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8화 신격 – 2
어떤 인물이 베르덴을 신으로 규정했다.
‘누구지?’
아드리안과 이자벨라는 아닐 것이다. 알파와 베타도 그렇다. 그런 조짐이 보였다면 진즉에 눈치챘을 테니까.
무엇보다 그들은 베르덴을 정말로 신을 대하듯 숭앙하지 않는다.
오스가르 파르건, 메드란트 케덴, 레바나, 라테온 오프니엘, 그레이브 러드워스, 알더니스는 베르덴을 블랙 아워 3대 지도자이자 에온의 수장으로 진심으로 인정하고 있고.
멜라드 타스티엔은 하르칸 다제스트의 전인으로 보고 있으며.
유니아와 카인은 선배로 취급한다.
‘알데반은…… 나를 우상숭배 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나, 최근까지 마력을 제외한 모종의 힘을 다룬 적은 없었다.’
실리스 리벤 디 에스티리아, 에이든, 샤를로트는 베르덴을 은인으로 여기고, 정보관 페일과 페르네는 거기에 더해 세력의 장으로 대한다.
칼리아 드 에스퍼렌사는 신과 신앙자의 관계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사이가 가깝다. 가장 오래 알고 지낸 로벨린 또한 당연히.
리비안트 공국, 에스티리아 왕국, 미들로스 자치령, 벨디른 공화국, 주인 없는 땅, 대수림, 가르간트, 블랙 아워의 대전당, 프로하스, 아르나크 제국, 아케나드 마도국…….
베르덴은 대륙을 여행하며 지금까지 얻은 수많은 인연을 돌이켜 봤다. 악연도 많았지만, 그 이상으로 선연도 많았다.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결과적으로 타인을 도운 적이 적지 않았다.
엘프.
드워프.
수인.
인간.
악마.
그중에서 베르덴을 신으로 경외할 만한 상황이 얼마나 있었을까.
당장 생각나는 건 침묵의 사막밖에 없었다.
‘투하르의 시민들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 사막의 신앙은 실재했고, 그 이슈르의 빈자리를 나로 채워서 신앙하고 있으니까. 다만, 신앙의 기간이 짧아도 너무 짧은 게 문제다.’
이슈르는 완전한 신격을 이룩하기 위해서 무려 수십 년 동안 투하르 대신전에 틀어막혔다. 그러고도 신격을 채 완성하지 못했다.
그와 비교해 베르덴이 투하르의 신으로 경배받은 시간은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신성력이란 힘이 그리 쉽게 탄생하진 않을 터.
혼란스럽다.
베르덴은 번번이 생각이 막히는 익숙하지 않은 기분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대로 머리를 굴려 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기에 일단은 마음 한편에 넣어 두고, 다른 단서에 집중했다.
[베르덴 폐하. 마도왕 폐하. ‘당신’. 마음이 동일?]
“어떤 마음가짐을 말하는 거지?”
“옛날이야기를 좀 할까요?”
히안테가 장난스럽게 다리를 번갈아 가며 앞뒤로 흔들었다.
“올다르크는 태초의 마법사이며 최초의 마법사. 그는 세계의 마력에 고유한 법칙을 부여하여 마법의 개념을 창조한 ‘인간’이에요. 현존하는 모든 마법의 원천이자 원류인 셈이죠. 베르덴도, 알파도 알겠지만, 오히려 세상이 그 힘을 받쳐 주지 못해서 마법에 출력 제한이 걸릴 정도였죠.”
관리자의 기억 속에서…… 초대 마도왕은 강대한 고위 신 셋을 제압하기 위해서 여러 마법을 구사했고 끝내 우주에서 거대 운석을 불러들였다.
마력회로가 없던 고대에는 자연의 마력이 동력이 되었는데, 그로 인해서 일대의 마력이 일시적으로 고갈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초대 마도왕이 소모하는 마력의 양을, 대자연의 회복력이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 올다르크는 ‘신’이었어요.”
베르덴과 알파가 흠칫햇다.
“초대 마도왕이, 신?”
“물론 신격을 이루었거나 신성력을 다루는 그런 신은 아니었어요. 그냥 수많은 이들에게 신과 다를 바 없는 경외를 받았죠. 올다르크는 애초에 신 같은 것에 별 관심도 없었고, 주변의 시선이 어떻든 신경도 쓰지 않았거든요. 정말로 자유로웠어요, 그는. 베르덴처럼 거침없기도 했고요. 하지만…….”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본인은 그럴 의도가 없다고 해도 올다르크는 사람들이 따를 수밖에 없는 인물이잖아요? 인간이되, 인간을 완전하게 벗어난 괴물이자, 고대 신들조차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존재를 어떻게 추앙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심지어 마법의 창시자이기도 한데.”
“…….”
“그렇게 올다르크의 능력과 지식, 그리고 업적과 행보를 찬양하는 추종자들은, 그를 신으로 여기고는 기도를 올렸죠. 한마디로 올다르크는 ‘신이 아니나, 신과 같은 인간’이었어요.”
실제로 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음에도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감이었기에, 추종자들은 올다르크를 신으로 규정했으나.
고대 신들의 관점에서 올다르크를 절대로 신으로는 보지 않았다.
───태초의 마법사. 오만하 구나신 도아닌 존재가 감히혼 자서고 위신을 감당하 려하다 니‘그녀’ 도없이.
───‘그녀’가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아직 시간이 있으니…… 기회이기도 하노라…… 출혈을 감수하마…… 단신으로 행차한 태초의 마법사를 처리하노라…… 세계수를 벌목하마…… 전세를 뒤집을 수 있노라…….
───죄악이다. 벌레 같은 인간의 몸으로 신들을 해한. 오류다. 너의 존재 자체가. 판정한다. 너의 죽음을.
대분기.
우주의 유성체에 파괴당했던 머리 없는 거신이, 세 개가 하나인 작은 행성과 괴조와 함께 올다르크를 신이 아닌 존재라고 명시했듯이.
베르덴이 말했다.
“현 마법계에서는 초대 마도왕 사후, 그를 마법의 신이라고 찬미하는 마법사가 적지 않다. 혹시 그것과 연관이 있는 이야기인가?”
“관계가 깊어요. 과거와 지금의 올다르크가 전혀 다른 것처럼요. 아무튼.”
히안테가 다리를 꼬았다.
“올다르크는 태생부터 위대했어요. 최고위 고대 신도 혼자서는 상대할 수 없었으니, 그는 마치 세계의 주인으로 빚어진 듯했죠. 여기서 질문이에요. 그렇게 대단한 올다르크를 패배시킨 태고의 시대 때 ‘당신’은 어땠을까요?”
[약했다.]
아르카디옴에서 호스트가 그랬다.
───{‘당신’은 올다르크처럼 압도적인 재능을 타고나지도 않았고, 잿빛의 용처럼 멸하지 않는 신체와 영혼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저 여러 강자 중 하나에 불과했지. 심지어 순위를 매기자면 명백히 하위권이었고. 그러나 본디 존재란 선천과 후천을 통해 완성되는 것.}
───{그때 ‘당신’에게는 올다르크와 잿빛의 용에게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사명감’이지.}
───{‘당신’은 항상 순수했다. 마치 순백으로 빚어진 것처럼. 그렇기에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무엇이든 될 수 있었지. 궁극의 의지. 그로써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로 등극한 것이다.}
히안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머나먼 과거에서 ‘당신’은 감히 올다르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했어요.”
그녀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약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며 자애롭고 순수한 ‘신’이었죠.”
* * *
‘당신’이 신이었다라…….
팔짱을 낀 베르덴이 검지로 자신의 팔뚝을 연신 두드렸다.
“세계 규모로 처음으로 발발한 전쟁인 대분기는, 이 대륙이 어떻게 되든 간에 자신의 이상과 욕망만을 추구하는 신들과 저마다의 이유로 혼란을 막으려는 신들 간의 사투라고 알고 있다. ‘당신’은 그럼 후자에 속한 고대의 신이었다고?”
“맞아요. 자신에게 믿음을 주는 약자를 보살피는 다정한 신이었죠. 그런 ‘당신’은 세계수보다도 평화를 사랑했기에 기꺼이 올다르크와 세계수와 함께 전쟁에 참전했어요. 그 분투 속에서 만인의 신앙이 쌓이며 ‘당신’ 또한 강해지기 시작했고요.”
히안테가 덧붙였다.
“표면적으로는요.”
“표면적?”
“호스트와 제가 ‘당신’이 약하다 했던 건 대분기 이전을 염두에 둔 거예요. ‘당신’은 이미 대분기 발발 당시부터 높은 신격을 쌓아 올린 상태였고, 대분기가 종식된 후에는 압도적인 권능을 갖게 됐어요. 그런데 그걸 세계수도, 올다르크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은폐했죠.”
“그 말은…….”
베르덴이 조금 늦게 입술을 떼었다.
“마치 ‘당신’이 대분기를 유도해서 고대 신들을 몰락시켰다는 의미로 들리는데.”
“자애(慈愛)는 부드럽고 상냥한 성질이기에 언뜻 나약하게 보이지만, 일선을 넘으면 가장 두려운 힘이기도 해요. 자신의 안위만을 살피는 것과 남의 평안을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것. 무엇이 더 강인한지 생각할 것도 없죠. 근본적으로 다르니까.”
정적 속에서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베르덴의 내면세계를 적신다.
“올다르크가 설계한 현대의 초월자와는 다르게 신에게는 명확한 이상을 향한 광기가 없어요. 그래서 자유롭죠. 하지만 ‘당신’은 고대 신인데도 ‘계기’를 통해 고유한 이상을 품게 되었고, 그 광기를 숨긴 채로 대분기를 암암리에 유도해 고대 신들을 대부분 몰살했어요. ‘당신’이 올다르크와 세계수를 비롯한 이들을 소중하게 생각했지만 이용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히안테가 나무뿌리에서 내려왔다.
“계획…… 즉, ‘운명’에 방해될 것이 뻔한 성가신 고대 신들을 손해 없이 치워 버린 거예요. 여기에 다른 목적도 있긴 했지만, 이처럼 운명전은 사실상 대분기 때부터 착실히 준비되고 있었어요.”
“…….”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러 준비를 마친 ‘당신’은 올다르크와 단둘이 만나서 줄곧 품고 있었던 이상을 이야기했어요. 혹시라도 올다르크가 이해해 줄지도 모르니까. 가장 거대한 벽이 동반자가 되어 준다면 그 자체로 운명은 완성되는 거니까.”
[하지만 설득은 실패.]
“예, 그렇게 ‘당신’과 올다르크의 균열로 인해서 운명전이 전개되었어요. 결과적으로 ‘당신’은 잠들고 말았지만 올다르크의 패배였죠.”
그녀가 다가온다.
“왜 올다르크는 ‘당신’에게 패배했을까? 대비가 부족해서? 그건 사소해요. 결정적으로 둘의 승패를 가른 요인은 딱 하나예요.”
히안테가 고작 한 걸음을 사이에 두고 베르덴과 마주 섰다.
“‘당신’이 먼저 자유를 버렸으니까.”
시간의 눈동자가 벽안을 들여다봤다.
“자유는 드넓지만, 이상은 제한적이에요. 하지만 그래서 이상은 깊을 수 있고, 깊을 수 있기에 조금 더 드높을 수 있는 거죠. 바로 그 단차가 ‘당신’의 우위를 끌어냈어요.”
하지만.
“지금은 서로 같은 높이에 있기에 승패를 예단할 수 없어요. ”
“초대 마도왕도 자유를 버렸다는 건가.”
“네, 태고의 시대에는 거들떠보지 않았던 신위에 오름으로써. 그것이 올다르크의 과거와 현재가 전혀 다른 이유죠.”
히안테가 뒤꿈치를 세우며 팔을 높이 뻗었다.
베르덴의 턱끝에 여린 손길이 닿았다.
“베르덴은 어때요?”
“…….”
“베르덴은 신격을 손에 넣고, 위계를 탈피하면 본래의 자유를 얻을 수 있어요. 초월자가 아닌 신이 되어, 초월자가 되기 위해서 선택해야만 했던 이상을 놓을 수 있게 되는 거죠.”
자유로운 신.
“물론 신격을 버리고, 그대로 초월의 끝으로 향할 수도 있답니다. 한 명의 초월자로서 이상을 완성하는 길을 계속 걷는 거예요. 신앙에 일절 구애받지 않고.”
신이 되지 않는 초월자.
“아니면 무엇도 버리지 않은 채 신격까지 손에 넣을 수도 있고요.”
진정한 신.
베르덴에게는 세 개의 선택지가 있다.
“그러나──세 번째 선택으로 진정한 신이 되면, 세계수와는 다른 신이 돼 버려요. 현재를 유지한다는 건 이상 또한 함께한다는 것. ‘당신’과 올다르크처럼 변질된 진정한 신에 오르겠죠. 그렇게 되면 다시는 이상을 향한 광기를 놓을 수 없어요. 영원히 자유로워질 수도 없게 되고요.”
그녀가 걱정스럽게 묻는다.
“힘에 의한 자유…… 베르덴이 추구하는 이상은 지배적으로 느껴지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너무도 이타적이죠. 불합리한 힘에 짓눌린 약자였기에 가질 수 있는 그런 꿈.”
“…….”
“베르덴은 본래의 자유를 되찾을 수 있어요. 지금 당장이라도. 더 이상 약자도 아닌 채로요. 그런데도 자신만의 이상을 고집할 건가요?”
히안테의 눈에 물기가 희미하게 아른거렸다.
“베르덴은 희생할 건가요?”
“애초에 내가 선택한 이상이다. 버리고 말고 할 것도 없지. 애초에 나는 타인을 위해서도, 다른 누군가의 강요로도 희생하지 않는다.”
베르덴이 단언했다.
“희생은 자처하는 거니까.”
“희생은 자처하는 거니까.”
히안테가 동시에 말했다.
“그게 제 대답이에요.”
히안테가 자그마한 손바닥으로 베르덴의 얼굴을 천천히 쓸었다.
“그 마음가짐이 진정한 신의 자격이죠.”
선택을 내렸으니.
결과가 따를 시간이다.
“이제 신격을 깨우칠 차례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