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4화 선택지 (2)
성소 아벤카.
루아스교의 대표적인 상징물이자 대륙 3대 성채 중 하나가 자리한 교국 수도에는 지난 사태의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었다.
무고한 시신들을 수습했지만 가도에 묻은 혈흔은 아직 지워지지 않았으며, 초월자들의 격전으로 인해 몇 개의 구역과 지하 수로가 완전히 파괴되어 출입이 제한되었다.
“…….”
성자 레온하르트는 [루엔스]를 품에 안고, 성소의 계단에 앉아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시민들의 통곡과 희생자를 추모하는 성직자들의 기도가 귀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 세리아는 구호품과 식사를 준비하는 등 비탄에 빠진 사람들을 돕고 있다.
───언젠가 인간이 딛고 있는 대륙에 위기가 찾아올 때 다시 성검이 빛을 발하고 새로운 성자가 태어나리라!
전대 성자의 예언.
───비극을 채우는 건 내가 아니라 성검일 텐데.
첫 번째 하인이 지적한, 비극의 결핍을 채우는 성검 [루엔스].
레온하르트는 이 모든 것이 어쩌면 자신 때문에 일어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실제로 그러지는 않을 테지만, 익숙해진 무력감이 부정적인 생각을 계속해서 부추겼다.
그가 입을 열었다.
“상태는…… 어떻습니까.”
“좋다고는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성자님.”
자선의 세르파니아 추기경이 성소에서 나와 계단 아래로 내려온다. 그녀는 레온하르트보다 낮은 높이에서 교국을 바라봤다.
“성녀님께선 교가 탄생한 이래 처음으로 두 번째 신열을 앓고 계세요. 언제 깨어나실지, 어떻게 되실지 감히 예상할 수 없습니다. 저희가 성녀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도 없죠. 그저 지켜보는 것 외에는.”
“…….”
“교황님께선 중상이 심하신 와중에 성서와 멀리 떨어진 탓에 신성 치유가 조금 늦었습니다. 머지않아 회복하시겠지만, 당분간은 거동이 어려우실 거예요. 그레고르반 추기경은 원인불명의 발작 증세가 멎지 않아 경과를 계속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검붉은 벼락.
레온하르트는 신앙계 초월자의 저항력에 더해서 성검과 성서가 보호해 준 덕분에 항상성에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그레고르반 추기경은 그런 레온하르트가 나서서 충격을 막아 주었기에 옛 왕이 부활했을 때는 활동이 가능한 상태였다.
하지만…….
갑자기 폭주한 신성이 옛 왕에게 일격을 날렸을 때 의식이 날아간 그레고르반 추기경은 깨어났다가 쓰러지기를 거듭하며 현재 불규칙한 고통과 발작에 시달리고 있다.
‘신성, 베르덴.’
레온하르트의 손끝이 자기도 모르게 미세하게 떨렸다. 옛 왕과 다른 의미에서 압도당하는 감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문득 거대한 현뢰가 눈앞으로 날아오는 상상을 하니 가슴이 섬뜩했다.
“성자님, 많이 힘드시겠지만 루아스교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어요. 신성뿐만이 아니라, 아르나크의 검과 7대 마도왕까지 직접 지원해 준 덕분에 유골룡 3기와 언데드 무리까지 추가 피해 없이 섬멸했으나, 이 사태로 초래될 국제 사회의 혼란 속에서는 타인의 도움에 기대서는 안 될 테지요.”
1차 대성전에서 3대 대악마인 몰가른의 군단을 토벌했을 때도 무결했었던 성소 아벤카가 침입을 허용했다.
첫 번째 하인이 어떤 수단을 썼든 간에 그것만은 변치않는 사실이었다. 루아스 교국의 영향력 약화는 피할 수 없다.
“이제부터는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그녀의, 말이…… 옳습니다…….”
그레고르반 추기경이 목발을 짚으며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커다란 몸이 무색하게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기색이었다.
“추기경?!”
화들짝 놀란 레온하르트가 서둘러 다가가서 그를 부축했다.
세르파니아 추기경이 소리쳤다.
“그레고르반 추기경! 그 몸으로 멋대로 움직이면 어떻게 해요!”
“하하하핫…… 누워만, 있으면…… 근육이 쑤셔서 말일세.”
그레고르반 추기경은 단련된 커다란 이두박근을 보여 주며 웃어 보였다. 그렇게 분위기를 가볍게 한 그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성자님…… 성녀님과 교황님이 전면에, 나서지 못하시니, 루아스 교국을 이끌어야 하는 성자님밖에 없습니다.
“예? 어떻게, 제가”
“신물로부터 선택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미숙할지언정. 당신은 누가 뭐라 해도 어엿한 성자의 귀감입니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옛 왕을 향해서 성검을 휘두르던 모습. 아직도 제 눈에는 선합니다.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추기경이 팔을 굽혀 레온하르트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세르파니아 추기경의 말대로 신중하게 움직여야 하나, 결단 또한 필요합니다.”
“…….”
“옛 왕의 문제를 떠나서, 루아스 교국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으니, 대륙의 이기적인 존재들이 혼란을 부추겨 이득을 취하려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더 큰 참상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이 교국의 드높은 위상을 바로잡으셔야 합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그가 단호히 속삭였다.
“저희는, 성자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대륙에 군림하려면 힘이 있어야 하고.
믿음은 곧 힘이니.
루아스교가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세계 종교로서 국제 정세를 주도할 수 있는지 없는진 레온하르트의 선택에 달려 있다.
약하면 먹히는 것이 세상의 이치.
피울음 역병 사태를 온몸으로 겪은 레온하르트는 그걸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 * *
아르나크 제국의 황도, 미렌도르.
황실에서 엄격하게 관리하는 비밀 감옥, 그 가장 깊은 곳에 옛 왕의 부활시킨 주모자 중 한 명이 갇혀 있다.
주검의 영광의 두 번째 하인.
영혼을 수확하는 자.
“……!!!……!!……!!!!”
루네시카 안테르노아가 철저하게 구속된 상태로 괴성을 질렀다. 마치 산 채로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참곡한 비명이었다.
격통의 주기가 반복된다.
그녀에게 연결된 수십 개의 구속구가 간헐적으로 철렁거렸다.
제라클 황제와 리반데일 대공이 그런 루네시카를 멀리서 지켜보았다.
“마법성의 소견에 따르면 육체는 이상이 없지만, 정신계 일부가 심각하게 훼손된 것 같다고 하네.”
“확신이 아니라 추측인가.”
“루네시카 안테르노아는 증상에 비해서 정신계의 상태는 비교적 멀쩡하다고 하니, 다른 부분에 문제가 있는 것이겠지. 그저 제국의 마법 기술로는 규명할 수 없을 뿐. 어쩌면 저것이야말로 영혼이 손상을 입은 상태일지도.”
루네시카는 고유 마도를 통해 영혼을 다룬다고 알려져 있다. 세계 회의가 끝나고 루아스 교국에게 직접 공유받은 정보였다.
현장에 있었던 레그리트의 보고를 참고한 제라클 황제는, 루네시카는 영혼을 다쳤기 때문에 저렇게나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베르덴의 마법에 즉사한 뒤에 옛 왕의 힘으로 부활했으나 영혼 자체에 피해가 남아 있다…… 부활의 대가라고 보기보다는, 베르덴의 마력이 원인이라고 봐야겠지.”
리반데일 대공은 검은 화산 지대에서 경험했던 베르덴의 마도와 지상 최악의 난쟁이를 향해서 초위 마법 같은 것을 전개하고 있었던 베르덴의 모습을 상기했다.
세기말의 풍경이라고 생각되는 광경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육체뿐만이 아니라 비물질적인 정신계를 넘어서 영혼까지 파괴하는 힘. 베르덴의 마도가 한 차원 높은 경지에 이른 것 같군.”
“……위계가 상승했다?”
“그날 이후로 베르덴은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7위계에서 8위계로 가는 과정이야 모르겠으나, 급격하게 힘을 방출한 뒤 쓰러졌다는 걸 보면 어떠한 변화를 겪고 있을 가능성이 높지. 그렇게나 규모가 큰 섬을 송두리째 지워 버렸다는 것 자체가 통상적인 초월을 벗어난 수준임을 증명하고 있으니.”
“초대 마도왕에 가장 가까운 존재는 반젤리스가 아니라 베르덴일지도 모르겠군.”
제라클 황제는 잠깐 놀란 반응을 보이고는 짧은 수염을 쓸었다. 베르덴의 지닌 특이성은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황성 지하에 자리한 대악마 몰가른의 미래 벽화를 보여 준 것이다.
‘그래도 벌써 8위계라니.’
경지의 상승 궤도가 너무 가파르다.
제라클 황제는 베르덴이 과연 언제쯤 복귀할지, 베르덴이 부재한 상황인 국제 사회가 어떤 식으로 급변할지 앞날을 상상했다.
상당한 마찰이 예상된다.
이러한 정치적인 예측과 판단은 제라클 황제의 특기였다.
리반데일 대공이 물었다.
“그나저나 루네시카 안테르노아의 문제가 영혼과 관련되었다면 아에로돈이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녀석은 별말 없었나?”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는 천공룡 아에로돈은 평소 자기자랑을 즐겨 했다.
영혼과 육체를 분리해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존재, 이런 식으로 영육을 제어할 수 있는 드래곤은 오직 천공룡뿐이다, 라고 말이다.
“아에로돈은 조언을 대가로 그림멜 그롬파르의 실물 확인을 요구했네. 그 드워프를 직접 보지 않으면 입을 다물겠다더군.”
베르덴, 반젤리스, 리반데일 대공이 제압한 지상 최악의 난쟁이는 현재 아케나드 마도국에 수감되어 있다.
마도국이 그놈의 신변을 관리하는 편이 안전할 거라는 베르덴의 판단을 고려한 것이다.
“음, 에온과 마도국과 협의해야 하는 사안이라 시간이 걸릴 텐데. 베르덴이 있으면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겠지만. 한데 이 와중에도 까탈스럽게 굴 줄이야. 한 번쯤은 아에로돈의 버릇을 손봐야 할 것 같은데, 필요한가?”
“콧대가 워낙 높은 드래곤이니 뭐라고 하든 역효과일걸세.”
제라클 황제가 넌지시 한마디 남겼다.
“그냥 지나가다가 모른 척 머리 한 대만 강하게 때려 주도록.”
폭행 사주.
이 또한 정치다.
* * *
아드리안은 베르덴처럼 다양한 사안을 재빠르게 처리할 능력은 없다. 다른 대륙으로 이동하는 것조차 에온의 마법사들의 힘을 빌려야 한다.
무투계 초월자이기에 어쩔 수 없지만, 다채로운 대응이 어렵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
아드리안은 일단 베타가 정해 준 순서대로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
“앉아라.”
블랙 아워의 대전당 지층(地層)의 응접실.
젠티르 마탑주, 시그릴 라비니아가 조심스럽게 아드리안과 마주 앉았다. 그녀는 꽤 긴장한 얼굴로 눈동자를 굴렸다.
“……설마 제가 블랙 아워의 대전당에 들어오게 될 줄은 몰랐네요.”
에온에서도 대부분의 손님은 주인 없는 땅에서 맞이한다. 블랙 아워의 대전당까지 들어올 수 있는 손님은 소수다.
본래 시그릴은 전자에 해당했지만, 소사이어티의 실체가 드러나고, 베르덴이 최초의 마탑주임을 밝힌 이후 마탑주들에 대한 태도가 재고되었다.
10대 마탑을 회유한다.
세계 회의에서 베르덴에게 최초의 마탑의 진위를 계속 지적했다가 빚을 지게 된 시그릴은 그 대상 중 한 명이었으니.
이런 점을 고려하면 그녀를 대전당에 들이는 게 낫다, 라고 베타가 조언했다.
“저, 베르덴 님께서는 그날 이후로 편찮으시다고 들었는─”
“신경 꺼라. 네가 급하게 할 말이 있다고 했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아드리안이 물었다.
“용건이 뭐냐.”
“그날, 히아레마르 내해의 섬의 지하 미궁에서 저희 쉬안트 장로가 지휘하는 젠티르 마탑의 선발 탐사대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당연하게도 아드리안의 성격을 이미 공부해 온 시그릴은 당황하거나 불쾌하다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희뿐만이 아니라 다수의 탐사대가 실종자와 사망자 명단에 올랐죠. 게다가 에온과 관련된 디아문 마탑에서도…… 그런데 특이하게도 그쪽에서는 특정 파벌에 속한 사람만 사라졌더군요.”
디아문 마탑의 르온 장로, 실종.
에온의 지원을 받는 알버트 윈디로브, 그를 지지하는 장로가 호위 마법사 둘과 함께 사라졌다.
미라 기사들과 벌레들이 범람해서 일시적으로 지형이 깨져 흩어지고 말았다고 하지만, 르온 장로의 경지를 생각하면 그런 이형종 따위에게 쉽사리 당할 마도사가 아니었다.
심지어 혼자도 아니고 5위계 하위 마법사 두 명이 붙어 있었는데.
“시체는 발견하지 못해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미궁의 그 생소한 환경과 희생자들의 수준을 고려하면 이렇게 무차별적이면서도 그 안에 의도적인 살인을 끼워 넣을 존재는 몇 없죠.”
“그래서.”
“전 이 살인귀가 델하룬의 대왕, 마울러, 가레스 시릴리아드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확신하고 왔죠. 이에……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제 바람은 이렇습니다.”
시그릴이 살기를 내비치며 낮은 목소리로, 하나 강한 어조로 말했다.
“보복.”
“…….”
“젠티르 마탑은 보복을 원합니다. 마울러의 ‘권역’에 대한.”
* * *
쏴아아아아───
얼마나 헤엄쳤을까.
베르덴은 제법 오랫동안 바다를 가로질렀는데도 이렇다 할 만한 무언가를 찾지 못했다. 여전히 마력의 바다에선 조용한 파도가 일었다.
[…….]
알파는 가만히 바다의 지평선을 응시했다.
베르덴은 이곳에서 아주, 아주 조금도 지치지 않는 느낌이었기에 멈추지 않고 계속 푸른 파도를 헤쳐 나갔다.
어디 한번 누가 이기는지 갈 데까지 가 보자는 마음이었다.
갑자기 안개가 끼었다.
사방이 흐릿하다.
안개 속에서 베르덴의 벽안과 알파의 외눈만이 파랗게 빛났다. 이윽고 알파가 베르덴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정면을 가리켰다.
[섬. 발견.]
알파가 살짝 몸을 갸웃거렸다.
[섬?]
사라진 안개.
저 멀리 펼쳐진 광활한 모래사장이 확 눈에 띄었다. 그 너머에는 울창한 숲이 시야의 수평선을 가득 채웠다.
“섬보다는 대륙에 가까운 크기군.”
[정정. 대륙 발견.]
어쨌든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베르덴은 그대로 수영해 그토록 찾았던 육지에 도달했다. 모래 위에 올라섰다. 베르덴과 알파의 몸을 적셨던 물기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저기.]
“그래, 보고 있다.”
베르덴과 알파는 서로 같은 방향을 향해 눈길을 보냈다. 아이의 그림자가 일순간 나타났다가 숲으로 사라졌다.
지극히 당연하게도 그는 잘못 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있다.
베르덴의 내면에.
[베르덴 폐하.]
앞다리에 실린 체중.
[달려.]
베르덴이 전력으로 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