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6화 신하(神下) (6)
블랙 아워 심층 복도에서 세 사람의 발소리가 잔잔히 울려 퍼졌다.
뒤통수에 깍지를 낀 유니아.
“와, 나름대로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악신의 잔재라는 괴물을 가져온 걸로도 모자라 그걸 사람으로 변하게 할 줄이야…… 선배는 무슨 깜짝 상자 같다니까? 앞으로 깜짝 선배라고 부를까?”
“그런 괴물은 처음 봤어. 현상도.”
하긴 보여 주는 것마다 경악하게 만드니 유니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카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에네트가 물었다.
“그렇게나 기괴한 괴물이었나요?”
과거 가르간트에서 광신자 노인을 우연히 마주해 신념이 꺾인 전적이 있는 에네트는 그 악신의 실험에 입회하지 못했다.
마스터는 제자에게 고유 신념을 설정시켜 성장에 도움을 주되, 그 신념이 꺾이면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금제를 걸어 기예를 앗아 가는 초월자.
현재 에네트는 에온에서의 활동과 아드리안과의 반복되는 대련으로 무너진 신념을 극복하고 마스터의 금제를 벗어났지만…… 정신이 망가진 흔적은 그렇게 간단히 사라지지 않는다.
더군다나 금제에 걸린 상태에서 보헤미른 마탑에 잡혀 비공식 실험까지 당했으니.
혹여라도 악신의 잔재가 상정 이상의 힘으로 정신계에 수작을 부리면 에네트가 위험할 가능성이 있음을 고려해, 베르덴은 그녀를 대전당의 지층에 배치했다.
“신경조직 같은 촉수들이 막 꾸물거리면서 인간 형태로 압축되는데, 뭐랄까, 음, 그, 그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혐오감이 장난 아니었어. 아, 말로 제대로 표현을 못 하겠네. 그런데 그것보다 압권인 게 선배의 책이 일으킨 현상이었고.”
유니아는 [그링 아르카넘]에서 느낀 수많은 시선에 정신계가 뒤집히는 것 같은 감각을 떠올리고는 다시 전율했다.
실험을 마무리한 후 이자벨라의 설명에 그것들의 정체를 들었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그게 영혼이었다니.”
“……우리처럼 영혼을 그렇게 직접적으로 목격한 건 인류 역사를 통틀어도 거의 없지 않을까.”
쌍둥이 마도사는 잘게 몸을 떨었다. 선배를 따라 소사이어티의 섬에서 나와 갖가지 경험을 쌓았지만, 악신의 잔재에 관한 실험은 다른 의미로, 독보적으로 인상적이었다.
아마 평생이 지나도 잊을 수 없으리라.
에네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악신과 영혼.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주제이기는 한데 대체 무슨 광경을 봤길래 이 둘이 이렇게나 겁을 먹, 아니 그건 또 아니구나.’
유니아와 카인은 압도당하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흥분을 느꼈다. 그들도 결국 신비를 탐구하며 미지를 추구하는 마법사였다.
“흐, 우리도 언젠가는 선배랑 비슷한 시야를 가질 수 있겠지?”
“우린 여전히 배울 게 많아.”
다름 아닌 베르덴의 후배를 자처하는 만큼 둘의 마법적 호기심과 향상심은 어떤 마법사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았다.
“크흠.”
에네트의 가벼운 헛기침이 두 사람을 상념에서 깨웠다.
“그나저나 엘로리스…… 라는 분은 정말로 신인인 걸까요? 그분께서 말씀하셨다지만, 믿음과는 별개로 머리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종교 분야는 저희도 문외한입니다.”
“뭐, 일어나 봐야 알겠지만 예사롭지 않은 인물인 건 확실해. 일단 예뻤어. 루아스교의 성녀와는 성격이 다른 신묘한…….”
유니아는 잠든 엘로리스의 모습을 상기하면서 그 감상을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마치 별 같았어.”
“별이라, 문학적이군요.”
“보면 무슨 느낌인지 알걸? 여기야.”
엘로리스가 있는 개인실에 도착했다.
유니아는 임무 수행자로서 엘로리스에 관한 모든 상황을 통제할 것이고, 카인과 에네트는 보조를 맡을 것이다.
에온은 기본적으로 임무 인원을 최소 3명으로 정해 두고 있다.
키잉.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문.
안으로 들어서자 침대 위에서 조용히 잠든 고대 성녀가 보였다.
“……확실히 별 같은 사람이네요.”
“그렇지?”
은빛이 은은히 감도는 금빛 머리카락.
순백의 피부.
냉정한 선이 살아 있는 이목구비.
어둑한 새벽에 우두커니 떠오른 샛별로 빚은 것 같은 미인이었다.
“다만 신관보다는 일국의 기사란 인상이 강하게 듭니다. ”
“그런가? 그럼 성기사일지도 모르겠네. 성녀라고 해서 다 신관은 아니니까. 당대의 성녀가 그런 것처럼 말이야.”
유니아는 엘로리스의 침대 앞에 놓여있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카인과 에네트를 부르기 전에 엘로리스에게 옷을 입혀 주며 몸 상태를 이미 확인했다. 재검진은 앞으로 세 시간 뒤였다.
‘그래도 새벽까지 기다리기는 번거로운데. 조금 더 빨리 일어나 주지 않으려나…… 음?’
엘로리스의 평온한 얼굴을 바라보던 유니아가 손을 뻗었다.
“머리카락이…….”
머리카락 딱 한 올이 볼을 가로지르고 있어 눈에 띄었다. 눕히면서 잘 정돈한 것 같았는데 미처 못 본 모양이었다.
그렇게 얼굴에 손이 닿을 무렵 엘로리스와 눈이 마주쳤다.
“어?”
왜 눈을 뜨고 있지?
몽유병?
쿵!
의자가 뒤로 넘어졌다.
순식간에 손목을 잡혀 버린 유니아가 무게중심을 잃었다. 이불로 뒤덮인 시야.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하나, 그녀는 제국의 전 워 로드인 오스가르에게 오랫동안 가르침을 받은 데다가 베르덴에게 실전적인 훈련까지 받은 마도사다.
본능적인 반응 속도는 이미 경지에 달했다.
<비행>
유니아는 상체를 뒤로 빼는 대신 오히려 이불을 향해 몸을 내던져서 가까스로 엘로리스의 관절기를 피했지만, 이불 너머에서 가해진 무릎까지는 막기가 어려웠다.
“큽……!”
명치를 찍힌 유니아가 신음을 내뱉었다. 이불을 사이에 두고 서로 뒤엉키려던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침대 옆 벽을 박찼다.
‘급소를 타격했는데 제압이 전혀 안 됐어.’
엘로리스가 찰나에 세 명을 가늠했다.
‘고도의 훈련을 받은 몸놀림. 일개 병사는 절대 아니야. 다른 둘도 마찬가지일지도. 가급적이면 육탄전 없이 제압하고 싶었는데.’
이곳은 헤르사온 왕국일까?
그녀의 마지막 기억은 악신의 잔재를 가공한 뒤, 샛별의 잔당을 이끌고 달빛의 여신을 믿는 헤르사온 왕국의 수도로 향하던 시간에서 끊겨 있었다.
일단 인질을 한 명 잡아서 상황을 파악하려는 데 실패한 엘로리스는 맨발이 서늘한 바닥에 닿자마자 가속했다.
팔 위로 작렬하는 발차기.
터엉!
에네트가 충격을 흘리지 못하고 공중에 떴다.
카인이 있는 방향으로.
갑자기 에네트를 받은 카인이 뒤로 밀려난 끝에 벽면에 등이 닿았다.
“괜찮…….”
“앞!”
카인이 고개를 틀었다. 매서운 정권이 턱이 있던 자리를 스쳐 지나갔고, 둘 사이에 낀 에네트가 기를 집중해 손바닥을 쳐올렸다.
‘기를 깨우친 자!’
엘로리스는 다른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밀어내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 회전하며 떠올랐다. 풍압과 함께 들이닥치는 뒤꿈치.
쩌엉!
에네트가 넘어졌다. 곧바로 멱살을 잡힌 카인이 옆으로 던져졌다. 그 순간 마력이 엘로리스의 감각을 자극했다.
‘게다가 마법사까지.’
아직 몸의 어색함이 가시지 않은 터라 신성력을 원활하게 끌어낼 수 없다. 그러니 상대가 방심했을 때 속전속결로 끝내야 했다.
엘로리스는 멈추지 않고 카인을 가림막으로 삼아 돌진했다. 유니아를 노린 수였으나, 카인은 능숙하게 <비행>으로 신체를 제어했다.
“옷도 입혀 줬는데, 날 때려?”
유니아가 손짓했다.
<폭풍>
허공에서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눈을 부릅뜬 엘로리스가 기류에 저항했다.
‘무영창……?! 그 전설의?’
엘로리스는 운명의 개념이 탄생하기 이전 시대의 인물이다. 영창 마법사 사이에서 무영창이란 전설이 존재한다는 것만 알 뿐 마력회로와 위계 마법 체계에 대해 완전히 무지했다.
다만 위계 마법을 보자 머릿속을 헤매는 안개가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눈을 보니 몽유병은 아닌 것 같고. 혹시 자기가 붙잡혔다고 생각하는 건가? 엘로리스? 이봐요, 선배 몰라? 베르덴 선배!”
“……?”
엘로리스가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르카디옴에서는 가명을 써야 했으니까. 그녀가 알고 있는 베르덴은 애셔라는 이름을 내세운 악마의 신이었다.
“아무래도 못 알아듣는 것 같지?”
“어떻게 할 거야.”
“제압해야지. 설득했는데도 이런 거니까 선배도 이해할 거야. ”
손수 옷도 입혀 줬건만, 유니아는 명치 맞은 값은 제대로 갚아 주겠다는 듯이 호전적인 미소를 지으며 공간 가방에서 [울티마]를 꺼냈다.
턱을 당긴 카인도 마검 [크레티마]를 허리춤에서 뽑아 들었다.
물론 크게 다치면 안 되니 검집째로 쥐었다.
“……퉷.”
에네트도 입가에 고인 피를 뱉으며 검집에 넣은 대검을 늘어뜨렸다.
마력과 기.
유니아와 카인은 대마력까지 활성화해 마력을 거대한 입자로 만들었고, 에네트에게선 맹용이라는 이명에 걸맞은 기세가 아른거렸다.
“…….”
엘로리스는 완벽하게 포위당했음에도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새로 얻은 단서들을 토대로 상황 파악에 몰두했다.
‘칼날을 전혀 내보이지 않고 있어. 이상하리만치 적의가 희미해. 무영창 마법사. 기를 깨우친 자. 셋 다 보기 드문 실력자들이야. 거기다가 쌍둥이? 헤르사온 왕국에 쌍둥이 마법사가 있다고는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그러고 보니 언어도 생소해. 소통은 왜 되는 거야. 무엇보다…….’
새벽녘의 기사가 대마력에 주목했다.
‘저 마력, 낯설지 않아.’
엘로리스는 흐릿한 기억 속에서 인간의 형체를 떠올렸다. 그 옆에는 골렘……? 그래, 손바닥만 한 작고 귀여운 골렘이 있던 것 같았다.
언제 봤을까.
기억의 절벽에서 허우적거리던 그녀의 초점이 곧 선명해졌다.
‘애셔.’
머릿속에서 번개가 쳤다.
복수심만으로 헤르사온 왕국 수도를 붕괴시킨 뒤 그녀는 죽음을 맞이했다. 샛별의 종교가 완전히 끝난 역사적 순간이었다. 하나, 그녀는 안식을 얻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영혼을 이용당했다.
그렇게 거짓된 세계에서 똑같은 역사를 반복하던 도중에…… 신을 만났다.
미래에서 온 신.
버려진 자들의 신.
그녀의 남편과 같은 이름인 하드라스라는 악마가 숭배한다고 들은 신.
기억났다.
‘그렇구나, 여기는…….’
엘로리스는 마침내 모든 걸 이해했다.
쿵!
엘로리스가 틈을 보이자 유니아, 카인, 에네트가 거리를 좁혔다. 스태프와 검집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궤도로 앞뒤에서 굽이쳤다.
그 순간 ‘잿빛’이 터졌다.
카각, 카가각.
엘로리스는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검 하나만으로 세 사람의 일격을 솜씨 좋게 받아 냈다. 대마력 입자는 어느새 양단되어 흩어졌다.
그 신성 검술의 묘리에 에네트가 숨을 삼켰다.
악신들이 몰락한 시대에서 누명을 쓴 채 세상에 쫓기면서도 하나의 나라와 하나의 종교를 전복시키고 무너뜨린 여인이 거기에 있었다.
“제가…… 너무 늦게 깨닫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실례를 범했습니다.”
엘로리스가 점차 신성력을 거두었다. 검과 함께 저항심도 이내 사라졌다. 유니아 일행은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신성함에 멈칫했다.
아주 기묘했다.
왠지 모르게 그 신성한 분위기는 바로 베르덴을 연상케 했기에.
“인사가 늦었습니다.”
엘로리스가 저항하지 않겠다는 듯이 가슴께에 천천히 손을 얹었다.
“저는 새벽녘의 기사, 엘로리스.”
감탄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샛별의 사도.
“여기가…… 그분의 세상이군요.”
엘로리스는 악마의 신의 은혜로 머나먼 현실에서 부활했음을 깨달았다.
* * *
초월자 연합 본거지, 그 감옥.
“주검의 영광은 내가 이어받았다.”
베르덴의 선언은 루네시카만이 아니라 벤디에와 유리온을 혼란하게 했다. 정확히 들었으나, 제 귀를 의심해야 했다.
해당 문장은 그냥 납득하고 넘어갈 내용 따위가 아니었다.
“신성, 그게 무슨 의미죠?”
“가, 갑자기 뭔 헛소리야?”
베르덴은 두 사람의 의문을 무시하고 루네시카만 바라봤다.
“해방의 언덕에서 기다리겠다, 그렇게 전달하면 너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이해할 거라고 드라벤이 그러던데.”
“…….”
“어떻게 생각하지?”
루네시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베르덴을 노려봤다.
사고의 흐름이 끊기는 것 같다.
꿈인가? 악몽인가?
그도 그럴 것이 베르덴과 드라벤이 그런 대화를 나눌 만한 시간이 일절 없었으니까. 그야말로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베르덴이 해방의 언덕을 알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며 진실.
털썩.
루네시카는 벽에 기대면서 일어나 힘겹게 의자에 몸을 실었다. 초월자들을, 베르덴을 정면으로 마주한 그녀의 눈은 여전히 의심으로 가득했다.
“그걸로는, 부족해.”
벤디에와 유리온은 전과 달리 고분고분하면서도 차분하게 대답하는 루네시카의 모습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루네시카가 입술을 짓씹었다.
“다른 증거가 없으면…… 믿을 수 없어.”
“그런가.”
베르덴이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마도 <명운>
검보랏빛 쇠사슬이 현현하여 베르덴의 건틀릿을 감쌌다. 순결하며 찬란한 죽음의 기운이 루네시카가 갇힌 공간에 넘실거렸다.
“그럼 이제 믿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