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2화 사후(事後) (3)
미지의 섬이 파괴된 그날 새벽.
“이렇게 무리했는데 여섯 번째 사도께서 온전히 부활하지 못하셨군.”
“하지만 부활하셨네.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그 봉인도 풀리게 되겠지. 끝내 무너진 운명은 보기 좋게 재건될 걸세.”
이데라트 연맹장, 테리웬이 깊게 신음을 내뱉자, 세계적인 감정사인 레논 버나드가 걱정하지 말라며 그를 격려했다.
“하지만 단텔 님은 상부로부터 중징계를 피할 수 없을 것 같네. 차기 사도가 될 분이신데 이번 실패로 입지가 조금 흔들리실지도.”
“그래도 사도의 위에 오르실 거다.”
테리웬이 말했다.
“그분은 ‘운명’에서 비롯된 초월자니까. 정확히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상부만이 알고 있지만.”
“뭐, 우리 같은 추종자들은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 따르면 그뿐이니 자세한 걸 알아야 할 필요 없지 않나? 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자 역할.”
레논 버나드는 자아를 가졌음에도 꼭두각시를 자처했다.
“결국 우리는 영원을 누릴 수 있을 걸세.”
“그럼, 그렇고말고.”
테리웬 또한 그러했다.
“‘당신’의 뜻에만 따르면 영원토록 최고의 인생을 반복할 수 있겠지.”
* * *
날이 밝고, 세계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알려지자 신성과 섭리자의 위계 돌파에 대한 합동 강의는 기약 없이 미루어졌다. 아티슨 마탑의 새로운 마법 기술 발표도 마찬가지였다.
8년 만에 정상적으로 열린 마도 축제의 후반부는 아름답게 장식되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루아스 교국이 첫 번째 하인에게 습격을 받아 옛 왕의 신체를 빼앗겼다.
히아레마르 내해에 떠오른 섬엔 두 번째 하인이 주둔하고 있었고.
용검 마그라스는 실재했으며.
세계 회의에서 언급됐던 옛 왕이 부활했다.
대참사였다.
레프라기움 마탑주가 나서서 옛 왕을 상대했다는 희소식이 퍼지지 않았다면, 민감하고 연약하기까지 한 국제 사회는 겉으로라도 평정을 지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봉인에서 풀린 옛 왕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고, 현 마법계의 정점인 레프라기움 마탑주가 잘못될 일은 없다.
게다가 주검의 영광의 지도자가 다수의 초월자와 혈투를 벌인 끝에 에온의 베르덴에게 처단당했다는 정보까지.
그 섬이 멸망한 뒤에 옛 왕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레프라기움 마탑에서 아직 발표하진 않았지만 덕분에 당장의 분위는 진정되긴 했다.
분명 최악은 피한 것이리라, 관계자들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사후(事後) 또한 문제였다.
“쉬안트 장로가 지휘하는 히아레마르 내해 탐사 선발대가 전멸.”
젠티르 마탑주──시그릴 라비니아가 보고서를 구겼다.
젠티르 마탑에서 섬에 파견한 탐사대 중 지상에 남아 물자와 비행정을 관리했던 잔류 인원이 작성한 보고서였다.
“……그 흉수가 마울러, 가레스 시릴리아드라는 건가요?”
“물증은 없으나, 그렇다는 소문이 은연중에 돌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정황도.”
장로가 건넨 실종자와 사망자 명단을 살폈다.
젠티르 마탑만이 아니라 다른 마탑들도, 마탑이 아닌 다른 세력들까지 합치니 미지의 섬에서 명을 달리한 자가 적지 않았다.
‘이 세력들 사이에 이렇다 할 공통점은 거의 없다. 대부분 무차별적이야. 미궁에 출몰한 이형종의 숫자는 많았지만 강대하지 않았다고 하니 어지간해선 국가급 전력이 도망도 못 치고 당할 리는 없고. 고작 며칠 사이에 이만한 전력을 아무렇지 않게 죽여 버릴 인위적인 수단은 적다.’
함정을 파 기습하거나, 함정 따위 없어도 무방한 과잉 전력을 투입하거나…….
미궁은 전 세력에게 생소한 환경이었고, 규모는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넓었다고 하니 전자는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다.
마주칠 일조차 거의 없는데 누가 함정을 만들어 미련 없이 기다리겠는가.
그러므로 답은 후자, 이에 해당한 강자는 지하에 여럿 존재했다.
탐사 조약을 위반한 초월자들 말이다.
‘관제와 마스터는 별 이유도 없이 학살을 자행할 성격도 아닐뿐더러 어떻게 생각해도 우리를 죽여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에온도 그러해. 애초에 신성은 대륙에서 섬까지, 성소를 피로 물들인 하인을 쫓아갈 정도로 주검의 영광에 집중했어. 천검은 신성의 뜻을 따르는 초월자다.’
공개된 정보에 의하면 주검의 영광은 초월자들을 경계하느라 다른 탐사대에 따로 힘을 할애할 여력도 없었다고 한다.
‘남은 건 마울러와 갑자기 나타나 신성을 공격한 비공식 초월자…….’
시그릴이 눈을 감았다.
‘그 뭔지 모를 초월자가 범인일 경우도 배제할 수 없지만, 탐사대 전부도 아닌, 기껏해야 일부를 처리할 목적으로 존재를 드러냈다고 하기엔 여러모로 앞뒤가 맞지 않아. 주검의 영광을 도우려 했으니 하인들과 한패라고 보는 게 타당하겠지. 게다가 이번 사망자 중에는 에온의 관계자가 있다. 마울러는 에온과 적대 관계에 준하는 사이고.’
저울이 한쪽으로 기운다.
마울러의 과거 행적을 살펴보면 이런 짓을 벌일 만한 인물이긴 하다.
그는 교활하며 폭력적인 존재니까. 자신이 섬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마주치는 탐사대를 몰살한 거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으득.
부아가 치밀었다.
쉬안트 장로와 쌓아 온 인간적인 관계를 떠나서 장로급 마도사는 아주 귀중한 인재다.
마탑에서 직접 키우든, 외부에서 들이든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투자해야 겨우 마탑을 받쳐 줄 장로 한 명을 만들 수 있다.
심지어 젠티르 마탑이 국가급 전력을 잃었다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마탑의 격이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초월자는 두려운 존재다. 초월자 세력에 가능한 한 맞서서는 안 된다. 분쟁으로 인한 손해는 천문학적일 테니까…… 하나 그렇다고 해서 마탑의 인사를 멋대로 쳐 죽인 초월자에게 굽신거릴 수는 없다. 그 행동을 못 본 척해서도 안 된다.
초월자라고 한들 마법계의 10대 마탑을 이렇게나 벌레 취급하듯 무시할 수는 없다.
한 명의 마탑주로서.
마탑의 드높은 권위와 지배력을 위해서 마땅한 대가를 받아 내야 한다.
“사렌 장로, 당신이 직접 주인 없는 땅으로 가서 에온과 약속을 잡아 주세요. 에온의 수뇌부와 긴히 할 말이 있습니다.”
“기일은 언제로 잡으면 되겠습니까.”
시그릴은 마도의 냉기에 얼어붙은 문서를 그대로 깨부쉈다. 불투명한 얼음 조각에 그녀의 얼굴에 서린 노기가 비쳤다.
“내일이면 좋고, 당장 오늘이면 더할 나위 없으니 최대한 빠르게.”
* * *
마도 축제를 기념하기 위해 루아스 교국 성소에 방문한 이데라트 연맹장, 테리웬이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시체도 발견되지도 않았다.
행방을 찾았지만 교국에서 테리웬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어떤 소문을 제외한다면.
“……연맹장이 주검의 영광과 결탁해 루아스교를 공격했다고?”
이데라트 연맹국의 다종족 최고 외교관이자, 마법계 총회의의 일석을 차지했던 브라오닉 스트롬이 책상을 치며 일어섰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누가 그런 헛소리를 해!!”
“추, 출처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연맹국의 외교관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겨우겨우 파악한 정보를 입에 담았다.
첫 번째 하인이 등장한 순간 군중 속에서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여 댄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테리웬의 수하들이다.
시민 사상자 다수 발생.
그로 인해 루아스 교국의 방어 체계가 뒤엉키며 첫 번째 하인의 성소 침입을 허용하는 불상사를 낳고 말았다.
“그러나 연맹장님의 실종이,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뒷받침에 이런 결론이 확산하고 있…….”
“근본부터가 잘못된 결론이잖나!”
브라오닉은 현실을 부정했다.
“연맹장이, 그 테리웬이 어떤 사람인데 그런 미친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작은 동물 하나 어찌하는 것도 고민하는 친구인데!”
테리웬보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모든 인간종이 화합하며 같이 살아가는 세상을 평생 추구한 사내다.
그런데 학살? 학살??
브라오닉은 어떤 치명적인 착오가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몹쓸 존재가 테리웬에게 누명을 씌운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돌이 있긴 했다.
세계 회의에서 테리웬은 세계적인 감정사, 레논 버나드의 힘을 빌려 용검 마그라스의 소재를 밝히는 데 성공했다.
섬이 떠오르기 전에 히아레마르 내해를 주목하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연맹국이 보유하고 있던 예언서 덕분이었다.
그리고 섬은 주검의 영광이 옛 왕을 부활시키는 주춧돌이 되었다.
연관성이 있다. 깊게.
테리웬이 배신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테리웬이 정말로 주검의 영광의 손을 잡았다면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 브라오닉은 테리웬을 여전히 신뢰했다.
“루아스 교국도 알고 있나? 그 소문을?”
“거기까지는 자세히 파악하지 못했습니다만…… 이미 알고 있을 거라 사료됩니다.”
“정보력이 남다르니 당연하겠지. 당사자이기도 하고.”
브라오닉이 이마를 짚었다.
‘골이 아프군.’
어떻게 해명해 테리웬의, 연맹국의 결백을 증명해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가 문을 가리키며 지시했다.
“바리건트에게 이 연맹국의 총력을 투입해서라도 테리웬을 찾으라고 전해라. 설령 시체든 뭐든! 무슨 일이 있어도! 외교는 내가 대응을──”
콰앙!
최고 외교관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브라오닉 각하……! 당장 시급히 전해 드릴 것이 있기에……!”
늙은 외교관이 숨을 고르지도 못한 채 목소리를 쥐어짰다.
“루아스 교국의 추기경이 현재 연맹국으로 오고 있다는 속보입니다……!!”
“삼정의 추기경이?”
루아스 교국이 합의는커녕 연락도 없이, 하다못해 이렇다 할 통보도 없이 연맹국으로 향하고 있다니?
외교적 결례를 따질 때가 아니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루아스 교국의 무거운 침묵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분노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 감정은 정확히 연맹국에 향해 있었다.
“빌어먹을!”
콰아앙!
브라오닉이 뇌격이 실린 주먹으로 두꺼운 책상을 박살 냈다.
시간이 없다.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자칫 세계 종교가, 이데라트 연맹국을 적대하게 될지도 모른다.
* * *
아드리안이 의식을 잃은 며칠 사이 정세가 격동했다.
젠티르 마탑과 이데라트 연맹국 외에도 사실상 모든 세력과 국가가 지금까지와 다른 혼란에 직면했다.
‘주군이라면 어떤 식으로 수습하려 하셨을까.’
아드리안은 이전에도 그러했듯이 베르덴처럼 사고하려고 애쓰며, 산재한 안건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심사숙고했다.
육체의 손상이 회복되지 않았지만 느긋하게 있을 여유는 없었다.
“일단 에온의 현안은 내가 처리하지.”
젠티르 마탑의 독대 요청.
황금의 죄인.
그림멜 그롬파르 생포.
아르나크 제국의 루네시카 안테르노아 생포.
이를 비롯한 에온에 연관된 사안들
아드리안과 이자벨라…… 베르덴 바로 다음가는 권한을 가진 둘 중 한 명이 판단하고 행동을 결정해야 한다.
“그 몸으로 괜찮겠어?”
“가만히 있어 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아드리안이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여기는 내게 맡기고, 넌 주군을 누하라로 서둘러 모셔라.”
“그래…… 알겠어. 관리자님께 가주를 부탁하고 돌아올게. 그분이라면 가주의 상태를 알고 계실지도 모르고.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이자벨라가 팔을 내밀었다.
“무리하는 건 좋은데, 적당히 무리해.”
“피차일반이다.”
아드리안과 가볍게 주먹을 부딪친 이자벨라가 대전당의 복도로 나섰다.
잠시 후 베타가 아드리안을 찾아왔다.
[알파의 의식이 깃든 미니 골렘은 현재 베르덴 폐하의 아공간에 보관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알파의 본체를 깨울 수는 있지만 당장 무리하게 그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합니다.]
베타가 외눈을 빛냈다.
[베타가 아드리안을 조력하겠습니다.]
“부탁하지.”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는, 나보다 네가 훨씬 뛰어나니.”
[객관적으로 평가했을 때 훨씬, 이 아니라 비교할 수 없습니다.]
“…….”
* * *
침묵의 사막의 유일한 국가, 투하르.
베르덴과 관리자가 틀을 구축한 투하르의 수도인 누하라에는 최초의 마탑이 곧게 하늘로 뻗어 있으며, 생명의 거목이 자리 잡고 있다.
생명의 거목으로부터 발생한 대자연의 마력은, 마력의 원천이 고갈된 사막에 깃들어서 신화시대에 잃어버린 자연을 되살렸으니.
황량한 사막에 피어난 초원에서는 침묵의 사막 특유의 불안정한 공간 좌표가 진정되어 공간 이동을 가능케 했다.
파아아아아앗!
에온의 마법사들이 블랙 아워 대전당에서 작성한 공간 이동진이 누하라와 연결됐다.
히히힝.
드레드미어가 홀로 이끄는 마차가 사막의 초원을 밟았다. 마부석에 앉아 있던 이자벨라가 두리번거리곤 곧 고삐를 움직였다.
“안녕하세요, 관리자님. 갑자기 찾아와 죄송한데 당장 도움이 필요해서요.”
“언제 찾아와도 미안할 것 없다, 이자벨라.”
관리자는 드레드미어의 머리를 쓸며 눈을 가늘게 떴다.
“베르덴에게 변화가 생긴 모양이군.”
“가주가 전에 8위계 경지로 상승한다고…….”
“벌써 파멸의 개념까지 통달한 건가. 한데 위계의 상승만이 전부가 아닌 듯한데. 어느 정도 직접 살펴봐야 답이 나오겠구나.”
관리자가 앞장섰다.
“생명의 거목으로 가자. 최초의 마탑보단 그곳이 베르덴에게 더 편안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