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9화 신격 – 13 (終)
다리가 갈 곳을 잃는다. 경험한 적 없는 부유감이 덮쳐 온다. 균형을 상실한 몸을 따라 눈높이가 천천히 내려간다.
‘세상을, 멸하는 권능이라니…….’
허공을 박찰 수도 없다.
공간 자체가 파멸한 탓이다.
세계의 틈새와 틈새의 그늘 사이의 중심 부분이 송두리째 분쇄됐다.
운명 파괴자와 악마들이 있는 내부 지형은 손상 하나 없었고, 그 바깥에 있는 아서와 인간들의 지면은 손쓸 새도 없이 파괴되었다.
빛이 가득한 세계의 틈새.
어둠이 만연한 틈새의 그늘.
본래 그 전체를 아우르는 세계의 틈새가 둘로 분단되고 있다.
서로 간섭할 수 없는──뿌리만 같되, 결국에는 별도로 존재하고, 유지되는 ‘두 개의 세계의 틈새’가 형성되고 있었다.
먼저 추락한 군세의 비명이 빠르게 멀어진다.
틈새의 그늘이 독립적으로 떨어져 나가는 이상, 세계의 틈새를 다스리는 아서라고 할지언정 그곳에 지금처럼 다시 발을 디딜 수 없다.
연결이 완전히 끊어지려 한다.
틈새 속의 그늘이 ‘당신’의 권능에서 벗어나고 있다. 운명 파괴자를 신앙한 악마들을 처단할 길이 사라져 간다.
그뿐만이 아니다.
만약…… 틈새의 그늘이, 세계의 틈새의 환경을 고스란히 품고 있으면 큰일이다. 그야말로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터였다.
‘운명 파괴자.’
아서는 절벽 끝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베르덴과 눈이 마주쳤다. 베르덴의 뒤에는 경외감을 내비치는 악마들이 자리했다. 잿빛의 용은 흥미롭다는 눈으로 베르덴을 내려다봤다.
선장은 지휘하고.
선원은 따른다.
베르덴의 모습은 방주의 이념을 그대로 현실로 옮겨 놓은 듯했다. 아서의 제왕학을 실현한 존재와 같았다.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
순수한 인간도 아닌 것이 운명의 실수인 악마들 따위를 신앙자라고 이끄는 꼴이라니, 남과 다르다며 고고한 척 으스대는 꼴이라니.
구역질이 난다.
갑자기 나타나 운명의 수레바퀴를 무너뜨리고, 희생으로 쌓아 올린 승리를 없던 일로 만든 것도 견딜 수 없이 혐오스럽다.
‘용납할 수 없도다.’
히안테와 잿빛의 용이 개입했다고 해도 미완성된 존재에게 당했다는 것 자체가 수치다. 운명이 뭔지도 모르는 무지한 존재에게……!
아서가 목청을 터뜨렸다.
“용납할 수 없단 말이다!!!”
조각난 그늘의 파편 공중에서 연속해서 밟으며 길을 만들었다. [카엘타리온]에 기를 집중하여 절기의 태세를 갖추었다.
하드라스가 소리쳤다.
[우리의 신께…… 접근을 허용치 마라!]
베르덴이 나서기도 전에 악마들이 저마다의 힘을 쏘아 보냈다.
콰아아앙! 스하아아아악! 콰광! 콰과과광!
군단장급 악마도 아닌 것들이 무엇을 하든 간에 아서에게는 자그마한 생채기조차 낼 수 없다. 대응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먼지 한 톨이 모여 별을 이루듯이 악마들의 저항 하나하나가, 이내 마지막 발판을 박찬 아서의 속도를 미세하게 늦추었다.
하드라스가 [라티르]로 쏘아 보낸 어둠의 광선을 검명으로 받아쳤다. 여기서 절기를 휘두른다면, 그 반동에 의해서 운명 파괴자의 근처에 닿지 못하게 될 것이다.
“찌꺼기들이……!”
멸망한 공간을 뛰어넘은 아서가 추락하며 팔을 뻗었다. 콰드드드득. 가까스로 절벽을 붙잡은 그가 위를 올려다봤다.
“아까 말했었지. 여기서 내가 살아남으면, 네놈은 반드시 내게 죽을 거라고.”
아서가 단언했다.
“이단은, 결국 멸할 것이다.”
“약속은 지킨다.”
베르덴이 [인테리스]를 아래로 향해 푸른 마력을 응축시켰다.
“이만 꺼져라.”
흐르는 별, 유성(流星).
콰아아아아앙!
자그마한 마력의 태양이 착탄 하며 고열과 압력이 폭발했다. <명계>에 의해서 붕괴된 세계에는 지탱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절벽에서 멀리 떨어져 나간 아서는 멀어져 가는 베르덴을 바라만 봐야 했다.
‘금기가 아니었다면…….’
가르간트에서 세계수의 제제를 무시하고 억지로 일검을 밀어 넣었다면, 현 방주의 지도자의 훼방에도 절기를 시전했다면, 잿빛 머리카락의 의미를 조금만 더 빨리 알아차렸다면…… 다른 걸 떠나서 처음부터 모든 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면 결단코 이럴 일은 없었을 텐데.
‘[이랬다면, 저랬다면. 쓸데없는 가정이지. 너는 세 번의 기회를 놓쳤다.]’
증오스러운 음성이 들렸다.
‘[베르덴은 멸하지 않는 안전한 상태에서 격상의 존재를 상대했다. 그 경험은 언제나 그랬듯 피가 되고 살이 될 터. 베르덴의 경지는 이미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으니, 훗날 네게 네 번째 기회가 온다면 어떻게 될까.]’
잿빛의 용이 속삭였다.
‘[배신자, 과연 넌 베르덴을 감당할 수 있을까?]’
절대자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의 성장은 예측할 수 없다. 언제 완성될지 모른다. ‘당신’과 올다르크가 경지를 완성하기 전의 성장 속도가 어땠는지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기에.
“베르덴.”
아서 타렌폴드는 처음으로 베르덴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이름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베르덴……!”
시간이 두려워졌다.
베르덴이 세 번째 절대자에 등극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문제다. 어떻게든 사전에 막아야 한다.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그 전에 죽여야 한다.
베르덴.
‘당신’의 두 번째 사도는 그를 올다르크와 같은 최대의 적으로 규정했다. 그렇게 진한 살의와 함께 아서가 깊은 어둠에 잠겼다.
* * *
두 번째 사도의 기척이 사라졌다.
물론 죽지는 않았다.
운명에 속박당한 인류와 함께 틈새의 그늘에서 추방당해, 렌디바르가 있는 세계의 틈새로 넘어갔을 것이다.
잿빛의 용이 말했다.
[금기의 제약을 받은 생태에서 놈은 무리하게 전력을 끌어냈다. 한동안 세계의 틈새에 처박힌 채 현실은 쳐다도 보지 못하겠지.]
“……그런가.”
베르덴이 어둠만이 드리운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세계의 틈새와의 연결 고리를 멸해 틈새의 그늘을 분리했다.
어둠으로 이루어진 이 공간은 고정되지 않고 아주 느릿하게 유영했다.
그 안에 악마들이 있었다.
더 이상 악마들은 운명에 속한 존재들에게 고문당하거나 죽임당하지 않는다. 결국 베르덴이 이곳을 떠나도 두 번째 사도가 쳐들어올 수 없다. 악마들은 자유를 얻었다.
악마들의 피난처.
어둠의 대악마인 녹시아스가 창조했던 대악마의 피난처의 아류인 셈이다. 그 과정에서 악마들이 다수 죽었지만…….
[연민이 깊은 것도 좋지 않다. 어깨만 무거워질 뿐이니.]
“그게 내가 짊어질 책임이지.”
베르덴이 물었다.
“이제 가는 건가?”
잿빛의 용의 몸체는 아까와 달리 반쯤 투명해진 상태였다.
시시각각 형체가 흩어졌다.
[네게 드래곤의 능력을 어떻게 재현하는지 알려 주었으니,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마쳤다. 힘의 잔재에 불과한 내게 허락된 시간도 다 됐고. 크큭, 배신자가 이용당하는 모습은 드문 여흥이었다.]
“도와줘서 고맙군.”
[히안테의 장단에 잠시 맞춰 줬을 뿐이다. 그럼 이만 작별을 고하지.]
이제는 드래곤의 비늘이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거체가 희미해졌다. 그가 보란 듯이 거대한 이빨들이 드러냈다.
[본체와의 재회를 고대하겠다, 베르덴.]
하드라스는 고위 악마에게 부축받은 채로 깊게 예를 갖췄다. 눈치껏 지성이 높은 몇몇 악마도 따라 인사했다.
잿빛의 용은 악마들을 흘깃 쳐다보고는 웃음을 흘리며 사라졌다.
사아아아…….
회색의 빛무리가 [아인베르]에 깃들어 자취를 감추었다.
고요하다.
긴장이 풀린다.
풀썩.
[시, 신이시여……!]
“괜찮다.”
<신격화>를 해제한 베르덴이 힘없이 어둠 위에 드러누웠다. 탈력감이 엄청나다. 죽지만 않는다는 게 이런 기분일 것이다.
“지쳤을 뿐이니까.”
운명의 두 번째 사도, ‘당신’의 검, 인간계 최초의 왕, 아서 타렌폴드와의 조우.
베르덴은 살아남았다.
* * *
하드라스는 새롭게 변화한 보금자리를 몇 번이고 확인했다. 추격자는 없는지, 그리고 악마들이 살기에 적합한지, 이는 신의 명령이었다.
[세계의 틈새의 환경과 흡사…… 아니…… 역시 완전히 동일하다…… 그렇다면.]
하드라스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희열에 몸을 떨었다. 신께서, 그 배신자를 절벽에서 떨어뜨렸을 때만큼의 환희였다.
[악마들을…… 모을 수 있다……!]
아래에서 위로 비집고 올라오는 악마들의 일부는 세계의 틈새에 표류한다. 그리고 다시 그중 일부는 현실로 올라간다.
아서의 12귀족이 주기적으로 사냥을 나서는 탓에 현실로 넘어가는 악마는 제한되었지만, 이곳에서는 위협받을 일이 없다.
말인즉슨 틈새로 향하는 악마를 틈새의 그늘에서 나오게 유도하고, 그들을 한데 모아 현실로 나아가는 입구를 빚는다면…….
군단을 구축할 수 있다.
저항자가 아니라 오로지 우리의 신만을 위하는 악마들의 군세를.
* * *
영혼이라서 회복이 빠른 걸까.
시간이 흐름이 달라 회복이 빠른 걸까.
신격을 얻었어도 여전히 시간 감각이 명확하지 않은 터라 현실에서, 내면세계에서 세월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다.
‘뭐, 돌아가면 알게 되겠지.’
베르덴이 개인 공간에서 나오자 악마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마음으로는 익숙한데, 시각적으로는 아직 어색했다.
곤충형 악마와 거대한 괴수형 악마들이 특히나 그러했다.
스윽.
베르덴도 눈을 감고 기도했다. 죽은 악마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생명을 느꼈다. 산 자로서 죽은 자에 대한 애도는 당연했다.
틈새의 악마들은 그로부터 장례에 관한 예식을 터득했다.
베르덴이 말했다.
“한동안은 만나기 어려울 거다. 현실에서 이곳을 넘나들기는 어려우니.”
[저희가…… 찾아뵙겠습니다.]
군단장 하드라스가 태양의 창으로 어둠을 짚은 채 고개를 숙였다. 이슈르의 것에서 베르덴의 것이 된 신기는 그에게 맡겼다.
[라티르]는 이곳에서 악마들을 인도하는 태양이 되어 줄 것이다.
[신기의 능력을 익히고…… 신앙자들을 모아서 기도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의 힘이 되어 줄…… 군단을 조직하겠습니다.]
하드라스가 첨언했다.
[머지않아 현실로 나갈 수 있게 되면…… 대륙의 악마를 통합하겠습니다.]
루아스 교국에 의해 숨어 살지만 대륙에도 악마는 다수 잔존해 있다.
아직 베르덴을 만나지 못한 악마가 말이다.
가련한 악마들을 계몽시키고 신앙심을 심어 주는 것은 당연한 의무. 일단은 대악마 휘하의 악마들을 제외한 악마가 포교 대상이었다.
베르덴은 적어도 어둠의 대악마까지 세력으로 끌어들일 계획이었다.
‘마치 거악이 된 기분인데.’
아무래도 좋다.
운명에 대항하는 것이 악이라면 기꺼이 악으로 비난받을 것이다. 베르덴은 악마까지 아울러 찾아올 혼돈에 대비했다.
‘루아스 교국이 알게 되면 대성전이 일어날지도 모르지만…… 감수해야 한다.’
운명의 추종자가 있을지 모르는 루아스교.
베르덴의 신앙을 가진 악마.
둘 중 누가 더 신뢰할 만한지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으므로.
“신님.”
절반은 인간이고, 절반은 악마인 녀석이 다리에 찰싹 붙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반인반마를 따라서 다른 악마들도 곁에 모였다.
“안 가시면, 안 되나요?”
“내가 책임질 이들이 많다.”
“……저희처럼요?”
“그래.”
베르덴은 절반의 악마의 작은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녀석의 이름은 아직 없다.
악마들은 어느 순간에 이름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고 한다.
하드라스가 손짓한다.
악마들이 짧게 물러났다.
하드라스의 도움 없이 어떻게 세계의 틈새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는 알고 있다. 신격을 얻으며 본체의 존재가 여실히 느껴졌기에.
“부탁하마, 하드라스.”
[우리의 신이시여.]
악마들이 신앙을 내보이는 풍경 속에서 베르덴은 곧 한 발짝 내디뎠다. 무엇도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베르덴이 사라졌다.
그러나 모습은 보이지 않을지언정 신앙심은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악마들이 일제히 자신만의 성호를 그렸다.
그들은 에온의 상징을 짊어졌다.
* * *
베르덴이 천천히 눈을 떴다.
내면세계에서 명상을 시작했을 때와 같이 앉은 자세를 취하고 있던 그가 앞을 바라봤다.
싱그러운 풀.
울창한 숲.
의자로 쓰였던 나무뿌리.
그리고.
알파.
[베르덴 폐하.]
알파는 연습이라도 한 듯이 능숙하게 몸을 던져 베르덴의 품에 안겼다. 오늘따라 외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았다.
[베르덴 폐하. 기상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