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9화 세계 회의: 진실 서약 (2)
상원에서 모험가 길드, 은행, 이데라트 연맹국, 프로하스는 아마 중립을 위해 진실 서약에 참여하지 않은 모양이다.
또한 같은 세력 내의 참가자가 많을수록 오히려 불리했기에 루아스 교국과 아르나크 제국 등은 딱 한 명씩만 대표로 나왔다.
‘게다가 레프라기움 마탑까지.’
베르덴은 회의장 전체를 주시하며 레드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섭리자가 이 서약에 참석한 이유를 헤아려 보았다.
세계 회의 참석자를 통틀어 가장 많은 비밀을 가진 건 레프라기움 마탑이다.
지독한 신비주의를 고수하는 서열 1위의 마탑과 비교하면 베르덴과 루아스교가 무엇을 얼마나 숨겼든 간에 새 발의 피일 것이다.
‘어느 모로 봐도 레프라기움 마탑이 가장 불리한 상황인데. 그만한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여기에 있다는 건가. 어쩌면 서약을 무시할 수 있는 수단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솔직히 말해서 아무리 섭리자라고 해도 이곳에 모인 초월자들의 이목을 완벽하게 속여 넘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이야기다.
불가능까지 염두에 두는 건 베르덴의 오랜 습관이었다.
아무튼 섭리자가 누구처럼 재미로 진실의 서약에 맹세하진 않았을 터였다. 이런 상황이라 섭리자에게 질문이 몰릴 수도 있다.
누가 그 기회를 붙잡을지는 주사위 눈금에 달려 있지만 말이다.
베르덴은 상황을 운 따위에 맡기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이번엔 다 같은 처지인 터라 딱히 이렇다 할 거부감은 없었다.
차례가 오면 누구에게 무엇을 질문할지.
질문이 오면 어떻게 답해야 할지.
베르덴은 머릿속으로 중심이 되는 줄기를 세워 대략적으로 정리해 두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적으로 몰두하는 건 변수에 취약하다.
애초에 베르덴은 진실의 서약에 불참할 생각은 없었지만, 레프라기움 마탑과는 달리 사실상 강제로 맹세한 형편이니까.
수왕이 사냥감으로 결정한 건 루아스 교국만이 아니다. 표적이 된 이상 미처 생각지도 못한 변수마저 대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지금은 수왕의 차례다.
“5번, 수왕, 안티아스. 질문하라.”
“…….”
진행에 따라 수왕 특유의 동공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그와 정반대로 초월자들의 생각은 빠르게 흘러간다.
베르덴이 초월적 존재 다수를 죽였다는 의혹을 지적할 것인가, 루아스교가 주검의 영광이라는 어떤 집단을 은폐한 걸 헤집을 것인가…….
해당 내막을 모르는 참여자들은 의심과 흥미를 숨기지 않았다.
수왕은 또 어떤 기행을 펼칠까?
세계 회의의 분위기가 이렇게 몇 번이고 바닥으로 떨어진 건 수왕 때문이나, 그래서 한편으론 순수하게 즐겁기도 했다.
대륙에 군림한 강대한 존재끼리 화기애애하게 논의하고 결론짓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
이곳은 와류의 현장이다.
서로 소용돌이에 휘말리면 어쩔 수 없이 부딪칠 수밖에 없다. 충격을 견디지 못해서 갈기갈기 찢기든 남을 박살 내든 간에 본인 역량이다.
이야말로 세계다.
“가레스 시릴리아드.”
……!
수왕이 직접 베르덴도, 루아스교도 아닌 마울러를 지목했다. 14명의 눈길을 받은 수왕이 피식 웃으며 과자를 한 움큼 입에 처넣었다.
“이빨을 가진 자에겐 고기만 던지는 법이지.”
와작와작.
말인즉슨 그렇게나 궁금하면 질문 기회를 얻어서 추궁하란 뜻이었다. 먹잇감을 던져 줬으니 너희끼리 알아서 뜯어먹으라는 것.
철저하게 수왕의 의도에 끌려다니는 상황에 몇몇 눈꺼풀이 씰룩였다.
마울러가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놈의 빌어먹을 속담은. 지랄 말고 물어보기나 해라, 짐승.”
“분명 넌 죽어야 했었다.”
수왕이 목소리를 내리깔며 느닷없이 마울러의 죽음을 입에 담았다. 이건 세계 회의가 시작될 때 잠시 나눴던 이야기의 연장선이었다.
───분명 내가 심장을 갈랐고, 너는 바닥조차 보이지 않는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즉사하지 않았다 해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었어야 정상일 텐데.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그 무저갱에 뭐가 있었던 건가?
───네놈의 직감력이 무뎌진 거겠지.
───과연 그럴까.
오래전에 수왕과 마울러는 일대일로 사생결단을 벌였고, 마울러는 참패했다. 즉사에 가까운 치명상을 입은 듯하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살아 숨 쉬고 있듯이 결국에는 살아남았다.
수왕은 그걸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내 손톱이 네 심장과 장기를 찢어발기면서 분명 초월자의 항상성이 깨진 걸 느꼈다. 바로 전엔 제대로 거동할 수 없도록 신경마저 뜯어 버렸고. 그런 와중에 그 높이에서 추락하기까지. 아무리 회복력이 좋다고 한들 살아남을 가능성은 전무했다.”
“…….”
“내 직감력이 무뎌졌다고? 그럴 리가.”
수왕이 살기를 내비쳤다. 사냥꾼의 확신이 깃든 시선이 마울러를 노려봤다.
흉악한 동공이 세로로 갈라졌다.
“대체 어떻게 살아 있는 거냐, 가레스.”
* * *
수왕의 무거운 질문이 던져졌다.
줄곧 점잖으면서도 장난기 어린 태도로 이 판을 어지럽히던 그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으르렁거리는 듯 낮게 울리는 수왕의 음성은 한없이 진중했다.
정적이 회의장을 집어삼켰다.
“…….”
마울러가 눈가의 음영이 짙은 채로 수왕을 마주 노려봤다.
절명의 순간이 떠오른다.
죽음을 앞두고 무저갱 아래에서 봤던 모든 것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꾸구국.
자연스럽게 몸에 힘이 들어가며 전완근이 근육의 결을 따라 갈라졌다. 뼈와 힘줄의 형태가 확실하게 드러난 커다란 주먹이 움찔 떨렸다.
진실의 서약이 마울러를 비추었다.
“……대답을 거부하지.”
마울러가 수왕의 첫 번째 질문부터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것도 일종의 답이었다.
마울러가 목숨을 건진 내막에는 외부에 밝힐 수 없는 사정이 있다. 단순히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면 굳이 숨길 이유는 없을 테니까.
이것이 진실의 서약을 행하는 의미다.
어떤 방식으로든 질문에 반응하는 순간 새로운 정보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여기선 마울러의 생존에 비밀이 있다는 게 확인됐다.
수왕이 그럴 줄 알았다며 즐겁다는 듯 나지막이 웃음을 흘렸다.
“그렇군. 누가 도와주기라도 한 건가?”
[일곱 번째 규약 ─ 모든 대답은 질문에 관련된 새로운 정보를 포함해야 한다. 답변에 거부했을 때도 그 이유를 간단히 설명해야 한다.]
마울러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그 정체는 말할 수 없다.”
정체는 말할 수 없어도, 조력이 있었다는 점을 마울러가 직접적으로 인정함으로써 일곱 번째 규약이 충족되었다.
“결국 누군가의 손이 네 목숨을 건졌다는 말인가. 그럼 조금은 이해가 가긴 하나…… 그 까마득한 절벽 아래에 너를 치료해 줄 만한 자가 있었다는 게, 곱씹어 보면 납득이 되지 않는군. 바람도 멈췄는데 나뭇잎이 흔들린다고나 할까.”
쨍그랑!
마울러가 던진 과자 그릇이 수왕의 머리 옆을 지나 벽과 충돌했다. 도자기 깨지는 소리가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다른 새끼한테 질문이나 해라. 괜히 떠보지 말고.”
“그럴 생각이다. 규약이 그러하니.”
“……개새끼가.”
아주 태연하게 초월자의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입담은 수왕의 본능일까.
인내심이 강한 그들의 속을 이렇게나 간단하게 뒤집어엎어 버리는 건 베르덴을 포함하며 모두에게 생소한 광경이었다.
섭리자가 말했다.
“다시 질문 대상을 정하라.”
[네 번째 규약 ─ 각 참석자는 한 번만 질문할 수 있다. 단, 질문을 거부당하면 다른 참석자에게 질문할 수 있다.]
수왕에게 두 번째 질문 기회가 주어졌다. 다시금 먹잇감을 물색하는 눈길이 스쳐 지나간다. 그러다가 그 야성이 한 곳으로 쏠렸다.
“레프라기움 마탑주.”
……?!
수왕이 섭리자를 가리켰다. 호전적인 음성과 함께 날카롭게 번뜩인 서슬 퍼런 손톱이, 먼 거리에서 섭리자의 목을 꿰뚫듯 겨누었다.
“두 눈으로 확인된 적은 없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8위계 초월자라고 들었는데. 너는, 네가 여기서 제일 강하다고 생각하나?”
“부분적으로는 그렇지 않으나.”
답은 즉각적이었다.
“종합적으로는 그렇다.”
섭리자가 모든 인간종과 공식 초월자를 포함해서 자신이 제일(第一)임을 선언했다.
화아아악!
천장의 눈동자가 섭리자를 응시하며 환한 빛을 내뿜었다. 마치 그 거침없는 대답에 찬사라도 하는 듯했다.
서약이 진실을 입증했다.
“대단한 자신감이군.”
수왕이 꼬리를 움직이며 이빨을 핥았다.
한번 붙어 보고 싶다는 눈빛이다.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일부 초월자도 그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직접 싸워 보지 않으면 결과는 모르는 거니까.
하지만…… 잠시 시간이 지나자, 섭리자를 향한 도전 정신은 사라지고, 오직 수왕에 대한 감정만이 마음에 자리했다.
섭리자가 스스로를 가장 강하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
무려 8위계 초월자니까.
실제로 그 경지를 본 사례는 없어도 섭리자라는 존재가 여타 초월자와 격이 다르다는 건 모두가 아는 바다.
그럴진대 저걸 꼭 질문해야 했나?
괜히 허무하게 기회만 날렸다.
이제 섭리자는 거부권을 쓰지 않는 한 한 번만 더 질문에 답하면 더 이상 질문받지 않고 진실의 서약을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사실에 서약의 참여자들이 보란 듯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베르덴도 제법 짜증이 났다.
“이런. 벌써 질문이 끝났군. 차례를 넘겨야 하니, 주사위를 돌리도록 하지.”
수왕이 적의를 한 몸에 받으며 조소를 아끼지 않고 거대한 주사위를 들어 보였다.
딱 봐도 일부러 그랬다.
섭리자를 향한 초월자들의 궁금증을 대놓고 농락한 것이다.
“와, 진짜 성격 제대로네? 나보다 더한데?”
이그나시아가 깔깔 웃으며 아주 솔직한 심정으로 말했다. 제라클 황제 옆자리에 앉아 있는 붉은 화산 클랜장, 아르쿨도 사견을 더했다.
“진짜 개패고 싶군.”
드워프의 진심에 성녀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왕이 등 뒤로 팔을 당겨 주사위를 던졌다.
후욱───!
맹렬한 속도로 쏘아져 나간 주사위가 깔끔하게 직선을 그렸다. 그 경로의 끝에는 다름 아닌 베르덴이 있었다.
베르덴은 공간을 지배해 주사위를 잠시 붙잡고는 그 운동력을 휘어 곡선으로 틀었다. <공파>, 거기에 공간 충격파를 더했다.
주사위는 이전보다 날카로운 속도로 회의장의 곡선을 따라 미끄러지듯 돌았고 순식간에 수왕의 관자놀이 앞에 놓였다.
그걸 수왕이 다시 잡아 던졌다. 이번엔 주사위가 성녀를 향해 날아갔다.
쾅!
성녀가 휘두른 손등에 주사위가 회의장 바닥에 처박혔다.
“뭐 하는 짓이지?”
“뭐 하는 짓이죠?”
수왕이 와인 잔을 들어 보였다.
“여흥을 더했을 뿐이지.”
마그누스 은행산 레드 와인을 벌컥벌컥 마시며 수왕이 본능으로 상대를 가늠했다. 처음 맛보는 와인 맛이 야성을 돋우었다.
‘마법계와 신앙계치고 신체 반응 속도가 이상할 정도로 뛰어나군. 역시 둘 다 전반적인 육체 능력이 무투계 초월자의 육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강한 듯하다.’
수왕은 인간 출신의 초월자들에게 상당히 관심이 깊었다. 그 강함은 수왕의 오랜 무료함을 달래 주기에 충분했으므로.
결과적으로 마울러를 죽이지 못했으나 나름대로 충분히 즐겼다. 무투계 초월자를 경험했으니 다음은 마법계와 신앙계다.
뭐, 느긋하게 즐길 작정이다.
운이 좋게도 이 시대의 초월자는 십수 명이나 되니까. 어쩌면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싸움을 겪게 될지도…….
“눈금은 8.”
섭리자는 어느 정도의 감정적 마찰은 문제 삼지 않겠다는 말이 진짜라는 듯 조금도 개입하지 않고 서약을 진행했다.
성녀의 손에 의해 날아가 바닥에 처박힌 주사위는 정확히 8을 나타냈다.
“8번, 세계수의 관리자, 세렌디아. 질문하라.”
엘프의 차례였다.
“섭리자.”
세렌디아는 기다렸다는 듯 망설이지 않고 상대를 정했다. 수왕과 동일한 질문 상대를 택한 그녀가 입술을 떼었다.
섭리자가 대답하게 되면 그는 진실의 서약에서 벗어나게 된다. 아까운 기회, 혹은 광경을 놓쳤다는 생각에 곳곳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런데 세렌디아의 질문이 기이했다.
“마경에 기생의 대악마, 이페아카른이 있나요?”
“……어?”
성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마 엘프에게서 대악마라는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기생의 대악마가…….
반사적으로 성녀는 답변자인 섭리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섭리자가 조금 늦게 답했다.
“……답을 거부하겠다.”
“어째서인가요?”
“……확정은 위험하다.”
도저히 설명이라고 할 수 없는 짧은 이유였지만, 세렌디아는 그걸로 만족한다는 듯 다른 참여자에게 질문했다.
“베르덴.”
“듣고 있다.”
“엘프가 배신하지 않는다면,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엘프를 끝까지 지키실 건가요?”
베르덴은 잠깐 놀랐을 뿐, 대답은 한 치의 지체도 없었다.
너무도 당연한 걸 물었기에.
“물론이다.”
서약이 말한다.
진실이라고.
세렌디아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질문은 여기서 마칩니다.”
수왕과 다르게 세렌디아는 누구도 도발하지 않고 주사위를 받아 던졌다. 모두의 중심에서 주사위가 연이어 회전했다.
상황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 듯 빠르게 흘러갔지만, 직전의 순간을 이해하지 못한 참여자는 없었다.
이그나시아가 눈을 깜빡거렸다.
“아니, 그러니까 뭐야. 마경에 기생의 대악마가 있다는 거야? 지금?”
마경에 대악마가 있다.
그리고.
엘프의 고위층이 섭리자를 아주 조금은 당황하게 했다. 도대체 엘프는 레프라기움 마탑주와 무슨 관계란 말인가?
게다가 그 사이에 끼어 있는 듯한 베르덴은?
진실은 뭘까.
주사위가 굴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