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2화 동대륙: 타락의 땅 (1)
남쪽으로 향한 두 개의 토벌군단이 로니아 왕국과 하부 수인 부족이 지배하는, 아니 지배했던 땅에 발을 디뎠다.
특정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불길함이 스쳐 지나갔다.
마음을 배신하면 언데드로 타락하리…….
로니아 국왕의 계명 심판을 위해 동대륙 남부에서 특수 작전을 벌인 적이 있었던 카인에겐 다소 익숙한 분위기였다.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심판 대상인 로니아 국왕은 성자에게 살해당했고, 생존자들이 타락하지 않도록 난생처음으로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했어야 했으므로.
카인은 그 책임감을 기억한다.
자신의 잘못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그러한 상황임에도 혼란을 조성하고 소란을 야기하는 사람들 탓에 정신이 차츰 마모돼 가는 시간을 기억한다.
“카인?”
“조금 긴장돼서.”
카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짧게 고개를 저었다. 평소 차분한 모습 그대로였다. 굳이 지적하자면 평소보다 아주 조금 굳어 있었다.
“긴장? 전쟁 한두 번 해 봐?”
유니아가 웃으며 그의 어깨를 세게 두드렸다.
“야, 무서우면 내 뒤에 있어. 누나가 전부 날려 버려 줄 테니까.”
“시끄러워, 유니아.”
“내 비장의 마법이면 사령관이라는 언데드 놈들도 척추가 서늘할걸?”
현자님들의 오랜 가르침에 이어 베르덴 선배로부터 체술과 마법, 심지어는 대마력까지 전수받은 유니아는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다.
물론 카인도 유니아와 같은 교육 과정을 거쳤지만 두 사람이 각각 개척한 마도의 특성은 성격만큼이나 판이하게 달랐다.
유니아가 모든 역량을 쏟아붓는다면 그 순간만큼은 6위계의 극점을 뛰어넘는다.
이는 선배가 인정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유니아도 긴장감을 완전히 숨기지 못하고 있다.
입꼬리가 약간 경직된 걸 보면.
주인 없는 땅에서의 경쟁전.
블랙 아워 숙청.
보헤미른 마탑과의 전쟁.
특히 보헤미른 마탑 소속 장로들과의 마법전에서는 목숨이 날아갈 뻔했다. 한데 그때의 소음보다 지금의 정적이 훨씬 더 무거웠다.
‘크세리온 제국과의 전쟁은 우리가 겪은 그 어떤 분쟁과도 규모와 명분이 차원이 다르다.’
일거에 7위계급 초월자 셋이 합동해서 구축한 초위 마법과 수만 마리의 언데드를 분쇄해 버린 선배조차도 한시도 마음을 놓지 않고 있다.
필시 이번 전장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일 것이 자명했다.
카인은 지상을 주시하며 비행정의 난간에 양팔을 걸쳤다.
“유니아.”
“왜?”
“방심하지 마.”
“뭐래.”
유니아가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사방을 습관처럼 관찰했다. 소사이어티 섬을 떠나, 동굴 속 고블린처럼 경험도 없이 기세만 등등하던 시절은 이미 오래전에 지났다.
“너도 조심해.”
……크흠.
상황이 상황인 터라 진지하게 충고했더니 상당히 어색하다.
쌍둥이라고 해도 형제는 형제.
오히려 가족이기에 티격태격하지 않고 좋은 말로 당부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 말로 하지 않아도 마음은 전해지기에.
서약자와 교황의 질서 아래 남부 제1토벌군단과 제2토벌군단이 남하한다.
옛 왕이 무려 성층권에서 낙하해 델하룬 토벌군단 주둔지를 공습했고.
마울러가 이에 맞서 시간을 벌었고.
수왕과 다크워튼 마탑주가 공간 이동으로 난입해 대응했으며.
성창과 함께 등장한 베르덴이 직접 델하룬 사문을 폐쇄했으나───옛 왕의 계략 전부를 차단하지 못해 대륙 전역으로 막대한 규모의 언데드 군단이 흩어지게 되었다는 전언(傳言).
그런 소식에도 동대륙 남부의 토벌군단은 멈추지 않고 나아간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서약자는 본 전략을 중시했다.
두 개의 사문 중 먼저 생명체를 타락시키는 사문을 공략하려면 여러 요지를 점령하거나 봉쇄해야 했는데, 중요도로 따지면 그중 다섯 개가 손꼽힌다.
노바르 보루.
갈기 구릉.
하스토우 요새.
브레필드.
누런 엄니 성채.
서약자──유리온 하이로스가 머릿속으로 반드시 장악해야 할 장소들을 곱씹다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하나가 틀어질 때마다 사문의 공략 가능성이 이할 감소하고, 세 개 이상 틀어지면 사실상 패배라니. 거참 아무리 생각해도 불합리하기 짝이 없구만.”
노바르 보루는 로니아 왕국의 언덕 성채로, 연합의 병력과 병기가 경유하는 보급로이자 두 번째 사문으로 향하는 행군로를 지키는 핵심 방어 거점이다.
만약 보루를 확보하지 못하면 토벌군단들이 전략을 실행하는 데 크나큰 차질이 생긴다.
갈기 구릉은 두 번째 사문으로 이동할 때 지나가야 할 진군 지역이며, 크세리온 제국군과 대규모 교전을 치를 가능성이 극도로 높은 곳.
갈기 구릉의 북동쪽에는 노바르 보루가 있다. 또한, 갈기 구릉의 동쪽을 점거당하면 토벌군단들의 측면이 훤히 노출된다.
하스토우 요새는 동대륙 남부 분쟁 지대에서 가장 큰 두 개의 성채 중 하나다. 로니아 왕국의 군사 시설이지만, 사실상 도시나 다름없다.
동대륙 남부에서 토벌군단들이 주둔지로 삼기에는 이곳만 한 곳이 없다.
브레필드는 로니아 왕국의 대도시로, 이미 적의 손에 들어갔을 테니 크세리온 제국의 거점인 셈. 이 땅에서는 인구가 많은 도시일수록 위험도는 극도로 높아진다.
타락자들은 인간과 수인을 비롯한 생명체로 제단을 쌓아 진화하니까. 브레필드의 타락자들이 분쟁 지대로 다가오는 걸 봉쇄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사문 공략이 지연될 수밖에 없다.
누런 엄니 성채는 하스토우 요새와 함께 분쟁 지대 최대 규모의 성채로 꼽힌다.
하부 수인 부족의 근거지로, 첫 번째 사문과 인접해 있다. 브레필드처럼 타락자들의 주둔지로 예상되므로 봉쇄하거나 완전 점령이 필요하다.
유리온이 조용히 속삭였다.
“만약 공략 실패하면 창피해서 얼굴 어떻게 들고 다니지……?”
“반드시 승리한다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군단이 막 집결했을 때 그렇게 연설까지 해 놓고.”
“당연히 연설이니까 그렇게 말했지. 자칫 망할지도 모른다고 우는소리 할 수도 없잖아? 사실만 지껄이면 베르덴이 애써 높인 사기만 팍팍 떨어지지.”
“그렇겠죠. 아무튼 그런 걱정이라면 굳이 안 해도 될 겁니다. 토벌군단의 패배란 저희를 포함해 완전한 전멸을 의미할 테니까요.”
마스터──벤디에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유리온을 곁눈질했다.
“혹시 패배하되 목숨은 건질 생각입니까? 아니면 타락을……?”
“하하하하, 그럴 리가 있나. 애들 다 죽여 놓고 혼자 도망치면 쪽팔려서 가족 얼굴 못 봐. 게다가 나 자신을 배신해 타락하는 건, 으, 당연히 말도 안 되고. 차라리 멋지게 죽는 게 낫지. 아내하고 애 놔두고 죽을 생각은 아주 조금도 없지만.”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승리할 자신은 있어도 앞으로의 전황이 꽤 불확실하긴 해.”
유리온이 군단장들을 중심으로 전진하는 토벌군을 눈에 담았다.
“이 넓은 땅에 비해서 규모가 많이 작긴 하니까.”
“이미 회의할 때 제기된 문제 중 하나죠.”
현재 제1토벌군단과 제2토벌군단의 총 병력은 약 13만 명에 달한다.
에스티리아 왕국, 리비안트 공국, 벨디른 공화국의 동대륙 중앙 3국.
루아스 교국.
화산섬의 마탑.
다크워튼 마탑.
템플.
하이랜디아.
동대륙 3국의 인구만 고려해도 수십만 명의 군사는 우습다. 현 마법의 시대는 곧 인류의 시대. 인류 역사상 최대의 번영기다.
평화의 시대에서 모든 인간종의 숫자가 증가했지만 인간은 특히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런데, 고작 13만 명.
아드리안이 지휘하는 테르네티아 연방 토벌군단에 비하면 턱없이, 턱없이 적은 병력이다.
타락의 땅에서는 규모가 큰 것은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13만이란 숫자는 마법과 기적으로 정신이 급속도로 무너지지 않도록 보호할 수 있는 최대 인원을 의미했다.
그런 이유로 타락의 사문이 폐쇄되지 않는 한 세계 연합은 현재 정해진 규모 이상의 인적 지원을 파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저희 제1토벌군단과 제2토벌군단이 가장 많은 병기를 지원받지 않았습니까. 다음이 펜드렌호 토벌군단이고요.”
“그렇긴 한데…….”
다만 인원이 부족하다고 토벌군단들의 전력이 약한 건 절대 아니었다.
현대 병기.
초월자들을 제외하더라도 부족한 규모를 대체할 수 있는 인공 아티팩트, 다양한 매직 아이템, 에온의 골렘 부대 등이 있다.
단언컨대 이 이상 군단을 효율적으로 최적화하기는 불가능할 터였다.
“아무래도 그런 병기는 부차적인 요소로 생각돼서 말이야. 결국 전쟁은 우리가 하는 거잖아?”
“구시대적인 관념입니다, 유리온. 하나, 틀린 말도 아닙니다. 무기를 쓰는 건 우리니까요.”
벤디에는 자신의 아공간 무기고에 보관된 무기들을 의식했다.
“무기를 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 또한.”
적지를 얼마나 장악하는가.
그것이 공략의 성패를 가름하리라.
* * *
하스토우 요새로 이동하는 토벌군단들에서 일부가 떨어져 나왔다.
보급로를 맡은 부대였다.
그중에서 핵심지인 노바르 보루를 점령 및 수호할 전력이 대부분이었다.
루아스 교국 – 성위(聖爲)의 대주교, 조제프.
리비안트 공국 – 라비슈른 후작과 로든마이어 백작.
에스티리아 왕국 – 테리트 백작.
화산섬의 마탑 원로회 – 멜코니 블라우드.
다크워튼 마탑 장로 – 즈하엘.
벨디른 공화국 – 에브락 의원과 바로바 의원.
템플 – 대제자, 키셰나.
고위급 모험가 다수.
각 지휘자를 필두로 약 15,000명이 노바르 보루로 향했다. 보루와 주변의 감시탑 장악 그리고 갈기 구릉 정찰을 전담하기에 적합한 숫자였다.
여러 비행정과 사람의 행렬이 멀어진다.
토벌군단 본대는 그들과 다른 방향으로 계속해서 남하했다.
피와 고통으로 얼룩진 땅.
마침내 분쟁 지대에 도착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찰대가 도시를 연상케 하는 커다란 성채가 우뚝 서 있는 걸 발견했다.
칼리아가 드레드미어에 탄 채 보고했다.
“하스토우 요새. 확인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교황──로마누스가 말했다.
“죽음의 기운이 희미하게 감지되는군요. 언데드가 있으나, 그 숫자는 미미합니다. 개체의 강함도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예측과 다르잖아. 우리가 저 요새를 노릴 거라는 건 저쪽에서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수상하군.”
적에게 요충지를 내준다?
함정이 틀림없다.
그런데 로마누스는 언데드적인 함정이 없다고 보고 있으니, 이럴 때는 전문가의 의견에 무게를 싣는 편이 합리적이다.
“척후를 보내지. 레오나, 연합에 통신 연결해.”
“예, 폐하.”
유리온의 명령을 받은 고위 마도사들이 비행정에서 낙하했다. 현재 시가지 탐색에서 가장 뛰어난 세력은 에온이다.
* * *
하스토우 요새는 그 어떤 방위 마법진도 기동되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대공(對空) 체계도 전혀 없었다.
“……고요하네요, 현자님.”
유니아는 분명 많은 사람이 거주했을 것이 자명한 대로를 마주했다.
하스토우 요새는 로니아 왕국군만이 아니라 병사의 가족들도 이주해서 같이 지냈다고 들었다. 그 정도로 방어가 견고하다는 뜻.
괜히 이곳 분쟁 지대에서 로니아 왕국의 최대 전략 요새라고 불렸던 게 아니었다.
하지만……지금은 생기가 없었다.
과거의 흔적만이 존재할 뿐.
두 개의 사문이 개방된 후 옛 왕이 언데드 군단을 물렸을 때 카인은 다른 위상들과 함께 동대륙 남부의 생존자들을 피난시켰다.
다른 세력들의 도움을 받아 대륙과 바다를 통해서 말이다.
그 과정에서 군림자──라테온은 육로, 그러니까 지금 막 토벌군단이 지나온 경로를 이용했는데, 당시 하스토우 요새도 거쳐 갔다.
기괴한 언데드의 울음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지고 있어 입성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생존자들의 구조가 우선이기도 했고.
동대륙 남부는 작은 땅이 아니다.
옛 왕이 명확한 날짜에 전령을 보내겠다고 했으며 그때까지 죽음은 없다고 했지만,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타락자들이 언제 또다시 공격해 올지 몰라 시간이 촉박했다. 그때 발견하지 못한 생존자가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 사람들은…….’
전부 고통스럽게 죽었을까.
언데드로 타락했을까.
운 좋게 어딘가에서 연명하고 있을까.
카인은 그 참상과 현장을 잊지 못해 쉽게 생각을 떨쳐 낼 수 없었다.
힘의 현자──오스가르가 말했다.
“별다른 위기감은 느껴지지 않는다만. 음, 샅샅이 확인해 봐야겠구나. 식별 골렘 기동. 명령어는 유기(有機) 조직을 찾아라.”
“넵. 유기 조직을 찾아라.”
유니아와 카인, 그리고 에온의 마법사들이 일제히 식별 골렘을 띄웠다.
구체형의 그것들이 푸른 마력을 빛내며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열두 번째 위상의 알데반은 마법사단을 휘하에 둔 채 상공에서 이변이 발생하지 않는지, 오스가르 일행 주변을 주시하는 중이었다.
파앗!
식별 골렘이 붉게 반응한 것은 불과 십수 초 뒤의 일이었다.
위치는 바로 옆 건물.
신속하게 건물에 돌입한 그들을 멈칫하게 만든 건 하나의 장식물이었다. 유기체 조직으로 짜인 끔찍한 조형물.
“사람이군.”
인체를 해부해서 신경줄과 장기들을 바싹 말리듯 부패시키고, 신경줄로 뼈들을 엮은 다음 그 위에 말린 장기를 걸쳐 놓았다.
흡사 시체로 만들어진 허수아비였다.
몇 번이고 사선을 넘은 마법사들도 정신적 충격을 느꼈다. 그들이 맞섰던 적들 가운데 시신을 이리 다룬 괴물은 없었다.
“카인, 타락자가 산 자들로 시체 제단을 세운다고 했었지. 이게 그 제단이느냐?”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다르다라.”
오스가르가 천천히 수염을 쓸었다.
탐색에 몰두하고 있는 식별 골렘 부대가 연이어 신호를 보냈다.
근처에 있는 곳부터 확인했다. 시체 허수바이가 또 있었다. 다른 건물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허수아비의 재료가 된 시체가 각양각색이라는 것.
남자, 여자, 노인, 중년, 청년, 아이…… 모든 성별과 세대가 소재로 쓰였다.
그러다 하스토우 요새의 가장자리 첨탑 중 하나에 올랐다. 첨탑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체 허수아비가 ‘설치’되어 있었다.
[살려…… 주세요…… 살려…….]
다양한 사람의 부위로 얽히고설킨 인간 조형물이 어둠 속에서 흐느낀다. 그것은, 그것은 신경, 뼈, 장기 등을 내보이고 있는 ‘시체 거미’였다.
[주세요…… 살려…… 주세요…….]
그 언데드는 하염없이 살려 달라는 말만 오르골처럼 되풀이했다. 성인의 머리통에 꿰매어진 앳된 하관이 연신 비틀렸다.
사람인 이상 감히 눈 뜨고 못 볼 광경이었다.
속에서 신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 언데드의 정신은 인간의 것. 역시 제단 따위가 아니구나.”
오스가르는 그걸 보고 나서야 허수아비들의 용도를 이해했다.
“심리전이다.”
“심리전이요?”
“감정을 격앙시키든 사기를 저하시키든 연합군을 동요시키기 위한 간계. 즉…….”
스태프를 붙잡고 있는 오스가르의 손등에 힘줄이 불거졌다.
“우리를 향한 조롱이지.”
크세리온 제국은 하스토우 요새를 미리 장악해서 연합군과 교전을 치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고 건물마다 시체 허수아비를 만들어 두었다.
무엇을 하든 간에 연합군 또한 희생된 사람들처럼 허수아비가 되어 크세리온 제국의 상징물이 될 거라는 비웃음 섞인 도발인 것이다.
놈들의 계략은 성공이나 다름없었다.
잔혹한 허수아비를 직면한 에온의 마법사들은 순식간에 머리가 뜨거워졌다. 그들 모두가 에온의 강령(綱領)인 신성의 3계명을 따르기에.
유니아의 표정이 거칠게 구겨졌다.
[살려…… 주세요…….]
지성체의 존엄은 어디에 있는가?
콰아아앙!
카인이 마검을 휘둘러서 시체 거미 조형물을 아예 부숴 버렸다. 언데드가 토벌됐다. 그 안에 갇힌 인간의 정신이 해방되었다.
미처 구하지 못한 남부 생존자들이 죄다 이런 꼴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 그 감정의 발로였다.
오스가르가 카인의 어깨를 토닥이며 통신 장치를 켰다.
“하스토우 요새. 위험은 전무. 빌어먹을 장난질을 제외하고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없네. 추가 수색대를 요청하지.”
토벌군단이 하스토우 요새 전체를 수색했지만 나온 것은 시체 허수아비뿐이었다. 거기서 언데드 구조물이 238개에 달했다.
최소 만 단위의 인체가 고작 연합군을 조롱하는 데 쓰였음이 확인됐다.
장례는 교황이 직접 치러 주었다.
그렇게 동대륙 남부 토벌군단들은 피 흘리지 않고 하스토우 요새를 점령했다.
* * *
무수한 흑염의 창이 상공에서 쇄도, 언데드 무리를 지워 버렸다. 지형지물은 멀쩡하되 오직 죽음의 기운만 소실되었다.
‘넓게 흩어져 있으니 귀찮군.’
베르덴은 델하룬에서 남하해 에스티리아 왕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암흑가 로아프라에 있는 대륙 간 공간 이동진을 사용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동하는 도중에 포착한 언데드 무리는 남김없이 처리했다.
현재 위치는 미들로스 자치령.
아드리안과 처음 만났으며, 아드리안이라는 이름의 복수 동행자가 생겼던 지역이었다.
쿵───! 쿵───!
수왕 안티아스는 <비행>하는 베르덴보다 느리지만 우월한 각력으로 산맥과 산맥을 뛰어넘으며 뒤따르고 있었다.
알파가 통신을 보낸 건 그때였다.
“무슨 일이지?”
───[수인 대부족. 급습. 발굽 성루 파괴. 흉수는 불명. 성직자 파견. 언데드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언데드로 인한 인명 피해는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긴다. 죽음의 기운. 빛의 성직자는 이를 찾아내는 데 특화되어 있다.
‘그런데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건…….’
베르덴이 급정지했다. 습격자는 크세리온 제국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세계 연합이 경계하는 강자 중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하필이면 수인 대부족에 피해를 안겼다는 점에서 더더욱.
쿵!
통신을 엿들은 안티아스가 지면에 착지하곤 씨익 웃었다.
“녀석이군.”
조제프 대주교를 손수 살해하고, 도시 골드힐을 파괴한 뒤 조제프 대주교를 부활시킨 성녀와 접전을 벌인 고대의 수인.
루아스교는 죽었다고 확신했지만 시체는 발견되지 않아 사망을 확정 짓지 못한…… 지상 최악의 난쟁이와 같은 시대에 군림했던 수왕.
대학살의 수인이 모습을 드러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