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3화 신년(新年) (3)
공간 이동이 가능한 비행정의 숫자는 세계적으로 따져도 극소수다.
또한 거리와 무관하게 공간 이동진을 작성하거나 <전이>를 자유자재로 시전할 수 있는 일반 마법사는 그냥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마법적으로도 개념적으로도 공간은 가장 어려운 속성인 탓이다.
그런 이유로 세계 회의가 폐회되자마자 복귀할 수 있는 세력은 얼마 되지 않는다. 특히 하원에 속한 국가들이 그렇다.
그들은 애초에 가르간트에서 최소 10일은 머무를 수 있도록 일정을 계획했다.
“커어어…….”
서대륙의 이텔 국왕이 아직 저녁이 오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코골이 중간중간에 섞인 잠꼬대가 방에 울려 퍼졌다.
듣기에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의미가 담긴 단어들의 나열이었다.
이텔 왕국의 왕실 호위대는 철두철미하게 왕의 저택을 수호했다. 이곳이 가르간트라고 해도 엄연히 외지는 외지니까.
대륙 국가급 전력 중에서도 상당하다고 평가받는 이텔의 호위대장이 촉각을 곤두세웠다. 본디 호위란 세력의 자존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텔 국왕의 침실에는 다른 이가 있었다.
“엘프의 대악마 언급, 마경 탐사, 그리고 두 번째 투표로 통과된 마경 정벌…… 상황이 뭔가 이상한 것 같은데, 이것도 예상한 건가요?”
제니아 데이로스가 손을 거두자 이텔 국왕은 숙면에 들었다. 직전보다 얕아진 코골이가 귓가에 감돌았다.
[변수는 변수로다.]
이페아카른의 늪처럼 끈적하고 끔찍한 음성이 영혼에 전달됐다. 그녀가 기생의 대악마와 계약을 맺은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적응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운명의 잔재가 크게 무너지면서 운명도 더욱 직접적으로 움직일 것이 확정되었노라. 세계가 마경의 심부에 발을 딛기 전에 운명의 사도가 강림할 것이니. 개의치 않노라.]
“계산에 없는 상황이라는 거군요.”
[‘당신’은 약간 눈을 떴다. 최후의 저항자는 아마 정신이 깨어난 듯하다. 그저 원하는 순간이 예상보다 가까워지고 있을 뿐. 작은 변수는 그저 폭풍의 속도를 가속한 것이 전부일지니.]
“…….”
[나무를 보는 자는 숲을 보는 자를 따라잡을 수 없고, 숲을 보는 자는 세상을 보는 자를 감히 헤아릴 수 없다. 거대한 흐름은 나의 뜻이리라.]
그가 속삭인다.
[또한 너의 바람이기도 하노라.]
달콤한 유혹이었다.
이페아카른은 다른 존재들을 현혹하고 부정하고 강압함으로써 기생한다. 한번 뿌리를 내리면 절대로 자의로는 벗어날 수 없다.
여기서 숙주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타협에 의한 공생이다. 그렇게 숙주가 보다 더 깊은 기생을 스스로 허락하는 것이다.
마경의 심부인 마해의 괴생명체들도 그렇게 차츰 노예를 자처했다.
제니아는 기생의 계약자로서 그 대악마의 권능을 다룰 수 있다. 말인즉슨 그녀도 다를 바 없이 노예 신세란 의미였다.
신세를 탓할 생각은 없다.
대악마에게 기생되었다고 해도 계약을 결정한 건 제니아 본인이었으니까. 가족을 되찾으려면 기생의 대악마의 힘이 필요 불가결했다.
그런 만큼 제니아는 이페아카른과 외적으로도, 심적으로도 거리가 오랜 기간에 걸쳐 가까워졌기에 그의 화법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조금이지만 당황했어.’
운명이 없는 세상이라고 했던가.
저것이…… 본래의 당연하고 순수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이페아카른도 앞날을 모른다. 그의 처지도 결국 남들과 비슷하다.
마치 신처럼 미개척 지대에 군림하고 있을지언정 전지전능하지 않으므로.
이 상황을 보라.
루아스교, 특히 성녀 때문에 세계 회의에는 감히 접근도 할 수 없어 이렇게 이텔 국왕으로부터 정보를 뽑아내고 있다.
게다가 몇몇 초월자의 감각도 경계해서 지금까지 최대한 먼 거리를 유지했다.
자칫 제니아가 죽으면 이페아카른의 정보력은 큰 타격을 입기에.
이렇듯 대악마에게도 허점은 있다.
‘물론 나 말고 다른 ‘단말’들이 있긴 할 테지만.’
제니아가 이페아카른의 가장 유용한 자원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바로 그게 문제다. 대체가 가능한 자원이라는 것.
당장이라도 쓸모가 없어지면 제니아는 처분당할 확률이 매우 높다. 이페아카른의 권능을 떠받치는 그 숙주들처럼…….
‘그건 안 돼. 적어도 지금은.’
아직 시신도 남기지 않고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방법을 듣지 못했다.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삶과 죽음에 얽힌 세계의 비밀을 알아내야 한다.
그걸 위한 계약이다.
‘이자벨라 언니.’
아주 멀리서나마…… 무려 십수 년 만에 그 그리운 얼굴을 보았다.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언니도 여전히 가족을 잊지 않았다.
보헤미른 마탑 수뇌부 절멸.
세간에는 블랙 아워와의 전면전에서 패배했다고 알려졌으나, 제니아는 에온이 직접적으로 관계되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야 크로든 올렌티아가 죽었으니까.
데이로스 가문에 비극을 안겨 준 놈에게 복수할 수 있는 건 이자벨라와 제니아밖에 없다. 다시 말해 언니뿐이었다.
그렇다.
마침내 복수에 성공했다.
‘하지만 언니, 그걸로는 부족해.’
복수는 근본적으로 아픔을 해결할 수 없다. 고작 보듬는 게 전부다. 제니아가 하려는 건 비극을 없었던 일로 되돌리는 것.
크로든에게 살해당한 마리엔느와 카버, 그리고 카엘을 다시 되살린다.
그리고.
동시에 이페아카른의 기생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는다. 가족의 재결합. 제니아는 거기서 제외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일개 인간, 그것도 계약자가 이페아카른에게 홀로 저항할 수단이 있을까.
아마도 없겠지.
그렇다면 도움을 받는 건 어떨까.
‘베르덴.’
이페아카른이 직접 언급한 적은 거의 없지만, 그 초월자가 세상을 운명에서 분리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이해했다.
한마디로 이페아카른이 가장 주의 깊게 살펴보고 경계하는 인물인 셈이다.
‘어쩌면…… 희망이 있을지도.’
혹시 모를 기대감이 생겼다. 다름 아닌 이자벨라 언니가 스스로 왼팔을 자처하며 아주 가까이에 두고 있는 사람이니까.
어떻게 이페아카른의 이목을 속이고 베르덴에게 접근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때, 제니아가 미간을 살짝 꾸겼다.
‘근데 언니하고 정말, 그런 사이인가?’
소문도 그렇고, 단순히 친하다고 하기엔 거리가 너무 가깝긴 했다. 아카데미 시절 크로든과의 관계를 비교하면 성질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연인, 혹은 그 이상.
언니 말고도 다른 여자가 있는 것 같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본인이 좋다면야.
그보다 언니와 그렇고 그런 사이인 사람을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까.
‘……형부?’
제니아는 어릴 적 천진난만했던 시절로 돌아온 듯이 고개를 기울이면서 소리 없이 몇 번이고 호칭을 되뇌었다.
베르덴 형부.
의외로 낯설지 않은 어감이었다.
* * *
밤이 깊어지고 있다.
베르덴은 이자벨라에게서 [끝없는 만상]을 빌려 초장거리 공간 이동진을 작성하고, 다수의 비행정을 동대륙으로 이동시켰다.
발로크의 스태프는 마법진을 복제하고, 위력을 극대화하며 재활용까지 가능했기에, 시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었다.
화아아아악!
베르덴도 세계 회의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권역으로 돌아왔다. 에온의 비행정 함대 아래로 빛을 품은 어레인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이 주인 없는 땅…….”
틸버 스팬기어가 난간의 틈새로 이제 머무르게 될 대지를 바라봤다. 긴장감과 기대감 등이 두루두루 섞여 있는 모습이었다.
“저기 어레인 외곽에 임시 연구소를 하나 만들어 주마. 임시라곤 해도 부족한 건 없을 거다. 나중에 알파의 시험에 통과하면 다시 거처를 고민해 보도록 하지.”
[응원.]
“아,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틸버가 작은 몸에 비해 비율이 큰 머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틸버의 신변은 맡기겠다.”
“믿고 맡겨 주십시오, 베르덴 님.”
리엄 어레인이 턱을 당기며 나름대로 절도 있게 대답했다. 겉으로는 허세가 좀 섞여 있기는 했지만 내면이 꽤 단단해졌다.
타국의 정상들을 자주 접하면서 경험이 쌓인 것이다.
다른 영주의 사절에게 면전에서 무시받던 영주는 더 이상 없었다. 성장과 변화에 있어서 젊음은 그 자체로 특권이었다.
“모두 수고했다. 큰 고비를 넘겼으니 앞으로 며칠 동안은 쉬고 있도록.”
카인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솔직히 말해서 저희는 구경만 했을 뿐입니다. 휴식은 불필요합니다.”
“그래도 쉴 수 있을 때는 쉬는 게 좋다. 인선을 마치는 대로 명령을 하달할 거니까. 앞으로는 아주 바빠질 거다.”
“예, 선배.”
베르덴이 등을 돌리며 손짓하자 비행정 함대가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그가 비행정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는 동안 이자벨라가 팔꿈치로 아드리안을 툭툭 치며 히죽거렸다.
“그래서 좋은 시간 보냈어? 응?”
아드리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언젠가 갚아 주마.”
“어떻게 갚아 줄지 기대할게. 근데 그냥 떠밀어 준 건데 많이 화났어? 혹시…… 에네트한테 화풀이한 건 아니지?”
이자벨라가 손으로 입가를 감추며 ‘설마’ 하는 표정으로 쳐다봤으나, 이에 아드리안은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그녀가 반대쪽으로 눈길을 돌리더니 에네트에게 물었다.
“아드리안이 뭐 크게 잘못한 건 아니지? 너한테 짜증 난다고 욕을 했다거나…….”
“아뇨, 그러신 적 없습니다.”
“그럼 뭐 했는데?
“그건.”
에네트가 호박색 눈동자를 굴리더니 살짝 고개를 숙였다. 밤하늘의 달빛이 살짝 붉어진 얼굴을 스치듯 비추었다.
이자벨라가 멈칫했다.
“……어?”
“가 보겠습니다.”
에네트가 짧게 목례하고는 도망치듯이 자리를 벗어났다. 이자벨라가 멍하니 얼어붙어 있다가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뭐야?”
“뭐가.”
“뭐 했냐고.”
대답은 없었다.
콱.
이자벨라가 엄청난 악력으로 아드리안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뭐 했냐니까?!”
아드리안이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
아드리안 첸버스, 승.
* * *
자신의 선실에 들어온 베르덴이 직접 수기로 작성한 문서들을 훝어봤다.
그러면서 세계 회의 안건을 비롯한 인원 편성을 머릿속으로 다시 검토하고, 별개로 사적인 일들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흠.”
[흠.]
[흐음.]
알파와 베타는 그 문서를 함께 관찰하며 ‘이론’을 면밀히 따져 보고 있었다. 검증은 다른 사람의 시각을 빌려야 효과적이다.
그런 측면에서 녀석들의 마법적 지식과 연산력은 더할 나위 없었다.
똑똑.
그때, 유니아가 문을 두들기더니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선배, 바빠?”
“괜찮다. 들어와라.”
유니아가 호다닥 들어와서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책상 앞에 섰다.
그녀는 괜스레 알파와 베타를 톡톡 어루만지다가 거의 온몸을 부들거리며 베타를 살짝 들어 보기도 했다.
“작아져도 이렇게 무거운데, 선배하고 이자벨라 언니는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데리고 다니는 거야? 어깨에 잘못 올려 두면 어깨 빠지겠는데?”
[내가 설계함. 최고?]
[최고입니다.]
알파와 베타의 모습은 영락없이 형과 형을 추켜세우는 동생 같았다.
“무투계라고 해도 어지간한 근력으로는 어림도 없긴 하지. 너도 나와 비슷한 방향으로 초월을 한다면 가능하겠지만.”
“초월…….”
“네 용건도 그런 주제인 것 같군. 터놓고 말해라. 그런 걸 숨길 사이도 아닌데.”
“그건 그렇지?”
베르덴과 눈을 마주친 유니아가 숨을 들이마쉬곤 책상을 강하게 짚었다.
“선배, 나 강해지고 싶어. 요즘 바빠서 미안한데 잠시라고 해도 좋으니까 우리하고 대련해 줄 수 있어? 최대한 실전적으로.”
“너는 최근에 6위계 상위인 혈맹의 간부를 홀로 잡았다. 성장 속도는 충분히 빠르다. 너무 조급한 건 좋지 않아.”
“선배는 해냈잖아.”
유니아가 작게 헛기침했다.
“크흠, 물론 내 마법적 잠재력이 선배에 비한다는 건 아니지만…… 세계 회의에서 나보다 강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새삼 느꼈어. 비공식적으로는 훨씬 더 많겠지. 그럴 거야. 선배가 침묵의 사막에서 맞닥뜨린 적들처럼.”
“…….”
“선배가 평소에 그랬잖아. 세상은 상대적이라고. 내가 강해질 때까지 상대가 기다려 주지 않을 테니까, 내가 더 빨리 강해져야 되는 거잖아. 머지않아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에. 근데 나와 카인이 할 수 있는 건 현자님들이 가르쳐 준 단련뿐이고.”
“…….”
“혹시 방법이 있을까……?”
유니아와 카인은 각각 8위계와 7위계에 이를 재능을 지닌 자들로, 이미 이십 대에 6위계급에 오른 지 오래였다.
베르덴을 제외하면 차기 대륙 마법계의 신세대로 부족함이 없는 수준.
천재 쌍둥이가 여기서 한층 더 강해지려면 시간, 혹은 변화가 필요하다. 특히 후자는 지금까지와는 결이 다른 수준의.
베르덴이 말했다.
“……아직 발표하긴 이르긴 하지만, 너에게는 알려 줘도 되겠지.”
“응?”
베르덴이 읽고 있던 문서 뭉치를 반대로 돌려 유니아에게 보였다. 한눈에 이해하기 어려운 고도의 마법적 지식이 얽히고설켜 있다.
“이게, 뭐야? 이론?”
“우리와 다른 마법적 세력을 완전히 차별화하는 수단이다.”
유니아의 눈에 이론의 제목이 들어왔다.
“새로운 마력 운용법이지.”
에온: 대마력(大魔力).
세력의 마법적인 경지를 한 단계, 아니 개개인에 따라 몇 단계 더 상승시킬 수 있는, 베르덴이 새롭게 창시한 마법 이론.
본 <아케인>을 발상의 시초로 삼았으나 명백하게 <아케인>과는 다른 것이었다.
“에온의, 우리의 마력 운용법……?”
유니아가 이론서를 손으로 만지며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이론서를 집어 들고는 꽉 끌어안았다.
“고마워! 역시 선배밖에 없어! 나, 열심히 터득해 볼게! 진짜로!”
“그래…… 음?”
쿵!
유니아가 더 이상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곧장 복도로 뛰쳐나갔다. 베르덴, 알파, 베타가 가만히 앉아서 눈을 깜빡거렸다.
[음?]
“아직 완성 안 됐는데? 유니아!”
베르덴도 <전이>로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