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27화.
갑작스레 울린 메시지.
그에 도현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진리의 눈이 갑자기?’
처음에는 심연의 잔재를 발견해서 뜬 건가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애당초 진리의 눈은 심연의 잔재에는 반응하지 않았으니까.
진리의 눈은 숨겨진 것을 꿰뚫어 보는 눈.
아마 루팔로가 내린 가호를 통해 위치가 드러난 심연의 잔재에, 굳이 반응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겠지.
‘심연의 잔재가 아니라면…….’
도현의 눈이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원흉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심연의 잔재가 있는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 언뜻 봐선 아무것도 없는 수풀로 보이는 곳에서 붉은 무언가가 일렁이고 있었다.
‘저거다.’
검은 기운으로 일렁이는 심연의 잔재와 달리, 붉게 일렁이고 있음에도 느껴졌다.
형체에서부터 전해지는 불길함이.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쉴 새 없이 일렁이며 폭주하려 하는 그것은 결코 일반적이지 않았으니까.
마치 당장이라도 족쇄를 풀고 뛰쳐나가려는 악마가 발악하고 있는 듯하달까.
보고 있자니 본능적으로 닭살이 돋는다.
‘잔재는 아니야. 확실하게 다르게 생겼어.’
무엇보다 루팔로에게 잔재 외의 다른 것에 대한 설명은 듣지 못했다.
한데 잔재보다도 더 위험하게 느껴진다라…….
감이 온다.
‘뭔가 있다.’
저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는 감이.
크르……? 커엉!
그곳에 꽂힌 도현의 시선을 자각한 것일까.
침입자의 수준을 보려는지 한동안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간을 보고 있던 마수들이, 돌연 거칠게 짖으며 달려왔다.
파앗!
한데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마수들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총알을 눈으로 쫓지 못하듯, 인간의 육안으론 쫓기 힘든 속도.
하나 기척은 생생하게 느껴졌고, 고인물들에게는 그것이면 충분했다.
까앙! 서걱!
가만히 있는 도현을 대신해서 검을 뽑아 막은 검성과, 그럴 거라 믿었다는 듯 냅다 검부터 내리꽂은 여제.
설마 바로 반응할 줄 몰랐는지 컹, 소릴 내며 물러난 마수 움트라.
그런 움트라의 옆에 있던 다른 마수들이 슬금슬금 주변을 배회하며 다시 눈치를 살폈다.
“갑자기 뭐야. 집중 안 해?”
“카이저?”
미간을 찌푸리며 질책하는 여제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는 검성.
그에 도현은 여전히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답했다.
“아, 미안. 뭘 발견해서.”
“설마 이번에도 발동된 거냐? 그 사기 눈깔.”
“맞아.”
눈치 빠른 아재가 불쑥 끼어든 물음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뒤쪽에 뭐가 있는데…… 저놈들 심연의 잔재보다 저걸 더 중요하게 여기는 거 같아. 내가 저길 보니까 바로 달려든 걸 보면.”
“잔재를 지켜야 할 마수가 잔재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라…….”
“무언가 있군.”
“호오, 그래? 흥미로운데?”
도현의 말에 동료들의 반응이 달라졌다.
마실이라도 나간 듯 가볍게 몸이나 한번 풀려던 모습에서, 작정하고 싸우려는 듯 이글거리는 모습으로.
“질질 끌 거 없이 바로 들어가자고.”
“내가 먼저 들어간다. 준비해.”
“……내가 네 기사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당연시하게도 맡기는군.”
“그게 제일 효율적이긴 하잖아. 아 몰라, 일단 들어간-다!”
검성이 불만스레 투덜거리는 말을 가볍게 무시한 여제가 냅다 땅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대포알이 쏘아진 듯 파괴적인 돌진.
붉게 물든 눈이 한 줄기 섬광을 그리고, 피로 물든 기운이 잔상을 남긴 순간.
—–!!
마수들의 위로 공간째로 찢어발기는 듯한 검격이 난무했다.
속전속결로 처리한다는 말처럼 그새 생명력을 쏟아부어 온갖 버프를 두른 여제의 검격이었다.
크아아아아!
위력이 상당했는지, 해당 위치에 있던 두 마수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제법 범위가 있는 공격이었는데도 놈들의 덩치가 덩치다 보니, 두 놈밖에 피해를 입지 않았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으나 놈들은 심연에서도 살아남은 마수들.
[심연의 괴수 ‘그람바’가 특성 ‘잠식’을 발동합니다.]
[붙잡은 대상의 신체 일부를 끔찍한 심연의 기운에 잠식시킵니다.]
[잠식된 신체는 모든 능력치와 속도가 급격히 저하되며, 여러 차례 잠식될 시 해당 부위를 움직일 수 없습니다.]
[심연의 마수 ‘바르디가’가 특성 ‘내부타격’을 발동합니다.]
[바르디가의 공격을 허용할 시 방어력을 60% 무시하는 데미지가 들어옵니다.]
…….
당하기만 할 놈들이 아니었고,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피해를 입은 것과 동시에 덮쳤기에 사실상 카운터에 가까운 속도.
웬만한 랭커들도 반응하기 힘든 속도였지만, 여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굳이 쳐낼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까앙-
크르르……?
제공권(制空權).
유능제강의 극(極)에 이른 검성이 알아서 막아줄 걸 알고 있었으니까.
“이거지.”
“……쯧. 하여튼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로군.”
서로의 실력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기에 가능한 전적인 신뢰.
그것이 두 사람의 합이 독보적인 이유였다.
다른 건 신경 쓰지 않고, 오직 공격만 집중하면 되기에 압도적인 여제의 피지컬이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고.
휘릭- 스륵.
반대로 검성은 방어와 무력화만 집중하면 되기에 더욱 효율적인 제공권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이다.
촤악-! 촥!
서거억-!
왼손의 검과 피로 뒤덮여 너클을 낀 듯한 오른손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여제는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 같았다.
그런 여제에겐 조금의 망설임도, 고민도 없었다.
그저 미치광이처럼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거 같은데, 귀신같이 빈틈을 만들어 급소에 내다 꽂히는 공격들.
크, 크아!
크어!
심연의 마수들조차 이런 난격은 처음인지 당황해하는 게 멀리서도 느껴졌다.
저 거대한 덩치의 마수들이 뇌 정지가 와 버퍼링이라도 걸린 듯 버둥거리고 있었으니까.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저들의 입장에선 지옥 같겠지만, 구경하는 아재와 가디언들의 입장에선 다소 우습게 보이는 광경이었다.
[패링에 성공하였습니다.]
[공격을 흘려내어 패턴이 취소됩니다.]
설상가상으로 두 사람만으로도 벅찬데 도현까지 합세한 상황.
여제와 검성이 날뛰고, 그 중심에서 도현이 다른 마수들의 위협적일 수 있는 패턴을 패링한다.
-어, 어……. 이럼 우리가 나설 필요가 없지 않아?
-리자리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군. 과연 주군과 주군의 동료분들인가. 포지션이 자유로움에도 서로 할 일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
평소 물량전에 특화되어있던 지하드도, 어그로를 담당하던 찰리도 지금은 그저 멍하니 구경할 뿐이었다.
겨우 여섯의 마수들로는 녀석들이 낄 자리가 없었으니까.
찰리로선 다소 아쉬운 일이었다.
[가디언 ‘찰리 드 라비온’이 심연과 조우하였습니다.]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심연을 상대할 시 ‘찰리 드 라비온’의 모든 능력치가 상승하며 보다 큰 힘을 발휘합니다.]
[특성 ‘심연에 대항하는 자’ ‘어둠을 밝히는 자’ ‘여명의 빛’을 발동할 수 있습니다.]
[빛의 심볼(전용)의 특수 옵션 ‘빛의 의지’의 효과로 어둠과 심연에 높은 저항력을 가집니다. 또한, 그들과 전투에 돌입할 시 받는 상태 이상이 80% 감소됩니다.]
-왜 그래 찰리? 계속 움찔거리는 거 같은데.
-으음, 몸 안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이 가만히 있기가 힘들다네.
-리자리자?
어둠에 대항하여 인간들에게 여명의 빛을 내릴 운명을 짊어진 고고한 기사 찰리 드 라비온.
심연을 마주하자 그의 진정한 힘이 반응하고 있었으니까.
찰리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을 거라고.
-으음.
하나 찰리는 참았다.
지금은 자신이 나설 자리가 아니었으니.
도현과 여제, 그리고 검성이 저리 모든 어그로를 끌며 화려하게 날뛰는 이유.
고오오-
[파티원 ‘아스트’님이 전설 스킬, ‘파괴신의 가호’를 발동합니다.]
[90초 동안 5번째 타격마다 강력한 ‘파괴의 일격’을 날리며 데미지는 무기 공격력에 비례합니다.]
[스킬 발동 후 첫 공격은 ‘파괴의 일격’이 적용됩니다.]
[초월 고유 능력 ‘리미트 해제’를 발동합니다.]
[리미트 제한을 해제하여 일시적으로 무기 업그레이드의 효과를 극한으로 사용합니다.]
[+20 ‘찬란한 거인의 철퇴’가 완성됩니다.]
[사용 시 무기가 파괴되며 50분간 특성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짜식들, 준비됐다.”
그건 아스트의 한 방이 준비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함이었으니까.
여제가 무대를 휘젓고, 검성이 더욱 휘저을 수 있게 돕고, 도현이 패턴을 끊는다.
그렇게 번 시간을 이용해 아재가 일격으로 치명상을 입힌다.
이게 카이저 파티의 주요 레이드 전략이었던 것이다.
물론 안 통하는 보스들이 가끔 있기에, 그때부터 아재는 병풍에 가까워진다는 단점이 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그야말로 영웅출현이 따로 없었다.
“그럼 간다.”
씨익, 웃은 아재가 크게 도약하자, 우주를 담은 듯한 검보랏빛이 마치 태양처럼 허공에 머물렀다.
이윽고 아스트가 철퇴를 밑으로 휘두르자,
——–!!!!
[시그니처 특성 ‘스매쉬’가 발동됩니다.]
[공기를 타격하여 공격력에 비례한 광역 피해를 입힙니다.]
[파괴왕의 철퇴의 특수 효과 ‘파괴왕의 일격’이 발동합니다.]
[모든 것을 담은 파괴의 일격을 가합니다.]
소리가 멎었다.
아니, 멎은 게 아니었다.
정신 나간 위력에 인간의 청각이 감지할 수 있는 데시벨을 뛰어넘은 충격음이 울려 퍼졌을 뿐.
그렇게 퍼져나간 충격파는 그보다 더했다.
“휘유.”
“……언제 봐도 정신 나간 위력이군.”
“다른 건 몰라도 저 한 방은 선 넘었긴 해. 이게 자본의 매콤한 맛인가?”
그녀들의 감상평에 도현도 수긍했다.
숲 전체 뒤흔들리는 듯 요란한 충격이 전해졌으니 말이다.
‘보스한테 써야 반발력 때문에 충격파 범위가 크다더니 진짜였네.’
재앙의 탑 입구에서 무법지대랑 한 판 거하게 뜰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단순히 범위만 커진 게 아니라 위력도 더 센 거 같기도 하고.
그렇게 잠시간의 감상 타임이 지나고, 충격파가 멎었을 때.
그들을 반긴 건 수많은 메시지들이었다.
[심연의 마수 ‘바르디가’가 심연으로 돌아갑니다.]
[심연의 괴수 ‘그람바’가 심연으로 돌아갑니다.]
[심연의 괴수 ‘가르벤’이 심연으로 돌아갑니다.]
[심연의 마수 ‘간테아르’가 심연으로 돌아갑니다.]
단 한 방.
한 방에 네 마리의 마수들이 죽어 심연으로 돌아갔다.
놈들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네임드 보스급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버그 급 위력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정말 보스로 판정된 건 아니기에 필드 보스나 네임드 보스에 비하면 생명력 자체는 훨씬 낮겠지만…….
‘웨폰 갬블을 발동한 것도 아니잖아. 다 꼬라박으면 진짜로 필보도 원킬 나겠네.’
아니, 이 정도면 어지간한 레이드 보스도 페이즈 한두 개를 통째로 날리지 않을까?
누군 죽어라 패링해가며 싸우는데 누군 딸깍 한 번에 보스 네 마리라…….
괜히 10대 길드의 마스터를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지금은 저 핵폭발급 딜러가 다시 자신의 파티원 되었으니 참으로 든든하달까.
[심연의 마수 ‘움라브’의 생명력이 20% 이하입니다.]
[생명의 위협에 특성 ‘변형하는 신체’가 강제 발동되어 2분간 재사용할 수 없습니다.]
[심연의 마수 ‘엠비타’의 생명력이 20% 이하입니다.]
“뭐야, 진짜 보스도 아닌데 왜 안 죽었나 했더니만. 특성으로 살았구만?”
“크큭, 마음에 걸렸었나 봐?”
“……크흠. 내가 가진 거라곤 한 방뿐인데, 이것마저 시원찮으면 뭐 먹고 살겠냐. 순간 돈 더 쏟아부어야 하나 고민했네.”
“더 투자할 템이 남아있긴 해?”
“안 그래도 그게 고민이다. 이제 돈으로 커버할 만한 건 다 해서…… 뭐 새로운 등급 템이나 레이드 콘텐츠 하나 안 나오냐.”
여유롭게 떠드는 아스트와 여제를 뒤로하며, 도현이 터벅터벅 마수들을 향해 다가갔다.
[진리의 눈이 발동 중입니다.]
좀 전부터 계속해서 눈에 밟히고 있는 저 정체 모를 형체.
크, 크어…… 크어어…….
“저것들 봐라. 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못 지나가게 하려 하네.”
“지성도 없어 보이는데 저런 모습이라……. 마치 세뇌라도 당한 것 같군.”
그곳에 다가가는 도현을 어떻게든 막아서는 두 마수를 보던 동료들도 도현의 뒤로 따라붙었다.
6대2였던 싸움은 한순간에 4대2가 되었고.
서걱- 석-
푹!
여섯이서도 안 되었던 마수들이, 다 죽어가는 상황에 도현 일행을 막아낼 리 만무했다.
끝내 심장과 이마를 꿰뚫리며 심연의 품으로 돌아간 마수들.
파삭-
[첫 번째 심연의 잔재를 부수었습니다.]
[선행 퀘스트 ‘심연의 잔재’의 성적에 반영됩니다.]
깔끔하게 심연의 잔재를 부순 도현이, 천변을 손에 쥔 채로 발걸음을 이어갔다.
비로소 확인할 때가 된 것이다.
[정체불명의 알이 격렬하게 반응합니다.]
‘뭘 숨겨놓은 건지, 어디 봐보자고.’
저 불길한 기운의 정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