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5화 신하(神下) (5)
공허한 그릇이나 다름없는 악신의 잔재에 어떤 영혼을 불어넣어야 하는가? [그링 아르카넘] 안에는 그야말로 무수한 넋이 보관되어 있었기에 베르덴의 선택지는 무궁무진했다.
하지만, 최선은 하나뿐이었다.
가공된 바르그논의 신경 다발───신의 파편은 베르덴의 신혈(神血)을 주요 기반으로 삼아 인간형의 신체(神體)로 완성되었으니.
신의 그릇을 채울 영혼 또한 신과 관련이 깊어야 마땅했다.
‘새벽녘의 기사, 엘로리스.’
그렇게 베르덴의 의지에 따라 샛별의 여신으로부터 힘을 받은 ‘신인’이자 ‘사도’의 영혼은 악신의 잔재에 깃들었다.
영혼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것.
죽은 몸에 영혼을 부여하여 명을 돌이키는 것.
이야말로 [그링 아르카넘]의 힘이었다.
죽을 때 발산하는 힘, 그리고 저장한 영혼을 소모품으로 활용해 상식 밖의 현상을 일으키는 [아니무스]와는 결이 달랐다.
영혼을 다루는 욕망 – 아니무스(Animus).
지식을 탐하는 세계 금서 – 영혼의 서 – 그링 아르카넘(Gring Arcanum).
영혼을 저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 부분이 있긴 하지만, 1대 전설과 3대 전설의 차이는 영혼을 이용하는 방식에 있었다.
전자가 영혼 자체를 자원으로 삼는다면, 후자는 마치 글귀로 새겨진 지식처럼 영혼을 기록하는 책인 셈이었다.
‘엘로리스의 영혼에 맞춰 악신의 잔재가 변화한 것은 순전히 그릇 자체가 신의 그것이기 때문이겠지. 본디 신성력은 형태가 정해져 있지 않고 마음에 따라 기적을 발현하니까. 엘로리스의 영혼이 다른 육신에 들어갔다면 외적인 변화는 희미했을 터.’
베르덴은 영혼을 직접 불어넣었던 손에 시선을 두었다.
‘……이 또한 부활인가.’
루아스교의 신인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부활의 기적이 베르덴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인과는 물론 다를지언정 틀림없는 부활의 한 형태였다.
심오하고, 또 묘했다.
먼 옛날 죽은 이를 되살리는 경험은 처음이라 생소함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링 아르카넘]에서 안식을 취하는 영혼들의 존재감.
그녀의 영혼이 손을 타고 흐르는 감각이 아직도 맴돌았다.
다만…… 베르덴이 감상에 빠진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었다.
‘[그링 아르카넘]에 보관된 영혼 대부분은 태고의 모험극에서 왔다.’
아르카디옴의 귀빈들과 하객들의 영혼은 보이지 않았다.
모험극에서 자신이 누군지 자각하고 호스트에게 반기를 든 열여섯 번째 귀빈, 루자크 팔테인은 적어도 책에 없었다.
아직도 호스트에게 저당잡혀 있거나 금서가 아닌 다른 형태로 귀빈에서 해방되었거나, 아마도 둘 중 하나겠지.
‘문제는 [그링 아르카넘] 안에 모험극에 존재하지 않은 영혼들도 있다는 건데.’
하나같이 눈에 익은 면면들이었다.
당연했다.
최근에 봤으니까.
전 이데라트 연맹장, 테리웬.
베르덴이 마렌 왕국 서쪽에서 운명의 추종자들의 요새를 급습했을 때 ‘직접’ 처단했던 존재들의 영혼이 금서에서 발견됐다.
파멸로 옛 왕의 권능을 파훼하여 놈들의 영혼이 현실에 머물지 못하게 했는데, 본래 가야 할 곳으로 가지 않고 어느샌가 [그링 아르카넘]으로 흘러 들어온 것이다.
의문이 깊어진다.
‘호스트, 넌 어떤 지식을 바라는 거지?’
이 [그링 아르카넘]의 소유권을 넘김으로써 대체 무엇을 기대하는가.
베르덴은 혼란 속에 화젯거리를 던지고 한 걸음 물러나 상황을 지켜보는 호스트의 저의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심해 속 심해에서 맞닥뜨렸던 놈의 본체를 떠올리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너는 정말로 그들과 다를까?}
일종의 시험이자 의심, 그리고 질문.
호스트는 초대 마도왕과 ‘당신’과 다른 길을 걸을 베르덴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혹은, 결국 그 둘과 같은 길을 걸어 절망하는 베르덴을 기대하는 걸지도 모른다.
‘굳이 의식할 것도 없지.’
베르덴은 생각을 정리한 듯 등을 돌려 대전당의 개인 연구실을 나섰다. ‘당신’과 초대 마도왕이 어떤 길을 걸었든 달라지는 건 없다.
그들이 바란 이상에 좌지우지될 정도로 베르덴의 이상은 얄팍하지 않기에.
선택은 오롯이 베르덴 자신에게 있다.
“슬슬 출발하지.”
“오냐.”
거대 망치 [마르쿠아브]를 등에 멘 그하룬이 몸을 일으켰다.
“솔직히 기대되긴 하는구나, 옛날 드워프 왕조의 마지막 왕이라니.”
그하룬은 베르덴과 함께 초월자 연합의 본부로 전이하여 지상 최악의 난쟁이 – 그림멜 그롬파르를 접견할 예정이었다.
무려 3세기에 가까운 삶을 살아온 그하룬조차도 드워프 왕조는 케케묵은 전설에서도 보기 힘든 오랜 과거였으니, 드워프로서 직접 얼굴을 보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할 만했다.
“정신 나간 난쟁이니 큰 기대는 하지 마라.”
“정신이 나갔으니 더 기대해야지.”
그하룬이 어깨를 풀었다.
“그래야 뒈지게 팰 수 있으니까.”
* * *
베르덴의 감지 능력으로도 명확히 꿰뚫어 볼 수 없는 하인랜디아의 어느 협곡.
쿠구구구구구.
자욱한 안개 너머에 있는 고대의 문이 개방되며 초월자 연합의 본거지가 보였다. 연합군 주둔지에선 훈련이 한창이었다.
“호오, 꽤 절경이군.”
죄인들의 황금 비고에서 초월자 연합에서 직접 사용할 여러 아티팩트를 감정하고 쓸 만한 마법 물품을 분류한 그하룬이었지만, 그가 이곳에 발을 들인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드래곤의 살아 있는 심장.
은하수처럼 빛나는 돌.
어두운 수정의 구체.
옛 왕이 봉인됐을 때 크세리온 제국 황성 망국의 죄인 – 카스티안과 황금의 죄인 – 마그누스가 빼돌린 보물들을 관찰하고, 어떻게 쓸지 고민하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베르덴도 이곳에서의 볼일을 마치면 그하룬과 같이 그것들을 확인할 생각이었다.
드라벤의 일생을 정독했기에 드래곤의 살아 있는 심장과 어두운 수정의 구체의 출처까지 알고 있기는 하지만…….
그중 은하수처럼 빛나는 돌에 대한 건 드라벤도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흑마법계 초월자의 통찰력으로 파악하지 못한, 일명 은하석(銀河石). 아칸드가 직접 보관을 명령한 만큼 어떤 내막이 감춰져 있을 터.’
베르덴이라면 드라벤이 당시에 보지 못한 비밀을 간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8위계급 초월자일 뿐만 아니라 신이기도 하므로.
어쨌든.
베르덴과 그하룬이 초월자 연합의 중추인 도시에 입성했다. 알파, 베타, 아드리안, 이자벨라 등은 각자 맡은 일이 있어 동행하지 않았다.
에온의 권역이 넓어지고, 권한 또한 강해진 만큼 그들의 역할이 지대했다.
감옥으로 가는 통로에서 초월자들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금방 다시 보는군. 세계 연합도 지휘해야 하고, 포로들도 봐야하고. 공간 이동이 없었으면 집에도 못 들어가겠는데?”
서약자 – 유리온이 베르덴에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그 옆에는 마스터 – 벤디에가 있었다.
“토벌군단 편성은 아마 앞으로 이틀이면 될 거다. 우리야 초월자 연합체를 구성하느라 진즉에 끝냈지만 다른 세력은 아니니까. 음, 솔직히 이틀도 좀 빠듯할 수도 있고.”
“알겠다. 더 늦어질 것 같으면 이야기하도록.”
“그러게 하지. 그런데…… 이쪽이 그 화산 지대의 전설적인 드워프인가? 네 스태프를 제작했던 절개를 지닌 망치?”
유리온은 그하룬에게 관심이 있어 보였다.
하기야 베르덴이 정체를 숨기고 화산 지대에서 아르나크 제국과 충돌했던 자리에 언령의 기사단도 있었으니.
베르덴이 직접 소개했다.
“그하룬이다.”
“나도 입이 있으니 대신 소개할 것 없다. 난쟁이, 그하룬이다.”
“명성은 익히 들었다. 화산 지대 최고의 명장이자 정통주의자라던데─”
“서약자, 네 무구 제작 의뢰는 안 받는다.”
유리온은 순간 눈을 살짝 크게 뜨고는 진지하게 물었다.
“이유가 뭐지?”
“넌 무구가 필요하지 않으니까. ”
유리온은 언령을 통해 힘을 발휘한다.
검과 갑옷 등 무구는 갖고 있으나 이것들은 보조 수단에 불과했다.
게다가 유리온의 장비는 오랜 시간 동안 언령을 불어넣어 강화한 유리온의 전용 무구이니, 이 시점에 다른 장비는 불필요했다.
“……과연 다르잖아. 드워프한테 이런 통찰력이 있다고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베르덴, 혹시 드워프 초월자 같은 거 아니지?”
“초월자는 인간의 전유물이다.”
“저는 어떻죠?”
벤디에가 드물게 호기심 짙은 얼굴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하룬이 덥수룩한 주황빛 수염을 쓸었다.
“설령 많은 무구를 다룰 수 있을지언정 결국 손은 두 개에 불과하다. 마스터, 너도 내 무구가 필요하지 않아 보이는군. 적어도 지금은 말이야. 그러니 의뢰는 거절하마.”
“그렇군요.”
벤디에가 손을 내밀었다.
“템플의 마스터, 벤디에입니다.”
“……? 그래.”
그하룬은 왜 느닷없이 자기 소개를 하는 건지 의아해하며 악수에 응했다.
벤디에는 표정에 큰 변화가 없었으나 눈빛만큼은 예사롭지 않았다. 뭐랄까. 유명인을 만난 사람과 같은 반응이었다.
무구 수집가라서 그런가?
베르덴이 말했다.
“이만 내려가지.”
“그러자고. 아, 그런데 우리도 동행해도 돼?”
“원하지 않다면 굳이 끼어들 생각은 없습니다.”
유리온과 벤디에는 직감적으로 그가 루네시카와 혼자서 대면하기를 바란다고 느꼈지만, 예상과 달리 베르덴은 고개를 저었다.
“너희가 있어도 상관은 없다. 하나 내려오면 더는 돌이킬 수 없으니 반드시 내게 협조해야 한다. 싫으면 밖에서 기다리고.”
“무슨 대단한 이야기를 하려는 모양인데. 그러면 더더욱 빠질 수 없지.”
“협조하겠다고 약속하죠. 이쪽입니다.”
벤디에가 앞장 서서 감옥 입구로 향했다. 그곳을 지키고 있는 템플의 제자들이 예를 갖추며 굳게 닫힌 문을 개방했다.
“나는 그 드워프를 만나러 가마.”
“접견이 끝나면 여기서 다시 만나지. 그하룬을 드워프 포로에게 안내해라.
“예!”
드워프는 왼쪽으로 향했다.
세 명의 초월자는 오른쪽으로 향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지하로 이어진 입구로 진입해 적막한 계단을 내려갔다.
* * *
베르덴의 마력이 깃든 마석을 품에서 끌어안고 잠에 든 루네시카 움찔거렸다. 천천히 눈을 떠 시야에 적응했다.
더 이상 춥지 않았다.
그녀는 의식을 잃은 사이 다른 감옥으로 이송된 것을 깨닫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고는 눈을 굴려서 마침내 찾아온 그들을 맞이했다.
끼이익.
세 명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베르덴은 아공간에서 네 개의 의자를 소환해 감옥 안에 배치했다. 세 개의 의자가 하나의 의자를 마주보는 구조였다.
“……오랜만이네, 베르덴. 히아레마르 내해 섬 이후로 처음인가?”
유니아가 주고 간 마석 덕에 심신이 좀 안정됐으나 여전히 기력은 약했다. 루네시카는 한가운데에 앉은 베르덴을 올려다봤다.
베르덴이 물었다.
“생각은 잘 정리했나?”
“닥치고 말해.”
루네시카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말해.”
“…….”
“말해, 네가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지.”
───먼저 해방의 언덕에서 기다리겠다.
드라벤과 루네시카만이 알고 있는 해방의 언덕이 어떻게 베르덴이 알고 있는가. 그걸 알아내기 위해서 루네시카는 죽을 수 없었다.
“말해……!”
“루네시카 안테르노아.”
베르덴이 단호히 속삭였다.
“주검의 영광은 내가 이어받았다.”
“뭐?”
루네시카는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전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재차 입술을 달싹였다.
“뭐??”
벤디에와 유리온도 같은 반응이었다. 그들은 멍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이상한 발언을 터뜨린 베르덴을 좌우에서 쳐다봤다.
이 자식…… 방금 뭐라고 했지?
* * *
대전당의 심층.
베르덴의 말대로 본디 엘로리스의 영혼과 육체가 완전한 조화를 이루려면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녀의 의식은 그보다 빠르게 회복했다.
스르륵.
엘로리스가 눈을 떴다.
‘여긴…… 어디지?’
샛별의 사도가 깨어났다.
밖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린다. 거리가 점차 가까워진다.
카인, 에네트, 유니아의 것이었지만 엘로리스가 그걸 알 턱이 없었다.
‘일단 제압해야겠어.’
엘로리스가 전투 태세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