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9화 비애 (2)
아케나드 마도국의 근간은 언제나 초대 마도왕의 핏줄이었다. 그렇다. 오직 위대한 혈통만이 마도국을 대표하는 힘이자 권력이었다.
그런 이유로 마도국 역사에 혁명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핏속에 깃든 재능이 곧 자격일지니.
초대 마도왕의 후손은 필연적으로 숫자가 적어 왕위 다툼이 일어날 수 없었고, 아무리 마도국 왕실의 힘이 약해져도 귀족은 감히 마도왕의 권위를 넘보지 않았다.
마도국에 있어서 마도왕이란 그야말로 절대적인 상징이었으므로.
그러나…….
마도국 왕족의 숫자가 계속 줄어들면서 가문들이 대륙에서 가장 존귀한 혈통에 욕심을 점차 드러내기 시작했다.
물론 마도의 왕위 때문이 아니라 혼인을 통해서 왕족의 가계에 정식으로 들어가려는 아주 상식적인 욕심이었다.
마도(魔道) 왕가의 인척 가문이 된다면 얼마나 드높은 명예와 권력이 따라올 것인지는 굳이 따져 볼 것도 없었다.
본래 마도 왕조들과 귀족 가문 간의 결혼은 종종 있었지만…… 지금 상황은 그 의미와 결과 자체가 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혼인 대상자가 위대한 혈통의 마지막 후손이자 사실상 8대 마도왕 즉위가 예정된 여인이었으니까.
훗날 메드레일은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가.
단언할 수 있다.
끝내 반젤리스의 하나뿐인 손녀는 자신의 의무를 지키려 애쓰겠지.
선대가 나약한 탓에 이 최후의 혈통이란 절벽에 몰려 버린 녀석은, 왕가를 위해서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온갖 발버둥을 치리라.
원치 않은 결혼을 할 것이고.
최대한 많은 아이를 낳을 것이다.
자식들이 비명 속에서 죽어 가는 지옥 속에서도, 적어도 혈통의 저주를 극복한 자식이 나올 때까지는 출산을 이어 갈 것이다.
설령 마도국의 가문들이 다양하고 뛰어난 유전을 명목으로 내세워 여러 사내의 씨앗을 권해도 결국엔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게 태어난 자식들을, 각 명문가는 애지중지 키울 것이다. 혈통을 견뎌 내면 대박이라는 그 알량한 마음가짐으로.
생각이 과하다?
천만에.
반젤리스는 아케나드 마도국의 권력이 몇 세대나 바뀌는 걸 살아서 보았고, 그 속의 수많은 인간 군상을 기억에 담았다.
마도왕이라는 중심이 없었다면 보헤미른 마탑의 발로크 베시아스처럼 인체 실험을 할 만한 존재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것이 마법의 어두운 일면이다.
차라리 메드레일이 힘으로 군림하는 성격이라면 안심일 텐데. 불행히도 손녀는 초월자로 된다고 해도 무력보다는 대화를, 명령보다는 타협에 좀 더 무게를 둘 인물이었다.
어떤 이상을 추구할진 몰라도 메드레일의 앞길은 아픔이 따를 터였다.
……조부로서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다.
메드레일이 그것을 원할지라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피눈물을 흘리며 짓는 웃음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동안 혈통이 쏟아 낸 피눈물을 마침내 행동으로 끊어 내야 할 때가 다가왔다.
반젤리스는 평생 초대 마도왕의 먼 후손으로서 아케나드 마도국의 번영을 위해 힘써 왔지만, 그것이 메드레일에게 해를 끼친다면 기꺼이 지워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
백 년을 훌쩍 넘는 그간의 인생으로 핏줄의 의무를 수호했으니, 이제는 딱 하나 남은 가족을 지킬 차례였다.
아케나드 마도국의 종말에 메드레일이 슬퍼하고 좌절해도 개의치 않는다.
전 대륙의 멸망과 손녀의 미래, 이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요구한다면 반젤리스는 기꺼이 후자를 택할 것이었다.
단 한 명의 행복을 위해, 한 국가를 멸망시키려고 한다니…… 그리된다면 세상은 정신 나간 초월자라고 평가하겠지만,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기에 진정으로 초월자인 것이다.
예전에 이그나시아가 말하지 않았나.
초월자는 정신병자라고.
겉으로는 딱히 내색하지 않았으나 솔직히 말해서 전적으로 동의했다.
반젤리스는 위대한 혈통의 자손으로 태어난 이상 미칠 수밖에 없었다. 자식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죽어 나가는데 미치지 않을 부모는 없었다.
반젤리스가 진정 사랑했던 아내는 둘째 아들에 이어 막내딸까지 보낸 후 정신에 병이 들어 일찍이 눈을 감았다.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던 친척들은 이미 재가 된 지 오래였다.
───왜 저희 후손들에게 이런 고통을 남기신 겁니까! 당신이 그렇게나 대단한 존재였다면 혈통의 저주 하나쯤은 없앨 수 있었을 텐데!
언젠가 반젤리스 루인 아케나드는 홀로 마도왕의 전당에 찾아와 초대 마도왕의 초상화 앞에서 이렇게 소리쳤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시조를 향한 존경심과 정반대되는 증오심을 가슴 한편에 품게 된 것은…….
그 차가운 비수는 이상을 추구하는 마음과 함께 자라나 이처럼 아케나드 마도국을 겨냥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뜻밖의 희망이 생겼다.
새로운 위대한 혈통의 보유자로 의심되는 존재가 등장했다.
마법적인 재능에 기반한 정황들과 <아케인>으로 핏줄을 검증하니 명실상부한 초대 마도왕의 후손임이 증명되었다.
베르덴.
제렌의 말대로 140년 전에 센트럼 바깥으로 나간 핏줄의 후대가 살아 있을 리 없었다.
한두 명이 살아남았다고 해도 베르덴의 세대까지 이어지려면 극악의 확률을 뚫어야 한다. 만약 혈통을 견뎠다고 해도 센트럼 같은 장소가 아닌 이상 재능이 무르익기 전에 죽을 가능성도 높다.
그냥 운이 좋았다고?
그럴지도 모르지만 마법사는 한낱 천운을 근거로 삼지 않는다. 그것이 위대한 혈통과 관련된 것이라면 더욱이 그러하다.
반젤리스는 혼란스러웠지만…… 그렇기에 현실에 더 집중했다.
<아케인>을 체득했다.
뭐가 됐든 간에 그거 하나면 차고 넘쳤다. 시조의 마력 운용법을 익힌 이상 누구도 베르덴이 초대 마도왕의 가계에 속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테니.
만에 하나라도 베르덴의 주장대로 위대한 혈통이 아니라면? 같은 핏줄이 아닌데도 <아케인>을 운용할 수 있는 거라면?
오히려.
오히려 반길 일이다.
베르덴의 유전 형질을 이어받은 존재들이 그처럼 <아케인>을 습득할 수 있다면, 위대한 혈통의 저주는 사라질 것이다.
초대 마도왕에서 베르덴으로 혈통의 시조가 바뀔 테니까. <아케인>이 이어지는 이상 그 사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리라.
메드레일을 대신해서 베르덴이 마도왕이 된다면, 반젤리스는 아케나드 마도국을 대륙에서 지워 버리지 않아도 된다.
반젤리스의 삶이 다한다 해도 아케나드 마도국은 번영할 것이고, 메드레일은 혈통의 의무에 짓눌리지 않고 자유롭게 웃으며 살 수 있을 것이다.
베르덴의 나이라면 적어도 100년…… 아니, 아마 200년은 거뜬히 군림할 테니까. 물론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반젤리스는 그보다 재능이 뛰어난 존재를 직접 본 적이 없었으므로.
“반드시 네가 해야 한다, 베르덴. 너야말로 나의 마지막 등불이다. 이 지독한 혈통의 굴레를 멈출 수 있는……!!”
꽈아악.
베르덴의 양쪽 어깨를 붙잡은 반젤리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눈빛은 마치 한밤의 보름달처럼 명료했다.
베르덴이 말했다.
“오늘 처음으로 아케나드 마도국에 방문한 내게 책임을 전부 떠넘기겠다는 건가. 오직 손녀의 안위를 위해서.”
“그래. 7대 마도왕으로서 감히 내릴 만한 판단은 아니지. 하나 아무래도 좋다. 너도 잘 알 텐데. 이상을 중시하는 초월자의 정신이 어떤지.”
반젤리스가 안광을 번뜩였다.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
초월자의 이상을 향한 광기와 집착은 베르덴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목숨마저 제물로 삼아 만인에게 기억되고자 했던 마법게 초월자는, 여전히 베르덴의 기억에 새겨진 채 살아가고 있다.
숨소리마저 고요하다.
푸른색 눈동자와 청금색 눈동자가 교차한 상태로 시간이 흘렀다.
“혈통 문제는 차치하고, 7대 마도왕이 군림하고 있는데 아케나드 마도국의 8대 마도왕이 되겠다고 선언할 계획은 없다. 적어도 당장은.”
“…….”
“그래도 네가 죽는다면, 메드레일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하지.”
베르덴은 초대 마도왕에게 빚이 있다.
초대 마도왕이 제작한 [아인베르], 초대 마도왕이 남긴 관리자, 초대 마도왕이 창조한 알파와 베타…… 초대 마도왕의 의도는 아니었더라도 베르덴은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 빚을 갚겠다고 목숨까지 내걸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의 머나먼 후손에게 자그마한 도움 정도는 베풀 수 있었다.
“지금은 그거면 충분하겠지. 지금은…….”
반젤리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천천히 손을 내려놓았다.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
고조된 감정이 진정되면서 반젤리스의 기세도 가라앉았다. 베르덴이 순간적으로 옆을 향해 가볍게 눈짓했다.
당장이라도 개입하려고 했던 아드리안이 검에서 손을 떼었다.
반젤리스가 다시 초대 마도왕의 거대한 초상화를 올려다본다.
그에게 베르덴이 묻는다.
“반젤리스, 네 이상은 뭐지?”
“시조처럼 대단한 존재가 되는 것.”
반젤리스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리고 그 힘으로 가련한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다.”
반젤리스가 초대 마도왕의 위상을 따라잡고 싶어 했던 건 부차적인 이유였다.
초월자가 되기 전부터 가족들의 필연적인 죽음을 경험해 왔던 그는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혈통에 의해 고통받지 않기를 바랐다.
* * *
메드레일이 자리를 비켜 주고…….
이자벨라와 베타는 총 87권에 이르는 데이로스 가문의 기록을 살펴보았다. 한 권 한 권의 두께가 꽤 상당했다.
이자벨라 혼자였다면 밤을 새워도 절반도 확인하지 못했겠지만, 베타가 함께 있는 이상 레바나의 도움도 필요 없었다.
[스캔 완료입니다. 다음입니다.]
베타가 마력의 빛을 조사할 때마다 책이 한 권씩 옆으로 넘어갔다. 표지를 넘기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곧바로 책을 바꿔 주기 위해서 다음 책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그때였다.
[찾았습니다.]
“진짜?!”
[136페이지부터 시작합니다.]
이자벨라가 들고 있던 책을 치워 버리고 베타의 옆에 붙었다. 베타가 언급한 쪽수까지 빠르게 책장을 넘겼다.
───끝없는 부정. 그 괴물은 중앙 대륙 어딘가에서 출현해, 바다를 건너 서대륙에 당도했다.
그것은 누군가의 일지였다.
[이 책은 데이로스 가문의 일원이 남긴 수기가 절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필요하면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역시 특수 개체를 막은 선조가 직접 쓴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럴 것이다.
어렸을 때 그 선조는 회고록을 남기지 않았다고 전해 들었으므로.
이자벨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일단은 직접 읽어 볼게. 그래도 내 가문의 선조니까. 잠깐만 기다려 줄래?”
[알겠습니다.]
그렇게 이자벨라와 베타는 같이 앉아서 과거의 역사를 읽었다. 그 안에는 특수 개체에 대한 정보가 실려 있었다.
가문 대대로 내려져 오는 이야기에 포함되지 않은 자세한 부분까지도 말이다.
───아르나크 제국령 끝에 있던 도시 두 개를 멸망시키고, 길 위의 마을까지 집어삼켰다. 희생자는 대략 수만 명. 끝없는 부정은 각국이 대처하기도 전에 아케나드 마도국의 영토로 향했다.
───하지만 마도왕 폐하께서는 부재하셨다.
───누군가가 막아야 했다. 어마어마한 피해를 볼 것이 분명했기에 명문가들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멀찍이 경계선만 구축했다. 사람들의 피난 행렬이 영토를 길게 가로질렀다.
───그런 가운에 데이로스 가문의 차기 가주가 말없이 마도국을 떠났다.
───나의 형이었다.
수기를 작성한 사람은 이자벨라가 아는 선조의 친동생인 듯했다. 그 오래된 글씨체를 따라서 과거에 몰두했다.
───나는 형처럼 용감하지 않았기에 센트럼에 머물렀지만 그래도 귀는 열어 두었다. 형은 이틀 동안 끝없는 부정과 싸웠다. 최대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 홀로 분투했다.
───세 개의 손가락과 다리 하나를 잃으면서도 괴물을 저지했다.
───그리고 마도왕 폐하께서 돌아오셨고, 놈은 토벌되었다. 국가를 위협한 괴물조차 지고한 힘 앞에 잠시도 버티지 못했다. 결국 형이 희생으로 번 시간은 데이로스 가문의 자랑이 되었다.
───마도왕 폐하께서는 데이로스 가문에 더 높은 작위와 끝없는 부정에서 나온 세 개의 산물을 하사하셨다. 데이로스 가문은 그것들을 가보로 삼아 마법적인 연구를 하기로 결정했다. 이 모든 것은 형의 입김이 컸다. 신체는 결손되었더라도 형은 가주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끝없는 부정과 싸운 형은 뭔가가 이상했다. 이상할 정도로 왼팔을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손가락이 일부 잘려 나간 것을 제외하면 상처 하나 없었는데.
이자벨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왼팔을 못 움직이셨다고?’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그리 물으니 형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것이 왠지 모르게 섬뜩해서 다시 묻지 않았다. 그 대신 몰래 형의 개인 연구실을 살펴보았다. 나 또한 마법사인지라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다. 형의 공식 일정을 훤히 꿰고 있었기에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형의 연구실에 들어갔다. 옛날에는 본 적이 없었던 것들이 많았다.
───책상에 놓인, 손때가 탄 낯선 책 한 권을 보았다. 마법 서적일 줄 알았는데 마법과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주제였다.
───일종의 철학서일까?
───그것은 영혼에 관한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