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5화 선택지 (3)
튀어오르는 모래.
있는 힘껏 땅을 박차도 현실에서의 속도가 나오지 않는다. 육체에 피로감이 쌓이지 않을 뿐, 감각을 제외하면 마치 평범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초월하기 이전, 역천의 마법진을 전개하기 이전의 시절처럼.
‘뭔가 그립군. 불쾌하기도 하지만.’
베르덴은 별로 달갑지 않은 향수를 느끼며 하얀 모래사장을 내달렸다. 그의 감정은 보헤미른 마탑의 실험체 전후로 나뉜다.
베르덴의 잿빛 머리카락을 잡은 알파의 프레임이 연신 흔들렸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마침내 생명의 흘러넘치는 숲에 도착했다.
사아아아…….
시원한 바람에 나뭇잎이 서로 부딪친다.
[흔적 없음.]
아이의 것으로 보였던 그림자는 작은 발자취도 남기지 않고 없어졌다. 어디로 간 것일까, 몸을 숨길 줄 아는데도 일부러 눈앞에 나타난 걸 보면 숲속으로 들어오라는 의미일까.
베르덴의 내면에 숨어든 불명의 존재가 적의를 품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래도 지금은 전진만이 해답이다.’
알파를 어깨 위로 옮긴 베르덴은 탐색을 하듯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알파가 마력의 빛을 조사해 스캔을 시도하려 했지만 여기서 마력을 다룰 수 없는 건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마력은 존재하지만.
마력을 임의로 조작할 수는 없다.
이 공간의 특성이 그러했다.
“평화롭군.”
[평화로운 자연. 확인.]
동물 울음소리는 들려오지 않았지만, 식물은 그 특유의 침묵과 수동적인 움직임으로 고유한 존재감을 선명하게 발산했다.
숲은 점점 더 깊어진다.
수목의 머리는 높이 솟아올라 하늘을 뒤덮었고, 빛이 가려지며 한낮의 그늘과 같은 명도(明度)가 둘을 에워쌌다.
아주 같지는 않았으나, 여러모로 경험해 본 있는 분위기였다.
[대수림과 유사성 높음.]
“우연의 일치는 아니겠지.”
베르덴은 작은 단서 하나하나조차 무시하고 지나치지 않고, 억지로 끼워 맞춰서라도 과거에 얻은 정보에 연결했다.
───베르덴, 어째서 엘프가 그대의 마력을 보고 저를 떠올리는지 아십니까?
───예?
───왜냐하면 우리가 본질적으로 같기 때문입니다. 보다 자세하게 말하자면 그대가 저보다 더 상위 차원의 개념이죠.
태초의 땅에서 처음으로 세계수의 본체와 만났을 때 그녀는 본질을 언급함으로써 베르덴과의 연관성을 암시했다.
엘프는 베르덴을 이종족으로 보지 않았다.
세계수는 베르덴과 근본이 같다고 했다.
대분기에 세계수가 풍요로운 땅의 마력을 전부 고갈시켜 침묵의 사막으로 만들면서까지 학살한 고대 신들, 그 잔해.
그것들이 침묵의 사막의 재해가 되어 베르덴에게 달려들었던 건 그의 마력이 세계수와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었다.
베르덴이 몸소 겪은 순간들이 세계수의 발언을 근거로 뒷받침한다.
보헤미른 마탑의 동력원을 제물로 삼은 역천의 마법진으로 몸을 재구성한 그의 존재에 어떤 변화가 일었는가.
본질에 대한 의문.
어쩌면 이번에 그 답의 편린을 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든다. 아니, 그럴 것이라고 베르덴이 확신한 순간이었다.
파앗!
갑자가 대수림의 경계선이 나타나더니 베르덴이 내디딘 발을 끌어안았다. 화창한 빛이 알파의 시야를 잠깐 물들였다.
신선한 공기가 폐를 적시는 듯했다.
삼림에 둘러싸인 드넓은 지대가 베르덴과 알파를 환영했다. 높이 솟아오른 거대한 물체가 원형의 터전 내부에서 위용을 드러냈다.
‘……거목?’
여태껏 본 나무 가운데서도 손꼽히게 큰 나무가 중심에 서 있었다. 물론 세계수의 본체와는 감히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대수림의 여러 거목보다 좀 더 크고, 좀 더 높은 정도였다.
둘은 자연스럽게 거목의 몸부터 머리까지 시선을 높였다. 동시에 울창한 숲에 가려진 탓에 한동안 볼 수 없었던 창천(蒼天)이 눈동자에 반사됐다.
[베르덴 폐하. 사슬.]
알파가 위를 가리켰다.
[거대한 사슬이 여러 개.]
무엇으로 제작되었는지 모를 고리들이 서로 간에 연결되어 사슬들을 형성했고, 그 사슬들은 하늘을 쭉 가로지르고 있다.
‘무지막지한 크기군.’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얼마나 거대한지 시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사슬들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끝이 어디인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슬들은 마치 상공에 떠오른 태양이나 달, 또는 별처럼 존재했다.
베르덴은 이내 고개를 바로 하며 거목의 밑동으로 눈길을 던졌다. 거목 아래의 장대한 그늘 속에 어둡고 진한 인간의 형상이 있었다.
아이의 그림자.
마력의 바다에서 나오자마자 목격했던 그 존재가 틀림없었다. 베르덴과 알파의 청각에 성별과 나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저 사슬은 ‘금기’예요. 금기가 제정될 때마다 저 사슬이 생겨, 특정 행위가 금지되거나 세상에 발설할 수 없는 비밀이 탄생하죠. 다만 사슬의 개수가, 실제 금기의 개수와 일치하지는 않아요. 금기의 정도에 따라 금기의 사슬이 한꺼번에 여러 개가 나타날 수도 있거든요.”
아이의 그림자는 난데없이 둘의 관심을 끌었던 사물에 대해 설명했다.
“게다가 저 사슬들에는 과거의 금기는 포함되지 않아요. 금기의 본의에 대해서는 아에로돈이 말했고, 현재의 금기와 과거의 금기의 차이점은 관리자가 설명했었는데, 기억하죠?”
“…….”
똑똑히 기억한다.
───금기는 세계를 대상으로 한 절대적 규율이며, 동시에 세계가 인정한 절대적 법률이다. 세계로부터 자격을 얻은 자가 관조하는 존재를 통해 반영하는 공연(公然)한 의지. 이것이 금기다.
───‘현재의 금기’는 아에로돈이 설명했던 것과 일치한다. 이는 운명전에서 결정된 일이라 내가 아는 바는 없지만, 결론이 그렇지. 하지만 세계수가 고대 신들을 몰살할 때 정한 ‘과거의 금기’는 오직 진정한 신만이 다루는 절대적 법률이다.
베르덴의 손끝이 살짝 움직였다.
전자의 문답을 아는 건 그렇다 치더라고, 후자는 관리자와 단둘이 나눈 대화다.
어떤 대화를 오갔는지 아는 건 베르덴이 정보를 공유한 몇몇 존재밖에 없다. 그런데 아이의 그림자는 바로 옆에서 보기라도 한 듯이 정확히 기억 속 문장을 짚었다.
“당신의 본질은 왜 세계수와 같아진 걸까. 이에 대한 답은 금기 안에 있어요. 올다르크가 직접 제정한 금기죠. 그래서 ‘당신’의 정체처럼 세상 어느 누구도 감히 밝힐 수 없는 거고요. 세계수도, 저도.”
그때, 베르덴이 물었다.
“너는 저항자의 편인가?”
[적? 아군?]
여기가 정확히 어떤 공간인지 묻기 전에, 거목과 그림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묻기 전에 접근의 의도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통찰력은 무사하다.’
베르덴은 아이의 그림자의 대답에 감춰진 감정을 분간하기 위해 집중했다. 그러자 순진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는 ‘당신’도, 올다르크의 편도 아니에요. 저의 본질이 운명의 원리를 거부해 예전에는 올다르크를 응원했지만, 현재 어느 진영에도 서 있지 않죠. 그런 뜻에서 적아를 구분하자면…….”
아이의 그림자가 움직였다.
“베르덴의 아군에 가깝다고 할까요?”
거목의 그늘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그림자 또한 씻겨 내려가듯 걷혔다. 본모습이 드러나며 깨끗한 연둣빛 눈동자가 명멸했다.
주인 없는 땅에 있어야 할 소녀의 등장에 일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점술가 손녀?]
“아이샤?”
베르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이샤…… 가 아니군.”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베르덴이 아는 아이샤가 자명했다. 하나 통찰력이 눈앞의 존재가 아이샤와는 다른 것이라고 규정했다.
저 눈빛.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아이샤에게 내재된 힘, 그 자체인가?”
아이샤는 본인도 설명하지 못하는 기이한 능력을 여러 번 발휘한 바 있다.
그녀는 [아인베르]의 <베일>로 세상의 인식을 저해한 베르덴의 모습을 꿰뚫어 보았고, 피울음 역병 사태를 예측했다.
그뿐만 아니라 투하르 제일의 선지자인 방랑의 무나딤으로부터 선지자로서 재능의 차원이 다르다는 평가까지 받았다.
아이샤의 진면목.
저 존재가 바로 그것이리라.
“이미 저에 대해서는 첫 번째 사도가 입에 담은 적 있죠. 녀석이 직접 개입해서 베르덴을 방해하길래 저도 나설 수밖에 없었거든요. 오히려 사도가 본인을 부주의하게 노출한 덕분에 제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 거기도 하지만요.”
빛으로 이루어진 존재…… 첫 번째 하인을 쫓아서 섬에 도착한 베르덴의 발목을 잡은, 첫 번째 사도와의 대면이 뇌리를 스쳤다.
───까다롭군요. 그 정도 경지로 이 어긋난 시공간을 꿰뚫어 보다니…… 아.
───당신이 ‘시간’의 관심을 받을 줄이야.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 기분…… 오랜만입니다. 모든 시간을 통틀어 저를 몇 번이나 당황하게 한 사람은 올다르크 이후 당신이 처음입니다. 어쩔 수 없이 대화는 여기서 마쳐야겠군요.
베르덴이 눈을 크게 떴다.
“네가 시간이라고?”
“그리고, 그전부터 베르덴은 이미 저의 본명을 알고 있고요. 알파도 마찬가지죠.”
[본명? 베르덴 폐하?]
베르덴은 관련 기억을 최대한 되짚어 봤지만 당장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이윽고 단 하나의 명칭을 떠올렸다.
“설마…….”
의심은 곧 확신이 되었다.
저 아이샤가 힌트를 주지 않았다면 생각의 틀을 쉽게 깨지 못했을 것이다.
먼 훗날에야 눈치챘을지도 몰랐다.
“과거는 흔적, 현재는 진행, 미래는 가능성.”
베르덴의 내면 속 대수림의 계절이 바뀐다.
여름에서 가을로.
가을에서 겨울로.
겨울에서 봄으로.
봄에서 다시 여름으로.
“현재를 지나지 않은 모든 시간과 사건에 여지가 있어 정해진 결과는 없으며. 어디에나 시간이 있듯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는 존재 또한 어디에나 존재하죠.”
기이한 존재감이 극대화됐다.
“운명을 극복한 새로운 가능성, 그리고 새로운 신이 될 베르덴. 솔직히 때가 이르다고 생각하지만, 불분명한 미래가 저희를 여기로 이끌었으니. 이렇게 인사드려요.”
아이샤가 미소 지었다.
“시간의 개념, ‘히안테’예요.”
2대 전설: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時制) – 히안테(Hiante).
그것은 물건이 아니라 생명이었다.
* * *
“젠티르 마탑은 보복을 원합니다. 마울러의 ‘권역’에 대한.”
시그릴 라비니아의 분노가 뒤섞인 대담한 발언에 아드리안이 눈썹을 씰룩였다.
‘각오했군.’
젠티르 마탑, 그를 넘어 10대 마탑의 위신을 위한 결정이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쉽게 꺼낼 수 없는 선언이었다.
“마울러에게 직접 대적할 수는 없으니 그 영역을 노리겠다는 건가.”
“현실적으로 그게 한계니까요.”
“전반적으로 어떻게.”
아드리안의 방법을 묻자, 시그릴은 기다렸다는 듯 요점만 설명했다.
“마울러에게 발각된 순간 역으로 보복의 명분을 주게 됩니다. 저희 젠티르 마탑은 그 위험을 감수할 생각도, 능력도 없죠. 하여 마울러가 지배하는 본토인 델하룬이 아니라, 그의 영향을 받는 권역을 노리는 게 안전하고, 효과적일 터.”
그녀의 답엔 흔들림이 없었다.
“로니아 왕국과 도시 연합 카일리언스. 저는 둘 중 하나를 노리고자 해요. 아무리 마울러가 대단해도 거리가 거리이니 즉각적인 대응은 불가능할 테니까요.”
“젠티르 마탑의 역량으로 자신 있나?”
“본래 마탑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서 마법계에 군림해 왔습니다. 젠티르 마탑이 행동하면 도와줄 마탑은 하나가 아닙니다. 마울러가 건드린 건 섬의 탐색대가 아니라 10대 마탑의 자존심이니까요.”
시그릴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들키지 않으면 그만. 이런 공작(工作)은 마탑이 전문입니다.”
과거 마탑들이 전쟁과 경쟁을 벌일 때에도 주로 물밑에서의 암투가 벌어졌다. 원인이 드러나지 않은 채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은 마법사와 마탑 관련자는 한둘이 아니었다.
“자세한 공작 설계도 지금 설명해 드릴 수 있어요.”
“…….”
아드리안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나가서 기다려라.”
“예, 언제든 불러 주시길.”
시그릴은 군말 없이 안내를 따라서 응접실을 나가 대전당의 다른 방으로 향했다. 거절당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반쯤 성공이라 판단한 것이다.
아드리안은,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베타.”
[듣고 있습니다.]
“내가 보기엔…… 이데라트 연맹장 같은 운명의 추종자라는 놈들이 세계의 분열을 노리는 것 같은데, 과한 생각인 것 같나?”
젠티르 마탑을 비롯한 몇몇 마탑은 마울러에게 보복하려 하고 있고.
에온의 정보관들에게서 들은 국제 정보에 의하면 루아스 교국에서 통보조차 없이 이데라트 연맹국으로 향하고 있다고 한다.
필시 연맹장의 배신에 대해 알아보려는 것일 터.
그 과정에서 어떤 마찰이 생길지 모른다.
만약 최악으로 치닫는다면 국제 사회는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릴 것이다. 옛 왕이 결국 어떻게 됐는지 레프라기움 마탑이 공개하기도 전에 대륙에서 피를 보게 될 수도 있다.
아드리안이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바로 주군의 목적 때문이었다.
‘주군은 세계 회의에서 세계 통합의 기반을 세워, 앞으로 나타날 적에 대비하려 했다. 그런데 연맹장이 교국 수도에서 그런 짓을 벌이고 사라진 탓에 통합에 균열이 생겼다.’
무엇보다도.
‘연맹장의 배신을 유일하게 목격한 메드란트가 그 사실을 발설하지 않았는데, 이미 그 소식은 대륙 전역에 퍼져 있다. 소문과 추측이라는 이름으로.’
대체 누가 퍼뜨렸을까.
직감으로 단언하건대 운명의 추종자의 계략일 가능성이 높았다.
베타도 긍정했다.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균열의 봉합인데…… 음.”
아드리안이 미간을 문질렀다.
“베타, 내가 주군처럼 전 대륙의 세력들의 갈등을 진정시킬 가능성은?”
[없습니다. 아드리안의 소통력과 특유의 성격을 고려하여 계산했습니다. 없습니다.]
녀석은 두 번 강조했다.
“조금도 없나?”
[극단적으로 계산하면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베타가 첨언했다.
[베르덴 폐하와 아드리안을 제외한 초월자들이 전부 의문사하면 가능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