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6화 차원 너머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네 번째 좌표의 구현은 곧 네 번째 차원의 생성으로, 고차원의 이치는 낮은 차원의 벽을 무시한다.
발로크 베시아스가 개척한 경전의 마도를 완전히 모방하지 않으면, 베르덴의 마도로도 사차원의 초위 마법진을 재현할 수는 없다.
그래서 틈틈이 시행착오를 거치며 초위 마법진을 해체하고, 해석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여 재구성해 왔다.
‘현재 완성도는 10할 중 약 6할.’
절반을 넘어섰다고 해도 시험 삼아 시동하기에는 부족한 완성도다. 아무리 못해도 8할 이상은 되어야 성공과 실패를 따질 수 있다.
초위 마법은 마법계 초월자의 정수.
이에 담긴 마법적 이치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애초에 베르덴을 제외한 마법계 초월자는 생각할 여지도 없이 불가능하다고 여기기에 시도조차 하려 들지 않는다.
실제로 불가능하기도 하다.
어쨌든.
‘부족한 나머지는 이그나시아가 채운다.’
후우우웅…….
베르덴이 새로운 초위 마법진을 작성하는 사이, 이그나시아가 허공에 앉은 모습으로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마도 <상계(想界)>
현실과 가상을 넘나들며 환상을 일으키는 고유의 마도가 개방됐다.
흐릿하고도 투명한 환상의 아지랑이가 현실에서 일렁거렸다. 그것들이 베르덴이 구축하는 마법진에 하나둘씩 깃들었다.
“그러고 보니 다히트 녀석이 꿈을 퍼뜨렸을 때랑 상황이 비슷하네. 전대 블랙 아워의 지도자에게 초위 마법을 빌려주고, 현 블랙 아워의 지도자에게도 초위 마법을 빌려주고. 의외로 나하고 블랙 아워가 잘 맞나 봐, 그렇지 않아?”
베르덴도 대륙의 혼란에 크게 기여했지만 그녀도 그에 못지않다.
대부분의 사람이 정확히 알지 못할 뿐이다.
“알파야, 기억 골렘 가지고 있지? 세계 회의에서 보여 준 거. 이것 좀 기록할래?”
“마도에 집중해라.”
“난 다히트처럼 순수하게 기억으로만 남고 싶지 않거든? 남는 게 있어야 남들한테 자랑할 수 있을 거 아니야. 인정하지? 인정한다고? 베르덴이 허락한 거 봤지?”
[베르덴 폐하의 암묵적 의사 확인. 기억 골렘 기동.]
미니 골렘에 내장되어 있던 기억 골렘의 기능이 활성화되었다.
이그나시아는 자기 할 일을 다 하면서도 다양한 모습을 선보였다.
은하수 같은 머리카락을 들어 올려 백옥 같은 목덜미를 드러내거나, 눈을 감고 집중하는 베르덴 뒤에서 쌍엄지를 치켜들었다.
‘……정신 산만하군.’
베르덴은 내심 한숨을 쉬고는 안광을 번뜩이며 손바닥을 겹쳤다. 허공에서 회전하는 마법진이 그의 의지에 반응했다.
왼손은 아래로.
오른손은 위로.
정확히 수평으로 나뉘면서 두 개로 분리된 마법진이 각각 지상과 상공에 내려앉거나 떠오르며 규모를 키웠다.
같거나 서로 다른 크기의 원들, 무수한 곡선과 직선, 규칙성을 띠는 도형들…… 두 개의 거대한 초위 마법진이 완성됐다.
이그나시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더럽게 난해하긴 하네. 딱히 마법진을 전공한 건 아니지만 반의반도 해석이 안 되는데. 이거 발로크가 살아 돌아왔다고 해도 믿겠는걸? 혹시 너, 발로크한테 마법진 배웠니? 숨겨 둔 제자인데 스승에게 버림받고 복수한 그런 이야기? 네 재능이면 버릴 리가 없는데. 아! 그걸 질투해서 죽이려 들었나?”
“헛소리 그만.”
이그나시아는 발로크 베시아스를 죽인 초월자가 다히트가 아닌 베르덴임을 알고 있었지만, 베르덴이 어째서 그랬는지는 알지 못했다.
‘분명 감정적인 건데…… 흠, 뭘까?’
사실 단서는 이미 뿌려져 있었지만 이그나시아의 상식이 추론을 방해했다.
1위계 마법사가 독자적으로 한계 위계를 완전히 극복해 격이 다른 초월자의 재목이 되었다는 상상은, 그녀가 역천의 마법진을 파악하지 못하는 이상 닿을 수 없었다.
이러니 관심을 끊을 수 있나.
이그나시아에게 있어서 베르덴은 무엇이 나올지 모르지만, 하나같이 즐겁기 짝이 없는 선물이 나오는 보물 상자나 다름없었다.
[열한 번째 위상. 통신 두절. 7분 34초.]
“이그나시아, 자리로.”
“확인.”
베르덴과 이그나시아가 초위 마법진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섰다. 은은한 마력의 빛이 그들의 모습을 밝혔다.
원리 자체는 간단하다.
이그나시아가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려 허상으로 마법진을 보완하고, 동시에 베르덴은 마법진 전체를 실시간으로 조율해 해답을 찾는 것.
암월의 꿈처럼 초위 마법을 연계하는 것이 아닌, 초위 마법에 초위 마법을 집어넣는 것이라 반발력이 클 거라고 예상된다.
‘시간을 지체하면 지체할수록 불안정성이 높아진다.’
마법진이 시간 초과로 무산돼도 실패.
마법진의 발동이 잘못돼도 실패.
모든 실패의 대가는 마법진의 주체인 베르덴이 감당해야 한다. 마법진이 붕괴하면 이그나시아의 초위 마법의 반동이 직격할 터.
이런 상황에서 정신계에 심대한 타격을 받으면 치명적이다.
망설임은 없다.
실수로 한 발만 잘못 디뎌도 낭떠러지로 떨어질 얇은 외줄 위를 걷는 건, 베르덴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일이었으므로.
“알파, 잠시 뒤에 보자.”
[베르덴 폐하. 만세.]
미니 골렘의 동력인 순수한 마력이 거두어지며 알파가 잠에 들었다. 이 상태에서의 알파는 생물이 아니라 사물로 취급된다.
과거 발로크가 보여 준 기억에 의하면 사차원에선 생소한 미증유의 압력이 전신을 옥죄다 못해 강하게 짓눌렀다.
초월자도 적응이 필요할 정도이니 알파는 자칫 위험할 수도 있다. 미니 골렘의 저항력이 높아도 굳이 불확실성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 베르덴은 일단 재구성한 초위 마법진의 기능에 자신을 제외한 다른 생명체가 들어갈 것까지 고려하지 않았다.
시작부터 이것저것 따지면 완성 자체가 지연될 테니까.
베르덴은 안전하게 미니 골렘을 [레인디아]의 아공간에 보관했다.
“아하하, 마치 부모 같네.”
“그럼─”
“전개하지.”
베르덴의 대사를 빼앗은 이그나시아가 엄지를 제외한 손가락들을 겹쳤다.
손가락의 첫 마디가 서로를 감쌌다.
세계 회의장을 만들어 냈을 때는 구체적인 심상을 떠올렸지만, 이번에는 어떤 형태로도 변모할 수 있는 애매모호한 심상이 필요하다.
형태가 명확하지 않기에 상당히 수고스러웠지만 문제는 없다.
존재하기에 실상.
존재하지 않기에 허상.
이그나시아는 그 경계의 주인이다.
은하를 연상시키는 빛이 눈동자와 머리카락에서 발광했다.
그녀의 격이 일대를 잠잠하게 했다.
팔꿈치를 바깥으로 밀었다.
여덟 개의 손가락이 당겨지며 첫 번째 마디에서 마찰을 일으킨다. 직후 손톱에 닿아 손끝을 지나는 순간 공기가 붕 떴다.
초위 마법.
경계 현현: <환허계──진하(震河)>
현실의 경계가 무너졌다.
이그나시아가 미리 마법진에 심어 놓은 환상의 흔적이 깨어나며, 베르덴이 지적한 마법진의 일부가 흐릿해졌다.
허상으로 실상을 보완해야 하는 지점은 정확히 36곳.
마법전이 두 개니 총 72곳.
파앗!
이그나시아가 이마에서 튕겨 나온 투명한 구체가 베르덴의 미간에 스며들었다. 그는 정신력을 극도로 낮춤으로써 온전히 이를 받아들였다.
“정확히 환허계의 주도권 절반을 넘겼어. 한번 고정된 허상은 그대로 되돌릴 수 없으니까 신중하게 판단해.”
이그나시아가 허상으로 셀 수 없이 많은 경우의 수를 보여 주고, 베르덴은 그중에서 정답을 찾아 초위 마법진의 완성도를 높인다.
그래서 두 사람의 합이 중요했다.
쿠구구구구구구구…….
마법진에서 발생한 미약한 떨림이 대지와 하늘을 뒤흔들었다. 아직은 미세하지만 머지않아 이 진동은 안전성을 산산조각 낼 터.
이그나시아의 손이 살짝 떨렸다.
“예상했던 것보다 반응이 격하잖아? 이거 오래 못 버텨.”
베르덴은 강하게 양팔을 뻗어 그녀와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마법진의 흔들림이 잠시 멎었다.
“4분 안에 끝낸다.”
“7분은 안 돼?”
“안 돼.”
후우우우웅───
베르덴의 <무한>으로 구현된 두 개의 마법진이 회전한다.
이그나시아가 복잡한 기계장치를 조종하듯이 보랏빛 은하수가 담긴 눈동자를 굴리며 손가락을 쉴 새 없이 까딱거린다.
팟. 팟. 팟. 팟. 팟.
허상이 결정되면서 마법진의 빈 부분이 하나둘씩 채워졌다. 속도가 빠르다. 너무.
베르덴은 한낮의 사막에서 유리 조각을 찾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마법 이해력 하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따라잡지 못하겠네. 저건 천부적인 거니까 초월자가 아닐 때도 저랬을 텐데. 그냥 말만이 아니라 진짜 초대 마도왕과 동급의 재능일지도.’
마도 축제에서 보여 준 베르덴의 연구와 베르덴을 향한 군중의 찬사가 떠오른다.
이그나시아가 히죽 웃었다.
‘재밌어재밌어재밌어. 그래도 질 수 없지.’
베르덴이 고정한 허상을 토대로 임의로 경우의 수를 줄였다. 만약 정답을 제외해 버리면 참사였지만 그녀 또한 주저하지 않았다.
이렇게 억지로 개입하면 이그나시아도 실패 시 정신계가 손상된다. 정신계 초월자이니 베르덴보다 더 피해가 클 것이다.
물론 그런 위험 따위는 당장의 즐거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
마치 경쟁하듯 가파르게 상승하는 초위 마법진의 완성도. 7할. 7할 5푼. 7할 8푼…… 곧 최소 완성도인 8할까지 돌파했다.
3분 20초가 지났다.
이내 72개 중 70개를 채운 직후 두 사람이 동시에 허상을 선택했다. 현재로서는 최대 완성도인 9할의 목전에 닿은 것이다.
이그나시아가 멋대로 남은 한 자리를 채웠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눈엔 확신이 가득했으므로.
마법진의 전체가 선명해졌다.
베르덴이 각각 위아래로 뻗은 손바닥을 그대로 반대 방향으로 빠르게 움직여 상체의 중심 높이에서 교차시켰다.
초위 마법진.
<디아셴시오Diashencio>
두 개의 거대한 마법진이 솟구치고, 또 추락하여 충돌했다.
무(無)의 경계.
마법진이 겹치며 만들어진 수평선에서 유리가 부서지듯 균열이 일었다.
쩌저저저저적…….
네 번째 좌표가 열렸다.
* * *
발로크의 그것보다 아직 부족해 신기루 비슷한 희미한 통로가 상당히 불안정했다.
역시나 본래의 설계대로 혼자만 들어가는 편이 안전하겠지.
아마도 십수 초 뒤면 닫힐 것이다.
“도와줘서 고맙군.”
“이걸로 빚 두 개…… 라고 하고 싶지만 특별히 봐줄게. 빚 하나는 남아 있으니까.”
이그나시아가 장난스럽게 손짓했다.
“세상을 즐겁게 만들어 와. 나를 위해.”
그녀 나름의 격려였다.
베르덴은 옅은 미소를 짓고는 네 번째 좌표에 발을 디뎠다. 발로크의 기억을 공유받았기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베르덴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핫.”
당연하게도 할 일을 마쳤다고 해서 이그나시아가 이대로 조용히 물러날 리 없었다.
베르덴은 다인용으로 만들어진 마법진이 아니라 위험하다고 했지만 호기심이 넘쳐흐르는 마법사로서 도전하지 않으면 평생의 수치다.
그녀가 고양이처럼 냉큼 다가가 사차원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읏.’
해석할 수 없는 공간파가 느껴졌다.
기이한 압력이 피부를 눌렀다.
이그나시아가 괴로워하며 최대한 눈에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사차원에 존재하는 아주 거대한 물체를 보았다.
‘아, 악마?’
빛 없는 어둠의 중심에 자리한 압도적인 크기의 악마의 손.
이그나시아가 어둠의 대악마가 창조한 악마의 피난처───리버레아스를 목격했다. 그녀는 그 정체를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저도 모르게 더 가까이 살펴보기 위해서 입구에 몸을 더 집어넣었다. 불안정한 입구에 이그나시아의 존재감만큼의 무게가 더해진 순간이었다.
“……!”
이그나시아가 확 몸을 뺐다.
쩍. 차원이 닫혔다.
네 번째 좌표 입구가 사라지고 가르간트 근방의 초원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내려앉은 정적 속에서 이그나시아가 목을 쓸었다.
“휴, 하마터면 잘릴 뻔했네.”
가장 어이없게 죽은 초월자로서 역사에 이름을 올릴 뻔했다.
아니, 세간은 어떻게 죽었는지 정확히 모를 테니 머리 없는 이그나시아의 시체를 두고 여러 이야기를 마음대로 써 내려가겠지.
아무튼.
“그건 분명 악마였는데…….”
어째서 네 번째 좌표 너머에서 악마의 손이 보인 걸까. 궁금하다. 어쩌면 악마의 손 말고도 다른 것이 또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입술을 매만지며 어깨를 들썩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시원한 웃음소리가 초원에 울려 퍼졌다.
“아, 역시 친구를 잘 둬야 한다니까. 아하하하.”
이그나시아의 눈빛이 한없이 진지해졌다.
“간만에 마법 연구 좀 해야겠어.”
베르덴은 이그나시아의 도움으로 초위 마법진의 완성도를 끌어올렸다. 그 과정은 차후 초위 마법진의 진정한 완성의 거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그나시아는 모든 감각을 연 채 베르덴과 같은 경험을 공유했다. 초위 마법진의 단서는 그녀에게도 있었다.
계외.
경계 밖의 초월자가 사차원의 경계에 큰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 * *
베르덴은 의식을 집중하며 루아스 교국의 좌표로 향했다. 사차원의 공간적 흐름에 온몸을 맡긴 그가 빠르게 네 번째 좌표계를 유영했다.
‘찾았다.’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해당 좌표 너머에서 뭔가 느껴졌다. 삼차원 속 비명과 절규, 폭음…… 그것은 그야말로 세계 종교의 총본산에서 절대로 나서는 안 되는 소리였다.
‘루아스교가 고전하는 건가.’
삼차원에서 사차원으로.
사차원에서 다시 삼차원으로.
베르덴이 일체의 고민도 없이 루아스 교국으로 몸을 던졌다.
눈앞이 번쩍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