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7화 세계 집합 – 하루 (2)
언젠간 인간, 드워프, 엘프, 수인이 화합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 최초의 모험가의 어느 동료 –
* * *
규모가 큰 축제일수록 상인은 방긋 웃지만, 그 이상으로 치안을 지키기가 까다로워지면서 순찰단은 울상 짓는다.
하물며 세계 회의의 인파는 이그나시아의 저울과 비교했을 때 구성 인원이 아예 다르다. 다른 종족만이 아니라 아예 다른 사회 체계를 갖춘 머나만 타지의 인간들까지 방문하니.
대표적으로 차가운 북부의 왕국이 그러했다.
“크하하하핳! 마셔라! 마셔! 더 마셔! 더 더 마셔!”
“이게 대륙의 겨울? 존나 포근한데?”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라더니. 술맛 하나는 나쁘지 않네! 수급도 편하니 동날 일도 없고. 더럽게 비싸긴 하지만. 야! 주인장! 우리를 추운 동네에서 온 무지렁이로 보고 등쳐 먹는 거 아니지?”
“아, 아닙니닷……!”
가르간트의 유명한 주점이 이른 아침부터 시끌벅적하다. 이러한 떠들썩한 분위기는 어제저녁부터 시작되었다.
프로하스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도록 제작된 모피 망토와 갑옷을 구석에 던진 북부의 전사들이 술과 음식을 먹어 치웠다.
근육이 두껍고, 매섭다.
허리춤에 대충 차고 있거나 벽면에 기대어 놓은 도끼와 검이 위협적이다. 무엇보다 척박한 환경에서 나고 자란 만큼 거친 말투와 성격은 야만스럽기 그지없었다.
“이게 최고급 술이라고? 프로하스산 딸기주에 비하면 맹물이군.”
“미친 새끼. 평생 한 모금 마셔 본 걸 어디까지 우려 처먹는 거야? 그럼 왕실에서 직접 관리하는 술이 이런 것보다 못하겠냐? 머리 없어? 대머리라 없다고 해야 하나?”
“그 주둥아리!”
사소한 시비가 붙은 전사 둘이 당연하다는 듯 치고받는다. 주변에서는 말리기는커녕 환호성을 지르며 싸움을 부추겼다.
이들은 프로하스를 벗어난 적이 처음이라 매우 신이 나 있었다.
와장창.
테이블이 박살 난다.
주인장의 표정도 함께 박살 났다.
‘젠장.’
북부인을 손님으로 받지 말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지만, 그렇다고 애초에 쫓아냈다간 처맞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선불로 음식값이 지불된 게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처참하게 망가진 가구 값까지 물어 줄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
결국 주인장은 가만히 카운터에 뒤에 앉아 뚱한 표정만 지었다. 겁먹은 종업원들은 주방에 숨은 지 오래였다.
술과 음식을 준비해 주면 북부인들이 알아서 가져가니 서빙이 필요가 없었다.
철컥.
새로운 손님들이 찾아온 건 그때였다.
이목이 한데 몰렸다.
동시에 인간의 것이 아닌…… 아주 사나운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어디서 소음이 들린다고 했더니. 곧 얼어 뒈질 인간들이 있었군.”
상부 수인 부족의 물소 수인이 콧김을 내뿜으며 촘촘한 이빨을 드러냈다.
상부 수인 부족과 프로하스는 거시적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다. 지역 환경이 달라서 갈등을 크게 빚는 일은 잘 없다.
다만 서로 인사하면서 지낼 정도로 관계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눈에 안 보이면 신경 쓰지 않지만.
눈에 보이면 두들겨 패고 싶은 수준이랄까.
현시대에서도 상부 수인 부족은 델하룬 북부와 종종 교전을 치르고 있다.
그들은 인간을 경쟁자이자 사냥감으로 여긴다.
쨍그랑!
북부인 한 명이 술병을 내던졌다. 술은 튀지 않고 파편만 비산했다.
“자리 없으니까 꺼져라, 짐승 새끼들.”
“확실히 사방이 더럽군. 북부 인간 아니랄까 봐 게걸스럽게 처먹기는. 하긴 그쪽에는 먹이가 풍족하지 않으니, 이럴 때 먹을 수 있을 만큼 먹긴 해야겠지.”
“너희들 개밥그릇 쓴다고 했었나? 바닥에는 자리 많으니까 앉든가.”
“한심한 도발이군.”
“앉혀 줘?”
분위기가 삽시간에 험악해졌다.
날붙이를 들 기미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의 주먹 자체가 흉기였다. 적어도 주점은 견디지 못할 터였…….
끼익, 끽, 끼익.
누군가가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주인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2층 손님들은 어제 전부 나갔을 텐데?’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손님은 오래되어 보이는 갈색 로브를 두르고 있었다. 후드를 푹 눌러쓴 터라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겉보기로 알 수 있는 건 체격이 건장한 사내라는 것뿐이었다.
촤르륵.
사내가 빈 그릇을 카운터에 올려 두면서 동전으로 음식값을 치렀다. 그러곤 북부인 무리를 가로질러 물소 수인 앞에 멈춰 섰다.
“더 이상의 소란은 민폐다. 배가 고프면 조용히 배만 채우고 가라. 그리고 북부인은 주인장에게 충분히 변상하도록.”
난데없는 훈계에 물소 수인과 북부 전사가 서로 노려보다 말고 각자 사내를 향해서 표정을 강하게 일그러뜨렸다.
“잠깐.”
미처 불쾌한 욕설이 터져 나오기 전에 북부의 대전사가 쿵, 술잔을 강하게 내려놓으며 전사를 제지했다.
상부 수인 부족의 부부족장도 물소 수인의 어깨를 잡아 옆으로 밀었다.
둘이 차례대로 말했다.
“변상은 충분하다 못해 넘치게 하겠소.”
“조용히 식사만 하고 가겠다.”
낯선 사내는 그 대답으로 만족했는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인 사이를 가로지른 그가 그대로 주점을 나섰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식사는 위에서 하겠다. 올라와서 주문받도록.”
“아…… 네, 넵!”
수인들은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으나, 결국 군말 없이 부부족장을 따라 주점의 계단을 올랐다.
그렇게 수인족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북부의 전사가 대전사에게 물었다.
“방금 왜 그러신 겁니까? 저 부부족장 놈하고 쌍으로. 아니, 설마 그 뭔지도 모를 놈한테 겁이라도 먹으셨습니까?”
“그래.”
“예?”
“조금도 가늠할 수 없었다. 폐하를 맞닥뜨렸을 때처럼. 어쩌면 그 이상의 존재일지도…… 이 순간을 기억해 둬라. 그리고 언젠가 비슷한 느낌을 받은 순간 한발 물러서라.”
대전사가 식은땀으로 흥건한 손으로 술잔을 집어 들었다. 뒤늦게 떨림이 전해졌다. 안에 담긴 술 위로 파문이 일었다.
“저런 건 건드리는 게 아니야.”
* * *
아침 식사를 마치고 활기로 가득 찬 대로로 나온 로브의 사내───방주의 지도자가 문득 우두커니 서서 주변을 둘러봤다.
“아니, 이걸 무구랍시고 파는 거냐? 잉? 망치로 후려치면 작살 나겠구먼!”
“나라면 이딴 건 돈 줘도 안 갖지, 음.”
“이, 이……!”
드워프 장인들이 무구점 앞에 진열된 무기들을 별 악의 없이 품평하자 무구점 주인인 인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다.
“이것들을 내놔라, 인간.”
“헤헤, 2만 8,100엘크입니다!”
“흥, 잔돈은 필요 없다.”
엘프가 경멸 어린 눈빛으로 인간과 정상적으로 거래를 하고 있다.
“쩝쩝쩝쩝쩝.”
덩치 큰 수인이 노점에서 구매한 꼬치구이들을 양손에 가득 쥐고는, 육즙을 뚝뚝 흘리며 시원하게 먹어 치운다.
평화롭다.
작은 마찰은 있을지언정 전쟁의 낌새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적어도 이곳의 인간종은 서로를 죽이려 들지 않았다.
‘분명 바라던 풍경일 텐데…….’
고질적인 지병처럼 부정적인 감정이 스멀스멀 흘러나온다.
종족 전쟁을 사전에 막을 수 있었나? 정말로 300년 전에는 이뤄 낼 수 없었던 광경이었나? 시간이 답이었나?
대체 이게 뭐라고 소중한 동료들은 무참하게 죽어 나가야만 했나.
드워프의 이기심, 엘프의 방관, 수인의 야성을 기억한다. 여전히 그들에게는 본능적인 성향이 주를 이루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
…….
…….
하지만 그러지 않을 것이다.
인류에게 해가 되니까.
방주의 지도자에게 감정적인 충동은 어울리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이 자리에 올라온 인간은 응당 인내해야만 한다.
그는 내심 고개를 강하게 젓고는 공허한 벤치에 걸터앉았다. 건물 너머로 전 대륙의 인재를 양성하는 기관이 보였다.
생각을 전환했다.
‘아카데미라.’
쉐오른 장로는 케르노든 가문의 고대 혈통을 개화한 어린 후손───현 아카데미 재학생을 보러 갔다.
물론 직접 대면하는 건 아니다. 자신이나 쉐오른 장로나 세상에서 이미 죽은 초월자니까. 혼란을 빚는 일은 피해야 한다.
그때였다.
……!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일순간이었지만 차마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을 만큼 뭔가 달랐다.
‘나를 향한 게 아니다.’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선에서 육감(六感)에 조금 집중하자, 저 ‘기나긴 골목’ 너머에서 칠흑의 마차가 어딘가로 향하는 게 감지됐다.
그 안에는 방주의 여섯 번째 선장이 될 후보와 여인이 있었다.
* * *
삶을 행복과 불행으로만 구분한다면, 이자벨라의 인생은 불행에 더 가까웠다.
그래도 적어도 오늘은 행복한 날이었다.
마차가 움직이는 내내 이자벨라는 베르덴의 팔을 한 번도 놓은 적이 없었다. 오히려 물 샐 틈 하나 없이 몸을 밀착시켰다.
거리가 평소보다 더 가까웠고, 대화는 평소처럼 일상적이었다.
“가주가 전에 세계 회의 끝난 뒤에 마일라 원장님 만날 거라고 했잖아. 역시 나도 그분 만나 봐야 하는 거 아닐까?”
“상관은 없는데. 달리 이유가 있나?”
“그야 가주한테는 어머니 비슷한 사람이니까.”
“글쎄, 그렇게까지 생각한 적은 없다. 그 사람이 고아원을 물려받은 덴 모성보다는 순수한 책임감이 더 컸으니까.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신경 쓰이는 사람은 맞잖아?”
“그렇긴 하지.”
관심 밖이었으면 로벨린과 기부를 논의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걸 알데반에게 맡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알데반이 피울음 역병 사태를 생각해 라스카벨 고아원을 독단적으로 어레인으로 옮긴 건, 베르덴이 그런 마음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자벨라에게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되살아나는 피]로 인해 고통받던 도중에 행운의 선율가로서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준 마부, 클린턴과 그 가족…….
전염병이 발발하자마자 이자벨라는 사람을 보내 그들의 안전을 지켰다.
“차라리 고아원을 주인 없는 땅이나 에스티리아 왕국으로 이전하는 건 어때?”
“그것도 고려하고 있다. 라스카벨에서 그리 좋은 시선을 받고 있지 않다고 하니까. 어떤 길을 선택할진 원장에게 맡길 거고. 그리고 마도…….”
베르덴이 멈칫했다.
마도국.
이자벨라가 레그리트처럼 마족으로서의 능력을 자각하기 위해선 다름 아닌 아케나드 마도국을 직접 방문할 필요가 있다.
그녀와 융합된 [되살아나는 피]의 근원인 특수 개체, ‘끝없는 부정’의 기록이 마도국에는 남아 있을 테니까.
데이로스 가문은 본래 마도국의 명문이다.
……바로 이 주제에 대해 말하려고 했으나, 그건 오늘과 어울리지 않는다. 역시 느긋해지는 건 그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응? 뭐라고?”
“아니다. 그보다 도착했군.”
마차가 멈췄다.
딱히 마부가 없어도, 베르덴의 의념을 통해 위치 정보를 전해 받은 드레드미어는 단신으로 길을 찾을 수 있다.
괜히 남한테 성질부리는 빈도수도 줄었다.
침묵의 사막에서 원 없이 뛰어다닌 덕분인지 요즘 녀석은 비교적 얌전해졌다.
베르덴이 <신비>와 <베일>로 모습과 존재감을 은폐하려고 하자, 이자벨라가 그의 손목을 부드럽게 붙들었다.
“그냥 나가자. 애써 감출 거 없잖아? 가주가 가르간트에 있는 모두가 다 알 텐데.”
“그래도 시끄러워질 거다.”
“난 상관없는데?”
이자벨라의 눈을 잠시 마주한 베르덴이 제 모습 그대로 하차했다. 그러곤 그녀의 손을 잡아 일반적인 사내들처럼 에스코트했다.
그러고는 이자벨라가 손수 예약한 레스토랑에 발을 디뎠다.
“달빛의 정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존귀하신…….”
지배인이 성심성의를 다해 예를 갖췄다가 돌처럼 굳었다.
가르간트는 국제 신문이 발간되는 도시.
조금이라도 관심을 기울인다면 국제 정세는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당연히 신문에 그림으로 게재된 인물들까지도.
털썩.
지배인이 무릎을 꿇었다.
“에, 에온의 지고하신 신성과 에온의 두 번째 위상을 뵙습니다!!”
……누구라고?
각국의 신분 높은 손님들이 깜짝 놀라 레스토랑 입구로 눈길을 향했다.
설마, 하는 마음이 컸지만 절대로 헷갈릴 수 없는 두 사람의 외견적 특징이 시야에 담긴 순간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주인 없는 땅의 대군주를 배알하나이다.”
“에스티리아의 절대자를──”
“블랙 아워의 지도자를──”
“거룩한 초월자의 존안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눈치 빠른 자들은 냅킨으로 입가를 닦을 새도 없이 경의를 표했다. 어느새 레스토랑은 알현실이 되어 버렸다.
단신으로 국가를 멸하고 세계를 격동시킬 수 있는 강대한 존재.
그것이 초월자를 향한 인식이었다.
후욱.
베르덴은 공간에 간섭하는 <염동력>으로 모두의 몸을 강제로 일으켰다. 인사는 받았으니 더 큰 소란을 일으키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자벨라가 말했다.
“이 시간에 ‘가주’라는 이름으로 예약했는데. 확인해 줄래요?”
달빛의 정찬의 예약 목록.
분명 그런 이름으로 예약이 되어 있긴 한데, 설령 예약이 되어 있지 않아도 문제없었다. 자리가 없으면 만들 테니까.
“바로 모시겠습니다.”
지배인이 직업 정신에 투철한 필사적인 미소를 지었다. 아주 좋은 인상을 남겨 드려야 한다. 그는 이 접대에 목숨을 걸었다.
그리고 곧바로 소식을 전달받은 주방에도 비상이 걸렸다.
주방장도 강제로 목숨을 걸게 됐다.
* * *
달빛의 정찬과 어느 정도 떨어진 건물 옥상에서 아드리안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주군과 단둘이서 시간 보낼 거라고 설레발치더니. 제대로 신났군, 이자벨라.’
이렇게 대놓고 휴일을 보내는 건 처음이니 그럴 만도 했다. 일단 지금으로선 정실 자리에 가장 가까운 건 이자벨라였다.
아무튼.
아드리안의 임무는 호위다. 그러니 날이 밝든 어둡든 간에 무슨 일이 있어도 맡은 바 소임을 다할 생각이었다.
호위가 아니더라도 주군의 검으로서 당연한 의무였다.
“그만 간 보고 나와라, 쥐새끼.”
“…….”
그림낙스의 수장, 블라드가 타 건물의 그늘에서 걸어 나왔다.
한때 귀족들과 왕족들의 의뢰를 받아 망나니를 죽이려 했었던 암살자 집단의 우두머리와 초월자가 된 망나니가 만났다.
블라드가 말했다.
“에온의 대답을 들으러 왔다.”
놈의 용건은 마탑 체제에 반하는 소사이어티와 에온의 관계를 만천하에 드러내지 않으려면, 동대륙에서 손을 떼라는 협박이자 요구다.
저들의 배후가 마울러임은 이그나시아를 통해 확정되었다.
“대답? 가서 전해라.”
아드리안이 가르간트의 풍경 속에서 블라드를 직시했다.
“수왕한테서 겨우 지킨 그 목, 오래도록 간수하고 싶으면 적당히 짖으라고.”
꿈틀.
블라드의 눈가가 씰룩였다.
살기가 요동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