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1화 세계 회의 (5)
다크워튼 마탑주, 라인델이 손을 모았다.
“언데드라고 해서 충분한 지성과 윤리를 갖추고 있다면 배척당할 이유는 없지. ”
“언데드는 존재 자체가 해악입니다.”
“성녀의 입장은 이해한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일반적으로 언데드가 근처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신 이상을 일으키거나 살이 녹아내리지는 않으니.”
라인델이 덧붙였다.
“물론 사기(死氣)를 통제할 수 있다는 선에서.”
언데드 사태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건 인명이 아니다. 바로 땅이다.
언데드 무리가 내뿜는 죽음의 기운은 생기를 잠식하고 끝내는 앗아가 버려 풍족한 대지도 불모지로 전락시켰다.
“강력한 언데드일수록 강대한 사기를 품고 있는 건 순리. 그리고 그 본성도 살아 있는 존재를 더욱 증오하는 쪽으로 기운다. 만약 공존이 가능한 언데드가 있다면 본성과 사기를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선제지.”
그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애석하게도 나는 그런 부류의 언데드를 실제로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공존 가능한 대상으로 언데드를 논해야 하는지 조금 의문이군. 이게 내 생각이다, 베르덴.”
“고견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제 의도가 다르게 전해진 것 같습니다. 언데드는 논의의 중점이 아니라 그저 일부에 불과합니다.”
베르덴이 모두를 마주했다.
“오해가 깊어지기 전에 정정하지. 내가 소의제로 명시한 건 언데드가 아닌 이형종의 종족 제한 철폐다. 정확히는 모든 지성체와의 공존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게 내 바람이다.”
교황이 묻는다.
“그 바람의 저의가 무엇입니까?”
“종족을 차별하지 않는 것.”
베르덴이 단언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루아스 교국의 인간 중심 사상을 무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 건으로 갈등을 빚을 마음도 없고.”
그의 말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성녀, 에르세티아.”
“말씀하세요.”
“나는 루아스 교국의 공로를 인정한다. 그건 어떤 세력도 대체할 수 없는 업적이지. 빛의 종교 덕분에 인류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해도 절대 과언은 아니야. 인간이라면 누구나 루아스교에 은혜를 느끼고 있을 거다. 빛의 신앙자가 아닐지라도.”
성녀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방금까지 첨예하게 대립한 상대에게서 듣기 좋은 말이 나오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순간 망설인 것이다.
“은혜라…… 역시 신성은 빛의 은총을 이해하고 있었군요. 참으로 기쁜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종족을 차별하지 않으려고 하는 건가요?”
성녀가 눈이 부실 듯한 미소를 지으며 답변을 요구했다.
베르덴이 내심 눈을 가늘게 떴다.
‘수틀리면 뒤집어엎겠군.’
아름다운 웃음 뒤에 뚜렷한 경계가 그어진 것이 보인다. 중간은 없다. 선에 닿는 순간 격렬하게 반대 의사를 보일 것이다.
“나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지성’이니까.”
베르덴이 자신의 관자놀이를 두드렸다.
“마치 계급처럼 지성에 따라서 신분에 차등을 둘 계획은 없다. 감정을 느끼고,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스스로를 통제할 줄 아는 존재에게만 사회 공존의 기회를 주고자 하는 거지.”
인간과 동급의 지성과 생활 습관을 갖춘 괴물이 있다. 인간은 괴물보다 우월한가?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로 괴물은 배제되어야 하는가? 그걸 기준이라고 하기엔 한없이 같잖다.
“여길 봐라. 엘프와 수인, 그리고 드워프. 그들은 당연하게도 인간이 아니나 인간과 함께 세계 회의에 있다. 우리 알파와 베타도 엄연히 이형종이고. 이와 같은 맥락이지. 나는 종족이라는 벽으로 경계를 구분하고 싶지 않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모험가 길드 본부장, 살베르 웬디시르가 발언을 위해 손을 들었다.
“종족의 벽을 없애고자 하신다면 이형종뿐만이 아니라 아인종도 포함인 것 같은데, 고블린도 지성과 윤리만 갖춘다면 공존 대상이 되는 겁니까?”
“알다시피 아인종의 가짓수와 개체수는 이형종과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으니 신중하게 접근할 예정이다. 적어도 여기서 아인종까지 범위를 확대할 예정은 없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되겠지.”
베르덴이 팔짱을 꼈다.
“그게 내 이상(理想)의 일환이다.”
……!
초월자가 자신의 이상을 입에 담았다는 건 절대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광기는 휘어지지 않는다.
당장 세계 회의에서 거부당해도 몇 년이 되든 몇십 년이 되든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짝, 짝, 짝, 짝, 짝!
이데라트 연맹장, 테리웬이 손뼉을 쳤다. 그는 모든 인간종의 화합을 바라고, 사회에서 공존하게 될 이형종이 많아지길 원하는 통합주의자였다.
“아. 이 얼마나 훌륭한 사상인가! 다른 인간종에 대한 차별은 전혀 없이, 이형종에 이어 아인종까지 포용하시다니. 이데라트 연맹국의 대표로서 감복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 * *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건 이데라트 연맹장만이 아니었다.
그를 호위하는 이데라트 연맹국의 다종족 최고 외교관, 대폭주, 브라오닉 스트롬도 대놓고 찬사를 보냈다.
“역시 제대로 깨어 있군. 그야말로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초월자야.”
“…….”
브라오닉은 마법계 총회의에서 베르덴을 봤을 때부터 그 비범함을 느꼈다는 듯 만족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제자인 중앙 대륙 4강의 바리건트는 말없이 베르덴만 쳐다보았다.
“지난 대의제에서 공존 가능한 이형종을 제한한 이유는 충분히 알고 있다.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힘과 습성은 경계의 대상이니. 공존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개체도 있고. 그래서 에온의 권역 내 이형종 거주 구획을 조성해서 시범 적용할 계획이다. 결과가 어떨지는 그 후에 따져 봐도 늦지 않겠지.”
베르덴이 모험가 길드 본부 측과 루아스 교국 측, 그리고 다크워튼 마탑 측과 차례대로 시선을 교환했다
“기존에 그러했듯이 모험가 길드가 이형종의 사회 공존을 심사하되 예외로 언데드는 다크워튼 마탑에서, 악마는 루아스 교국의 판단을 중점으로 결정을 내리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성녀가 눈가를 씰룩였다.
“기어코 악마까지 포함할 생각이군요.”
“악마라는 이유만으로 대상에서 배제하는 건 내 이상에 부합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결국 결정권은 루아스 교국이 갖고 있다. 그래도 못 받아들이겠나?”
“…….”
성녀는 즉답하지 않고 입을 가린 채 교황과 레온하르트와 대화를 나누었다. 두 사람도 덩달아 입을 가렸다.
이그나시아가 구축한 세계 회의장은 환영으로 여러 장치가 구현되어 있다.
상원과 하원의 참석자는 임의로 목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은폐할 수 있다. 다만 모습은 보이기에 입 모양은 따로 숨겨야 했다.
성녀와 교황이 진중하게 논의한다. 레온하르트는 경청하려고 노력했지만 너무 어려운 이야기라 잘 이해는 하지 못했다.
‘종족 차별을 하지 않는 건…… 좋은 거 아닌가?’
그게 레온하르트의 생각이었다.
세계 회의에서 처음으로 수인, 엘프, 드워프를 본 그는 부정적인 감정은 들지 않았다. 신기하고 놀라운 게 전부였다.
이형종도 인간만 한 지성과 윤리가 있다면 토벌할 이유가 없지 않나, 순수한 레온하르트는 그런 생각만 들었다.
“레온은 어떻게 생각하시죠?”
“아, 크흠.”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할 만한 마음은 못 되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성녀와 교황의 뜻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예, 그럼 동의하는 걸로.”
그렇게 루아스교의 신인들이 일제히 입을 가린 손을 내렸다.
교황이 말했다.
“신성, 악마는 대상에서 제외해야겠습니다.”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비틀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칼리아와 로벨린은 식은땀을 내버려 두며 상황을 주시했다.
두 사람은 베르덴이 무엇을 할지 자세히 들은 적 없었다. 이자벨라만큼 반응을 감추는 게 능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필요한 보안이었다.
자칫하면 수왕이 레온하르트의 감정을 읽어 내고 로니아 국왕을 이용했던 것처럼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있었기에.
“……최대한 양보했다고 생각하는데.”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교황이 조건을 보충했다.
“다른 이형종이야 원래대로 모험가 길드에서 주관하되 언데드는 다크워튼 마탑과 저희 루아스교가 동시에 심사하겠습니다. 두 세력이 동의하지 않으면 어떤 식으로든 언데드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이 조항을 추가하지 않으면 저희는 신성의 소의제를 거부하겠습니다.”
완강한 태도다.
사실상 언데드나 악마나 사회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트집을 잡으면 끝도 없을 테니까.
베르덴에겐 걸림돌이다.
하지만 그 걸림돌을 치우는 건 베르덴 본인이 아니었다.
라인델이 와인 잔을 내려놓았다.
“루아스 교국이 이 다크워튼 마탑을 이리 불신할 줄은 몰랐군. 고작 언데드를 검증하는 것 하나 맡기지 못해서 동시 심사를 제안하다니.”
성녀가 반박했다.
“다크워튼 마탑주는 신성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내가 편의를 봐줄 거라고 보나?”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선언하시죠. 사회에서 공존하게 된 모든 언데드가 일으킨 죄는 다크워튼 마탑주가 책임지겠다고.”
도발적인 제안이었으나 라인델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다크워튼 마탑이 아니라 마탑주를 책임자로 명시한 것으로부터 그녀의 근본적인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나를 주검의 영광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눈엣가시로 여기는군.’
그런 성녀를 이해하기에, 라인델은 딱한 감정을 완벽하게 감추곤 잠시 생각에 잠긴 척 시간을 끌다가 말했다.
“무례하군. 하나 좋다, 내가 책임지지.”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더는 반대할 수 없겠군요. 추가 조항 중에 언데드 건은 제외하도록 하죠. 신성, 받아들이시겠습니까?”
톡톡톡.
베르덴이 눈을 감은 채 테이블을 두드리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군. 악마는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지.”
“그때는 또 논의해 보도록 하죠.”
투표는 어디까지나 다수결로 진행되지만 벌써 통과된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것이 강대한 세력의 힘이었다.
그리고 상원이나 하원이나 딱히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이형종 사회 공존 구획은 여러모로 위험 요소가 커서 운영하기가 까다로운데 그걸 대신해 주겠다고 하는 것이니. 그렇게 되면 돈도 노력도 없이 해당 연구 자료를 얻을 수 있다.
마탑, 국가, 초월자 세력 전부 그 시범 결과에 관심이 꽤 있었다.
이에 베르덴은 내심 입꼬리를 비틀었다.
‘예상대로.’
악마?
아인종?
베르덴이 종족을 가르는 벽을 허물고자 하는 건 진심이나 그건 전혀 급할 게 없다. 세계 회의에서 언급하지 않아도 아무래도 좋을 정도로.
어차피 루아스 교국이 군림하는 한 모든 악마는 양지로 나올 수 없다. 아무리 베르덴에게 우호적인 악마들이라고 해도 예외는 없다.
악마는 베르덴이 루아스 교국과의 협상 카드로 이용하기 위한 미끼였다.
이상을 향한 욕망을 잠시 물리는 척해서 그들의 체면을 세워, 결과적으로 언데드에 대한 경계심을 최대한 약화한 것이다.
‘첫 번째 단추는 끼웠다.’
다크워튼 마탑주는 베르덴에게 아주 우호적인 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죽음에 관련된 금기를 알려 주지도 않았을 터.
모험가 길드에는 흑요 등급 모험가인 흑해와 마의 공포가 있다.
흑해는 바다를 빌미로 협조를 얻으면 된다. 마의 공포는 다름 아닌 방주의 다섯 선장 중 하나인 재액의 토벌자다.
인맥은 이미 마련됐다.
세계 회의 이후 초대 네크로맨서는 합법적으로 활동해도 문제가 없다. 문제없이 기준을 통과할 테니까.
황금의 죄인도 마찬가지다.
이자벨라와 레그리트는 마족이나, 현시대에서는 마족이란 종족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정체를 공개할 건 없고.
‘이로써 전력의 갈래가 늘었군.’
베르덴이 이형종 구획까지 지정하려는 이유는 초대 네크로맨서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형종의 전력화.
베르덴은 모든 방면에서 에온의 총력을 강화할 작정이었다. 그가 추구하는 힘에 의한 자유는 종족을 가리지 않는다.
“크크큭, 네 주군의 혓바닥도 위대하긴 하구나.”
“이걸 안 싸우네. 아깝다.”
수왕이 아드리안을 흘끗 바라보면서 큭큭 웃고, 이그나시아는 첫 번째 대의제 언제 끝내고 싸우냐고 칭얼거렸다.
‘무슨 구경 왔나…….’
레프라기움 마탑의 대행자, 메이아가 속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섭리자가 의장으로서 회의를 속행했다.
“자세한 대의제 개정은 첫 번째 소의회 투표 전 시간을 주도록 하겠다. 베르덴의 발언이 끝났다. 다음 제의자, 이데라트 연맹장은 발언하라.”
베르덴의 사상에 적극적으로 찬동한 이데라트 연맹장의 차례였다. 강하게 목을 가다듬은 그가 힘 있게 말했다.
“제가 발의할 소의제는 법률적인 것보단 일종의 제안입니다. 아무래도 이데라트 연맹국으로는 소화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그나시아가 눈을 빛냈다.
“오, 뭔데?”
“아마 오래된 역사와 보물에 관심이 있으신 분은 한 번쯤 들어 보셨을 겁니다. 800년 전에 사라졌다고 알려진 하나의 검.”
이데라트 연맹장이 가슴을 폈다.
“용검, 마그라스를.”
곳곳에서 반응이 일었다.
특히 내면적으로 동요를 느낀 건 주검의 영광의 진실에 대해 아는 자들이었다. 베르덴처럼 6대 전설을 아는 인물은 더욱이.
용검의 마지막 주인은 옛 왕이었다.
그걸 자세히 알 리가 없는 이데라트 연맹장은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저희 이데라트 연맹국에서 용검, 마그라스의 소재를 찾은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