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화 주검의 영광 (1)
완전히 사라진 기척.
지면에 착지한 베르덴이 즉각 푸른빛의 공간 이동이 발생한 지점을 살폈다.
공간 지배까지 활용하여 공간 좌표의 연결점을 쫓았다.
베르덴이 이내 미간을 구겼다.
‘흔적이 없다.’
베르덴이 보헤미른 마탑을 탈출했을 때와 비슷한 경우다. 마법적 재료가 아닌 기계장치로 구현된 공간 이동 마법진은 추적할 단서를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사라졌다.
이곳에 남은 것은 그림멜의 왼쪽 팔을 보호하던 금속 장갑의 파편들뿐이었다.
‘설마 마도 결합을 버틸 줄이야.’
소멸의 개념이 극대화된 <월식>의 망화와 파멸의 마력을 일치시키면 종말이 되고.
그 주류가 되는 파멸을 <아케인>으로 운용하면 <로드 아케인>이라는 베르덴만의 비장의 수단이자 고유 마법이 완성된다.
이는 초위 마법을 제외하면 베르덴의 가장 강력한 마법이기도 하다.
만능의 초월자, 발로크 베시아스.
키론다르, 텔로르 크렌드로스.
사막의 신, 이슈르.
초월의 영역에 속한 존재들조차 <로드 아케인>을 온전히 방어하지 못하고 치명상을 입었다.
정통으로 격중하면 대부분의 존재는 즉사에 이를 정도의 파괴력. 한데 그것을 드워프가 맨몸으로 견딘 광경은 예상 외였다.
못해도 장갑(裝甲)이 파괴되고 종말에 일부나마 노출된 팔은 지워졌어야 정상이었는데…….
게다가 마안으로 발동된 <현뢰 - 유전(流電)>에 제대로 적중했음에도 그림멜의 머리통은 끝까지 붙어 있었다.
단언컨대 어느 정도 부상을 당했을지언정 목숨엔 지장은 없을 것이다.
기이하게도 놈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으므로.
‘설명이 안 되는 저항력이군.’
종족 특성상 기, 마력, 신성력을 전혀 체득할 수 없을뿐더러 수인처럼 신체 능력이 압도적으로 뛰어난 것도 아닌 드워프치고는 그러했다.
꿈틀.
알파가 [아인베르]의 목덜미 부근에서 슬쩍 몸을 보였다.
[상황 종료?]
“일단은. 놈의 도구 잔해가 남아 있으니 돌아가면 정밀 분석을 부탁하마.”
[확인.]
베르덴이 그림멜의 외부 장갑 파편을 아공간에 보관했다. 그중 작은 파편 하나가 알파의 자그마한 손에 들렸다.
알파는 파편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베르덴에게 물었다.
[그림멜 그롬파르. 강함?]
“강하기보다는 위험하다고 평가하는 게 옳겠지.”
그림멜은 어디까지나 드워프다.
육체적인 힘은 일부 중의 일부일 뿐, 경계해야 하는 것은 그림멜의 손재주로 탄생되는 정체불명의 장비들이다.
자체 무력은 초월자에게 닿지 못하는 그하룬이, 직접 [인테리스], [실렌다르], [엘데론] 같은 무구들을 제작했던 것처럼 말이다.
“기계장치라…….”
파멸의 충격을 막아 낸 마력의 장벽.
존재감을 철저하게 은폐하는 도구.
마력 폭발을 일으키는 기계 팔.
드워프의 기동력을 초월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기계 다리.
그리고.
놈이 도주 수단으로 사용했던 공간 이동 마법진 장치는,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공간 이동 마법진과는 기반이 달랐다.
아무래도 독자적인 기술력으로 현대의 마법을, 마력만으로 구현한 듯했다.
특히 거대한 마력의 입자를 불안정하게 만들어 쏘아 보낸 마지막 일격…… 필시 그 힘이 도시를 부순 마력 분열일 터.
“방심했을 때 죽였어야 했는데.”
도주한 그림멜이 숨어 다니며 마력 폭발 테러를 일으키면 성가셔진다.
어떻게든 시급히 제거해야 한다.
단서는 생길 것이다.
주검의 영광이 부활시킨 존재가 활동하고 있다는 것은 주검의 영광의 하인들도 움직이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
다른 초월자가 접근한 건 그때였다.
“그림멜 그롬파르. 죽이지는 못했군.”
섭리자, 데우스 위덴.
* * *
[섭리자. 확인.]
백색의 로브를 두른 노인이 뒷짐을 진 채 그에게 걸어왔다. 특유의 피폐한 녹색 안광이 달빛 아래에서 일렁였다.
베르덴이 물었다.
“여긴 무슨 볼일이지.”
“대행자가 전했을 텐데. 너를 위해 조언을 하기로 결정했다고.”
“조언…….”
베르덴이 붕괴된 도시가 있는 방향으로 눈길을 던졌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나?”
“예상은 했다.”
“그런데 왜 나서지 않은 거냐.”
옛 왕이 이슈르처럼 운명의 사도이고, 섭리자가 운명을 거부하는 저항자 중 한 명이라면 진즉 나서서 주검의 영광을 처단했으면 됐다.
레프라기움 마탑이 손만 얹어도, 최소한 옛 왕의 부활을 막는 데 아주 큰 힘이 되어 줄 수 있을 거라는 건 틀림없다.
그런데 섭리자는 방관을 일삼고 있다.
주검의 영광의 만행을 그저 지켜보면서 사상자를 방치했다. 그림멜 그롬파르에 대해 알고 있었으면서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다.
피울음 역병과 도시 멸망.
최근에만 몇 명이 죽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도대체 뭘 기다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의도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나? 언제까지 신비주의를 고집할 작정이지?”
“이타적이군.”
섭리자는 시선을 높여 구름 사이에 반쯤 가려진 달빛을 응시했다.
“세상은 꽤 균형적이다.”
고고한 목소리였다.
“악이 아무리 발호해도 그에 준하는 선이 등장해 혼돈을 이루고, 선이 가득해도 결국에는 악이 생겨나 혼란을 자아내지. 그런 흐름이 있기에 대륙과 바다는, 이 세상은 멸망하지 않는다. 선악의 규정과 대립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작금의 상황은 일종의 눈치 싸움에 가깝지.”
알파가 몸을 기울였다.
[눈치 싸움?]
“누가 먼저 손을 뻗느냐의 싸움이기도 하다.”
섭리자가 눈을 피하며 왼손을 오른손 위에 겹쳐 올렸다.
“목적을 거머쥐기 위해 참지 못하고 손을 내밀면, 결국 상대방에게 손등이라는 주도권을 내어 줄 수밖에 없는 법이니.”
“그러니까 운명과 저항자, 둘 중 먼저 움직이는 쪽이 불리하다는 이야기군.”
“결과적으로 먼 과거의 승자가 ‘당신’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래서 그녀 또한 잃을 것이 많지. 우리가 그러했듯이.”
섭리자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네가 의도치 않게 파괴한 운명은 잠든 ‘당신’이 깨어나기 전에 재건을 원하고 있다. 갈라진 바다가 자연스럽게 다시 채워지듯 망가진 기계를 자동으로 다시 제작하는 이치지. 이를 행하는 것이 바로 운명의 사도들이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온다.
베르덴은 과연 섭리자가 어디까지 대답해 줄지 궁금했다.
“사도들이 따르는 ‘당신’은 얼마나 강하지?”
“음?”
섭리자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조금이지만 놀란 기색이었다.
“설마 사도들이 아니라 ‘당신’의 경지에 대해서 물을 줄은 몰랐군.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언제나 네 상상을 벗어날 거라는 것 외에는.”
“그런가.”
“하지만 닿을 수 없는 것은 아니지.”
섭리자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베르덴의 어깨를 가볍게 짚었다.
“네가 궁극에 도달한다면 ‘당신’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이 로브에 깃든 잿빛의 드래곤의 권능을 온전히 손에 넣는다면 더욱.”
“……!”
베르덴이 소환 마법의 여파로 패잔병의 감옥에서 태초의 드래곤과 조우한 것을, 섭리자는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정보 수집의 수단이 무엇인가.
베르덴조차 당장 감지하지 못하는, [아인베르]에 깃든 힘을 어떻게 꿰뚫어 본 것일까.
의문이 더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7위계에 머무르고 있는 너에게는 먼 이야기지. 대행자가 두 번째 조언까지 해 주었으니 이번이 세 번째 조언이군. 이미 8위계의 실마리를 잡고 있으니 불필요한 조언일 테지만.”
스윽.
“본질에 충실해라. 그리고 지배하라.”
섭리자가 세 발짝 물러났다.
“제어할 수 없는 것을 제어하는 경지가 8위계다.”
베르덴은 침묵으로 대답했다. 섭리자가 말했듯이 그의 조언은 무의미했다. 이미 8위계로 가는 방법을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베르덴에겐 8위계에 필요한 ‘단 한 번의 상황’만 필요할 뿐이었다.
섭리자가 말했다.
“그리고 눈치 싸움이라고 했지만 아예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 마탑들이 물밑에서 전쟁을 벌인 것처럼 우리 또한 손을 뻗지 않는 선에서 준비를 갖추었지.”
“……아카데미 강의를 빌미로 삼아,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안전한 가르간트에 몰려들도록 유도한 것도 그중 하나인 셈인가.”
“휴전도 전쟁이다. 그리고 우리는 저항을 포기한 적이 없다.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죽지 않았기에 저항하고.
죽지 않았기에 삶을 갈구하며.
죽지 않았기에 복수를 다짐한다.
베르덴과 섭리자가 서로를 직시했다.
[……?]
알파는 두 사람 사이에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동질감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직후 베르덴에게 질문이 던져졌다.
“갈등은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무엇을 할 것인가, 베르덴.”
베르덴이 즉답했다.
“전쟁을 준비해야겠지.”
“그렇다면 마지막 조언이다. 결단을 내렸다면 뒤돌아보지 마라.”
달빛이 사라졌다.
잠시 어둠이 내려앉았다.
“망설임은, 언젠가 발목을 잡는다.”
* * *
베르덴과 알파가 공간을 통해서 잔트라의 폐허로 이동했다.
오직 섭리자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
베르덴에게 세 번째 조언과 네 번째 조언을 해 준 섭리자는 만사에 초연한 듯, 회색 구름 너머에 있는 달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만남은 어떻셨습니까.”
기척을 드러낸 섭리자가, 베르덴과 대화를 나눈 섭리자를 향해 공손히 물었다.
“과거가 떠오르는 만남이었다. 왠지 옛날의 나를 마주하는 것 같더군. 알파가 함께 있으니 그런 기분이 더 드는 걸지도 모르겠어.”
섭리자의 형체가 흐릿해지더니 곧 젊은 사내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그 안에 깃든 의식이 속삭였다.
+과연 나와 다른 길을 걷고, 종국에 나와 같은 선택을 내릴지. 기대가 되는군+
올다르크 루인 아케나드가 동대륙 순행을 마치고 중앙 대륙으로 넘어왔다.
진짜 섭리자가 말했다.
“저희는 다가올 ‘난전’을 대비하겠습니다, 태초의 마법사시여.”
+맡기겠다, 데우스+
올다르크가 격려하듯 섭리자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그 의미를 이해한 섭리자가 오랜만에 그 호칭을 입에 담았다.
“맡겨 주십시오, 스승님.”
그렇게 베르덴을 만나 본 올다르크는 남쪽으로 순행을 이어 나갔다. 그는 베르덴이 지나온 과거를 천천히 되짚고 있었다.
‘당신’이 약간 눈을 뜬 이상, 화산 지대의 검은 화산을 멸망시켰을 때처럼 조금 과감하게 세상에 개입할 수는 없었으므로.
올다르크가 전력을 발휘한 순간 ‘당신’의 봉인이 풀리는 속도도 가속한다.
새벽의 초원.
“…….”
섭리자는 혼자가 되었다.
태초의 마법사의 분신인 관리자의 제자, 베르덴.
태초의 마법사의 제자, 데우스 위덴.
문득 섭리자는 베르덴을 사제(師弟)라고 여겨야 하는지, 평소의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하며 서쪽에 신경을 기울였다.
서대륙의 루아스 교국에.
* * *
역시 마도 축제는 루아스 교국에도 평소와 다른 활기를 불어넣었다. 아무리 마법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종교 국가라고 해도 대륙의 축제를 즐길 권리는 있었다.
무엇보다도 마도 축제는 마법사 이전에 ‘인간’의 축제였으니까.
가르간트 외에도 루아스교, 아케나드 마도국, 아르나크 제국 등에는 각국의 고위 사절들이 찾아가 해당 국가의 마도 축제를 참관했다.
일종의 외교 관례였다.
이데라트 연맹장, 테리웬은 직접 루아스 교국에 방문해 축제를 지냈으며…… 에온에서 보낸 메드란트 케덴도 그러했다.
아니, 정확히는 메드란트 케덴이 자처했다.
마도 축제 8일 차.
스윽.
계속 테리웬의 행적을 자연스럽게 주시하고 있던 메드란트가 주변을 살피고, 아무도 몰래 건물 지하로 내려갔다.
루아스 교국의 중심가에 가까운 장소였다.
세계적인 감정사인 레논 버나드는 세계 회의에서 용검과 금환일식의 관계를 언급한 후 수상한 정황을 보였다.
그렇다면 레논 버나드를 데려온 테리웬은 내해에 떠오른 미지의 섬과 금환일식의 연결 고리를 정말로 알고 있었을까?
메드란트는 그런 의심을 거두지 않고 테리웬을 감시했다. 루아스 교국에서 무엇을 하는지, 어디를 다녀오는지 주도면밀하게.
‘베르덴은 최대한의 안전을 기하라고 했지만…… 그래서는 단서를 얻을 수 없다.’
탐험과 탐구에 특화된 오스테아 마탑의 주인답게 대담하게 움직였다.
지난 8일 동안 테리웬이 흔적을 찾을 수 없었던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그게 바로 이 근처였다.
지상은 전부 뒤져 봤으니 지하만 남았다.
…….
메드란트가 소리 없이 문을 열고는 지하를 천천히 살폈다. 어둡다. 거미줄이 가득하다. 사람의 손길이 오랫동안 닿지 않은 듯했다.
끼익.
하지만. 누군가는 있었다.
낡은 의자에 근엄하게 앉아 있는 존재가 어둠에 잠겨 있다.
숨을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처럼.
메드란트가 말했다.
“역시 안 좋은 예감은 꼭 들어맞는군.”
“감이 좋군. 마탑주답게 집요하고.”
쿵! 문이 닫혔다.
“메드란트 케덴.”
주검의 영광의 첫 번째 하인이 에온의 열한 번째 위상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