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2화 주검의 영광 (2)
공기가 서늘하다.
평범한 건물 지하 창고에 감도는 정적이 신경을 지그시 억누른다.
구석에서 거미가 함정에 걸려든 먹이를 거미줄로 휘감는다. 그 외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다.
‘대적은…… 불가능.’
인간의 벽을 넘어선 무거운 존재감.
초월자다.
하지만 주검의 영광의 두 번째 하인인 루네시카 안테르노아와는 성별이 다르다.
얼굴을 가리고 있으나 사내임은 틀림없다.
괜히 여기서 위장할 이유도 없으니 소거법으로 상대방의 정체는 하나로 귀결된다.
턱.
메드란트가 먼지가 수북이 쌓인 빈 의자에 걸터앉았다. 루아스 교국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내가 그를 흥미롭게 바라봤다.
“죽기 전에 체면이라도 챙기겠다는 건가.”
“널 감당할 수 없다는 건 인정하겠다, 첫 번째 하인.”
메드란트는 보란 듯이 사내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너 또한 나를 일격에 죽일 수 있을까.”
“…….”
“궁금하면 시험해 보도록.”
메드란트를 일순간에 처리하지 않으면 루아스 교국에 발각된다.
아무리 초월자 전쟁을 포함해 800년 이상 생존한 초월자라고 해도 빛의 총본산에 포위당하면 살아날 방도는 없다.
소리 없이 죽느냐.
살아남아 알리느냐.
메드란트는 스스로의 마도와 방어 마법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단 한 번은 견딘다. 그의 자신감이 곧 확신이었다.
“소문보다 낫군. 하긴 그러니 마탑주로서 마탑에 반역하는 소사이어티에 가담할 수 있었던 거겠지.”
첫 번째 하인이 로브를 들췄다.
“드라벤 르마르크다.”
첫 번째 하인───‘드라벤 르마르크’가 본명을 밝혔다. 그의 얼굴을 처음 목격한 메드라트의 감상은 이러했다.
‘젊다.’
선이 분명하기에 어려 보이지도 않았지만 주름도 하나도 없었다. 외견상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칠흑의 머리카락.
창백한 피부.
어딘가 지친 듯한 에메랄드 눈동자.
전반적인 분위기는 당대의 다크워튼 마탑주와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드라벤의 눈은 전혀 죽어 있지 않았다.
묘한 열정이 느껴졌다.
그것이 광기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는 단정할 수 없었다. 일단 그냥 미친 초월자가 아니라는 것만큼은 자명했다.
“800년이나 넘게 산 초월자치고는 동안이군.”
“껍질은 껍질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항상 그 알맹이지. 영혼이 그러하듯.”
드라벤의 통찰력이 메드란트의 신체 너머에 있는 영혼을 응시했다. 차분함에 얽힌 경계심이 뚜렷하게 감지됐다.
하나 메드란트의 영혼에서는 티끌 같은 공포심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 메드란트가 물었다.
“이데라트 연맹장은 모든 종족의 화합을 바라는 평화주의자다. 그런 인물이 너희들에게 붙다니. 내 머리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데, 어떻게 테리웬을 현혹했나.”
“무의미한 의문이다. 껍질은 중요치 않다고 했을 텐데. 질문은 이렇게 하는 거다.”
드라벤이 <염동력>으로 바닥에 놓인 빛의 경전을 들어 보였다. 루아스 교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책이었다.
“너는 루아스교의 교리를 믿나?”
……교리?
메드란트는 드라벤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지만 대화에 응하기로 했다. 먼저 움직이면 목을 내어주는 꼴이 된다.
“이론적으로 검증할 방도는 없지만 일단은 믿고 있다. 신성력이라는 근거가 존재하니.”
“신성력은 실재하지. 하지만 내가 묻고 있는 건 교리다. 신성력이라는 근거로 쌓아 올려진 루아스의 ‘진리’ 말이다.”
콱.
먹이의 체액을 빨던 거미가 끌려오더니 드라벤의 손에 쥐어졌다. 건틀릿에 덮인 손끝이 거미의 몸통을 살짝 짓눌렀다.
“루아스교는 생명과 죽음로부터 세상과 인간의 영혼을 명확히 규정한다. 경전에는, 세상이란 인간이 스스로의 더러움을 털어 내는 장소이며, 사람마다 짊어진 더러움이 다르기에 삶 또한 제각기 다르다고 적혀 있지.”
루아스교는 삶을, 더러움을 씻어 내는 과정이라고 믿는다.
“끝에서 더러움을 씻어 내지 못한 인간은 타락해 지옥으로 떨어지고, 깨끗해진 인간은 루아스 여신의 곁으로 승천한다……. 편리한 이치가 아닌가? 도덕을 강요하기에 이보다 좋은 수단은 없을 거다. 인간에게 이보다 좋은 종교도 없을 거고. 믿지 않기엔 루아스의 힘이 존재하니 그에 마땅히 반박할 논리도 존재할 수 없었지. 하지만 아무리 포장해도 거짓은 진실이 될 수 없다.”
압사당하기 직전인 거미가 발버둥 친다.
“보아라. 인간보다 못한 한낱 미물이 죽음 앞에서 삶을 갈구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육체에 깃든 생의 본능일까, 혹은 죽음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영혼의 절규일까.”
“……인간 외에도 영혼이 있다는 관점은, 과거의 마법계에서도 논의된 적 있었지. 이 역시 실증할 방법이 없기에 의견으로만 남게 됐지만.”
“영혼 이론에 관심이 있었나 보군. 특별히 세상의 진실을 알려 주마.”
드라벤의 손에서 겨우 벗어난 거미가 아래로 떨어졌다. 어느새 활짝 열린 루아스교의 경전 위로 거미가 안착했다.
콰직!
책장이 닫히며 거미가 터졌다. 드라벤이 손끝을 까딱거렸다. 거미의 잔해로 더럽혀진 책 안에서 ‘하얀 구체’가 떠올랐다.
“정답은, 그렇다.”
거미의 영혼으로 보이는 것이 드라벤의 건틀릿에 흡수되었다.
“루아스교의 교리는 잘못됐다. 인간만이 아니라 수인, 엘프, 드워프도 영혼을 갖고 있다. 하다못해 벌레와 짐승도. 물론 인간의 영혼은 특별하지.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용한다?”
“이 모든 것은 루아스교가 자초한 일이다.”
드라벤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경전에 실린 대로 더러움을 씻어 낸 자가 빛의 신의 곁에서 안식을 취했다면…… 내가 이 길을 걷지 않았을 테니까.”
화르륵.
생명 자체를 앗아 가는 ‘검보라색 불꽃’에 경전이 타오른다. 이내 드라벤의 손목에서 제삼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방금 서대륙으로 넘어왔네. 근데 예정보다 10분 정도 늦을 것 같네.
“이유는.”
───으하하하하하하핫! 예상하지 못한 사고가 있었거든! 그래도 걱정 말게. 자네가 원하는 풍경은, 내가 아주 제대로 만들어 줄 터이니.
웃음 속에서 분노가 느껴진다.
───내가, 반드시.
드라벤이 알 수 없는 장치로 낯선 인물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메드란트가 슬쩍 자신의 손목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통신 팔찌가 반짝인다.
에온의 일원이 연락을 걸었다. 팔찌를 기동하면 즉시 연결될 터…….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베르덴에게 전하는 것이 급선무다.
“에온도 외부와 개인적으로 연락할 자그마한 수단이 있나 보군.”
드라벤이 충고했다.
“명을 재촉하고 싶나.”
“말했을 텐데.”
메드란트가 단호히 대답했다.
“궁금하면 시험해 보라고.”
10분을 줄 생각은 없다.
전신의 마력회로를 활성화함과 동시에 팔찌에 손을 뻗었다. 그러면서도 드라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츠읏.
드라벤이 허리춤에서 ‘마검’을 발도하며 거리를 한순간에 좁혔다.
마도 <명운(命殞)>
말 그대로 생명 자체를 폐하는 마도가 개방되어 원소에 깃들었다. 마검의 날붙이에 검보라색 화염이 실렸다.
크세리온 황제의 호위 기사단장, 드라벤 르마르크.
크세리온 제국 제일의 검사이자 마도사.
마도 <성연(城鏈)>
메드란트의 고유 마력 장막이 중첩되어 전신을 보호했다. 마검의 궤적을 제대로 읽고 판단할 여유는 없었다.
목적은 명료했다.
촤아아아악!
마검이 순식간에 사선을 가르더니 견고한 보호 마법마저 절단했다. 피가 튀었다. 오스테아 마탑주의 로브가 붉은색으로 서서히 물들었다.
메드란트가 입가를 끌어 올렸다.
“못 죽였군.”
치명상은 피했다.
메드란트의 망가진 방어막이 명멸하더니 위험한 빛을 뿜어냈다.
고유 마법이 발동했다.
<반사의 장막>
검격에 담긴 충격량이 도리어 사방으로 뻗어 나가 지하실을 덮쳤다.
* * *
루아스 교국의 밤은 여전히 마도 축제로 빛나고 있다. 성직자들이 가득한 도시에서 사람들은 안심한 채 웃고 떠들었다.
지축이 흔들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지하에서 무언가가 폭발했다.
하늘로 솟구친 메드란트가 가까스로 <비행>을 해 추락 속도를 늦췄지만, 마법을 아예 제어하지 못하고 다른 장소에 곤두박질 쳤다.
한창 대주교가 중심가에 나와 사람들과 기도를 하고 있었기에, 다행히 건물 내부를 포함하여 폭발로 인한 사상자는 없었다.
갑작스러운 굉음에 군중이 몰렸다.
7인의 대주교───영화(永華)의 대주교가 폭발 발생 지점에 다가섰다.
그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이게 무슨……?”
루아스 교국에서 폭발 사고라니?
불가능한 일이다.
우연으로라도 벌어질 사건이 아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의도한 것이라는 뜻이 되지만…… 그 또한 말이 되지 않았다.
종교의 역사에서 루아스 교국이 외부의 습격을 허락한 적은 없었다!
건물 잔해가 들썩였다.
“방어의 마도사. 목숨 하나는 끈질긴 마탑주군.”
드라벤이 죽음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마검을 손에 든 채 모습을 드러냈다. 성직자들과 시민들, 그리고 타국의 사절들의 시선이 꽂혔다.
영화의 대주교가 눈을 부릅떴다.
“이, 인간이 어찌 이런 사기(死氣)를─”
“드라벤 르마르크.”
삼정의 추기경───인내(忍耐)의 데엘로가 가장 앞으로 나왔다.
위광.
그의 등 뒤에서 대주교급을 웃도는 거대한 빛의 고리가 형성됐다. 강력한 신성력이 드라벤의 사기를 차츰 정화했다.
“주검의 영광의 첫 번째 하인 따위가 감히 성역에 침입하다니. 오만에도 정도가 있다.”
“추기경 따위에게는 볼일 없다.”
드라벤이 시선을 높였다.
루아스 교국에서 가장 높은 곳…… 수많은 계단 위로 올라가야만 입성할 수 있는 성소에, 드라벤이 주시하는 존재가 있었다.
교황, 로마누스.
신성력이 어둠을 걷어 낸다. 성스러운 목소리가 드라벤에게 전해졌다.
“골드힐의 참사는 이를 위해서였군요.”
“성녀까지 있으면 성가시니.”
빛에 둘러싸여 있는데도 드라벤에게 후퇴의 의사는 없었다. 오히려 기뻐하고 있었다. 지난 800년 동안의 증오와 울분을 풀 기회가 왔다는 듯.
‘대체 어떻게 교국에…….’
교황은 침착함을 표방했으나 내심 의문이 한둘이 아니었다. 출입 검사는 철저하게 했다. 드라벤 정도의 흑마도사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들어올 방법이 없을 터였다.
그에게 내재된 죽음의 기운은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것이니까.
“교황님.”
성소에서 나온 고위 팔리딘이 보고했다.
“성녀님과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까.”
교황이 멀리 시선을 던졌다.
다른 사람의 눈에 전혀 보이지 않는 흐릿한 막이, 교국을 뒤덮은 광경이 보였다. 끔찍한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저것은 보는 그대로 인간의 영혼으로 만들어진 벽이었다.
나갈 수도 없고.
들어올 수도 없다.
루아스 교국이…… 성소가 폐쇄됐다.
“빛의 신, 루아스!!!!!”
드라벤이 내지른 함성이 루아스 교국 수도에 울려 퍼졌다.
현재 잊힌 6대 전설 중 1대 전설인 영혼을 다루는 욕망 – 아니무스, 그 미지의 힘과 연결된 건틀릿이 발광했다.
“네년은 거짓된 교리로 진실을 은폐하고 세상을 현혹했다. 인간을 위한다고? 웃기지 마라!! 그 거짓된 가면은, 내가 직접 부숴 주마……!!”
드라벤의 칼끝이 교황을 넘어 종교의 신 자체를 겨냥했다.
“폐하의 신체, 돌려받겠다.”
“빛의 신자들에게 고합니다.”
교황의 신성력으로 구현된 위광이 도시 전체를 밝혔다.
마치 한낮의 태양처럼.
“신성 모독자를 처단하십시오.”
“무구한 광명으로.”
빛이 온몸에 깃든다.
<영광의 은총>
추기경, 대주교, 팔라딘, 성직자…… 모든 빛의 신자들이, 교황의 기적을 받음으로써 믿음의 경지를 한 단계 위로 높였다.
“진실과 거짓도 분간하지 못하는 광신자들이.”
드라벤은 흑마법계의 초월자로서 모든 전력을 끌어냈다.
“좋다. 전부 죽여 주마.”
계획대로 성녀를 꾀어내고, 성소를 가두어 외부 개입을 차단했지만…….
메드란트 케덴과 그림멜 그롬파르 때문에 상황이 조금 틀어졌다. 10분, 아니 9분 동안은 루아스 교국의 총공세를 단신으로 견뎌야 한다.
교황이 지원하는 이상 한 명 한 명 확실하게 숨을 끊을 필요가 있다. 어딘가에 있는 미숙한 성자도 얕볼 수는 없다.
맞선다.
패배는 없다.
드라벤 르마르크는 바로 오늘, 이 한 수에 모든 걸 걸었다.
그때였다.
푸욱!
칼날이 성직자의 척추를 뚫고 장기를 등 뒤에서 관통했다. 옅은 비명을 지른 성직자가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돌렸다.
“……뭐.”
피가 흩날린다.
“꺄아아아악!”
“아아아악!”
겉으로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 성직자 말고도 시민들을 살해했다.
사절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소리 없는 기습을 가까스로 회피한 라리안 마탑의 위원회, 오색 중 청(靑)을 담당하는 틸렌 하우겐이 목에 난 상처를 붙잡았다.
“전원, 주의하거라……!”
사방에서 무차별적인 살인이 발생했다.
“군중 사이에 적이 숨어 있다!!”
지금의 돌발 상황에 당황한 건 교황만이 아니라 드라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드라벤은 이 소란의 원흉이 누구인지 짐작했다.
‘그놈들이군.’
* * *
통신 장치가 먹통이다.
아무래도 루아스교의 수도가 잠시 동안 감옥이 된 듯했다. 리산드로의 열매 포션을 마신 메드란트가 가쁜 숨을 내쉬었다.
상처는 회복되고 있으나 속도가 더디다.
게다가 극심한 고통까지.
‘성가신 마도군.’
드라벤의 마도가 심장에 닿았으면 손도 못 쓰고 죽을 뻔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싸게 먹혔다.
드라벤의 섬멸은 교황이 주도할 터.
메드란트는 다시 전쟁터에 나서기 전에 자신을 찾아온 자를 맞이했다.
“아무리 봐도 가짜는 아닌데.”
“…….”
“왜 배신한 거냐, 테리웬.”
테리웬이 눈을 감았다.
“인간과 다종족의 상생에서…… 인간우월주의를 중심 교리로 삼은 루아스교는, 저의 이상향에 방해가 되었습니다. 그런 극단적인 믿음이 존재하는 한 우리 종족의 화합은 이룰 수 없습니다. 영영. 그렇기에! 그렇기에…… 저도 어쩔 수 없이 주검의 영광의 손을 들어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친 헛소리를…….”
“여기까지가 대충 표면적인 이유고. 우리 행동의 근거는 단 하나뿐입니다. 오직 단 하나.”
테리웬이 눈을 뜨더니 평소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든 것은 ‘당신’을 위해.”
메드란트가 미간을 좁혔다.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