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3화 신들이 몰락한 시대 (1)
{마기온과 블러디아, 앞으로.}
남은 하객들이 눈치껏 갈라졌다.
마기온은 근엄한 위엄을 풍기며 무대의 중심으로 나섰다. 블러디아는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매혹적인 걸음을 옮겼다.
[첫 번째 게임에서 도망치는 꼴이 우습더구나.]
“넌 이긴다.”
[이번에는 중도 포기하지 말거라. 네 지식은 어떤 맛일지 궁금했으니.]
최초의 위계 마법사와 드래곤이 마주했다.
저항자와 운명의 사도가 대립했다.
대부분의 참석자는 감지하지 못했지만 은연중에 중압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그들에겐 그나마 범접할 수 있는 드높은 경지가 아니라면 느낄 수 없는 존재의 무게였다.
테아렐이 미간을 좁혔다.
“……강하네. 혹시 누군지 알아?”
“마기온의 정체는 파악했다.”
베르덴은 굳이 모른 척하지 않았다.
숨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테아렐이 마기온이 누군지 알아 봤자 손해는 일절 없다. 되레 이득이다. 적어도 그녀가 마기온을 게임의 상대로 삼는 일은 피할 수 있을 테니.
‘아르카디옴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얻으면 바로 공유한다. 게임에서 테아렐의 승산을 조금이라도 더 높일 수 있도록.’
이는 일행의 책임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방적으로 지식을 넘길 수는 없다. 아르카디옴이 끝나고 듣거나, 정 궁금하면 이에 상응하는 지식을 치르면 되지.”
“음.”
테아렐은 심해의 색이 깃든 머리카락을 쓸면서 고민하다가 이내 베르덴에게 얼굴을 가까이하고는 아주 작게 속삭였다.
“초월자가 되기 전에 해구에서 ‘가라앉은 문명’을 본 적이 있어. 수압이 심해서 더 다가가진 못했는데, 나중에 초월자가 돼서 다시 가 보니까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더라고.”
“문명?”
“응. 헛것을 본 건 아닐 거야, 아마.”
[문명 이동?]
심해로 사라진 문명이 움직일 리 없는데 자취를 감췄다. 생각해 보면 별것 아니기는 하지만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그녀가 먼저 공유한 지식을 베르덴, 알파, 베타는 기억했다.
다음으로 베르덴이 나직이 말했다.
“마기온은 지독한 신비주의자다.”
“헉.”
[헉.]
본명을 말할 수는 없기에 실체를 유추할 수 있는 단서를 주었다. 레프라기움 마탑은 유일하게 베일에 싸인 신비주의 세력.
‘마기온이 섭리자?’
베르덴의 말뜻을 단번에 이해한 테아렐이 놀란 듯 숨을 삼켰다.
물론 알파와 베타는 베르덴처럼 마기온이 누군지 처음부터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기에 별로 놀랄 것도 없었다.
그저 그녀의 반응을 따라 했을 뿐.
둘은 네 번째 주빈으로 취급되기에 베르덴에게서 어떤 지식을 일방적으로 듣든 간에 제재를 받지 아니한다.
{두 번째 게임을 추첨하겠다.}
호스트가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두 번째 게임을 결정하는 역할에 동의하겠다면 세 번째 주빈 마기온과 첫 번째 귀빈 블러디아는 공을 뽑도록.}
동시에 입방체에 손을 넣었다.
필연적으로 피부가 닿았지만 둘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무심한 증오. 서로를 향한 적대감이 외적인 감정을 초월한 듯했다.
이윽고 손아귀에 잡힌 공들이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
[……!]
두 개의 공에 각각 새겨진 주제를 확인한 마기온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꽈드드드득. 공이 뒤틀리는 소리가 잔잔히 퍼졌다.
[이 문어 대가리가.]
블러디아도 가면 너머로 어이가 없다는 기색을 여실히 드러냈다.
[수작을 부렸군.]
{수작이라고 믿고 싶겠지만 애석하게도 너희의 ‘운’이다. 운이란 예상대로 흘러가게 하면서도 뜻밖의 흐름을 만들어 내는 것.}
호스트가 손을 튕겨 두 번째 게임의 주제가 실린 공을 띄웠다. 그것들은 부력을 받은 것처럼 둥실둥실 떠올랐다.
{그것이 태고의 시대지.}
공이 정렬하며 단어들이 모두의 시야에 비쳤다.
태고(太古)와 모험(冒險).
{두 번째 게임은 ‘태고의 모험’이다.]
만찬회장이 요동쳤다.
“뭣……!”
“지,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것 맞소?”
“태고, 태고라니……?”
베르덴이 열 번째 귀빈에게서 승리했을 때 이상의 파장이었다.
베르덴 일행처럼 아르카디옴에 처음으로 초대된 하객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참석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리거나 기겁했다.
“호스트.”
세 번째 귀빈이 손을 들었다.
“두 번째 게임을 포기하겠습니다.”
{아르카디옴의 규칙을 잊었는가. 세 번째 귀빈, 코르넬라. 중도 포기 선언은 다음 게임의 주제를 듣기 전에만 유효하다.}
계단 위에서 호스트는 만찬회를 굽어봤다.
{누구도 예외는 없다.}
* * *
아르카디옴이 혼란에 휩싸였지만 베르덴 일행은 영문을 몰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대화라도 엿들으려고 했지만 귓가를 스치는 것은 공포의 탄식뿐이다. 드물게 극도의 흥분에 찬 숨결도 들렸다.
‘대체 태고의 모험이 뭐길래 그러는 거지?’
마침 답을 줄 지식인을 찾았다.
“태고라니…… 설마.”
열여섯 번째 귀빈인 루자크 팔테인이 손을 떨며 바다코끼리를 닮은 코를 어루만진다. 얼굴이 불안에 젖어 있었다.
귀빈답게 첫 번째 게임에서는 무난하게 승리를 거듭한 모양이다.
“저게 무슨 게임이지?”
“아! 네 번째 주빈이시여.”
루자크는 그제야 베르덴 일행을 보고는 저택의 샴페인을 들이켰다. 잠긴 목소리를 푼 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식인의 태반 이상이 알고 있으니 이번 게임에 대한 정보를 공유해도 제재는 없을 터. 호스트가 정한 두 번째 게임은 두 주제의 결합이오. 주제를 무작위로 합쳐서 새로운 게임을 진행하는 것이지.”
루자크가 검지 하나를 폈다.
“먼저 모험이란 주어진 과업을 달성하는 일종의 역할극. 무작위 신분과 상황을 부여받고 개별적인 임무를 완수하는 게임이오. 물론 서로 임무가 겹칠 수도 있소.”
“과업을 이행하면 게임은 종료인가?
“그렇소. 간단한 규칙이지. 하나 이 모험 주제의 진가는 따로 있소.”
[어떤 진가입니까?]
루자크가 턱을 당겼다.
“과업을 달성한 지식인은 모험을 하며 손에 넣은 모든 것을 바깥으로 가져갈 수 있소. 어떤 보물이든, 어떤 지식이든! 출처는 호스트의 창고요. 다시 말해서 호스트가 직접 보물과 지식을 뿌린 무대에서 우리는 모험을 하는 것이지.”
“……!”
호스트의 보물과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베르덴만이 아니라 테아렐도 아주 강한 관심을 보였다. 그 호스트가 가진 것이라면 결코 평범한 것은 아닐 테니까.
테아렐이 물었다.
“위험이 있다고 해도 충분히 감수할 만한 게임인 것 같은데. 왜 다들 반응이 안 좋은 거야?”
“모험은 가장 인기 있는 게임 중 하나요. 모험만 있었다면 모두가 환호했을 거요. 문제는…… 문제는 모험을 수식하는 태고란 주제요.”
루자크의 깊게 신음했다.
“태고는 시대의 배경을 뜻하오. 그러니까 태고의 시대에서 모험을 해야 한다는 거요. 무엇보다도 이곳 아르카디옴에서 태고란…… ‘신들이 멸망한 이후의 시대’를 의미하오.”
베르덴은 두 개의 전쟁을 알고 있다.
‘당신’과 올다르크 그리고 세계수 등이 연합하여 대륙을 파괴하려는 신들을 근절해 신들을 몰락시키는 기점이 되는 대분기(大分岐).
‘당신’과 올다르크가 운명을 두고 항쟁을 벌였던 운명전(運命戰).
‘그럼 호스트가 말한 태고는…… 대분기와 운명전 사이의 시대인가?’
베르덴은 당시에 평화가 있었다고 알고 있었으나 설명을 이어 가는 루자크의 표정은 그야말로 비장하기 그지없었다.
“마지막으로 태고의 주제가 들어간 게임이 열린 것은 무려 7만 3천 년도 더 전이요.”
[7만 3천 년?]
“게다가…….”
루자크가 힘겹게 눈을 끔뻑였다.
“당시 전체 참가자의 9할 9푼이 지식의 망령으로 떨어졌소. 오직 1%의 참가자만이 태고의 주제가 붙은 게임에서 살아남았지.”
짝! 짝! 짝!
호스트가 세 번 손뼉을 쳐서 난잡한 분위기를 환기했다.
{오랜만에 태고가 주제에 올랐다. 게다가 태고의 모험이라. 아르카디옴이 개최된 이후로는 처음 있는 일이니, 참으로 기대되는군.}
“…….”
{첫 번째 게임이 막 끝난 참이니 막간의 여유를 갖도록 하겠다. 식사를 원하는 지식인은 풀코스를 즐기고, 휴식을 바라는 지식인은 평온 속에서 심신을 회복하라.}
베르덴, 마기온, 블러디아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호스트가 오른손을 가슴 위에 얹으며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잠시 후에 보도록 하지.}
운명.
저항.
역천.
{서로 다른 길을 걷는 지식인들이여.]
* * *
푸른 산맥에서 호세의 조각 작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가, 갑작스러운 열병을 앓으며 의식을 잃은 레나르, 페이, 하에넬.
그들은 호세의 오두막이 아니라 기본적인 주거가 마련된 정체 모를 밀실에서 깨어났다.
호세 아저씨는 어디에?
여긴 어디야?
아직 어린 레나르와 페이 남매는 생소한 환경에 불안해했다.
테르네티아 연방의 실세 귀족인 바나흐 백작가의 외동딸인 하에넬은 어른으로서 두 사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그들의 식사는 어느새 방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주기적으로 세 번씩.
하에넬은 식사의 간격을 통해 아침, 점심, 저녁을 가늠했다. 또 아이들에게 주기 전에 먼저 먹어 보면서 이상이 없음을 확인했다.
‘대체 누굴까, 우리를 여기에 가둔 건……. 쓰러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하에넬은 억지로 태연한 척했지만 두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누가 이런 짓을 한 건지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다.
‘……호세 님은 무사하실까.’
하루하루 걱정뿐이다.
며칠인지 몇 주인지…… 시간이 흐르자 그래도 이 기괴한 감금 생활에 적응했다. 페이도 이제 더는 울지 않았다.
키이잉.
그러던 어느 날 벽이 움직였다. 있는지도 몰랐던 문이 열린 것이다. 경계하는 세 사람의 시선의 끝에는 그리운 인물이 있었다.
호세가 네 명분의 식사를 들고 등장했다.
“호세 아저씨!”
“아저씨!”
“늦어서 미안하구나.”
레나르와 페이가 촉촉해진 눈망울로 호세에게 달려들었다.
그릇을 식탁에 내려놓고 남매를 토닥이는 다정한 호세의 모습에 하에넬은 떨리는 손을 억누르며 깊게 안도했다.
“호세 님, 무사하셨군요. 다행이에요, 정말로.”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아가씨. 아직은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식사라도 함께하는 게 그나마 최선이죠.”
호세가 결연한 눈빛을 띠었다.
“하지만 제가 있는 한은 여러분들에게 어떤 일도 없을 겁니다. 결코. 그러니…… 저를 믿고 기다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전 아저씨 믿어요!”
“믿어요!”
레나르와 페이는 마치 아버지를 대하듯 무한한 신뢰를 보였다.
물론 하에넬도 남매와 같은 마음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푸른 산맥을 오르지도, 이단의 신앙자를 꿈꾸지도 않았을 것이다.
“네, 믿어요.”
그렇게 다시 한자리에 모인 호세, 하에넬, 페이, 레나르는 밀실…… 실험실의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함께했다.
그리고.
해당 구역의 실험실 전체를 감싼 특수한 유리창 너머에서, 그 모습을 글러트니의 수뇌부가 지켜보고 있었다.
“배려가 지나치군, 키르에.”
글러트니의 수장 – 발리온이 눈을 가늘게 떴다.
“신기하다고 해도 실험체 따위에게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글러트니의 두 번째 송곳니 – 키르에가 유리창에 손을 대었다.
그녀는 오직 호세만을 주시했다.
“빛의 신성력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신성력은 분명 신인류의 창조에 도움이 될 테니까요.”
“어떤 면에서 그렇지?”
“이걸 보세요.”
키르에가 품에서 조각상을 꺼내 보였다. 호세 일행의 소지품에서 확보한 정체불명의 신에 대한 단서였다.
“당신은 어떻게 보여요?”
“그저 흐릿하군.”
키르에나 발리온이나 기이하게도 작은 조각상의 형체를 인식할 수 없었다. 시각으로도, 촉각으로도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분간이 안 됐다.
마치 조각상 자체가 그들을 거부하는 듯한 그런 감각이었다.
“그렇죠? 이 힘은…… 뭔가가 달라요. 루아스교의 것보다 더 자유로운…… 아직 명확한 형태가 완성되지 않은 듯한 느낌이에요.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호세가 믿는 신앙은 탄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테죠. 교리도 정해지지 않은 걸로 보이고요.”
키르에가 조각상을 어루만졌다.
“어쩌면 신성력이란 개념을 규명할 기회일지도 몰라요. 호세는 그 열쇠죠.”
“그래서 해부하지 않은 건가.”
“바탕이 신앙자라면 해부해 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시체뿐이니까요.”
신성력을 조사하기 위해서 루아스교의 성직자를 해부한 적이 있다. 기를 깨우친 자와 마법사와 다르게 빛의 신앙자들은 해당 힘을 담당하는 신체적 기관이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글러트니는 숱한 인체 실험으로도 신성력을 이식하지 못했다.
“기, 마력, 신성력. 세 가지 힘을 동시에 다루는 완전한 인간. 당신이 바란다면 이는 신인류의 자격이 될 거예요.”
“인간의 모든 힘을 품는다는 의미에서 신인류의 방향성에 적합하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를 위해 신인류를 신앙자로 만들겠다고? 뭔지 모를 신 따위에 삶을 의탁하는?”
발리온이 극도의 거부감을 보였다.
“그래서야 구인류와 뭐가 다르지?”
“신앙자 따위가 아니에요.”
키르에가 발리온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신, 그 자체를 만드는 거죠.”
“……!”
“완벽한 인간이면서 오직 자기 자신을 신앙하는 신을. 모든 종을 압도하며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새로운 인류를. 섭식으로 끝없이 진화하는 우리만의 글러트니를.”
그녀가 유리창에 기댔다.
“그러려면 일단 호세와 같은 신성력을 손에 넣는 게 순서예요. 발리온, 당신은 계속 ‘신인류의 태아’를 구축해요. 저는 호세와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종교를 공부하면서…….”
키르에가 미소 지었다.
“한번 신앙자가 되어 볼게요.”
“…….”
“신성력을 파악하려면 그게 가장 빠를 테니까요. 빛의 신성력처럼 제가 얻을 수 없는 거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지만요.”
키르에는 글러트니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그녀는 발리온에게 있어서 대체할 수 없는 동반자였다.
키르에가 신앙에 빠질 거라는 우려는 없었다.
발리온이 원한다면 키르에는 자신의 신을 기꺼이 짓밟으리라.
“마음대로 해라.”
“고마워요.”
“그래도 종교는 지루할 텐데. 현학적이고 듣기 좋은 말만 지껄이니.”
“그렇지만도 않더라고요.”
키르에는 세계 종교의 관점에서 이단자인 호세와의 담화가 지루하지 않았다.
“꽤 재밌어요. 나중에 들려줄게요.”
* * *
첫 번째 게임의 식사 및 휴식 시간이 끝나고, 두 번째 게임에 참여해야 하는 지식인들이 만찬회장에 다시 집결했다.
분위기가 무거웠다.
지식을 전부 잃어버려 망령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끼는 지식인이 많았지만, 개중에는 새로운 지식을 탐하는 이도 있었다.
호스트의 지식과 보물.
게임이 어려운 만큼 극복할 때의 과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달콤하리라.
“……태고의 게임에서 생존한 지식인, 흠.”
루자크는 전과는 달리 정제된 태도로 호스트를 기다렸다. 두려움보단 게임에서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지식을 상상하며 열의를 피웠다.
‘이렇게 귀빈과 하객의 차이가 드러나는군.’
베르덴은 간간이 블러디아와 마기온을 관찰하며 게임 시작을 기다렸다.
[문어 대가리. 등장.]
{…….}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호스트가 알파를 가볍게 째려보고는, 아르카디옴의 운영자로서 인사를 건네며 게임을 설명했다.
{태고의 모험에서의 기본 규칙은 이렇다.}
1. 각자에게 주어진 과업을 끝마치면 개별적으로 게임이 종료된다. (단, 과업은 지식인끼리 겹칠 수도 있고, 단독으로 주어질 수도 있다.)
2. 지식인들이 과업을 달성할수록 게임 시간은 계속 단축된다. 제한 시간이 만료되면 참가자는 게임에서 추방된다.
3. 과업을 마친 지식인 ‘한 명’만이 모험에서 얻은 것을 갖고 나갈 수 있다. 같은 과업을 받은 지식인이 여러 명이어도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지식인은 오직 한 명뿐이다.
4. 개인 무력도 지식의 갈래이기에 현실의 강함을 일부 반영하나, 게임에서 허락하는 상한선을 넘어설 수는 없다. (예외는 없다.)
5. 다른 지식인을 먹으면 무작위 분량의 지식을 얻을 수 있다.
6. 모험에서 사망하면 지식을 희생하여 부활할 수 있다.
7. 모험이 시작되면 과업을 완수하거나 종료될 때까진 나갈 수 없다.
{두 번째 게임이 시작되면 각자의 신분과 상황이 주어진다. 이외의 세부 규칙은 모험극에 진입한 순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것이다.}
호스트가 양팔을 펼쳤다.
{모험의 배경이 될 태고의 시대는 위험하나, 대신 그에 걸맞은 보물과 지식이 존재하지…… 과연 너희는 ‘태고의 산물’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 아니면 과업도 완수하지 못하고 지식의 망령으로 전락할까.}
바닥에서 솟아난 해일이 만찬회장을 덮쳤다.
{두 번째 게임을 시작하겠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
심해의 바닷물이 지식인들을 집어삼킨다.
“무대 자체는 같으니 잘하면 만날 수 있을 거다.”
“운이 좋으면 말이지만.”
베르덴과 테아렐은 서로의 행운을 빌며 다가오는 파도를 마주했다. 알파와 베타는 베르덴의 로브에 쏙 들어가 있었다.
{건투를 빌지.}
전신을 뒤덮는 급류.
베르덴 일행은 태고의 시대를 모방한 두 번째 게임의 무대로 휩쓸려 들어갔다.
* * *
부유감은 잠깐이었다.
현실적 감각이 이미 자리를 찾았다.
‘어둡고 무겁군. 게다가 피 냄새까지.’
베르덴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자 시체 하나가 굴러떨어졌다. 바닥에 난잡하게 떨어진 여러 횃불이 주변을 비추었다.
습한 동굴.
베르덴은 용병으로 보이는 시체 더미 한가운데 있었다. 크게 저항하지 못한 걸로 보아 기습으로 죽은 것 같았다.
움찔.
베르덴의 가슴팍이 꿈틀거렸다.
[동굴. 그리고 시체.]
[애셔 폐하가 용병이 되었습니다.]
잿빛의 [아인베르] 대신에 베르덴이 착용한 용병 갑옷 안쪽에서 알파와 베타가 불쑥 머리를 내밀고 외눈을 빛냈다.
이곳에서도 그들은 네 번째 주빈으로서 엄연히 셋이서 하나였다.
“그나저나 세상 자체를 구현할 줄이야…… 밖으로 나가 봐야 알겠지만 아르카디옴은 생각 이상으로 더 위험한 장소인 것 같군.”
[동의.]
“아무튼, 일단 나가지.”
베르덴이 하반신을 뒤덮은 시체들을 치우고 있던 그때였다. 그리 멀지 않은 벽 쪽에서 빛이 일렁이더니 용병 셋이 나타났다.
“돌아가서 시체나 다시 확인하라니, 시발.”
“동전 던지기에서 졌는데 까라면 까야죠, 뭐.”
“동전 던지기가 아니라 저 시체박이 새끼들한테 시키는 게 정상 아니냐? 너는 씨, 동전은 왜 그렇게 던져서는.”
“진정해라. 그 기사가 도착하기 전에 깔끔하게 일 처리부터…….”
우뚝.
용병들과 베르덴이 눈을 마주쳤다. 주변에 놓인 횃불이 서로의 얼굴을 비추었다. 동굴 속에서 불꽃이 일렁인다.
정적은 찰나였다.
“생존자가 있어요? 제가 마지막 놈을 죽였는데?”
“배신당해서 눈을 못 감았나 보군.”
건장한 용병이 재빠르게 활시위를 당겨 화살을 쏘아 보냈다.
“잡았──”
콰드득!
화실이 되돌아와 용병의 머리를 관통했다.
“뭔.”
“화살이, 왜.”
남은 용병 둘이 눈을 동그랗게 뜬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날아오는 화살을 잡아 던진 베르덴이 가볍게 팔을 풀며 시체를 밟았다.
“힘의 제약이 꽤 심한데. 감각이 흐릿해.”
[불편?]
“가볍게 움직일 정도는 된다.”
베르덴은 시체 사이에서 주인을 잃어버린 검을 집어 들었다. 칼날을 적당히 견갑에 얹은 그가 위로 올라갔다.
“……아까는 저런 놈이 없었는데?”
“마법사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잡을게요!”
비교적 젊은 용병이 함성을 지르며 베르덴에게 달려들었다. 검이 한 차례 엮이고는 용병의 머리가 베르덴에게 잡혔다.
“어?”
우지지지직!
아래로 당겨진 용병의 면상이 무릎 차기에 박살 났다. 즉사한 용병은 그대로 굴러떨어져 시체 더미와 하나가 됐다.
“……영혼은 진짜인가. 단순한 게임 따위는 아닌 모양이군.”
베르덴이 마지막 용병을 응시했다.
“바깥에 몇 명이나 있지?”
태고의 모험에서 베르덴에게 부여된 상황과 신분은 ‘배신당한 용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