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4화 신년(新年) (4)
다른 대륙의 변경에서 주인 없는 땅은 그야말로 피와 전쟁, 그리고 고통으로 얼룩진 곳이라는 소문이 흔하게 퍼져 있었다.
타운보다 규모가 작은 마을에서 평생을 살아온 순박한 사람이 듣기에는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 구설이었다.
그래도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까.
전직 종군 마법사, 월릭에게서 그러한 이야기를 들은 라스카벨 고아원장, 마일라는 분명 무시무시한 땅일 거라고 지레 겁을 먹었다.
그럴진대 서대륙의 변방 마을에서 중앙 대륙의 전쟁터로 반강제적으로 이주해야 한다니? 게다가 고아원에서 보살피는 아이들을 함께 데려가는 것이 마음에 턱 걸렸다.
하지만…… 에온의 12번째 위상 알데반이라고 정중하게 이름을 밝힌 정체불명의 마법사의 권유를 거스르기는 어려웠다.
월릭이 그렇게 긴장하는 건 처음 봤으므로.
새로운 터전으로 옮기고 싶지 않다면 마일라에게 위험이 될 수 있는 마을 사람들을 당장 처리하겠다고 선언했으므로.
그건 절대로 농담이 아니었으리라.
‘왜 나를 보호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라스카벨 마을 사람들이 살해당하도록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자신도 마을도 내버려 두라고도 할 수 없었다.
고아원은 전염병으로 인한 식량 부족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고 있었으니까.
마을 사람에 의해 굶어 죽거나.
전염병에 걸려 죽거나.
아이들에게 기근과도 같은 최악의 상황을 겪게 할 수 없었다. 기근은 약 ‘21년 전’부터 마일라의 마음속 무거운 돌덩이로 남아 있었다.
‘어떻게든 아이들만은 지켜야 해.’
마일라는 근심과 결연한 각오를 안은 채 곧바로 알데반을 따라서 라스카벨에서 주인 없는 땅으로 넘어갔다.
무려 여러 마법사가 작성한 공간 이동진이란 걸 통해서 말이다.
그렇게 도착한 그곳은 의외로 평화로웠다.
아니, 생각보다 훨씬, 훨씬.
‘아.’
어레인이라는 도시의 최외곽은 실시간으로 증축 중이다. 마법사들과 인부들이 설계도를 보며 열심히 공사에 임했다.
라스카벨과는 감히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거리에 사람들이 많았다. 심지어 돌덩이들이 날아다니거나 걸어다니기까지 했다.
“원장님, 저게 뭐예여?!”
“그, 글쎄. 나도 잘…….”
라스카벨을 벗어나 이렇게나 멀리 떨어진 적은 마일라도 처음이다. 그녀도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처지였다.
“이, 인공 골렘이라니, 말도 안 돼. 이건 재현이 불가능한 기술일 텐데……?”
마일라의 완강한 부탁과 요구로 함께 알데반에게 허락을 받아 어레인으로 오게 된 월릭도 당황을 금치 못한 모습이었다.
오히려 아이들보다도 격한 반응이었다.
갑작스러운 이사.
공간 이동에 의한 울렁증.
도시를 지키는 골렘.
세상에 전염병이 만연함에도 활기찬 도시.
…….
마일라는 모든 게 새로웠다. 설마 40살에 한없이 가까워진 나이에 이런 경험을 하게 될 줄은 정말로 꿈에도 몰랐다.
에온이란 세력의 호의가 어디에서 기인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이야, 유골룡 사태에 이어서 피울음 역병까지 겪었는데도, 이렇게 팔다리 멀쩡히 살아남다니. 역시 이름만 보고 주인 없는 땅에 오길 잘했다니까.”
“자네, 벨디른 공화국에 있었나? 그날에?”
“그분께서 유골룡에게 최후를 선사하는 광경을 이 두 눈으로 지켜봤지. 잿빛의 폭발이 도시 전체를 흔드는데 아주 그냥…… 앞으로도 베르덴 폐하 뒤만 졸졸 따라다니려고, 하하하하!”
근처 음식점에서 용병처럼 보이는 이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베르덴…….’
그 이름을 소리 없이 중얼거린 마일라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베르덴. 설마 오래전에 한 아이에게 준 이름을 이렇게 다시 들을 줄은 몰랐다.
당연히 동명이인이겠지만.
그녀가 아는 베르덴은 수년 전 마탑에서 사고로 죽었다.
“원장님, 울어여?”
“응? 아니, 안 우는데?”
마일라가 고개를 들며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어 보였다.
그녀의 눈꼬리에 물기가 맺히고, 입가가 떨리고 있었지만 아이는 애써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 대신 마일라의 손을 더 강하게 쥐었다.
그렇게 평소와 전혀 다른 일상이 시작됐다.
알데반에게서 고아원을 대신할 새집과 풍족한 생활비까지 지원받은 마일라는 영 부담스러웠지만 거절하지 않았다.
먹여 살릴 입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조금 성격이 다른 기부금이라고 생각하고 상황에 순응하기로 한 것이다.
마일라는 십수 명의 아이들을 언제나처럼 최선을 다해 돌봤고, 월릭이 지병으로 힘들어할 때 간병인도 자처했다.
그녀는 작은 고아원의 원장으로 살아가는 것이 운명임을 느꼈다.
“…….”
달빛이 내려앉은 밤.
아이들을 재운 마일라는 따뜻한 코코아를 든 채 집 앞마당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겨울의 찬기와 컵의 온기가 동시에 전해졌다.
바쁜 하루와는 전혀 다른 고요함을 즐기는 것이 그녀의 작은 취미였다.
마일라가 청량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아름다운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그 순간 여러 비행정이 넓은 상공을 가로지르며 은은한 달빛을 가렸다.
하늘을 나는 배라니.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멋지다…….”
마일라는 한동안 에온의 비행정 함대가 하강하는 광경을 눈에 담았다.
* * *
다음 날 점심.
주인 없는 땅───분쟁 지역의 대규모 복합 광산은 이미 활성화되어 어마어마한 양의 광물을 채굴하고 있다.
매장량은 화산 지대와 동급은 아니더라도 그에 필적하는 정도가 되었기에 오랫동안 고갈될 염려는 없었다.
이곳에 살고 있는 드워프가 고작 200명 남짓밖에 되지 않기도 했고.
“동생아!!!!! 술맛 너무 좋구나!!!!!!!!!!!!!”
제라딘이 차갑게 식힌 술을 한입에 털어 넣고서는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주변이 떨리며 천장에서 먼지가 조금 떨어졌다.
바로 옆에 있던 라이너스 볼티모그는 하나 남은 손으로 아무렇지 않게 안주를 씹었다. 드디어 적응한 모양이었다.
그하룬이 피식 웃었다.
“너도 성장은 하는구나.”
“……?”
라이너스가 에온에 부탁해 특수 제작한 귀마개를 뺐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전혀 성장하지 않았군.”
“예??”
“닥쳐라, 제자야.”
라이너스가 궁시렁궁시렁 불만을 표현하고는 잘 익은 고기를 왕창 집었다. 그하룬이 술병으로 녀석의 귀마개를 부수려다가 참았다.
그때였다.
“식사 중이었나?”
베르덴이 연락도 없이 불쑥 요새에 찾아왔음에도 이렇다 할 동요는 없었다. 이런 적이 처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왔냐.”
“오!! 베르덴!!!”
“오셨습니까, 폐하.”
라이너스가 재빨리 의자를 가져왔다. 환대를 받으며 베르덴이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아 그들과 합석했다.
그러고는 시장에서 구하기 힘든 품질의 고기와 값비싼 술을 꺼냈다.
“양이 부족해 보여서. 이 정도면 충분한가?”
“뭐, 한 끼 식사로는 충분하지. 라이너스, 제대로 한번 구워 봐라.”
“예예.”
“하하하, 제자를 너무 부려 먹는 거 아니냐. 나도 도와주마!”
제라딘과 라이너스가 고기를 신속하게 손질하곤 숯불을 이용해 노릇노릇 구웠다. 환기 시설을 만든 지 오래였기에 연기는 문제없었다.
“세계 회의는 끝난 거냐?”
“새벽에 폐회했다. 아르쿨은 잘 있더군. 제국과 확실하게 동맹을 맺은 모양이야.”
“마음에 안 드는 짓 하는 건 여전하구만. 뭐, 잘 살아 있다니 됐다.”
그하룬이 가볍게 코르크를 빼내고는 술을 크게 들이켰다.
“이것도 맛이 좋군. 저번에 먹었던 은행 뭐시기 와인보다는 아니지만. 그래서 오늘은 부탁하고 싶은 게 뭐냐?”
“의뢰하러 왔다.”
“의뢰?”
그하룬이 큰 관심을 보였다.
“안 그래도 그 사막의 신의 무구에 대한 조사가 진척이 없던 참이었는데. 좋아, 어디 자세하게 말해 봐라.”
베르덴이라면 분명 [인테리스]처럼 어마어마한 무언가를 제작하려 할 터. 말인즉슨 새로운 소재를 줄 가능성이 높다.
기대가 된다.
그하룬은 정통 중의 정통 드워프이면서 순수한 대장장이였다.
베르덴이 말했다.
“가장 단단한 물질이 필요하다.”
“단단한……?”
그하룬이 주황빛 수염을 쓸었다.
“물질이라고 한 걸 보니 무구의 형태를 취하는 건 아닐 테고. 말투를 보아 룬 문자나 마법이 깃든 것도 아닌 듯한데. 정말로 그냥 순수한 물질이 필요한 거냐? 단순히 단단하기만 한? 그런 걸 어디에 쓰려는 거지?”
베르덴이 단언했다.
“파괴하려고.”
베르덴이 개척한 고유한 마도 <무한>은 가능성을 근간으로 하며, 마도 <파멸>은 파괴를 본질로 삼는다.
파멸의 개념을 더욱 깊게 깨닫기 위해서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가.
침묵의 사막에서 있었을 때부터 고민한 베르덴은 최근에 결론을 내렸다.
‘가장 먼저 물질적인 측면에서 접근한다.’
다시 말해, 마치 뜨겁게 달궈진 검을 망치로 쉼 없이 두들겨 단조하듯이 원초적인 단련으로 파멸의 개념을 강화하는 것.
복잡하고 난해한 험로만이 답이 아니다. 단순한 길은 가장 빠른 해답이 될 수 있다.
“파괴하기 위한 물질을 만들어 달라. 흠.”
그하룬이 팔짱을 낀 채 연신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의뢰였으나 납득은 갔다.
베르덴을 제외하고…… 베르덴의 힘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건 그하룬이었기에.
다른 드워프와 제자와 힘을 합쳐 검은 화산에서 완성한 최고의 역작───질서의 종말, [인테리스]가 모든 걸 증명한다.
“참신하군.”
턱.
그하룬이 빈 종이와 전용 펜을 가져와 테이블 위에 놓았다.
“여러 기능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내구성에만 집중하면 최고위 금속만으로 충분히 네가 원하는 걸 제작할 수 있을 거다. 너무 무거울 필요도 없고, 너무 거대할 필요도 없지. 외부와 내부의 저항력을 완전히 동일하게 설계하고, 구조적으로 효율을 취하면 아마 결과물은 손에 들어올 정도로 작아질 거야.”
“밀도가 관건이란 뜻인가.”
“그렇지.”
베르덴이 물었다.
“별도의 도구가 있어야 하나?”
“있어야 할 것 같으냐?”
우드득.
그하룬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짧지만 엄청나게 두꺼운 근육이 불거졌다. 그의 손이 곧 창조를 위한 도구였다.
그하룬은, 베르덴과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으며 종이 위에 뭔가를 그렸다. 이내 라이너스와 제라딘이 먹음직스럽게 익은 고기를 가져왔다.
라이너스가 슬쩍 그하룬의 도면을 구경했다.
“……구체?”
여기저기 주석이 붙은 3차원 원의 그림.
전설적인 드워프의 손재주답게 구체는 군더더기 하나 없이 그려졌다. 그야말로 완벽한 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크기가 상당히 작은 것 같습니다만, 혹시 무슨 기능이 있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아무 기능도 없다.”
“그럼 이걸로 공놀이라도 하시려고요?”
“이 새끼, 요즘 잘한다 잘한다 했더니 기어오르는 거 봐라? 나중에 제작하면 꼭 공놀이해라. 대가리든 손이든 박살 나게.”
“스승님, 잘못…… 어억!”
그하룬이 목덜미를 붙잡자, 라이너스는 그대로 짓눌려 움직이지 못했다. 서로의 근력 차이는 아이와 어른, 그 이상이었다.
제라딘은 껄껄 웃으며 각자의 그릇에 고기를 옮겨 담았다.
“뭐가 됐든 쉬엄쉬엄해.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으니까.”
“촌장 아니랄까 봐 넉넉한 소리 하기는. 아무튼 밀도를 맞추는 데 시간이 들겠지만 보다시피 어려운 작업은 아니다. 완성되면 연락하지. 의뢰비는 나중에 제자하고 이야기하고.”
“부탁하지.”
“그럼 밥이나 먹자.”
그렇게 점심을 먹기 직전이었다.
라이너스가 목 뒤를 어루만지며 일어나더니 슬쩍 손을 들었다.
“근데 아까부터 이상한 냄새 나지 않습니까? 아, 지금은 또 안 나긴 하는데.”
“음?”
그하룬이 콧잔등을 씰룩였다.
“무슨 냄새를 말하는 거냐, 제자야.”
“약간 시원한……? 광산에서 느낄 수 없는 그런 냄새였는데. 스승님과 폐하께서 맡지 못하신 걸 보면 제 착각이었나 봅니다.”
“아주 가지가지 하는구나. 고기나 씹어라.”
“네, 스승님.”
라이너스가 조심스럽게 헛기침하고는 식기를 들었다.
달그락달그락.
두 명의 드워프와 드워프의 제자가 시끌벅적하게 식사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베르덴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냄새라…….’
과연 라이너스의 착각일까.
의문이 든다.
* * *
그하룬에게 의뢰를 맡긴 베르덴은 달레힌으로 넘어갔다. 초대 네크로맨서와 세계 회의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함이었다.
달레힌의 영주, 듀말이 공손하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폐하. 아무래도 세계 회의는 잘 마치신 것 같군요.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분은 안에 있나?”
“물론입니다. 항상 계시는 그 방에 계십니다. 아, 그런데……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만.”
“말해라.”
인간 사회에 녹아든 뱀파이어가 살며시 얼굴을 가까이하며 코를 살짝 씰룩였다.
“세계 회의는 가르간트에서 열린다고 들었는데, 혹시 장소가 바뀌었습니까?”
베르덴이 멈칫했다.
“무슨 뜻이지?”
“아, 실례했습니다.”
듀말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폐하에게서 바다 냄새가 나길래 해안가에서 막 오셨나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