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4. 운이 좋군
“경계!”
로열 가드 수장이 외쳤고, 렘의 시선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음?”
암살자 여자가 고개를 갸웃하며 반응하는 사이다.
“마누르 기병대의 팔란이다!”
다가오는 무리에서 말 한 필이 뛰어나와 외쳤다.
“마누르 기병대장이자 기사다.”
발뭉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기병대장? 기사단 소속이 아니라?”
제 관심사인 제국 기사가 나오자 엔크리드가 물었다.
“기사단 소속이며 마누르에 머무는 기병대장인 거지.”
“제국은 기사단이 하나인가?”
“어, 하나다. 지금의 황제가 하나로 합쳤다고 들었고 공식 명칭은 제국 기사단, 그 외에는 없다.”
황제에 관한 게 아니라면 발뭉은 순순히 답했다.
그렇군.
엔크리드가 고개를 끄떡이는 사이에 팔란이란 기사가 다가왔는데, 무서울 정도로 빨리 뛰는 말이었다.
그 말은 그대로 마차와 평행을 이루며 뛰며 조금씩 옆으로 다가왔다. 누가 봐도 악의는 없었다.
“나우릴리아의 주인을 뵙습니다.”
기사 팔란이 말했다. 면도칼로 자른 목덜미와 바짝 자른 옆머리의 반듯함을 보자니 어지간히 깔끔한 편인 듯했다.
“주인은 아니고 모두의 대표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만나서 반갑소.”
일전에 만난 코티 백작의 행동이 너무 특출나서 그런 걸까.
얌전히 왕에게 먼저 예를 표하는 팔란이란 사람이 오히려 어색해 보였다. 또 예를 갖추긴 하는데 그냥 겉치레 같았고.
“세리아나 공.”
집행관에게 고갯짓으로 인사한 그가 이번에는 발뭉을 향해 말했다.
“떠돌이 발뭉 경! 이번에는 좀 쉬는 건가? 안식년을 가질 때가 되지 않았나?”
제국 파견직은 본디 몇 년에 한 번씩 아무 의무도 없는 휴식이 주어지기에 하는 말이었다.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발뭉이 심드렁한 태도로 답했다.
“그렇군.”
덤덤하고 평범한 답 뒤에 기사 팔란은 그대로 말을 몰아 반대편으로 향했다. 그쪽 창문에 엔크리드가 한쪽 팔을 걸치고 밖을 구경 중이었다. 둘의 눈이 마주치고 발란이 감정을 보이지 않으며 말했다.
“그대가 마성의 기사로군.”
“제국에서 내 별명은 마성으로 확정인가?”
마차 위를 차지한 렘이 낄낄 웃었고, 시나르가 그 말에 동조했다.
“나라는 요정을 휘어잡은 죄로다.”
에스터는 쳐다보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테마레스는 잠시 다가온 남자를 관찰하다가 말했다.
“음.”
애매했다. 적당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기에, 이번에는 아름답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확실한 건 이제까지 본 사람 중에서는 가장 못난 사람이다. 테마레스의 평가였다.
“한판 붙어 보고 싶겠지?”
팔란은 누구에게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한 번도 파란 눈의 기사에게 눈을 떼지 않고 물었을 뿐.
기사란 누구나 반쯤 미쳐서 단련에 임한 이들이다. 예의를 갖췄다고 하지만, 팔란이라고 다를까.
덤덤해 보이는 태도와 표정과 달리 그의 눈 안에는 열의가 엿보였다.
“마누르에 머물러라. 심각하게는 못해도 간단하게는 즐길 수 있을 테니까.”
팔란이 재차 한 말에 엔크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원하는 바였다.
그대로 마차가 도시 마누르로 향했다. 신이 부리는 소가 경작한 도시, 마누르란 이름의 의미가 그랬다.
이곳은 농경지가 대다수였다. 사람보다 땅이 훨씬 넓었다. 성벽 대신 낮은 목책 따위가 보이더니 집 몇 채와 함께 커다란 풍차가 수십 개도 넘게 눈에 들어왔다.
한쪽에 줄지어 규칙적으로 자리 잡은 구조물은 그 자체로 감탄이 나올 광경이었다.
엔크리드뿐 아니라 모두가 시선을 떼지 못한 게 당연하달까.
크랑은 더더욱 주변을 보기 바빴다. 언제고 나우릴리아의 땅에도 해야 할 일이니.
그런데 지금 보이는 걸 구현할 생각은 없었다. 풍차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 마법이나 새로운 동력으로 맷돌 수십 개를 돌리는 법을 연구 중이었으니까.
‘처음 세울 때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고 도전해야 해.’
시작할 때부터 과거의 안정을 답습하면 발전이 너무 늦어진다. 늦게 출발한 사람이 먼저 뛴 사람을 잡으려면 특별한 재주가 필요한 법이니.
제국을 무찌르거나 경쟁 상대로 삼겠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모든 것에 대비하는 게 맞는 길이었다.
그리 도시에 들어가니 환영 인파가 나왔는데 숫자는 많지 않았다. 남녀 합해서 총 셋이었다.
“마누르는 곡창지대다. 이곳에서 나는 곡물은 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가지.”
그들이 다가오는 걸 보면서 팔란이 말했다. 그의 말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엔크리드는 그의 말을 들으며 다가온 세 명의 남녀를 주시했다.
“기사 라놀트, 레벨, 로디요.”
팔란이 자연스레 그들을 소개했다. 다들 젊은 축에 속하는 인상이었고 실제로도 젊었다.
팔란까지 기사 넷이 농경 도시에 머문다. 제국 기사의 숫자가 적지 않다는 걸 방증하는 현실이었다.
‘변경도 아니고 농업 도시에 기사가 넷이라.’
엔크리드나 크랑이나 같은 생각이었다. 제국에는 기사가 많다. 그 명제는 진실이다. 과장은 없었다.
“본래라면 기사 하나와 기병대 일부만 도시를 지킵니다. 이쪽은 그러니까, 환영 인사라고 해야겠군요.”
세리아나가 가벼운 오해를 풀었다. 아무리 제국이라고 해도 불필요하게 인력을 낭비하진 않는다. 쓸데없이 제국의 위상을 키우겠다고 헛소리도 뱉지 않는다. 그러지 않아도 제국은 강하기에 그녀는 그래도 됐다.
“나 때문에 왔다고 생각해도 되는 거요?”
엔크리드가 물었다. 마차 안에서 다가온 이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치면서다.
“맞소.”
셋 중 남자 기사 하나가 답했다.
엔크리드가 보기에 로포드보다 처져 보이는데 드러내는 투기는 아니었다.
전능감에 살짝 취한 상태인가?
“영광입니다.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그 옆의 다른 남자는 태도가 반대다. 유명한 이야기 속 주인공을 만난 듯한 얼굴이지 않나.
“나를?”
엔크리드가 가만히 되묻자 기사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성의 기사 엔크리드 경. 요정을 휘어잡은 그 비결이 너무도 궁금했습니다.”
풉.
렘이 웃음을 터트렸다. 시나르는 관심을 두지 않다가 슬쩍 시선을 돌려 얼굴을 확인했다.
적당히 곰보가 핀 얼굴에 두툼한 입술이 어울려, 강에서 가장 못생긴 물고기를 건져 올리면 비슷한 외모일 듯싶었다.
“저도 마음을 둔 요정이 있는데 영 뜻대로 되질 않아서.”
강물에서 나온 물고기가 머쓱한 태도로 웃었다. 요정을 논하는데 진심 같진 않고 뭔가 가벼워 보였다. 전체적으로 그리 보기 좋진 않았다. 외모나 속내가 썩은 감 같았다.
“모욕인가.”
시나르가 중얼거렸다. 저건 지금 요정의 심미안을 무시하는 태도 아닌가?
“이 자식은 머저리니까 그냥 두시면 됩니다. 경, 들어오시면 한 수 배울 기회는 있겠죠?”
마지막은 젊은 여자 기사다. 로디라고 했던가.
다들 열정과 패기가 나쁘지 않았다. 다만, 태도 전반에 은근히 상대를 깔아보는 느낌이 섞였다.
“급하게 굴 일이 아니다. 어디 도망갈 사람들도 아니고.”
기사 팔란이 셋을 나무랐다. 셋은 까딱 고개를 숙임으로 그의 말에 수긍했다.
“대장을 너무 만만하게 보는 것 같은데.”
렘이 실실 쪼개며 말했다. 엔크리드는 예전부터 무시라면 수없이 당해 왔기에 그런 쪽의 눈치는 비상했다.
“그래, 그런 것 같네.”
라놀트란 투기 가득한 놈도 그렇고, 엔크리드와 다른 의미로 얼굴을 무기로 쓰기에 충분한 레벨이란 놈도 그렇다. 얼마나 만만히 보면 여자를 휘어잡는 비결 따위를 묻는 걸까.
마지막으로 나선 여자 기사도 다르지 않았다. 어서 빨리 실력을 가늠해 보고 허명을 부수겠다는 자신감이 넘쳐난다. 무엇보다 기사 팔란이 가장 거슬렸다. 이 새끼는 아까부터 계속 은근히 시비조다.
“이해해라. 원래 직접 겪지 않고서는 납득 못 하는 이들이라.”
발뭉이 변명하듯 말했는데 그렇다고 크게 신경도 안 쓰는 눈치였다.
“난장 피우고 싶게 구네.”
마차 위에서 렘이 중얼거렸다.
“하지 마라.”
엔크리드가 말했다.
“뭐, 그럼 저런 걸 그냥 놔둬야 하는 거요?”
제국으로 들어왔다고 해서 렘이 친절하고 예의 바른 렘이 되진 않았다.
“도끼로 귀 하나 잘라 주면 얌전해지겠는데.”
“……엔크리드 경의 위명은 제국 내에도 많이 퍼졌습니다. 모병관 슈미트 님을 만나셨지요? 그분이 많이 안타까워하셔서 더 유명해졌지요.”
놔두면 정말 그럴 것 같은 사람이기에 세리아나가 말을 돌렸다. 제국 내에서 모병관 슈미트는 그 실력보단 타고난 안목으로 인정받는 이였다.
“그렇소?”
엔크리드가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로만 보면 태연해 보였기에 화가 난 것 같진 않았다. 다들 덤덤했다. 크랑도 뭐 별일 아닌 것처럼 굴었고.
렘도 말은 그렇게 했는데 낄낄 웃으며 농담이나 던졌다.
“좋은 도시다.”
테마레스가 주변을 보며 말했다. 지나는 이들은 웃고 아이들이 기웃대며 도시에 온 손님을 관찰한다. 사람들이 기르는 개 한 마리가 꼬리를 좌우로 신나게 흔들었다. 여러모로 목가적인 풍경이었다.
여기 함께한 이들이 도리어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 같았다.
에스터는 도시를 보고도 여전히 말이 없었으며, 시나르는 세리아나가 말을 걸자 그녀를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도시 마누르에는 딱히 경계선이 없었다. 농경지를 지나 집이 모인 곳이 마을 사람들이 주로 머무는 곳이었고, 거기서 외곽으로 나아가면 한쪽에 큰 병영과 마구간이 보였다.
저택까진 아니고 큰 집 한 채가 바로 기사 팔란의 집이었다.
병영 앞에 마차가 섰고 엔크리드가 내렸다.
이곳은 어디든 널찍해서 병영 앞에도 공간이 트였다. 마르고 탄탄한 땅이었다. 달리 말하면 싸우기 딱 좋은 곳이고.
“기사 라벨트.”
그걸 보자마자 엔크리드가 입을 열었다. 그 부름에 젊은 기사 중 하나가 고개를 갸웃했다가 얼굴이 벌게져 답했다.
“내 이름은 라놀트요. 그건 누구 이름인데.”
음, 쉽군.
이름 하나 잘못 불렀다고 바로 감정이 드러나니.
“라놀트? 그런 이름이었나. 헷갈렸다. 나 때문에 왔는데 내 얼굴이나 감상하려고 한 건 아닐 테지?”
“당연히 한 수 겨뤄 보고 싶어서 왔소.”
한쪽으로 땋은 색 바랜 노란 머리칼은 그의 출신이 귀족이 아님을 알려 줬다.
그는 등 뒤에 비스듬히 맨 삼지창을 옆으로 당겨 뽑았다. 투둑- 하고 가죽끈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창을 손에 쥐고 그대로 엔크리드를 돌아봤다.
‘허명.’
기사 라놀트는 생각하며 상대를 노려봤다. 대륙에서 온 기사 따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헛된 위명 몇 개 쌓아서 건방을 떠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엔크리드가 가만히 그를 보다가 말했다.
“먼저 와도 좋다. 기사 라벨트.”
……이 새끼가 이름을 자꾸 왜.
기사 라놀트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저 뒤에서 회색 머리칼의 야만인이 낄낄 웃는 소리가 속을 더 긁었다.
탕.
라놀트가 창날로 바닥을 한 번 때렸다. 그거로 감정 일부를 해소하며 앞을 향해 창을 겨눴다.
대륙에서 온 허명의 기사는 검도 뽑지 않고 자신을 바라봤다.
늘어뜨린 손, 무심한 눈, 적당히 벌린 다리.
‘방심은 금물.’
라놀트는 마음을 다잡았다. 허명이라고 해도 이런저런 명성이 따라붙은 놈이다.
‘제국의 기사는 다르다는 걸 보여 주겠다.’
이전에 천재라고 왔던 놈 하나가 제국을 떠났다.
이곳에는 미래가 없다고 했던가.
그러며 미련 따윈 조금도 보이지 않고 그대로 제국을 나선 거다.
‘제국이 미래가 아니라고?’
그 무슨 망발인가.
“헛소리도 가지가지구나.”
이리 말하며 놈의 앞을 막아섰다가 딱 세 번의 칼질로 무릎을 꿇으며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졌었다.
“수준 이하다.”
놈의 말이 귓가에 남았다. 기억에 남아 마음을 괴롭혔다.
“내 이름은 라놀트다.”
말하며 창을 뻗었다. 뻗으며 회전을 가미해 상대가 막으면 쳐 내고 피하면서 따라갈 요량이었다.
사고가 가속하며 집중력이 타올랐다. 상대의 동작이 보였다. 놈은 허리춤의 검 그립에 손을 올렸다. 뽑아서 휘두를 작정이구나.
그리 생각한 찰나다. 턱, 제 창이 중간에 멈췄다.
어?
무슨 바위틈에 낀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앞에 서 있던 대륙에서 온 기사가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라놀트는 기합을 내지를 틈도 없이 왼손으로 창대를 놓고 허리춤에 매어 둔 숏소드를 역수로 뽑아 위로 그었다.
다가온 남자는 그조차 피하곤 팔꿈치를 휘둘렀다.
‘피해야…….’
사고를 가속했기에 머리는 돌아가는데 몸이 반응하지 않았다. 상대는 자신보다 아주 조금 빨랐다.
쩍-
그게 라놀트가 들은 마지막 소리였다.
* * *
엔크리드는 한 놈을 때려눕히고 고개를 들며 말했다.
“운이 좋군.”
렘은 엔크리드의 의도를 알아채고 코웃음을 쳤다.
‘하여간 음흉해.’
들고양이랑 어울리면서 안 좋은 것만 배웠다. 지금 엔크리드는 일부러 약한 척하며 상대를 하나씩 하나씩 끌어들일 생각이다. 그래서 아까부터 어설픈 기세만 얼핏 드러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