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7화 전환점 (3)
먼저 의식을 회복한 이자벨라와 프리발트가 구출한 사람은 세 명이었다.
세르파니아.
브라오닉 스트롬.
자일론 마인.
차례대로 루아스교의 추기경, 이데라트 연맹국의 최고 외교관, 라리안 마탑주였다. 하나하나가 국제 사회의 거물이었다.
‘탈출했을 때의 충격이 영혼에 넓게 퍼졌어. 깊지는 않아서 검성처럼 후유증을 겪지는 않겠지만 당장 눈을 뜨긴 어렵겠지.’
조금이나마 안전한 장소를 물색하고 있지만 마경에 그런 친절한 장소가 있을 리가. 어쩔 수 없이 은신처를 직접 마련하는 수밖에 없다.
‘여기보다 나은 지형은 없겠지.’
지배의 선고 [엘데론]으로 장식된 왼손을 사선으로 뻗었다.
마도 <침식>
숲에 가려진 절벽의 중간 부분이 일부 허물어지며 작은 공동이 구축됐다.
지상과 어느 정도 이격을 둔 높이.
이자벨라는 가볍게 두 명을 붙잡은 채 <비행>으로 낮게 떠올라 그 안에 안착했다. 프리발트도 자일론을 어깨에 메고 단숨에 절벽을 박차고 올라 곧장 그녀의 뒤를 따랐다.
“사람들이 의식을 회복할 때까지만 여기 머물도록 하죠.”
“……음.”
세 명을 일렬로 눕히고는 절벽 동굴의 입구를 거의 폐쇄했다. 벽의 두께를 키웠다.
절벽을 통째로 날려 버릴 수 있는 괴물이 도사리고 있을 테지만, 그래도 대충 방치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판단했다.
‘그다음 은폐를…….’
에온에서 만든 휴대용 마법진을 전개───침식의 마도로 개조시켰다. 확장과 변형이 일어나며 마법진의 기틀부터 작성할 필요 없이 머릿속에 저장한 형상이 재현되기 시작했다.
가주에게서 배운 은폐형 마법진이 완성돼 그들의 기척을 덮었고.
마력이 동굴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고 내부에서 순환할 수 있게 손을 쓰고 나서야 안심한 이자벨라가 마석등을 켰다.
후웅.
약한 불빛이 어둠을 밀어냈다.
대충 아무 데나 앉았다.
프리발트는 아직 간헐적인 두통에 시달리고 있는지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었다. 도와주고 싶긴 하나, 저건 연금술로 해결될 증상이 아니었다.
“육체가 아닌 영역에서 오는 통증이라 포션으로는 증상을 완화시킬 수 없어요.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알아서 진정될 테니 견뎌요.”
“…….”
프리발트는 슬그머니 꺼내려던 최상급 포션을 다시 공간 가방에 집어넣었다.
숨소리만 감도는 적막감이 내려앉았다.
미간의 골이 깊어졌다.
식은땀이 떨어졌다.
이명이 들릴 정도로 두개골이 울리는 듯한 혼란을 감내하며 그가 난잡하게 흩어져 버린 기억의 조각들을 끌어모으는 데 사력을 다했다.
“적룡이…… 마경의 생물들과 함께 습격한 것까진 떠올렸다. 그 직후에 마의 공포가 달려들어서 적룡과 정면으로 충돌한 것도.”
프리발트가 물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지?”
“저희가 당초에 각오했던 일이요.”
이자벨라는 그가 기억을 회복할 수 있도록 과거의 흐름을 이끌어 주었다.
“전쟁이 있었죠.”
* * *
“사르…… 칸드라……!!!!!!!!!!”
지상에서 솟구친 갑옷 인간을 보며 사르칸드라가 반응했다. 세로로 갈라진 특유의 동공에 깃든 감정은 다름 아닌 의아함이었다.
[?]
이 하등 생물은 뭔데 증오를 품고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짖는가.
쩌엉───────!
마의 공포가 내려친 권격이 사르칸드라의 비늘을 강타했다. 충격으로 발생한 대기의 파동이 시각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사르칸드라가 추락했다.
쿠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
추락 지점에서 발생한 지진이 발밑을 흔들었다.
마의 공포가 거칠게 착지했다.
그대로 거창을 뽑아들고서 횡을 그었다. 압도적인 완력이 광풍을 일으켰다. 그에 스치기라도 한 마경의 생물체들이 산산조각 났다.
“드디…… 어…… 드디어, 찾았다……!!!!”
마의 공포는 평소의 과묵한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광기 어린 환희와 증오로 얽힌 감정을 주체하지 않고 토해 냈다.
“찢어…… 죽여, 주마……!!!!”
단신으로 생물의 장벽을 돌파한 그가 쏘아져 나가 숲을 초토화했다. 이 마경의 기괴한 환경조차 부딪친 순간 어쩌지 못하고 박살 났다.
사르칸드라와 다시금 격돌하면서 그 여파가 주변 일대를 격동시켰다.
“큽!”
“무슨 힘이…….”
마의 공포를 조력하려고 해도 이미 사방이 포위된 상황이다.
적룡과 모험가.
토벌대와 괴생명체.
전장이 분리됐다.
열파裂波
프리발트가 내지른 첨예한 파동이, 반으로 갈라진 머리에서 말미잘 같은 촉수를 뻗은 사슴을 삽시간에 토막 냈다.
생명이 요동치는 근원을 포착해 베었지만 몸통이 다시 움직여 공격해 왔다.
카강, 캉! 촤아아악!
기괴한 재생력과 숫자도 큰 문제였지만, 이놈들은 몸을 완전히 갈아 버리지 않는 이상 한 번은 언데드로 되살아나는 점이 가장 큰 난제였다.
소수의 최정예라고 할지라도 무수한 변수와 숫자에 완벽히 대응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지형이 불리하다.
마경에 깊이 들어온 이상 후퇴는 별 의미가 없다. 이런 순간에 대열을 잃으면 되레 생존율만 떨어뜨리는 악수가 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실 해답은 진즉에 제시되었다.
토벌군단의 전권은 군단장의 것이다. 세계 연합에 일단 들어왔으면 군단장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마땅한 의무다.
“키퍼.”
“알겠다.”
아세트로 올딘이 정제된 마력을 발산하며 단안경을 벗었다.
세간에서는 협곡에 웅크린 자, 키퍼.
방주에서는 균형의 조율자.
“내가 맡지.”
어긋난 것을 바로잡아 원형으로 되돌리고, 원형을 재정렬해 새로운 왜곡을 낳는─가장 연구에 어울리는 마법의 길이 개방됐다.
마도 <조환(調還)>
죽은 생명체가 언데드가 되는 과정에 작은 간섭이 더해졌다. 잘못된 조율은 과정 자체를 비틀어 원하지 않는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콰득, 쿠지지직!
찰나에 뼈와 살이 뒤틀린 채로 탄생한 언데드들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바닥에 널브러져서 애벌레처럼 꿈틀거렸다.
형태는 그 자체로 균형을 갖고 있다.
균형이 무너지는 방식에 따라 곧 형태의 뒤틀림이 결정된다.
아세트로는 이런 식으로 생물의 어긋남을 조율하는 걸 선호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은 인간을 대상으로 할 때의 이야기였다.
“키퍼를 필두로 한 제1분대와 제2분대는 방어선을 유지하며 사문에 진입해 적을 차단, 그리고 나머지는 저를 따르세요.”
이자벨라는 제2분대장이었기에 생명체들의 육체를 잠식해 형체도 남기지 않고 폭발시키면서 아세트로를 조력했고.
그사이에 메이아는 표정 없는 얼굴로 선두에 서서 사문으로 향했다.
“공략, 시작하겠습니다.”
* * *
지끈!
마경 토벌대──그중 제3분대에 속한 프리발트가 움찔거렸다. 그래, 이자벨라의 설명을 들으니 기억이 점점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시간이 조금 흐르니 정체 모를 두통의 정도도 제법 완화되었다.
“사문에는…….”
프리발트는 기억의 선명도를 최대한 높이고, 그게 확실히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뇌리에 스친 장면들을 입으로 되뇌었다.
“사문에는…… 연합이 본래 상대해야 했던 제국의 언데드 군단이 있었다. 마경의 생물체를 기반으로 한, 전쟁 전에 마경 바깥으로 나와 중앙 대륙을 급습했던 개체들이…….”
“마치 마경이 언데드를 사문 안으로 몰아넣은 듯한 모양새였죠.”
“그리고 전투에서, 아니. 전투에 돌입하기 직전에 대행자가 어떤 마법을 시전했다.”
프리발트가 손가락을 쥐었다.
“난잡하게 얽힌 덩굴 속에서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 감각…… 토벌대는 수적 열세에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이해했다. 그 결과 전열을 포기하고 산개해 우리는 개인으로서 움직였지.”
“예, 그때는 확실히…….”
마경의 사문 세계는 마경을 재현한 것처럼 척박한 공간이었다. 그런 장소에서 토벌대는 본래의 기량, 그 이상을 발휘했다.
“미래를 읽는 느낌이었죠.”
“미래를…… 그래, 미래를 읽는다고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겠군. 초위 마법이었나?”
“그럴 거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아요. 당신도 알다시피 레프라기움 마탑은 워낙 베일이 싸여 있으니까요.”
프리발트가 짧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계속 기억을 더듬었다.
“사문에는 제국의 사령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 목적은 근원체이니, 그 많은 언데드를 처리할 필요도 없었지. 그 끝에……누군가가.”
“세르파니아 추기경, 검성, 그리고.”
“워 로드.”
그가 휙 고개를 들었다.
“우리가 호위하는 사이에 레그리트 나르실리아가 사문의 근원체를 파괴했다. 목적은 달성했지만 밖에는 적룡과 괴수 무리가 있어 탈출할 길이 요원했지. 그때 대행자가 말했다.”
“사문이 닫히는 순간 토벌대 전원은 마경 곳곳으로 튕겨 나갈 겁니다. 서로를 연결했으니 각자 생존자를 찾으세요. 그렇게 최소 11명 이상 모이게 되면 알아서 마경을 탈출하시길…… 이라고 했죠.”
이자벨라가 새끼손가락을 폈다.
새하얀 실이 나타났다.
그것은 프리발트만이 아니라 세르파니아, 자일론, 브라오닉과도 이어진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실 한 가닥은 동굴 바깥으로 향해 있었다.
가장 가까운 생존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스윽.
프리발트가 실을 만지려고 했지만 손가락에 전혀 걸리지 않았다.
촉감은 없었으나, 존재감은 느껴졌다.
‘대체 무슨 마법인지.’
기억을 회복해 일련의 상황을 이해한 프리발트가 벽에 뒤통수를 기댔다.
읏…….
세르파니아가 곧 깨어날 모양이었다.
다른 둘도 금방 의식을 차리겠지.
프리발트는 공연히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다가 재차 입을 열었다.
“만약 그때 사문 바깥에 있었으면 탈출하지 못했던 건가?”
“전이 현상은 밖에도 전해졌을걸요. 우리가 쓰러져 있던 환경이 어떤지 봤죠?”
“……잿더미가 흩날리더군.”
“당신들이 기절한 사이에 적룡이 그 근처에 숨결을 내뱉고 사라졌어요. 운이 안 좋은 건지 우리가 사문이 있었던 장소에서 아주 멀리 이동한 건 아닌가 봐요.”
심지어는 불길에 간접적으로 닿았지만 이자벨라는 재생력을 발휘해 살아남았다. 만약 프리발트나 다른 사람이었으면 진즉 재가 되었으리라.
이자벨라가 턱을 괴었다.
“어쨌든 그 사람만 쭉 같은 자리에 남아 있었으면 적룡을 그냥 보내 줄 리 없겠죠. 그사이에 죽었을 리도 없고요. 그러니 마의 공포도 우리처럼 이곳 어딘가에 떨어졌을 거예요.”
“…….”
프리발트는 설명에 납득하면서도 의문을 해소할 수 없었다.
마의 공포.
어째서 그자는 사르칸드라를 증오하는가?
* * *
거창과 적룡의 발톱이 대기를 찢어발기며 정면에서 부딪쳤다.
서로 튕겨 나갔다.
다름 아닌 고룡과 힘을 겨룰 수 있는 인간이라니? 그런 존재는 두 번째 사도나 여섯 번째 사도에 준하는 정도가 아니면 불가능할 텐데.
───[이 냄새…….]
사르칸드라가 콧잔등을 씰룩이며 어디선가 맡아본 향취를 기억에서 끄집어냈다.
동공이 확장된 그녀가 입가를 한껏 비틀었다.
───[그래…… 그때 그 밭을 일구던 인간이었나? 놀랍구나. 진심으로 놀라워. 하등 생물치고 꽤 나쁘지 않은 눈빛을 하고 있었는데, 과연.]
사르칸드라가 갑옷으로 가려진 마의 공포의 정체를 알아봤다.
───[새까맣게 타 버린 아내를 끌어안고서 슬픔에 미쳐 버린 모습이 선한데, 고작 100년 사이에 이리도 순수한 분노와 증오밖에 남지 않다니. 나약한 건지, 아니면 강인한 건지.]
콰아아아앙!
사르칸드라의 턱이 크게 들렸다.
치아가 맞물렸다.
고룡의 저항력을 파고들어 오는 통증. 그건 명백히 인간을 벗어난 힘이었고, 또한 드래곤에게나 어울리는 경지였으니.
───[필시 저항자의 작품이구나. 촉수 녀석이 왜 이 전쟁에 수작을 부렸는지 이해가 되는군. 오랜만의 여흥이다.]
파괴와 분노.
───[복수는 강자의 권능이지.]
사르칸드라가 진정 즐거워하며 마의 공포를 향해서 진력을 드러냈다. 그리고 치열한 접전이 벌어진 도중 사문의 폐쇄와 함께 전이 현상이 발생했다.
마의 공포───데미안이 눈을 떴다.
“…….”
나무뿌리에 기대어 있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봤다.
마경의 것 외에도 다른 기척을 포착했다.
“다행히 널 먼저 발견했군. 투구는 호흡이 불편해 보여서 벗겨 뒀다.”
아세트로가 옆에 놓인 투구를 던졌다.
데미안은 언제나처럼 투구로 얼굴을 가리려고 하다 움직임을 멈췄다.
“사르. 칸드라가…… 날…… 기억하고, 있었다. 내, 아내도…….”
“그랬나.”
“복수하지…… 못했어…….”
“괜찮다. 다음이 있으니까.”
아세트로가 손수건을 툭 던졌다.
“사르칸드라는 대륙을 갔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생존자들을 찾아서 대륙으로 향해야 하는데, 먼저 놈을 추적하겠나?”
“나는…… 선장…… 이다…… 대륙은…… 경이의…… 답파자가…… 알아서…… 대처하…… 겠지…….”
데미안은 화상과 비늘로 얼룩진 피부 위로 떨어진 눈물을 닦고 투구를 썼다.
“함께…… 나간다…….”
아세트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희소식이 있다.”
“희소…… 식?”
“사문이 붕괴할 때 영혼이 떨림을 느꼈다. 아무리 봐도 대륙의 일로 치부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야. 이건 인류에 위협이 될 거라는 직감, 아니 확신이 들었다.”
그가 단언했다.
“방주에서 개입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 * *
사문을 조사한 결과───재해.
방주의 지도자로서 옛 왕과 크세리온 제국을 모든 인류의 위협으로 판단한다.
“현재 공간 이동이 불가능한 터라 당장 움직이기는 어렵습니다.”
“배를 준비하라.”
방주의 리더.
최초의 모험가.
“먼저 내려가마.”
루가르트가 채비를 갖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