겁니까? 그 학살을?”
레온하르트의 눈빛이 분노를 띠었다.
이 또한 순수하다.
그가 보기에는 로니아 국왕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적이었다. 개인적으로도, 그리고 신앙적으로도 말이다.
로마누스가 말했다.
“로니아 국왕의 행적을 파헤치면 주검의 영광이 아니더라도 루아스 교국에서 문제 삼을 부분이 나올 겁니다. 하지만 로니아 왕국은 초월자의 영향력이 직접적으로 닿아 있으니, 자칫 혼란이 크게 가중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국이라면……!”
“당연히 루아스 교국에 비하면 마울러의 전력은 미약하죠. 전면전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만큼. 그래서 마울러도 못 이기는 척 협조해 최대한 빨리 결백을 입증하기로 한 거고요. 저희와 대립할수록 에온과의 신경전에 불리할 테니까. 다만 성자가 명심해야 할 건 세력이 아닙니다. 개인이지.”
에르세티아가 목소리를 낮췄다.
“아무리 성검의 선택을 받았고, 남다른 재능까지 있다고 한들 성자의 몸과 마음은 아직 초월적 경지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묻죠. 성자와 신성이 충돌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나요?”
뇌리에 두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수인 한 명을 일격에 날려 버리고 성녀와 수왕 사이에 끼어든 베르덴의 모습, 그리고 두 번째 하인의 빙의체로 전락한 로니아 국왕의 보좌관을 가차 없이 죽이던 베르덴의 모습이었다.
레온하르트는 그 단호함에 압도당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침을 삼켰다.
“……이길 수 없겠죠. 절대로.”
“신성이 전력을 발휘하면 성자는 그 한 수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 정도의 격차예요.”
베르덴과 레온하르트의 각성 시기는 고작 1~2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베르덴의 경지는 초월자의 기준으로도 뭔가 어긋났다.
‘본래 주어진 인간의 수명을 벗어날 수 없는 대신 초월에 대한 적응과 성장이 빠른 루아스교의 신인도 아닌데.’
초월적 존재를 무려 다섯이나 죽인, 말도 안 되는 경험을 했다는 걸 고려해도 그 강함을 손에 거머쥔 시간이 너무도 짧다.
그녀의 감각에 확실히 새겨진 검붉은 마력처럼 기이한 것투성이.
에르세티아는 이번 세계 회의를 통해서 라인델 넥스레온만큼이나, 베르덴을 가장 주의하고 경계해야 할 존재로 인식했다.
향후 무엇을 할지 감히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더더욱.
“다른 초월자들도 성자가 제대로 상대할 수 없는 건 같습니다. 거룩한 빛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겐 힘이 없는 신앙은 통하지 않아요. 그러니 성자가 지금 해야 할 건 심판이 아니라 단련입니다.”
로마누스가 수긍했다.
“적어도 성검의 위력을 온전히 끌어낼 수준은 되어야 합니다. 머지않아 큰 충돌이 있을 테니까요.”
“충돌이요?”
“이데라트 연맹국에서 세계적인 탐사를 제의한 용검의 마지막 주인은 옛 왕이었습니다. 성자는 아직 배우지 못한 역사의 부분이니 모르셨을 겁니다. 과거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것의 소재가 하필 이 시점에서 드러난 건 너무도 공교로운 일이지요.”
레온하트르가 흠칫했다.
“그러나…… 혹 이데라트 연맹장이 주검의 영광과 관련성이 있다면, 처음부터 연맹장 측이 용검에 대해 말하지 않고 숨겼으면 되는 것 아닌가요?”
“그래서 당장 연맹장의 의도를 의심할 수 없는 겁니다. 용검에 대한 내용은 어느 모로 보나 주검의 영광에 있어서 손해니까요.”
“우연이든 뭐든 간에 길은 하나로 통하겠죠.”
에르세티아가 단언했다.
“옛 왕의 하인들은 용검을 확보하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 거예요. 그리고 세계적인 탐사라고는 하나 다른 세력들도 용검을 손에 넣으려고 뒤에서 수작을 부리겠죠. 혼란은 필연입니다. 바로 그때를 위해서 성자는 힘을 길러야 하는 거고요.”
한참 어린 남동생을 대하기라도 하듯 부드러운 손길이 레온하르트의 머리를 쓸었다.
“한 달 내로 7인의 대주교와 삼정의 추기경이 준비한 기초 교육을 이수하세요. 그 이후에는 저희가 성자에게 심판의 권리를 전수하겠습니다. 로니아 국왕만이 아니라 초월자의 어둠마저 밝힐 수 있는 그 힘을.”
레온하르트는 심판이란 단어를 한번 되뇌곤 결연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어머니와 여동생을 지키고, 더 나아가 수많은 사람을 위해서 악을 처단한다, 그것이 레온하르트의 광기이자 사명이었다.
에르세티아와 로마누스는 만족하며 어린 신인의 다짐을 격려했다.
“오오.”
추기경, 정의의 그레고르반은 이런 자랑스러운 세 명의 신인이 화기애애하게 대화 나누는 광경을 슬쩍 보며 빙긋 웃었다.
“참으로 보기 좋구나.”
빛이 일렁였다.
* * *
해가 중천에 떴다.
“……흠.”
베르덴이 <겁화>를 성공적으로 억누르고는 몸을 일으켰다.
‘의외로 일찍 끝났군.’
반영구적인 소멸에 육체가 조금씩 적응하고 있는 게 느껴진다. 평균적으로 이 적응 속도를 유지하면 두세 달 안에는 불안정성을 상당 부분 제거할 수 있을 터였다.
다만 임시적인 방편이라서 며칠밖에 지속되지 않겠지만, 어차피 가르간트에 오래 있을 것도 아니니 문제는 없었다.
터벅, 터벅.
방을 벗어나 계단을 내려갔다.
좋은 냄새가 났다.
1층 거실에서 다수의 인원이 식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셨습니까, 주군.”
“생각보다 일이 금방 끝났나 보네? 가주, 수프 먹을래?”
“부탁하지.”
“빵도 방금 막 구운 걸 사 왔습니다. 식기 전에 어서 앉으세요, 호호.”
[음료?]
“커피로.”
[확인했습니다.]
베르덴이 빈 상석에 착석했다.
식기와 음식이 담긴 쟁반이 허공을 가로질러 식탁에 안착했다. 알파와 베타는 어디서 배웠는지 커피를 직접 만들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자벨라도 자기 자리에 앉았다.
“일찍 먹고 남은 일정 소화하러 갔어. 유니아하고 라테온은 아직 자고 있고.”
“그렇군.”
[커피. 완료.]
식탁 높이에 딱 맞게 조절된 베타의 프레임에 올라탄 알파가 커피잔을 운반했다. 꽤 좋은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베르덴이 먼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시선을 돌렸다.
“제국 연회에서 맺은 거래를 이행하러 왔다고. 세계 회의가 끝나자마자.”
“그렇습니다. 기왕이면 만난 김에 처리하는 편이 효율적이니까요.”
아티슨 마탑주, 펠디안느가 식탁 한편에서 빵에 버터를 바르며 답했다.
갑자기 찾아왔다고 해도 진심으로 내쫓을 수는 없어서 아침에 저택에 들였더니, 무슨 제 집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었다.
“…….”
“음! 이 빵, 별미네요.”
아드리안의 불만 섞인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다.
“그래서 알파에게 소개해 줄 그 인재는 어디에 있지?”
“바로 가르간트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저 최외곽 쪽이죠. 다른 곳으로 가려는 걸 제가 설득해서 여기로 이주시켰습니다. 몇 년 전의 일이죠.”
“아티슨 마탑 바로 근처에 머무를 줄 알았는데.”
“원래는 그랬는데 그 친구가 대인기피증이 아주 심한 편입니다. 그때 말씀드렸던 기형 때문에요. 노력은 했으나 극복하지 못한 경우죠.”
아드리안이 물었다.
“타인과 어울릴 수 없다면 훨씬 더 한적한 곳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닌가?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가 아니라.”
“그 친구이기에 거대 도시가 괜찮은 보금자리인 겁니다. 사람에게는 벽이 있으니까요.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그 벽만 넘지 않는다면 소외되죠. 관계란 마음을 나눈 결과니까요.”
펠디안느가 커피를 음미했다.
“아, 물론 바깥에 나가지 않아도 풍족한 음식과 연구 재료를 주기적으로 배달받을 수 있는 재력과 인맥만 있다면 말입니다. 그 친구에겐 제가 곧 돈이자 연줄이죠.”
“정확한 위치를 말해라.”
베르덴이 확언했다.
“우리가 직접 데리러 갈 테니. 계약서대로.”
“역시 이야기가 빠르십니다. 좋습니다. 식사를 마치면 바로 알려 드리도록 하죠. 한데…….”
펠디안느가 기품 있게 잘 구워진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존재감이 다시 약해지셨군요. 세계 회의에서 본 그 강렬한 압박감은 사라지시고. 무엇인지는 몰라도 아직 힘의 제어가 완벽하게 되지 않는 모양입니다.”
“네가 궁금해할 건 아닌 것 같은데.”
“호호, 대답을 바란 건 아닙니다. 그냥 호기심에 이것저것 묻는 거죠. 그게 식탁 위에서 나누는 담소가 아니겠습니까? 싫으신가요? 그럼 사소한 성의라도 보여 드려야겠군요.”
펠디안느가 품속을 뒤적거렸다.
“예를 들면…… 베르덴 님을 곤란하게 만들려고 했던 마도사의 사죄 정도?”
그릇 옆에 뭔가가 놓였다. 그걸 본 아드리안과 이자벨라의 표정이 굳었다. 펠디안느가 꺼낸 것은 차갑게 얼린 누군가의 손가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