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0화 징조 – 4 (대학살의 수인)
여신 루아스를 신앙하는 루아스교, 그 본산인 루아스 교국에는 만인 앞에 신성한 빛을 대표하는 위대한 신앙자들이 존재한다.
그 숫자는 시대마다 조금 차이가 있는데, 현시대에는 13인이었다.
성녀, 교황, 성자.
삼정의 추기경.
7인의 대주교.
이 중에서 대주교는 모든 주교를 총괄하고, 세계 각지에서 신인과 추기경의 뜻을 이행하는 손이자 발로서 온갖 실무를 담당한다.
세계 회의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권력자가 정식으로 대면할 수 있는 최고위 성직자는 대주교가 한계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들은 루아스교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대주교님!! 여길! 여길 봐 주십시오!”
“루아스시여!!”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골드힐의 시민들이 황금빛 정십자가를 목에 건 채로 조제프 대주교의 방문을 열렬히 환영했다.
갓 봄이 돼 간간이 한기가 감도는 계절이었지만 신앙자들의 믿음은 태양처럼 뜨거웠다.
팔리딘의 지시를 받은 성기사들과 성직자들이 최소한으로 거리를 통제했다.
불필요한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끊이지 않는 환호성.
한 손에 석장을 든 조제프 대주교가 사람들을 향해 천천히 손을 흔들어 주었다.
언젠가 대주교가 되려면 반드시 이수해야 하는, 상위 주교의 심화 과정을 밟고 있는 레나 주교도 곁에서 신나게 팔을 흔들었다.
“와아, 저도 대주교가 된다면 사람들이 이렇게 좋아해 줄까요?”
“대주교 이전에 스스로 떳떳하고 기꺼이 신앙의 모범이 되려고 한다면 직함이 어떻든 레나 주교를 사랑할 겁니다. 하나만 조언하자면, 개인적으로 돈을 밝히는 마음을 차츰 자제해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하하…….”
레나 주교는 어색하게 웃으며 분홍빛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훌륭한 조언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반적인 대주교들처럼 금전적으로 무욕한 삶을 살아갈 생각은 없었다.
루아스교도 타인의 요청으로 기적을 행할 때마다 헌금을 걷지 않는가?
돈이 있어야 밥 먹고 힘도 내서 포교도 열심히 할 수 있는 법이다. 조금 비싼 취미 생활로 스트레스를 줄일수록 상위 주교로서 더욱 왕성하게 활동할 수도 있고 말이다.
가난보다 풍요가 많은 사람들을 돕는다는 믿음이 레나 주교의 신념.
그런 그녀의 목표는 기부도 많이 하되 자신에게 부족하지도 않은 막대한 자금을 쌓고 높은 자리까지 출세하는 것이다.
“제가 빵 하나 덜 먹는 것보다는, 빵 하나를 더 사는 게 사회에 더 이롭지 않을까요? 제가 배고프면 빵집도 배고프니까요.”
“구매한 빵을 필요한 다른 사람에게 기부하면 빵집 주인과 빵을 기부받은 사람, 총 두 명을 도울 수 있겠군요.”
“그럼 차라리 빵을 세 개 사는 건요? 제가 배곯지 않고 열심히 일하면 나중에 또 빵을 나눠 줄 기회가 생길 수도 있잖아요? 저도 먹고는 살아야 해서요.”
“제 말뜻은…… 후, 됐습니다.”
조제프 대주교는 궁극적으로 자기희생을 논하려고 했으나, 레나 주교는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관점에서 상황을 따졌다.
더 말해 봤자 평행선일 터.
애초에 그녀의 근본적인 사상을 부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당연하다. 만 명이 있으면 만 개의 생각을 존중해야 하므로.
오히려 이런 사람은 어떤 대주교가 될 것인지 내심 궁금해졌다.
“레나 주교, 그대가 성격적으로 모든 이의 귀감이 될 것이라 장담할 순 없지만 그 신앙심과 능력은 아주 훌륭한 편입니다. 다만 그것만으로는 7인의 대주교가 되기 어렵습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항상 동기를 구체화하며 살아가십시오. 고뇌의 시간만큼 그대의 신앙심도 깊어질 겁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레나 주교가 예의 분홍빛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씩씩하게 답했다.
‘역시 자신감 하나는 더할 나위 없군요.’
머지않아 조제프 대주교 일행이 골드힐의 중심 광장에 섰다. 골드힐 시장이 준비한 연단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봤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가련한 신앙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연설은 그때마다 달라야 한다.
장소와 청중이 다르니까.
조제프 대주교는 골드힐이 어떤 도시이고, 어떤 사람들이 살아가는지 공부했다.
신앙이란 곧 마음.
단 하나뿐인 마음을 움직이는데 상대가 누군지 알아보려고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는 건 대주교 실격이었다.
쿵.
팔라딘 셰인이 검집에 꽂힌 검으로 절도 있게 바닥을 찍었다. 마치 성배를 들듯 양손으로 손잡이를 붙잡은 모습이 위엄이 났다.
삽시간에 광장이 조용해지며 숨소리만 대기 중에 감돌았다.
조제프 대주교가 정면을 응시했다.
“친애하는 골드힐─”
그때였다.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는 군중 맨 뒤편에 심상치 않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평범한 성인 남자보다 두 배 이상 큰 키.
거대한 체격이다.
온몸을 싸맨 로브, 그 등 부분이 비정상적으로 툭 튀어나와 있다. 로브로 신원을 감춘 인물은 누가 봐도 순수한 인간이 아니었다.
찰나에 흐려지는 신형.
정체불명의 존재는 어디 가고 로브만이 허공에 남아 펄럭거렸다. 직후 눈을 부릅뜬 조제프 대주교가 팔을 뻗었다.
“레나 주교!!”
“네? 꺄악!”
갑자기 강하게 밀쳐진 레나 주교가 광장 바닥에 주저앉았다. 깜짝 놀란 그녀가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푸확───!
외골격에 둘러싸인 팔이 조제프 대주교의 등과 복부를 관통했다. 장기 조각과 함께 피가 저 멀리까지 뻗어 나갔다.
뒤늦게 발해진 신성력이 고통을 완화하며 의식을 붙잡았다.
“크윽, 끅…….”
“제법. 세계 종교의 일원답게 감이 좋구나.”
낯선 목소리다.
조제프 대주교가 힘겹게 시선을 돌리니 처음 보는 수인이 있었다.
첨단이 하늘을 향한 두 개의 유선형 뿔.
어두운 갑각으로 덮인 피부.
칠흑의 날개.
코가 없는 얼굴.
길게 찢어진 입과 뾰족한 이빨들.
형형하게 빛나는 검보라색 눈동자.
수인의 종족에 대해 아주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수왕을 포함하여 여태껏 본 수인 중에서 가장 포악한 인상이었다.
울컥!
피가 솟구쳐 목울대를 강타했다. 치아가 붉게 물들었다. 혀끝에 도는 피비린내를 느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수인, 대부족에서 오신 것은, 아닌 듯한데……!”
“수인 대부족? 아, 요즘에는 수인 부족끼리 모여 산다지. 무슨 인간처럼. 세월이 흐르면서 야성이 많이 옅어진 모양이던데.”
“대주교 예하!!”
팔라딘 레일버와 팔라딘 셰인이 철퇴와 검을 빼 들었으나 섣불리 다가갈 수 없었다. 대주교가 인질로 잡혔다.
“그보다 말이 잘 통하는군. 과연. 영혼을 먹은 보람이 있어. 귀찮게 현대의 언어를 다시 배울 필요가 없으니.”
영혼?
조제프 대주교의 표정을 읽은 대학살의 수인이 낮게 웃었다.
“애써 알아들으려 할 것 없다. 이건 ‘금기’니까.”
“금기…… 큽?!”
수인이 팔을 빼면서 조제프 대주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후두두둑. 팔의 외골격을 타고 대주교의 피가 흘러내렸다.
지금.
“셰인!”
조제프 대주교에 식은땀을 미친 듯이 흘리며 소리쳤다.
“안 됩니다……! 물러서십시오!!”
“무구한 광명으로!”
팔라딘 레일버가 방패를 앞세우고 철퇴를 붕붕 돌리며 돌진했다. 성기사들이 뒤를 따랐고, 주교들이 고위 기적으로 보조했다.
소환된 루아스의 하인들이 빛이 무구로 수인을 제압하려 했다.
그러는 동안 팔라딘 셰인이 재빨리 레나 주교와 조제프 대주교를 확보하고 교전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연단에서 멀어졌다.
“안 돼!!!!”
대학살의 수인이 움직였다.
콰지지직!
레일버의 철퇴를 손으로 붙잡아 부수고 방패를 후려쳤다. 방패가 꺾이며 레일버의 몸이 광장 바닥에 튕겼다.
활짝 펼쳐진 칠흑의 날개가 한 바퀴 원을 그리자 예리한 풍압이 몰아치며 성기사들과 주교들이 기적째로 토막 났다.
심지어 시민들까지도.
……철퍽.
양쪽에서 아이의 손을 잡은 부모의 상반신에 한 줄기 사선이 피어났다. 절단된 몸이 아래로 떨어지며 장기가 쏟아졌다.
광장 중심지에 가까웠던 시민들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놀라움은 사라지고.
공포가 그 자리를 채웠다.
“우, 우아아아아아악!!”
“루아스시여, 루아스시여…….”
“엄마……? 아빠……?”
“꺄아아아아아아아악!”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도망치며 거리가 엉망이 되었다. 대학살의 수인은 포식자로서 큰 만족감을 느끼며 여운에 잠겼다.
레나 주교의 어깨가 덜덜 떨렸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리가 멍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로.
조제프 대주교가 관통상을 치유하며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레나 주교, 어떻게든 살아남아 이 상황을 본교에 전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겁니다.”
“대주교님……?”
“팔라딘 셰인. 그녀의 호위를 맡기겠습니다.”
상대와의 전력 차이를 실감한 셰인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자신이 돕는다고 해서 전황이 바뀌지는 않는다.
“예,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도 도울게요. 베, 벨디른 공화국에서처럼, 그러면 어떻게든 방법이 생길…….”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조제프 대주교의 체내에서 강력한 신성력이 들끓었다.
그의 눈이 거룩한 빛으로 번쩍였다.
“이들을 지켜 주소서.”
터엉.
신성 보호막으로 둘러싸인 팔라딘 셰인과 레나 주교가 그대로 하늘 멀리 날아가 순식간에 골드힐을 빠져나갔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 속에서 대학살의 수인이 물었다.
“작별 인사는 나누었나?”
조제프 대주교가 몸을 일으켰다. 피로 물든 의복 사이로 완전히 치유된 신체가 보였다.
“그대가 저들을 보내 준다면 의미 있는 작별이 될 겁니다.”
“안심해라. 전령 정도는 남겨 둘 생각이었으니.”
전령.
정보를 은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 대해 세상에 알리고 싶다는 건가. 무슨 목적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사람들의 핏물이 흘러 조제프 대주교의 발밑을 적셨다.
“그대는 대체 누구입니까.”
날개가 수인을 감쌌다.
“바르카젤(Varkhazel).”
대학살의 수인──바르카젤이 비로소 이 세상에 이름을 밝혔다.
화아아악.
신성 치유를 받은 팔라딘 레일버가 비틀거리며 바닥에 널브러진 검 한 자루를 들었다. 망가진 방패를 옆으로 던졌다.
“지켜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대주교님.”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조제프 대주교의 등 뒤에서 거대한 빛의 고리가 나타났다.
위광(威光).
극소수의 신앙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거룩한 믿음의 증명.
“끝까지 책무를 다하십시오. 무구한 광명으로.”
“빛을 받듭니다.”
온갖 기적을 부여받은 팔라딘 레일버가 함성을 지르며 당당히 전위를 맡았고, 조제프 대주교는 뒤를 생각하지 않고 모든 신성력을 동원해 방어와 보조에 집중했다.
카앙! 캉! 카가가가각!
외골격과 검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신성력을 실은 검으로 내려찍듯이 베고 있음에도 놈에겐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바르카젤은 여흥이라는 듯 반격조차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는데도.
촤르르르륵, 철컥!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조제프 대주교는 수십 개의 신성한 사슬로 그의 팔다리를 구속하며, 희미하게 느껴지는 그의 강함을 판단했다.
‘초월자, 그 이상.’
대주교의 신앙심마저 떨게 만드는 야성은 마치 당대의 수왕을 연상케 했다. 그렇다면 그에 필적하는 괴물이란 말인가.
이 수인을 당해 내려면 보통의 수단과 방법으론 안 된다. 대주교의 뇌리에 가장 강력한 성직자가 스쳐 지나갔다.
우드드드득!
바르카젤이 감히 인지할 새도 없이 두 사람을 지나치자, 팔라딘 레일버의 팔과 조제프 대주교의 팔이 동시에 뜯겨 나갔다.
신성 검기와 쇠사슬은 형체를 잃고 다시 빛으로 화했다.
“……루아스시여.”
날개가 수평을 갈랐다.
대주교의 신성 보호막이 깨지고 팔라딘 레일버가 즉사했다. 조각난 석장. 다리가 잘린 조제프 대주교가 지면에 널브러졌다.
“나쁘지 않은 손맛이었다, 대주교.”
쿠웅.
바르카젤이 골드힐 광장을 박차곤 엄청난 속도로 위로 솟구쳤다. 아득히 먼 하늘에서 골드힐을 내려다본 그가 히죽 웃었다.
광장에서 벗어나 도망치거나 숨는 인간들이 아주 잘 보였다.
“예나 지금이나 벌레는 벌레로군.”
허공을 박차는 순간 충격파가 일었다.
경로는 수직.
대기와의 마찰로 인해서 바르카젤의 몸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 압력이 곧 지면에 전해지며 도시가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땅에 쓰러진 채 겨우 몸을 돌린 조제프 대주교의 눈동자에 비친, 마치 운석과도 같은 붉은 점이 커지고 있다.
“나의…… 여신이여.”
조제프 대주교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부디, 우리를 굽어살펴 주소서,”
바르카젤이 속도를 유지한 채로 골드힐 광장을 향해 오른 다리를 내질렀다.
천공 추락.
일 점에 집중된 각력이 도시의 핵심을 강타했다.
쿵───
찰나 정적이 내려앉고.
바르카젤이 내려찍은 곳에서 압력의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안으로 건물과 시체, 또 살아 있는 사람들이 지하로 끌려갔다.
이윽고 지하에 응축된 힘이 폭발하며 아래에서 위로 골드힐을 집어삼켰다.
쿠구구궁, 콰과과과과과과과과광!
어느새 폭발 범위에서 벗어나 상공으로 돌아온 바르카젤이 팔짱을 끼며 자신이 만들어 낸 대학살의 현장을 구경했다.
다음 대주교가 탈출시킨 두 명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거리라면 서대륙의 루아스교 본국에 소식이 전달되기까지 며칠 정도 걸린다고 했었지.’
바르카젤이 이빨을 핥았다.
“죽어서도 살아서도 계산적이고 계획적인 것은 여전하군. 정신 나간 난쟁이. 뭐, 그동안 좀 지루하긴 하겠지만 어쩔 수 없지.”
다음 목표는 이미 정해졌다.
“역대 최강의 성녀라. 아무리 못해도 예전 난쟁이 수준이면 좋겠는데.”
오랜만에 살육을 즐긴 바르카젤이 한껏 기대감을 품으며 소리 내어 광소했다. 그의 웃음 너머로 도시가 붕괴하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사망자 3만 2,533명.
생존자 2명.
중앙 대륙에 속한 딘엘 왕국, 그 남쪽의 변방 도시 골드힐───멸망.
* * *
멀리서 끔찍한 굉음이 들려왔다.
레나 주교는 팔라딘 셰인과 함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고, 또 달렸다. 조제프 대주교와 팔라딘 레일버, 그리고 골드힐의 시민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도와주세요, 성녀님. 도와주세요, 교황님.’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도와주세요, 베르덴 님……!’
레나 주교는 자신이 아는 강자들을 마음속으로 애타게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