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47화.
앨로윈 라세드.
님프 여왕의 대리인.
자취를 감춘 님프 여왕을 대변하는 유일한 이로, 사실상 여왕과 같은 권한과 권력을 지닌 남자.
그런 그의 저택은 이곳 님프들의 땅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 할 수 있었다.
유저나 님프들이나 감히 그의 저택을 건드릴 수 없는 건 물론, 가장 많은 방비가 되어있는 곳이었으니까.
사아아-
그래서일 것이다.
지독한 피비린내를 밭으며, 피바다가 된 저택 내부를 보면서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게 무슨 일이지?’
뇌 정지란 단어가 이보다 적합할 수가 없다.
상식을 벗어난 상황에 사고회로가 정지되어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랭커 위의 랭커라 불리는 하이 랭커.
그중에서도 상위권에 군림하던 레피아스로선 실로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칠강 중 하나인 푸른 마탑주의 제자로서 어지간한 건 다 겪어왔다 자부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건 처음이다.
‘NPC를 죽였다고? 그것도 이런 전시 상황에?’
다 죽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 모두.
……아니, 다 죽은 건가?
유저들이야 죽으면 가루가 되어 날아가니 확신할 수 없지만, 당장 이 난리에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죽었을 확률이 높다.
중요한 건 NPC들인데…….
‘하나 같이 간부들만 죽였다.’
하기야 이곳에 모인 자들이 모두 간부급이니 당연한 소리겠지.
그나마 다행인 건 가장 핵심 인물인 ‘앨로윈 라세드’의 시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데…… 도망이라도 친 걸까?
그럼 앞으로 님프 마을은 어떻게 되는 거지?
전 심연의 강자와의 전쟁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겠군.’
너무 상식 밖의 일이 일어나서인지 생각이 제대로 이어지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가장 이질적인 건…….
-쯧. 우매한 것들…… 이런 것도 대비라고 하고 있는 건가. 그저 재앙에만 집중했지, 내가 습격할 거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은 것 같군. 전쟁을 겪은 지 너무 오래된 것이지.
로브를 뒤집어쓴 채 고고하게 서 있는 저 남자였다.
‘전쟁? 대비?’
설마 재앙을 막는 게 끝이 아니었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는 남자를 보며 그런 생각이 스쳐 가던 때였다.
쩌억.
로브를 쓴 남자가 걸음을 옮겼다.
걸을 때마다 소름 끼치는 소리가 귓가를 자극했다.
쩌억. 쩌어억.
한 발짝, 한 발짝.
어찌나 많은 이들을 죽였는지 발을 옮길 때마다 찐득한 피가 떼어지며 꺼림칙한 소리를 내었다.
본능적인 거부감에 팔에 닭살이 돋는다.
움직임에 따라 로브 자락 사이로 언뜻 드러나는 몸은 피에 찌들었는지 검붉게 착색되어 살인지 뼈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야마모토가 보이지 않는다. 시아나 또한.’
죽은 걸까?
아니면 어디론가 날려 보내진 걸까?
뭐가 됐든 이토록 짧은 시간에 이런 광경을 연출한 이상, 저놈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알려야 한다.’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다른 10대 길드들에게.
그리고 엘프 마을에 있는 이들에게도.
빠르게 상황판단을 마친 레피아스가 조용히 시스템 창을 열었다.
이대로 걸어 나가면 걸릴 확률이 높을 테니, 로그아웃을 하는 게 좋다는 판단이었다.
한데 그때였다.
사아-
“……!?”
공기가 차갑다.
마치 새벽녘 무덤에 온 듯 피부가 차갑게 시려 오는 느낌.
전신의 세포 하나하나가 예민하게 경고를 울려왔다.
-쥐새끼가 숨어있었군.
이윽고 무색무취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젠장!’
레피아스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황급히 손가락을 뻗었다.
공격이고 방어고 할 것 없이 당장 로그아웃을 해야 한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하나 그가 손을 뻗는 속도보다 레피아스를 향해 쇄도하는 어둠의 그림자가 더욱 빨랐다.
쇄애액-!
뱀의 형상을 한 그림자가 속도에 못 이겨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길게 찢어지며, 레피아스의 손가락을 잘라내었다.
-사도란 것들은, 손을 뻗으면 사라지더군.
로그아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짤막한 경험으로 최선의 판단을 해낸 것.
하나 레피아스도 상위권의 하이 랭커. 쉽사리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전설 스킬 ‘블리자드’를 시전합니다.]
[10초간 하늘에서 대량의 작은 얼음 운석이 떨어집니다. 운석에 맞을 시 큰 피해와 함께 상태 이상 ‘빙결’에 빠집니다.]
[빙결 상태가 된 적에게 빙(氷) 속성 피해를 입힐 시 추가 데미지가 적용됩니다.]
손이 잘린 순간, 곧장 반격을 준비한 것이다.
하늘에서 빙산의 일각이 수없이 떨어지듯, 얼음 운석이 난무했다. 제아무리 저 남자라도 모두 피할 수는 없을 터.
콰앙! 쾅!
결국, 몇몇 운석에 맞은 순간.
쩌저적- 쩍-
얼음꽃이 허공에서 피어나더니, 순식간에 범위를 넓혀 로브를 쓴 자를 뒤덮었다.
[시그니처 특성 ‘빙화만개(氷花滿開)’가 발동됩니다.]
[빙 속성 계열로 대상에게 피해를 줄 시 빙화(氷花)가 형성됩니다.]
[빙화(氷花)는 시전자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며 감당할 수 있는 힘에 한에서 그 무엇이든 얼리거나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월영검의 일격조차 막아냈던 그 얼음꽃이었다.
놈이 순식간에 얼음 더미에 짓눌린 것과 동시에, 레피아스의 머리 위로 거대한 빙창이 생성되었다.
[전설 스킬 ‘빙극천추(氷戟天墜)’를 시전합니다.]
[극(極)에 달한 얼음창을 하늘에서 지상으로 떨어트려 일정 범위에 큰 피해를 입힙니다.]
빙결사의 최강 딜링기 중 하나인 빙극천추였다.
이걸 창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는 그것이 거칠게 얼음 더미를 향해 내려꽂혔다.
슈아아악-!
무엇이든 단번에 부술 것 같은 위압감이었지만, 창끝은 얼음 더미에 도달하지 못했다.
콰득.
얼음 더미 위로 솟구친 어둠이 창을 집어삼킨 것이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너무도 깔끔하게 자취를 감춘 창을 보며 레피아스는 벙 찌는 대신 계획대로 다음 공격을 이어갔다.
[영웅 스킬 ‘아이스 애로우’를 시전합니다.]
[전설 스킬 ‘아이스 에이지’를 시전합니다.]
[영웅 스킬 ‘프로스트 버스트’를 시전합니다.]
…….
레피아스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며 지면이 얼어붙고, 하늘에서는 얼음 화살과 얼음으로 된 검이 내리꽂힌다.
그리고 얼어붙은 지면을 뚫고 솟구치는 얼음 폭발까지.
수많은 스킬이 난무했고,
그럴 때마다 천장에서 시그니처 특성으로 인해 얼음꽃들이 별똥별처럼 떨어지며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
그야말로 폭격이란 단어가 떠오르는 광경.
서걱-
하나 로브를 쓴 자가 손을 뻗자, 그 모든 게 베이며 두 동강 났다.
심지어는 레피아스의 상반신까지도.
그 순간.
잘려나간 줄 알았던 레피아스의 상반신이 생기를 잃더니, 얼음 동상이 되어 떨어졌다.
[전설 스킬 ‘아이스 캡슐’을 시전합니다.]
[60초 동안 얼음으로 된 캡슐로 몸을 감싸며, 치명적인 일격을 입을 시 캡슐이 한 차례 치명적인 일격을 대신 입습니다.]
빙결사만이 가질 수 있는 최상급의 생존기 아이스 캡슐이었다.
뒤로 크게 물러난 채 두 동강 나서 떨어진 자신의 얼음 동상을 보던 레피아스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혹시 몰라서 시전해두지 않았다면.’
바로 몸이 잘려 끝이 났으리라.
하지만 겸손함을 배운 덕에 막아내는 것에 성공했고, 이번엔 자신의 차례였다.
쩌저적-!
아이스 캡슐이 최상급 생존기라 불리는 이유는 단순히 여분의 목숨이라서가 아니었다.
[전설 스킬 ‘아이스 캡슐’이 성공적으로 발동되었습니다]
[5초간 ‘겨울의 축복’을 받습니다.]
[겨울의 축복을 받는 동안 모든 빙(氷) 속성 계열 스킬의 마나 소모와 캐스팅 시간이 삭제됩니다.]
단 5초.
겨우 5초지만 모든 빙 속성 계열 스킬의 마나 소모와 캐스팅이 삭제되는 것이다.
즉, 좀 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폭격을 쏟아부을 수 있다는 뜻.
그리고 이는 빙화만개를 가진 레피아스에게 엄청난 DPS(초당 데미지)를 선사해주는 효과였다.
……
스킬을 쓸 때마다 얼음꽃이 떨어지며 추가 데미지를 넣어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파급력은 엄청났다.
쩌적- 쩍!
콰드득! —!!
순식간에 저택 안이 얼음으로 뒤덮이고, 한기가 전신을 뒤덮는다.
시전자인 레피아스조차 몸이 덜덜 떨려올 만큼 지독한 한기와 지면과 맞닿은 발을 타고 느껴지는 강렬한 진동이 얼마나 강력한 위력인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어지간한 보스들은 가루가 되어 산산조각 날 수준이었지만, 레피아스는 곧장 다음을 대비했다.
겨우 이걸로 죽을 거라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 죽지 않았을 뿐. 움직일 수는 없을 거다.
‘얼음꽃에 닿으면 확률적으로 동상 상태가 된다.’
그리고 한 번 동상 상태가 되면, 얼음꽃에 맞을 때마다 지속시간이 0.5초씩 최대 20초까지 늘어난다.
바인드로선 거의 역대 최고 수준.
저 정도로 맞았으면 최대 시간을 노려봐도…….
‘아니, 면역력이 높다고 가정하는 게 좋다. 그 이하…… 10초라고 생각하자.’
10초면 충분하다.
[초월 특성 ‘최후의 빙결사’를 발동합니다.]
[적을 앞에 두고 홀로 고고하게 서 있을 때만 발동되며, 다음으로 시전하는 빙(氷) 속성 계열 스킬이 주변의 한기를 모아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일격을 가합니다.]
[발동 후 2시간 동안 모든 능력치가 50% 감소하며 24시간의 재사용 대기시간이 적용됩니다.]
긴 캐스팅 시간을 필요로 하는 대신 아득한 위력을 자랑하는 단일기.
현재의 레피아스가 가진 최강의 딜링기를 시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10초 남짓이었으니까.
‘잊혀진 왕도 이게 있었다면 잡을 수 있었다.’
당시 레피아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던 보스.
물론 그때와 지금은 스펙부터가 다르니 쉽게 이길 테지만, 레피아스는 확신했다.
그 당시 기준이었어도 이 능력만 있었더라면 능히 잡고도 남았다고.
그만큼 엄청난 위력을 자랑하는 기술이었다.
그야말로 필사(必死)라고 할 수 있을 만큼.
—-!
지독하게 느껴졌던 좀 전의 한기가 장난으로 느껴질 만큼 강렬한 추위가 레피아스를 중심으로 휘몰아친다.
정신없이 흩어지던 기운이 한 곳에 모이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하나 순조롭게 모인다기보다 제멋대로 날뛰는 걸 어떻게든 끌어오고 있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마치 통제할 수 없는 눈보라를 한 점에 빨아들이는 듯한 광경.
콰아아아아-
그 과정에서 저택 내부 이곳저곳이 부서지고 뒤집어지며 거세게 흔들렸다.
느껴진다.
이제 겨우 반절밖에 모이지 않았음에도, 감히 인간의 몸으로 대항할 수 없는 기운이.
‘빙결사는 한 방이 약하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어느 분야든 정점은 다른 법.
멸살과 여제, 검성이 약점을 극복했듯이.
갓오세 출시 이후 한 번도 최강의 빙결사란 타이틀을 놓치지 않은 자신 또한 비로소 약점을 극복한 것이다.
이쯤 되니 자신감이 붙었다.
“차라리 잘 됐어. 전 심연의 강자와의 레이드를 앞두고 변수가 생길 수는 없는 법. 네놈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정리해두는 게 좋겠지.”
그리 말한 레피아스가 더욱 거세게 기운을 모으고 있을 때였다.
7초를 넘어 8초.
그리고 9초가 되어가며 슬슬 기술이 완성되어갈 무렵.
-호오…….
한기로 인해 피어오른 냉기에 가려진 시야 너머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안에는 공포도, 분노도 담겨있지 않았다.
느껴지는 건 그저 무심함 속에 담긴 미약한 흥미로움 뿐.
-사도들의 수준이 궁금해서 지켜보았는데…… 그건 조금 위험하겠군. 대사를 앞두고 굳이 상대해줄 필요는 없겠지.
“……!”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낀 레피아스가 서둘러 기운을 터트리려 했다.
아직 완전하게 모이지 않았기에 사방으로 튀겠지만, 그렇게라도 해야만 한다고 그의 감이 외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의지는 결국 닿지 못했다.
귓가에 울려 퍼지는 단조로운 절삭음을 들은 순간, 힘겹게 모으던 기운이 신기루처럼 허망하게 흩어져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건 회색 화면에 비친 한 줄기 메시지였다.
[사망하였습니다.]
[데스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사망 메시지.
레피아스가 탄식을 흘렸다.
‘아…….’
무엇에 죽었는지조차 보지 못했다.
그저 절삭음이 들려왔을 뿐.
처음부터 놈은 언제든 자신을 죽일 수 있던 것이다.
이 정도 격차라니.
‘이건 마치 잊혀진 왕 때 느꼈던…….’
……아니, 그때보다도 한 차원 더 높은 벽이었다.
그동안 많이 성장했다고 느꼈는데 이런 기분을 또다시 느끼게 되니 이리도 허망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상실감조차 레피아스는 온전히 느낄 기회가 없었다.
띠링!
[침입자의 수장의 등장으로 대륙 퀘스트의 돌발 이벤트가 발생합니다!]
[돌발 이벤트 ‘침입자의 습격’이 발생합니다.]
[침입자들의 수장이 세력을 이끌고 옵니다.]
[하늘을 집어삼킨 눈 ‘라그 베헤모스’가 깨어나기 전까지 그들의 습격에 대항하십시오.]
[점령당할 시 침입자들에게 땅의 소유권을 빼앗깁니다.]
‘……뭐?’
이해할 수 없는 메시지가 떠올랐으니까.
그리고 레피아스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할 그 시각.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레피아스의 흔적을 보던 로브를 쓴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때가 되었구나.
전투의 여파로 구멍이 뚫린 저택의 천장을 보던 그가 손을 뻗자, 어둠구가 높이 쏘아지더니 이내 소리 없는 폭발을 일으켰다.
그러자 마치 그게 신호라도 된 듯.
대륙 곳곳에 숨어있던 침입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종말의 시작이다, 엘라니스여.
침입자의 수장.
그가 세력을 이끌고 전쟁을 선포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