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7화 옛 왕 (2)
아칸드 리니게아 타인 크세리온은 애초부터 초월을 품고 탄생했다.
초월종이다.
아니, 인간의 육체 따위로 초월종을 웃도는 힘을 지녔으니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오만한 드래곤보다도 우월하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인간은 인간.
각성을 거치지 못했기에 종족의 기틀을 벗어나지 못한 아칸드는 제 경지에 걸맞은 항상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치명상을 회복할 수도 없고, 수명까지도 평범한 인간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드라벤 르마르크는 아칸드의 단 하나뿐인 약점을 없앰으로써 유일한 존재를 완성하기 위해서 불사의 의식을 설계했다.
의식을 마치는 것이 크세리온의 영광의 마지막 임무였다.
‘이론상 폐하의 옥체는 어떤 것으로도 훼손되지 않아야 하는데…… 베르덴, 놈의 마도가 절대적인 명제를 망가뜨렸어.’
초월자들을 상대하는 폐하의 몸에서 끊임없이 피가 흘렀다. 그런 수적 열세에도 폐하께서는 밀리지 않으셨지만…… 당연히 그럴 리가 없겠지만, 희미한 불안감이 스쳤다.
초월자 전쟁 막바지에 결국 폐하께서 쓰러지셨기 때문이었다.
‘설마.’
루네시카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조금이라도 조력을!
마력이 바닥이었지만 <영연계>의 마도를 개방해 자신의 영혼 소모를 대가로 잠시 동안 본래의 경지를 발휘할 수 있을 터.
억지로 심장을 쥐어짜 정신을 집중시키자 내면이 발작했다.
두근.
루네시카가 입을 벌렸다.
“마, 마도가, 왜 안 열려.”
손바닥은 경련이 온 듯 떨렸다.
일순간 루네시카는 숨을 삼키며 자신의 영혼의 형태를 인식했다. 그녀의 영혼은 무수한 검붉은 금이 새겨져 있었다.
죽어도 영혼만 있으면 초월자의 힘은 잔존하듯이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영혼이 크게 손상되면 힘 또한 위태로워진다.
“내, 경지가……?”
무너지는 탑과 같이.
쩌저저적.
루네시카 안테르노아가 평생 쌓아 올린 초월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 * *
그링 아르카넘으로 히아레마르 내해를 관람하고 있던 호스트. 베르덴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모든 것이 그의 눈에 비치고 있었다.
{베르덴의 영향력이 사방을 뒤덮으니 여기저기서 새로운 선택이 이루어지는군. ‘당신’이 창조한 운명의 수레바퀴가 구현하지 못한 예측 불허의 미래, 과연 흥미롭다.}
베르덴으로부터 발생한 파급력은 아군과 적을 가리지 않는다. 세계 회의 연설을 통해 그 힘은 훨씬 더 강맹해져 세상에 인력을 발생시켰다.
드라벤 르마르크도.
루네시카 안테르노아도.
주검의 영광도.
그들은 크든 작든, 필연적으로 기존의 운명과 다른 길을 걸어야 한다.
{그렇다 해도…… 금기로 공멸을 유도할 줄이야. 그야말로 무지의 표본.}
드라벤이 베르덴을 죽일 작정으로 영혼의 금기를 입에 담은 광경을 돌이켜 본 호스트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문어 머리에 달린 촉수가 흔들거렸다.
{금기란 발설해선 안 되기에 금기거늘.}
세계의 금기는 무기 따위가 아닌 규율.
함부로 비밀을 누설한 존재들에게 제재를 가하는 것이 목적이지, 절체절명의 상황에 정보를 공유하여 적대적 존재와 함께 자살하는 용도로 쓰라고 창조된 것이 아니다.
초월자로서 이상을 이루기 위한 발버둥이었지만, 지식이 충분치 않았기에, 그 본질적인 집착이 역으로 걸림돌이 되었다.
{뭐, 그 이상조차 ‘헛된 꿈’일 뿐이지만.}
여하튼.
금기를 위반한 처벌은 아직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니무스와 연결된 건틀릿이 섬 전체를 영혼의 장막으로 가두고 있었기에 잠시 지연되었을 뿐이다. 이제 건틀릿이 파괴되었으니 진정한 제재가 가해질 차례다.
금기를 유출한 ‘장본인’에게.
육체 손상?
{고작 그딴 게 금기 저촉의 대가였다면 금기라는 거창한 명칭이 붙지도 않았고, 내가 가장 먼저 금기를 어겼겠지.}
호스트가 촉수를 쓸었다.
{다만…… 이 상황은 특별하다.}
드라벤 르마르크는 이미 죽어 버렸기에 본 처벌을 다 받지 못하므로. 그러나 관계자가 아주 명확하기에 형벌은 반드시 집행된다.
그렇다면 누가 징벌의 대상이 될까?
드라벤이 금기를 깨뜨림으로써 직접적인 이득을 취한 자가 대신 치러야 한다. 드라벤이 모든 걸 걸고 부활시켰던 존재가 말이다.
바로, 옛 왕이.
운명의 사도 중 하나라고 할지언정 금기를 넘을 권한은 없다.
쿠구구구구구구……!
세계가 흔들린다.
극소수의 존재만이 느낄 수 있는 지진이다.
호스트의 생각과 동일한 판단을 내린 세계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관조하는 존재.
그녀는 금기를 침범한 존재를 처벌하는 의무를 ‘당신’에게 부여받았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뿌리다.}
호스트는 제 본체의 촉수만큼이나 심미학적으로 우월해 마지않은 세계수의 뿌리를 관측하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볼거리는 이뿐만이 아니다.
호스트는 맞은편에 앉은 상대랑 대화하듯 혼잣말을 이어 나갔다.
물론 어디까지나 지금 그는 혼자였다.
{여섯 번째 사도를 강림시킨다고 심하게 무리를 했군. 첫 번째 사도도 존재를 드러내서 베르덴을 잠시 막았고. 운명의 수레바퀴가 무너진 데다가 휴전이 오래 지속되다 보니 ‘당신’의 추종자도 생각이라는 걸 깊게 할 여유가 없었나. 이 또한 지식의 부재일 터.}
‘당신’이 여전히 잠들어 있음에도 세상사에 깊게 개입했다. 먼저 바닥에 손을 짚었으니 손등을 내어줄 수밖에 없는 상황.
휴전 또한 전쟁의 일부다.
본격적인 전쟁보다 규모가 작은 여러 교전쯤이야 얼마든지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하물며 적이 허점을 보인 마당에는 더욱 그렇다.
{추종자들의 개입이 없었으면 베르덴이 진즉에 승리하고도 남았다. 그게 싫다고 이렇게나 몸부림을 친다, 추하기 짝이 없군.}
호스트는 지식인으로서 한마디 했다.
{억지도 정도껏 부려야지.}
운명이 먼저 선을 넘었으니.
저항자에게 철퇴를 맞을 시간이다.
* * *
{아, 잠깐.}
호스트가 다시 베르덴에게 집중하다 말고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드라벤 르마르크는 선택을 내렸으나, 그 선택은 드라벤이 상상하던 방향과 거의 정반대의 결과로 이어졌다.
옛 왕에게 이상을 맡긴다?
애초에 그것부터가 드라벤 르마르크의 완전한 착오였다. 아는 것이 없었기에 제멋대로 오판하고 그릇된 꿈을 가진 발로였다.
{호오.}
호스트가 촉수를 튕겼다.
{만찬회에 메인 디시를 추가한다. 오직 주빈을 위한 음식이다. 이에 조화를 이루도록 코스를 다시 수정하도록.}
“예, 호스트.”
기발한 생각이다.
아주 좋은 발상이다.
역시 아는 만큼 상상할 수 있는 법이다.
호스트는 스스로의 지적 수준에 만족하며 흡족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기대감이 치솟았다.
뭐가 됐든 간에 호스트는 단언할 수 있었다. 분명 이번 만찬은 여태까지의 아르카디옴 중에서도 극상의 별미로 손꼽힐 것이다.
{이 기분, 오랜만이군.}
3대 전설 – 그링 아르카넘이 어째서 세계 금서로 여겨져 왔는지.
베르덴은 비로소 알게 되리라.
* * *
아티팩트 [명인의 존저(存貯)].
“미래를 끌어 현재를 위하리.”
사막의 신을 상대했을 때처럼 미리 저장해 두었던 방대한 마력이, 베르덴의 심장에 담긴 무한한 마력의 역할을 대신한다.
두근.
심장이 조금 크게 뛰었다.
‘우선───’
베르덴은 한편에서 당혹감에 빠진 루네시카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순수하고 거대한 마력이 공동의 대기를 억눌렀다.
<암천(陰穿)>
소멸의 광선을 시전하자 옛 왕이 모두를 제치고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콰아아아앙! 흑염의 옛 왕의 신체를 타고 흘러내렸다.
‘하인을 보호했다.’
베르덴은 의심을 품었다.
‘부활에 제약이 있을지도 모른다. 조건은 당장 알 수 없어도, 적어도 지금 루네시카가 죽으면 방금처럼 되살릴 수 없을 가능성이 생겼다.’
베르덴은 현재 몸 상태로 최대 전력으로 마법을 구사할 수 없다. 그래서 다른 초월자들이 비집고 들어갈 옛 왕의 틈이라도 만들 생각이었다.
화아아아아아악!
베르덴의 전신이 극도로 농밀한 마력의 기운에 휩싸였다. 이어 구덩이 어딘가에 박힌 <인테리스>를 원격으로 조종했다.
두근.
심장이 더 크게 뛰었다.
“진정한 전쟁을 치르기 전에 서로를 가늠해 보는 것도 좋을 테지.”
옛 왕이 기를 운용해 날아오는 용검 마그라스를 잡아챘다.
“와라, 운명 파괴자.”
그 순간.
카스티안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와 지면을 강하게 박찼다. 옆에서 끼어들곤, 옛 왕 바로 앞에서 방향을 꺾은 그가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다.
검명이 폭발했다.
단순히 뛰어난 전사가 낼 수 있는 속도도, 검격도 아니었다. 다른 경로로 인간을 벗어난 듯한 힘이 검에 실려 있었다.
“강한 힘을 손에 넣었구나.”
쩌어어엉!
카스티안의 검이 산산조각 났다.
“하지만 사각을 노렸어야지.”
5대 전설: 만물을 극하는 용검 – 마그라스.
마그라스가 손상되지 않은 한 마그라스와 충돌한 만물은 반드시 훼손된다. 격이 낮은 무구는 여지없이 파괴된다.
“내 검으로는, 당신은 죽이지 못하니까.”
카스티안이 용검을 끌어안다시피 하며 온몸으로 옛 왕의 팔을 붙들었다.
몸이 갈라지든 말든 괘념치 않았다.
옛 왕을 부활을 대비해 억지로 살아오며 많은 걸 준비했다. 하지만 그걸 다 쓰지 않고, 여기서 옛 왕을 죽이는 것이 최선이자 최고의 결과다.
복수해복수해복수해복수해복수해복수해복수해복수해미안해복수해복수해미안하다복수해복수해복수해복수해죽여버려복수해같이죽어복수해복수해복수해복수해복수해.
크세리온 제국 수도의 시민들이 카스티안에게 속삭였다. 그 안에는 옛 왕에게 왕위를 물려준 그의 부모도 있었다.
꾸구구국.
카스티안이 아주 잠깐 옛 왕의 근력에 대항했다.
“지금입니다!!!!!”
옛 왕이 상처 입은 지금이 기회.
그렇게 판단한 것이다.
벤디에를 필두로 정신을 집중하며 기와 마력을 끌어모았다. 베르덴이 마법을 시전한 순간에 일제히 움직일 것이다.
베르덴이 <인테리스>를 회수했다.
성신 마법.
베르덴은 두 번째 별, 혜성, 라레니아의 별자리를 그렸다. 은하구의 격류는 별의 잔흔을 남겨 옛 왕의 재생력과 기의 흐름을 막으리라.
그렇게 회색의 마력으로 잔상을 남기며 스태프를 기울였다.
심장이 아주 크게 뛰었다.
한데 이번에는 단발성이 아니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격하게 뛰었다.
체온이 급격하게 상승했다. 피로감이 짙은 몸에 알 수 없는 활력이 치솟았다. 겪어 본 적 없는 감각에 베르덴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게 무슨…….’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의 신이시여, 떠나간 제 아내와 아들을 죽음 너머에서도 굽어살펴 주시길.
귀에 익은 음성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격렬한 두통에 누군지 떠올리지 못했다. 마도가 강제로 개방된다. 베르덴의 벽안이 어두운 색채로 물들었다.
그의 입술이 본심(本心)을 드러내기라도 하듯이 제멋대로 달싹였다.
“멸하라.”
저도 모르게 <인테리스>를 끌어당겨 라레니아의 시전을 중지했다. 허공에 창이 현현했다. 그하룬에게 맡긴 신의 무구가.
태양의 창, [라티르].
태양을 빚어 만든 듯한 그것이 파멸이 깃들면서 검붉은색으로 변모했다. 공중에서 회선한 신의 창이 빛살처럼 옛 왕을 향해 날아갔다.
‘빠르다.’
벤디에와 아드리안의 신경이 곤두섰다.
“……!”
옛 왕이 몸을 틀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창이 공간을 관통함과 동시에 파멸이 화산처럼 분출했다. 누가 개입할 수도 없이 막대한 충격파가 초월자들을 밀어냈다.
가까이서 충격을 받아 정신을 잃은 카스티안을 인드렌이 겨우 받아 냈고, 바닥을 구른 루네시카는 경련하다가 툭 고개를 떨궜다.
태양의 창이 사라졌다.
절벽 끄트머리까지 밀려 나간 옛 왕이 제 육체를 내려다봤다. 오른쪽 가슴에 구멍이 생겼다. 완전히 뚫리지는 않았지만 깊게 파인 것이다.
“……업적에 걸맞은 지고한 힘.”
옛 왕이 낮게 웃으며 양손으로 용검을 붙잡고 자세를 취했다.
“내 운명을 실현하기에 더할 나위 없다.”
“하나, 그게 오늘은 아니다.”
공동의 유일한 입구에서 새로운 기척이 모두에게 잡혔다. 백색의 머리카락과 수염, 피폐한 듯한 녹색의 눈동자를 가진 8위계 초월자였다.
인드렌이 눈을 크게 떴다.
“레, 레프라기움 마탑주?”
섭리자───데우스 위덴.
섭리자는 대답 없이 옛 왕을 응시하며 베르덴과 아드리안 옆을 지나쳤다. 동시에 투명한 장막이 주변 사람이 모르게 베르덴을 덮으며 아드리안에게 의념이 전해졌다.
───곧 섬이 가라앉을 거다. 베르덴을 챙겨라.
아드리안이 내심 동요하곤 즉각 베르덴의 안위를 살폈다.
벽안으로 돌아온 안광이 희미해진다. 호흡이 심하게 가빴다. 아드리안도 함부로 건들기 어려울 만큼 베르덴의 몸에서 엄청난 열기가 느껴졌다.
‘주군께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두 번째 의념이 전해졌다.
───명심하도록.
섭리자가 단호히 충고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루아스 교국이 베르덴의 상태를 알아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