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7화 세계 회의 (1)
각 호위를 제외한 참석자의 숫자는 하원 28명과 상원 26명으로 총 54명이다. 마법계 총회의에 출석한 22인보다 두 배 이상은 많다.
당연히 대륙을 사분오열하는 세력이 무려 54개나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안에는 두 명이서, 혹은 세 명이서 한 세력을 대표하는 인원도 포함되어 있다.
“이번 세계 회의는 마법계 총회의에서 결론 낼 수 없는, 그리고 대륙적인 논의가 필요한 사안을 위해서 소집됐어.”
이그나시아가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주인 없는 땅에 대한 에온의 권역 정당성과 퀘론 렉클로스가 마해를 탐험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적룡, 사르칸드라의 꼬리 비늘.”
“…….”
“이 둘을 기본 대의제(大議題)로 선정하고, 이후 참석자의 권한으로 상정된 안건은 소의제(小議題)로 지정할게. 그리고 소의제 중에서 사안이 중대하다는 의견이 나오거나 결론이 나지 않을 경우에는 ‘의장’의 판단하에 대의제로 상정될 수 있어.”
대의제는 모든 참석자가 공개 투표를 진행하여 그중 3분의 2 이상의 찬성표가 확보되어야 통과되는 주제를 의미한다.
소의제는 표결에 임의로 참가한 참석자가 비공개 투표를 진행해 절반 이상의 찬성을 얻으면 통과되는 논제를 뜻한다.
이 둘을 구분하는 건 ‘책임’이다.
강대국에 불리한 대의제의 찬반을, 본인이 보는 앞에서 결정하는 건 약소국으로서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보복이 걱정스럽다.
직접적인 앙갚음은 없더라도 강대국이 약소국과 우호적으로 외교할 리가 없다. 그를 빌미 삼아 은근한 압력만 행사해도 심각해진다.
아무것도 당하지 않아도 그것 그것대로 불안을 야기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의제 표결은 피해서는 안 되고, 피할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 되며, 막을 수도 없는 결의다.
세계에 영향력을 끼칠 결정에서 책임을 등지는 건 허락되지 않는다.
그거 하나 감당하지 못할 거면 세계 회의에 있을 이유가 없다.
실제로 대의제 투표 거부는 세계 회의의 법률상 당장이라도 회의장에서 쫓겨날 수 있는 아주 엄격한 사항이다.
그렇게 추방되면 더 이상 국가, 혹은 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국제적으로 권리를 주장할 자격의 상실…….
그게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일인지는 구태여 설명할 것도 없다.
하지만 모든 의제를 대의제로 처리하는 건 너무 불합리하다. 절차도 번거롭고, 약소 세력은 참석하지 않느니만 못하게 된다.
회의는 야만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그래서 비교적 심각성이 떨어지는, 대륙보다는 국가적인 논제는 그런 걱정 없이 자유롭게 판단을 하도록 설정했다.
이런 자격조차 없으면 하원, 특히 소국은 참석할 이유가 없다.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흘러가는 대로 흘러갈 테니까.
이야말로 자연과 사회의 차이점이다.
자연에서는 강자만이 권리를 갖고 약자는 먹히고 도태될 뿐이지만.
사회에서는 강자만이 아니라 약자 또한 나름대로 권리를 배려받는다.
그러한 존중이 자연과도 비교도 안 되는 탄탄한 지배 체계를 구축한다.
밑바닥으로 떨어지면 바닥이 있고, 위로 높이 솟구치면 천장이 있다. 서로가 아무리 멀어져도 틀을 벗어날 수 없다.
강자와 약자가 형식을 공유한다는 건 그 자체로 안정감을 형성한다. 바로 그 안정감이 세계의 기준을 정하는 것이다.
모여, 논하라.
그렇기에 세계 회의(會議)다.
“그럼 의장부터 선발할게. 솔직히 이건 길게 따질 거 있나? 공식적으로 세계 회의를 제안하고 추진한 인물이 레프라기움 마탑주니까, 마법계 총회의에서와 마찬가지로 레프라기움 마탑주에게 의장을 일임하는 게 가장 깔끔하겠지?”
관제의 인드렌이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계외, 자네라면 스스로를 의장으로 추천할 줄 알았는데.”
“의장도 재밌을 것 같긴 한데 오늘따라 이쪽이 좀 끌려서. 게다가 가벼운 것보다 무거운 쪽이 분위기에 더 어울리잖아? 권한에 따라서 세계 회의 주최자가 직접 추천한 참석자는 의장 후보직을 거부할 수 없고, 전체의 절반 이상이 찬성하면 의장으로 결정돼. 자, 찬성은 거수.”
세계 의장 선출은 대의제와 동급으로 취급되기에 전원 투표에 참여해야 한다.
스윽.
이그나시아를 포함한 참석자들이 하나둘씩 오른팔을 들어 보였다.
인간이 아닌 안티아스, 세렌디아, 아르쿨은 그런 의장 자리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지 아무런 반문 없이 응했다.
마지막으로 섭리자가 찬성 의사를 보였다. 역시 참석자 본인과 직결된 안건이라고 해도 예외 없이 찬반을 정해야 한다.
“찬성 54명. 반대 0명.”
이그나시아가 손끝으로 상원 테이블을 세 차례 두들겼다.
규칙적인 울림이 통과를 알렸다.
“레프라기움 마탑주는 세계 의장으로서 세계 회의를 진행하라.”
섭리자가 몸을 일으켰다.
수백 쌍의 눈동자가 한곳으로 향한다. 수많은 생각으로 얼룩진 시선들에도 그는 긴장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나, 레프라기움 마탑주는 세계 회의가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으며, 의장으로서 주어진 임무를 다할 것을 맹세하겠다.”
담백한 선서였다.
“본 회의에 들어가기 앞서 피울음 역병과 대규모 언데드 사태로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은 모든 이와 모든 국가에 애도를 표한다.”
슬픔을 입에 담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한 낯빛은 고요하기만 할 뿐 감정의 색채는 보이지 않았다.
그 담담한 태도는 왠지 모르게 현 다크워튼 마탑주와 흡사한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현재 참석자의 구성에 일부 의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불필요한 소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조율을 거치겠다. 에스티리아 왕국, 중앙으로.”
“……예.”
에스티리아 왕국을 대표하는 실리스가 회의장 중심에 섰다.
‘엄청난 압박감…….’
당연히 각오한 상황인데도 사방에서 날아오는 시선에 뭉개질 것 같다. 초월자는커녕 각국 왕들의 눈빛마저도 무겁기 그지없다.
그래도 마음을 최대한 가다듬으며 목소리와 손의 떨림을 없앴다. 실리스에겐 몇 번이나 초월적 존재를 접해 본 경험이 있다.
“에스티리아 왕국은, 재작년 왕위 계승을 통해 발르그나 베인 디 에스티리아가 현 왕좌에 올랐다고 세간에 알려져 있다. 사실인가?”
“예, 사실입니다.”
“그런데 제1왕녀 실리스 리벤 디 에스티리아가 이곳에 있군. 에스티리아 국왕의 권한을 대행한다면 그 자격을 증명하라.”
잠깐의 침묵이 감돌았다.
“저는 권한 대행이 아닙니다, 의장님.”
“설명하라.”
“제 존재가 곧 자격입니다.”
실리스가 가슴께에 손을 얹었다.
“저, 실리스 리벤 디 에스티리아가 에스티리아의 진정한 왕이기에.”
……!
하원에서 술렁임이 커졌다.
상원에서는 건조하거나 조금 흥미로운 눈빛을 보냈다. 그들에게 한 나라의 왕위 다툼의 가치는 딱 그 정도였다.
“발르그나 베인 디 에스티리아는?”
“발르그나에게 왕위를 넘긴 것부터 제가 계획한 대로입니다. 제 존재를 감추면서 에스티리아 왕국을 지배하기 위해 발르그나뿐만이 아니라 선대 왕을 폐위시킨 것도 저입니다. 제2왕자와 제3왕자를 계승 전쟁으로 살해한 것도 저입니다.”
아버지와 형제들을 죽였다.
친족 살해를 보란 듯이 밝힌 실리스의 기행은 여러 왕에게 충격을 안겼다. 그 정도의 혁명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럴진대 한참 어릴 적 이지를 상실한 인형 왕녀가 어떻게 그런 잔혹한 짓을 성공시킬 수 있었단 말인가?
“그걸 이제 와서 밝히는 이유가 무엇인가.”
“더는 감출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실리스가 고개를 움직였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역시 베르덴이 있었다.
실리스의 권력과 정당성과 자신감은 에온에서 나온다는 걸 모두가 두 눈으로 확인했다.
섭리자가 묻는다.
대상을 바꿔서.
“실리스 리벤 디 에스티리아를 에스티리아의 왕으로 인정하는가?”
베르덴이 답했다.
“내가 인정한다.”
“알겠다. 에스티리아 왕국은 자리로.”
실리스는 깊이 예를 갖춘 뒤,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유가 어찌 됐든 친족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건데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
당연하다.
여기서 중요한 건 실리스가 에스티리아 왕국을 대표할 수 있느냐니까. 타인의 상식적인 의견 따윈 아무래도 좋을 일이다.
베르덴의 책임하에 그녀는 정당한 에스티리아 국왕이었다.
마울러가 이죽거렸다.
“멋대로 주인 없는 땅을 통일해 권역을 선포하질 않나, 잘 사는 나라에 간섭해 왕위를 마음대로 뺏질 않나, 계명이랍시고 뒷세계에서 학살을 벌이지 않나. 참 대단한 새끼야.”
아드리안의 눈에 살기가 깃들었지만 그게 미처 표출되기도 전에 섭리자가 목소리를 높여 마울러를 제지했다.
“내게 발언권을 얻거나, 자유롭게 논의가 가능한 상황이 아니라면 다른 참석자에게 직접적인 의사를 표명하지 마라. 3회 경고 시 침묵을 강제하겠다.”
“세계 회의답게 격식은 차리라는 건가. 주의해 보지.”
마울러의 도발적인 언사에도 베르덴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예 관심이 없다는 듯 눈길도 주지 않았다.
사실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다른 쪽으로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베르덴은 개개인이 아닌 참석자 전체를 고려하며, 여러 화두를 던졌을 때 저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계산했다.
‘……내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자가 다수이긴 하지만, 소문으로 접한 성격을 크게 벗어난 행동을 해도 무대는 마련된다. 회의 자체가 무마되지 않는 한 문제는 없어.’
당연하게도 세계 회의가 갑자기 중단되는 일은 절대로 없다. 테이블 위에 오른 모든 의제는 투표로써 반드시 결론 난다.
뒤로 물러날 곳은 없고, 발판은 무너지고 있으니 앞으로 나아갈 길만이 존재한다.
어느 한 사람이 아닌 세계 회의에 참석한 모두가 선택을 강요당하는 형국이다. 항거할 수 없이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는 것과 진배없다.
만반의 준비를 갖췄어도 덮쳐지는 순간 그대로 쓸려 나갈 뿐이다.
‘하지만 그 파도의 방향을 미리 주도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게 베르덴의 궁극적인 노림수였다. 말 그대로 세계 회의에 혼란이란 마법을 터뜨려 인위적으로 해일을 일으킬 작정이다.
바로 ‘운명’의 일부를 폭로함으로써.
그 순간이 되면 마울러가 알려 줄 것이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 * *
수왕, 안티아스는 체구에 걸맞은 가장 큰 좌에 앉은 채 턱을 괴었다.
짐승을 아득히 넘어선 괴물의 눈동자가 몇 명을 주시했다. 과거에 죽였다고 생각한 마울러도 그중 하나였다.
하나 그가 가장 큰 관심을 가진 건 잿빛 머리의 초월자였다.
‘과연…… 바람 없는 초원에 짐승 내음은 퍼지지 않는다는 건가.’
속내를 알 수 없는 놈들 중에 가장 위험한 냄새를 풍기고 있다.
부족장들은 섭리자와, 네크로맨서, 성녀, 베르덴을 가장 위험한 종자로 꼽았는데 베르덴은 그들과 뭔가가 근본적으로 달랐다.
동물적인 촉이었다.
심지어 이상한 건 분위기뿐만이 아니다. 베르덴은 모종의 힘을 체내에 억누르고 있다.
애써 봉합한 것 같으나 툭 치면 터져 버릴 것같이 불안정하다.
‘천부적인 샤낭꾼이군. 게다가 질 좋은 미끼를 가져온 모양인데.’
세계 회의를 사냥터로 인지하는 수왕도 쓸 만한 미끼를 하나 갖고 있었다. 여기서 가장 큰 포식자이자 먹잇감을 자극하고 꾀어내기에 충분하고 넘치는 그런 정보를 말이다.
관건은, 언제 미끼를 던질 것인가.
그때, 섭리자가 말했다.
“다음 디아문 마탑의 반타룬 타레시온, 그리고 알버트 윈디로브.”
“아, 예!”
“네!”
디아문 마탑주 후보 둘이 몸을 일으킨 순간 다시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로 간의 의견 충돌로 인해 하나의 세력으로서 의견이 엇갈리거나 표결에 차질을 빚는다면 의장의 권한으로 제재하겠다. 테르네티아 연방과 벨디른 공화국도 주의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반드시 주의하겠습니다, 의장님.”
연방의 대표들과 공화국의 최고 위원들이 최대한 머리를 숙였다. 섭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엉거줌추해 있던 반타룬과 알버트가 조용히 다시 착석했다.
에스티리아 왕국에 대한 여러 참석자의 의문을 해소하고, 대표가 다수인 국가 및 세력에게 사전에 주의를 준 섭리자가 형식적으로 세계 회의의 규칙을 설명했다.
하원은 단 하나의 소의제를, 상원은 최대 두 개의 소의제를 올릴 수 있다.
소의제가 의장에 의해 대의제로 넘어가면 해당 소의제를 상정한 세력은 하원이든 상원이든 더 이상 의제를 발의할 수 없다.
소의제와 대의제는 찬성으로 통과하면 이번 세계 회의에서 수정 및 폐기할 수 없다.
소의제와 대의제는 거부로 부결되면 단 한 번만 재상정이 가능하다. 그리고 부결된 안건을 재상정한 참석자는 더는 의제를 발의할 수 없다.
모든 의제에는 자유 토론이 반드시 진행된다.
갈등을 조장하는 발언은 의장의 판단으로 제지할 수 있다. 물리적인 마찰은 사안에 따라 징계가 내려질 수 있다.
다른 참석자의 표결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모든 행위는 엄격히 금지한다.
초월자는 의념의 행사를 금지한다.
…….
그렇게 세부 규칙까지 하나하나 언급한 섭리자가 자리에 앉았다. 지루하다며 이그나시아가 테이블에 머리를 얹고 있다.
“이것으로 조율을 마치고, 본회의를 개시한다.”
이그나시아가 그러했던 것처럼 섭리자도 손끝을 움직였다. 상원 테이블을 통해 전해진 울림이 세 차례 내면을 떨게 만들었다.
“먼저 대의제와 소의제를 논하기 전에 전염병의 피해와 그 피해를 회복할 방법을 논하겠다. 사상자의 집계는 아티슨 마탑주가, 경제적 피해액의 추산은 마그누스 은행장이 발표할 것이다. 질문을 비롯한 참석자들의 자유 발언을 허용하되 가급적 발표가 끝나고 하도록. 아티슨 마탑주.”
“제 차례군요.”
아티슨 마탑주, 펠디안느가 일어서서 헛기침을 해 주목을 끌었다.
“중앙 대륙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저희 아티슨 마탑의 조사에 따르면, 일단 테르네티아 연방의 피해는───”
“질문!”
이그나시아가 손을 번쩍 들었다. 테이블에서 얼굴을 뗀 그녀가 양손으로 턱을 받치곤 싱글거리며 물었다.
“이번에 전염병 감당 못 해서 감염자든 아니든 간에 몰래 죽이고 태워 버렸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사실이니?”
움찔.
성자, 레온하르트가 흠칫하며 본능적으로 로니아 국왕을 노려봤다.
그 감정을 수왕이 포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