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8화 신격 – 12
운검 [카엘타리온]의 검흔엔 필연성이 부여되어 회복이 더뎌지다가 끝내 악화되어 육체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경상을 입은 존재는 빠르게.
중상을 당한 존재는 느리게.
전자는 작은 상처로도 사망하고, 후자는 한동안 고통을 느끼다가 숨이 끊긴다. 이렇듯 두 번째 사도가 하사받은, 하늘빛을 내는 검은 운명에 반하는 자들을 처단하는 신의 무구다.
그런데 베르덴의 신앙이 [카엘타리온]의 권능을 상쇄했다. 즉사당하지 않은 악마는 질긴 회복력으로 운명을 딛고 일어섰다.
[우리의 신께서, 지켜보고 계신다.]
아서에게 허리가 양단됐던 불타는 거대 악마가 화염의 검끝을 내리찍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악!”
“다리가, 얼굴이……!”
“꺄아아아악!”
분출된 폭염이 병사들을 산 채로 태우고, 액체로 녹여 버렸다. 12귀족이 솟구쳐 올라와 악마의 용암석 얼굴을 글레이브로 후려쳤다.
화아아아악───콰앙!
생생한 화염이 넘실거리는 악마의 손이 귀족을 붙잡아 짓눌렀다.
귀족들이 들이닥친다.
고위 악마의 육신에서 아지렁이와 함께 붉은빛이 일렁이더니 화산과 같은 폭발이 인간의 진영 일부를 고온으로 뒤덮었다.
[운명의 노예들을 멸각하라.]
화염의 악마들이 유황 불꽃을 방사하고, 얼음의 악마들이 일대를 얼린다. 정신계 악마들이 감각 및 의식을 교란하는 정신 파동을 일으켰다
운명에 지배당한 영창 마법사들이 고대 마법으로 맞섰다.
굉음이 터졌다.
사방이 난잡했다.
“이 악마 새끼들이……!”
[크롸아아!]
무기와 팔을 물어뜯던 짐승 악마의 몸에 창칼이 꽂혔다. 악마가 죽기 전에 휘두른 꼬리가 여자 기사의 머리를 박살 냈다.
거구의 괴수 악마가 힘껏 질주하며 인간의 방어 진형을 무너뜨렸다.
이곳저곳에서 난무하는 비명과 괴성.
“으읏!”
“끄르, 끄르륵.”
베르덴에게 구원받은 절반의 악마가 방금 주인이 없어진 단검으로, 앞에 넘어진 인간의 목을 사정없이 찔러 댔다.
푹푹푹푹푹푹!
자기 의지마저 버린 인간이 꺽꺽거리다가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운명이 회귀하면 다시 부활하겠지만, 이 또한 죽음은 죽음이었다.
약하고 불완전한 악마인데도 전쟁에서 나선 것이 대견스러운가, 동족과 함께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 가여운가, 괴물 주제에 악착같이 남을 죽여 대는 것이 역겨운가.
“허억, 헉……!”
인간의 부분과 악마의 부분이 피에 물든 채 전란 속에서 일그러진다.
인간은 악마를 혐오하고.
악마는 인간을 증오한다.
인간은 운명을 받아들였고.
악마는 운명을 거부했다.
분노와 원한이 살의에 실려 소용돌이치는 전장은 교국의 4대 성인이 군단의 대악마, 몰가른을 처단한 1차 대성전과 다르지 않았다.
몰가른의 패배와 죽음은 루아스 교국의 위업이자 악에 대한 대표적인 징벌로 묘사된다.
악마는 타인을 현혹하고 죽이는 것밖에 모르는 무도한 괴물이다. 악마는 끔찍해서 마음을 이해할 줄 모른다. 악마는 반드시 토벌해야 한다. 악마를 숭배한 인간은 심판받아야 한다,
인류는 오랜 시간 동안 지식의 전달을 통해 그런 가르침을 받았다.
하지만 틈새의 악마들은 신실한 믿음에 기대어 희생을 아끼지 않았다. 악마도 지성체에게 허락된 감정이 있다. 악마도 깊이 생각할 줄 안다. 악마도 고통을 느낀다, 악마도 눈물을 흘린다.
이런 악마들의 모습은 인류의 역사와 사뭇 다른 일면을 보여 주었다.
무엇이 옳은가?
역사는 기록의 산물이다. 누가 기록했느냐에 따라서 평가는 달라진다. 제삼자의 관점에서 둘 중 무엇이 답인지는 모른다.
둘 다 답일 가능성도 생각했지만 그는 확신할 수 없다.
분명한 건 오직 하나뿐이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다.
악마가 인간에게서 승리했다면 역사에서 인간은 과연 어떻게 묘사되었을까? 악마와 인간을 지칭하는 의미가 다르지 않았을까?
세상은 승자에게는 너무도 관대하고 패자에게는 한없이 가혹하다. 승자의 의사에 따라 패자는 흔적을 새길 권리마저 빼앗긴다.
아무리 선할지언정 악인으로 기록되면 악인으로 남게 된다.
어쩌면…….
패배자의 본질은 여전해도 이 세계가 그 본질을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은,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생존이 명맥을 유지하는 일이라면.
승리는 존엄을 지키는 일이다.
패배하면 전부 잃는다.
‘당신’도, 올다르크도, 베르덴도 예외는 없다.
<신성 아케인: 역성(逆星)>
머리 위를 뒤덮은 잿빛의 성운이 그늘의 바닥에 반사됐다. 별빛의 기둥들이 아래에서 위로 치솟으며 종말의 섬광을 일으켰다.
모든 궤적을 간파한 아서가 거침없이 빛과 빛 사이를 가로질렀다.
후욱, 카아앙!
대악마의 어둠이 추가로 부여된 [라티르]가 옆을 찔러 들어왔다. 근거리에서 하드라스를 노려본 아서가 팔꿈치를 휘둘렀다.
등 뒤에서 날아온 [인테리스]의 몸통과 부딪치며 충격파가 터졌다.
‘검속이 현저히 느려졌다.’
어느샌가 베르덴의 손바닥이 아서의 몸통에 거의 닿아 있었다.
쿠웅──!
내부 충격파가 안을 헤집었다. 처음으로 정타를 허용한 아서가 미약한 신음을 머금으며 관자놀이에 핏대를 세웠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하드라스가 각력에 온 힘을 집중했다.
콰드드드드드드드드드득!
무게중심을 잃으며 직선으로 밀려 나간 아서가 상체를 숙여, 운검의 칼자루로 하드라스의 등허리를 내리찍는다.
바닥에 쓰러진 군단장의 머리를 짓밟으려 하다가 검기를 날린 직후 내지른 권격.
울컥.
가슴을 강타당한 베르덴이 핏물을 삼키고 충격을 흘렸다. 틈이 없을 정도로 거리를 좁힌 그가 마력과 신성력을 끌어내어 척력을 발했다.
그대로 고속으로 이동한 그들이 연이어 여덟 번 충돌했다.
‘영혼이 멸하지 않아도 운명 파괴자의 권능은 유한하도다. 신의 약점은 신앙자. 틈새의 악마들을 모조리 처단하면 신앙은 힘을 잃을 터.’
이제 갓 신이 된 존재에게 신앙자의 상실은 아주 치명적이다.
믿음이라도 죽이리라.
아서는 상대의 신경을 빼앗으며 운명에 귀속된 인간들로 악마들에게 타격을 입힐 작정이었다. 운명 파괴자의 고유한 힘이 없으면 운명의 순환은 끊기지 않는다.
이윽고 버러지 같은 악마의 숫자가 충분히 줄어 운명 파괴자의 신격이 흔들린다면, 단 한 번의 절기로 하드라스의 군단을 끝장낼 것이다.
금기로 제한된 힘의 총량은 전력의 4할을 지나 3할까지 감소하고 있는 상태. 다만 기술의 완전성은 변함이 없으니 운명 파괴자는 절대로 아서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운명 파괴자의 힘만으로는 인간계 최초의 왕의 강함을 넘볼 수 없다.
‘그런데.’
집요할 정도로 공세를 퍼붓는 베르덴의 벽안에선 초조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다. 포식자와 같은 흉하고 날카로운 기세가 불안감을 자극했다.
‘대체 뭘 노리고 있단 말인가.’
순간적으로 아서의 눈이 주변 환경을 광범위하게 의식했다.
틈새의 그늘에 그려진 격전의 풍경.
새까만 어둠에 균열이 일어났다.
공간이 깨져 버린 것이다.
운명 파괴자와 아서로 인한 그 파괴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가득하다. 한데 그중 일부가 마치 경계선과 같이 이어져 있었다.
공교롭게도 악마들과 인간들의 대립한 중심이 그 부근이었다.
‘무엇을──’
아서는 여전히 운명 파괴자의 노림수를 이해하지 못했다. 상상력의 한계였다. 그러나 직감만은 제대로 반응해 자리를 지키려 기를 운용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저 경계선을 넘으면 안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파아아아아앗!
베르덴의 [인테리스]가 당장 눈부시도록 잿빛을 뿜어 댔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 색채가 아서의 감각을 잠시 지워 버렸다.
베르덴이 회전하며 옆으로 비켰다.
하드라스가 내던진 [라티르]가 직선으로 공간을 관통했다.
쩌어어엉!
운검의 검면과 [라티르]의 창날이 강하게 맞닿은 채로 힘겨루기가 이루어졌다. 그것도 잠시, 베르덴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인테리스]를 휘둘렀다.
쩌어어어어어어어엉!
“……!!……!!!”
망치가 정을 때리듯, 스태프가 창 밑을 후려치며 신성력을 고스란히 전달했다. 신격에 반응한 태양의 창에서 광선이 사출됐다.
허를 찔려 영거리에서 직격당한 아서가 그대로 경계선 바깥으로 나가떨어졌다.
점차 약해지는 두 번째 사도와 최소한의 거리를 벌렸고, 악마들이 분투한 덕분에 분리시킬 영역 또한 충분히 확보했다.
‘[지금이겠군.]’
처음부터 베르덴의 생각을 알고 있던 잿빛의 용이 당장이 적기라고 판단했다.
그 말대로 조건이 갖춰졌으니 실행할 때였다.
[전군…….]
하드라스가 힘겨워하며 명령했다.
설명은 필요 없다.
군단장의 명령은 지엄하다. 악마의 위계질서는 엄격하다.
[몰아내라.]
악마들이 일제히 괴성을 질러 댔다. 이형종들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살아 움직이는 기괴한 파도가 운명의 인간들을 갈아 버리거나 후퇴시키는 등 사방의 전선을 밀어내며 영역을 확장했다.
‘최후의 수단.’
베르덴이 잿빛의 마력을 전개하며 [인테리스]를 허공에 띄웠다.
“개벽하라, 인테리스.”
본래 시동어를 외면 마력회로의 출력 제한만이 완전히 해제되지만, <신격화>를 유지한 지금은 그에 더해서 새로운 기능이 더해진다.
<신기 해방>
잿빛으로 물든 오브(Orb)에서 흘러넘친 마력이 광명한다.
무한한 마력, 파멸의 개념, 소멸의 개념, 그리고 신성력이 깃든 진회색의 마력이 틈새의 그늘을 같은 색으로 잠식했다.
────────────!
운명의 근원과 정반대의 개념을 맞닥뜨린 자들이 경직됐다. 아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장이라도 경계를 지나 운명 파괴자를 베어 버릴 마음이었으나 행동이 이어지지 않았다.
‘믿을 수 없도다. ‘당신’께서 부여하신 내 운명이, 억눌리다니……?!’
운명의 안내를 선택한 존재는 어디로 나아갈지 정해지기에, 운명의 빛이 잠시라도 사라지면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잃고 만다.
마친 빛 한 점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을 거니는 방황자와 같이.
쿠오오오오오.
베르덴이 왼손을 아래로, 오른손을 위로하며 양손을 모았다. 건틀릿의 손바닥이 마주 보는 사이의 공간에서 잿빛이 타올랐다.
‘이것이 신의 힘.’
검은 화산 지대에서 [인테리스]의 주인이 되어 리반데일 대공과 내기를 벌였을 때, 베르덴은 초위 마법의 단초를 깨달았다.
유니아의 마도를 응용해, [인테리스]를 매개체로 삼아 푸른 마력과 검붉은 마력을 결합한 끝에 하나의 회색 위성체를 구축했다.
그것은 엄연히 마법이라고 규정하기에는 형태가 미완성된 힘이었다. 그래도 회색의 마력이 현현시킬 광경을 떠올리며 ‘무허’라고 명명했다.
회색의 빛.
말 그대로 섬광.
베르덴은 그 순간을 떠올리며 자신만의 권능을 발현했다.
<무허(無虛)의 권능>
혼돈의 잿빛이 깨어났다. 동시에 경계선을 이룬 파괴의 흔적들에서 진회색의 화염이 분출해 악마와 인류를 분단했다.
그것은 <신성 아케인: 성운>으로 사도를 향해서 666개의 별빛을 흩뿌린 자취였다.
8위계에 도달해 신격을 터득한 순간, 신의 권능을 자각한 순간, 처음부터 끝까지 베르덴은 이 순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번째 사도의 목은 안중에도 없었다.
베르덴의 목적은 세계의 틈새에 갇힌 악마들의 구원이었다. 오직 그걸 위해서 변수로 점철된 상황을 마법적 사고로 설계했다.
마법사는 준비하는 자.
베르덴은 마법사다.
<명계(冥界)>
손안에서 터져 나온 빛에 반응한, 경계를 가르는 잿빛의 화염은 어둠을 절단하여 틈새의 그늘 안팎을 구분했으니.
공간 전체에 대지진이 일었다.
청각과 촉감뿐만이 아니라 영혼과 신체의 감각 전체가 격동했다.
항거할 수 없는 진동에 내부가 짓이겨지는 것만 같고, 고막이 갈가리 뜯겨 나가는 것만 같다. 영혼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지금까지…… 권능을 사용한 게 아니었단 말인가?”
아서는 경악을 감추지 못하다가 사태를 깨닫고 당장 아래를 내려다봤다. 베르덴이 무엇을 노리는지 그제야 어렴풋이 이해했다.
“설마─”
쩌저저저저저저저적!
악마가 존재하는 그늘을 제외한 모든──운명의 인류가 딛고 있는 어둠이 산산이 붕괴했다. 붕괴되며 그들의 몸이 위로 떠올랐다.
땅이 무너진 것처럼 조각난 어둠과 함께 추락한 인간들을 암흑이 반겼다.
단말마의 비명조차 삼켜졌다.
모조리 파괴됐다.
자연물이 잠시라도 존재할 수 있는 공간 원천이 파멸했다.
세계의 일부가 멸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