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01화.
“글쎄. 꽤 많은 일이 있긴 했지.”
“그렇군.”
어깨를 으쓱인 도현이 멸살을 마치 탐색하는듯한 눈으로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는 너는 별일이 없었나 보네?”
“…….”
예상치 못한 도발이었을까.
드물게도 헛웃음을 지은 멸살이었으나, 이내 재미있다는 듯 피식거리며 맞받아쳤다.
“별일까지 있을 필요가 있나?”
“음?”
“마술을 부려야 하는 건 아직 부족한 도전자의 자세지.”
“내가 도전자다?”
멸살은 구태여 답하는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런 그의 얼굴엔 오만함이나 허세가 담겨있지 않았다. 그저 당연한 사실을 읊었을 뿐이라는 듯 담백할 뿐.
하기야 그럴 법도 하리라.
그는 명실상부 갓오세의 최고 스타 플레이어자, 최강의 유저라고 인정받고 있었으니까.
벌어들이는 수익이나 세상에 끼치는 영향력이 일반적인 연예인을 넘어서, 재벌에 가까운 게 그였다.
씨익.
하지만 도현은 웃었다.
“아무래도 네가 최강 소리 좀 듣다 보니 잊고 지냈나 보네.”
“?”
가소롭다는 듯이.
뎀로크 시절 누가 더 위였는지.
그 언급에 멸살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차갑게 가라앉은 그의 눈빛을 보며 도현이 비죽거렸다.
“안 그래? 만년 2등.”
그 잘난 양반이 뎀로크에선 섭종을 하는 그 순간까지 1위를 탈환하지 못했지 않은가.
물론 둘이 붙은 적은 없지만, 결과적으로 항상 1위를 차지했던 인물이 도현이었던 건 명백한 사실.
차마 반박할 말이 없는 펙트에 멸살은 입을 닫았다.
-어우, 역시 우리 주인. 도발할 때마다 아주 기가 막히게 한단 말이야.
-리자리자! 리자!
-……칭찬 아니야, 엘리자.
-리자……!? 리자!
-음! 역사에 이름을 올린 위대한 주군들은 대부분 리더쉽이 뛰어났지. 뛰어난 언변 또한 리더가 갖출 덕목 중 하나네.
오히려 뒤에 있던 가디언들이 더 신이 나서 들썩거리는 상황.
하나 도현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성큼.
한 걸음 더 멸살에게 다가가선, 코앞에 직면한 그의 차갑기 그지없는 눈을 살짝 올려다보며 덧붙인 것이다.
“그동안 즐거웠겠네. 나 없어서.”
“그런데 어쩌냐. 다시 원래 자리 되찾아가게 생겨서.”
툭툭.
멸살의 어깨를 두드린 도현이, 그대로 어깨를 스치며 지나갔다.
와아아아아아아!!!!!
둘이 나눈 대화는 모르지만, 그 행동으로 분위기를 읽은 관중석에서 우레와 같은 환호가 터져 나왔다.
대형 전광판에 그 모든 행동이 송출되고 있던 것이다.
-뭔데. 둘이 분위기 뭔데.
-와 X…… 카이저 기존쎄…….
-존X 멋있어. 이러니 남자들이 뻑이 가지.
-왜 남자들만 뻑 감?
-그야 여자들은 멸살 얼굴을 더 좋아하니까?
-응 아니야, 우리 카이저 오빠가 최고야.
└여자임?
└남잔데?
└?
└남자는 오빠라 하면 안 됨? 그거 성차별임.
└;;
-와, 방금 방송 켰는데 이거 뭐임? 왜 둘이 저러고 있음?
-키야, 이게 길드전이지. 시작부터 흥미진진하네.
-카이저! 카이저! 카이저!
그리고 그건 방송사를 통해 실시간으로 생방송을 보고 있던 이들도 마찬가지.
첫 장부터 가장 많은 기대를 받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두 사람의 화끈한 도발전에 실시간 채팅이 쉬지 않고 올라오고 있었다.
졸지에 기 싸움에서 밀린 사람이 되어버린 멸살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저벅, 저벅.
-같이 가, 주인!
-리자리자!
무심하게 떠나는 도현과 그런 도현을 허겁지겁 뒤따르는 가디언들의 등은 어느새 멀어져 있었다.
“한 방 먹었군.”
“……마스터. 따라붙을까요?”
부마스터이자 비서인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으나, 멸살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도현의 등을 향해 담담히 말했다.
“뿐만이 아니길 기대하지, 카이저.”
그는 모를 것이다.
헛웃음을 짓고 있다 여겼던 자신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가 있는 것을.
그리고…….
“난리도 아니네.”
길드 대기실 화면에 송출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과 열광하는 관중들을 보던 시아나가 작게 혀를 내둘렀다.
그러자 곁에 있던 푸른 머리, 레피아스가 피식 웃었다.
“긴장되나? 시아나.”
“흥, 긴장은 무슨. 오히려 기대되는데? 저들 모두가 보게 될 거 아니야. 우리가 길드보다 위라는 걸.”
“옳은 말이다.”
대답한 건 레피아스가 아니었다.
짧게 쳐올린 검은 스포츠머리와 구릿빛 피부가 잘 어울리는 날렵한 인상의 사내.
186cm는 되어 보이는 신장과 생김새에 걸맞게 탄탄한 몸을 지닌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가온이었다.
뒤쪽에서 장비를 점검하고 있던 가온이 어느새 그들 사이로 끼어든 것이다.
“내가 참여한 이상. 우리가 이기는 건 당연하다.”
자신감을 넘어 사실을 읊조리는 듯 담담하고 단호한 어조.
오만하다고 칭할 발언이었으나, 그 말을 들은 레피아스는 순순히 수긍했다.
“그래. 저들도 너의 존재만 알지, 너의 진짜 전력을 모르니…… 놀랄 녀석들을 생각하니 우습네.”
“흥. 인정하기 싫지만…… 기대되긴 하네.”
그 자존심 센 시아나마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찰 뿐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술 뜨며 한 마디를 얹었다.
“저 녀석이 지는 모습은 상상도 되지 않으니까.”
10대 길드 마스터 누구를 데려와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는 그 멸살마저도.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가온은 모든 NPC 소속 유저들의 정점.
알려지진 않았으나 무려 칠강(七江) 세 명의 인정을 받은, 규격 외의 괴물이었으니까.
그런 그를 지칭하는 별호는 공식적으로는 사이탈 그리드나의 수제자.
즉, 칠강 중 하나인 영왕(靈王)의 수제자였지만…… 마탑주의 수제자인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비공식적으로 붙은 그의 숨겨진 타이틀을.
‘칠강의 후계자.’
그 검황이 애지중지하는 수제자인 검성마저도 갖지 못한 타이틀.
유저의 신분으로 제국의 일곱 별이라 불리는 최강자들의 후계자 자리에 등극한 괴물이 가온인 것이다.
“시아나 눈나!! 예뻐요!!”
“섹시하다아아아!!!”
“다 불태워버려!!!”
“레피아스 오빠아아악!!!!”
“레피아스! 레피아스! 레피아스!”
하나 화면에서 아직까지도 간간이 들려오는 NPC 소속 유저의 이름은 레피아스와 시아나가 대다수.
아주 간혹 가온이란 이름이 드려오긴 하나 극소수였다.
가온에 대해 알려진 게 오직 칠강의 수제자라는 것뿐, 별다른 활약조차 보여준 적이 없기 때문이리라.
“길드전이 끝나면 떠들썩해지겠네.”
그리고 그 화제의 중심엔 가온을 필두로, 자신들이 서 있을 것이다.
* * *
“왔냐?”
“아재.”
대기실에 들어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인사를 건네는 아스트를 보며 도현이 마주 인사했다.
-와아아아아아!!! 와아아아!!!
“어우, 아주 인기 스타야? 여기 있는데도 귀가 아플 정도네. 하여튼 이놈도 관종끼가 있다니까.”
“뭐래.”
피식 웃는 도현이지만 솔직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대기실에 들어오는 길 내내 자신의 이름을 부르짖는 관중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으니까.
-키륵! 케륵!!
-리자리자리자!!
진성 관심에 목매는 사람답게 환희에 찬 못생긴 얼굴로 기쁨의 시위를 하는 지하드나, 귀엽게 폴짝거리는 엘리자.
두 녀석을 보며 누굴 닮아서 저리 관종일까 했건만.
아무래도 자신도 사돈 남 말 할 처지가 아닌 모양이다.
“그런데 왜 대기실이 겹쳐있어?”
“아, 길드전 참가자가 너무 많아서 두세 팀씩 같이 쓴다 하더라고. 저기 명단 보이지?”
까끌까끌한 턱으로 턱짓하는 아스트를 따라 고개를 들자, 벽면에 [바벨론, 카신교] 라고 적힌 명단이 보였다.
어쩐지 대기실이 꽤 넓더라니 이유가 있었다.
‘하긴 길드당 하나씩 배정하면 말이 안 되긴 하지.’
애초에 내부 건물이 아닌 야외에서 진행하는 길드전이다.
그나마 참가자들만 라크시아에서 제공한 근처 건물들을 대기실로 쓰는 건데…….
참가자 수가 워낙 많다 보니 모든 참가자가 대기실을 하나씩 썼다간 근방의 건물을 모조리 빼앗아야 할 터였다.
뭐, 사실 근방 건물만 범위에 속해있는 건 아니긴 했다.
하얀 마탑주의 마도학 기술로 만든 워프 덕분에, 그저 길드전 무대에서 발 한번 들이면 해당 대기실로 이동되는 시스템이었으니까.
‘당장 여기만 해도 거리가 좀 되어 보이는데 마도학이 참 편리하긴 해.’
그야말로 마법의 힘이 담겨있는 기술이기에 가능한 일.
이런 면에선 오히려 현대의 과학 기술보다도 뛰어나달까.
“그중에서도 우리가 있는 곳은 길드 마스터들만 들어오는 곳이야. 길드에서의 직위에 따라 자동으로 이동되는 거 같더라고.”
“신기하네.”
처음 길드전을 신청하고 나서, 길드원들의 직위를 입력하는 시스템이 떴었는데 이것 때문이었나보다.
“그래도 보통 첫 등장 땐 길드원들이랑 같이 오는데 길드원들은 어디 가고 너 혼자 와?”
“사정이 있었어서.”
지난 일주일간 길드원들…….
그러니까 카신교 신도들이랑은 얼굴 한 번 마주치지 못했으니 말이다.
“뭐 너희 길드원들이면 알아서 하겠지. 대검이 녀석이 사실상 길마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잖냐.”
“그렇긴 해. 난 뭐 바지 사장이지.”
“보통 바지 사장이 일하지 않나?”
“일 안 하는 바지 사장도 있는 거지 뭐.”
그렇게 만담을 주고받길 몇 차례.
문득 도현을 위아래로 훑어본 아재가 궁금해 죽겠다는 듯 걸걸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래서, 대체 뭔 일이 있던 거냐?”
“나도 스펙 많이 올리고 오긴 했는데…… 이건 뭐 일주일 만에 바뀔 수준이 아닌데?”
목소리엔 황당함을 넘어 경이로움마저 담겨있었다.
그런 아재의 시선은 이내 한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까부터 궁금했던 건데 그건 대체 뭐냐? 멸살이랑 기 싸움할 땐 안 보였던 거 같은데.”
그에 힐끔 옆을 보니 허공에 떠 있는 무언가가 보였다.
허공을 침대 삼아 둥실둥실 뜬 채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녀석은, 도현에게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카엘리보루스]
[타이틀 : 파천귀(破天鬼), 하늘을 부수는 자, 파멸의 존재, 신멸도깨비(神滅鬼).]
[타입 : 돌연변이 심연과 도깨비의 혼혈]
[충성도 : 50]
[레벨 : LV 1]
[특성 : 파천(破天), 신기(神氣), 도깨비불, 돌연변이 심연, 신멸도깨비(神滅鬼)]
[가디언 특성 : 나태, 기면증, 까칠, 방관자]
[설명 : 파천귀 카엘리보루스가 정체불명의 알을 매개체로 새로이 태어난 존재.
정체불명의 알이 흡수해온 기운과 카엘리보루스의 종족이 합쳐진 돌연변이 혼혈 타입이다.
도깨비와 심연의 충돌되는 기운으로 인한 영혼의 파장으로 인해 성격이 많이 게으르고 나태해졌다.
오랜 세월 봉인 당했던 습관과 맞물려 모든 일에 있어 굳이 나서려 하지 않는다.]
[현재 레벨이 낮아 대부분의 능력이 봉인되어있습니다.]
[사용 가능한 스킬 : 1]
-하늘 부수기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파천귀(破天鬼), 카엘리보루스.
한때 신에게마저 닿았던 유일무이한 도깨비는, 엘리자와 엇비슷한 크기의 작디작은 가디언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