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7화 아르카디옴의 끝 (5)
발로크 베시아스의 죽음과 보헤미른 마탑의 이전 수뇌부의 전멸로 없어진…… 77번 실험체라는 명칭이 망각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베르덴은 동요하지 않았다.
인생에서 가장 무력했던 과거는 과거일 뿐이며, 과거를 거론한 드라벤은 산 자가 아니니까. 무엇보다 복수는 이미 완수했다.
베르덴은 제 손으로 직접 고통과 증오와 원망의 원흉을 침묵시켰다. 이제 와서 옛날 절망에 시달리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오랜만에 듣는 호칭이군.”
베르덴은 어디 계속 말해 보라는 듯 살짝 턱끝을 까딱였다.
“호스트가 알려 준 건가? 그렇게 간단히 정보를 내놓지는 않았을 텐데. 더군다나 내 과거를.”
“호스트와 게임을 했다. 동전을 던져 너에 대한 지식을 얻어 냈지.”
베르덴이 지식의 만찬회에 참가하는 동안 드라벤도 호스트와 판을 벌였다.
지식과 부탁.
베르덴과 연관된 지식을 얻기 위해 동전을 던져 앞면일지 뒷면일지 내기했고, 호스트에게 개인적인 부탁을 하기 위해 아르카디옴의 끝에 도달할 자가 누구일지 맞히기로 승부를 걸었다.
“……호스트를 이겼다고?”
“순전히 운에 의존했기에 이길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 내가 호스트를 이길 방법은 없지. 그마저도 호스트의 농간일지도 모르지만.”
드라벤은 아르카디옴이 진행되는 동안 호스트와 맞붙기라도 한 걸까. 그 자존심에도 호스트를 이기지 못한다고 단언하다니.
매우 낯설었다.
정말로 초월자의 격을 잃어버리는 중이기라도 한 모양이다. 성소 앞에서 악에 받쳤던 드라벤의 모습은 지금 온데간데없었다.
“어쨌든.”
드라벤이 손끝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묘한 책을 두드렸다.
“네 일생을 ‘읽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필요한 만큼은 읽었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더군. 보헤미른 마탑의 일개 비공식 실험체가 이만한 역사를 이룩하다니. 한낱 실험체 따위가…… 나를 죽이다니.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기분이 어떻지? 가장 밑바닥에 있던 존재로서 타고난 분수에 맞지도 않은 힘을 얻어, 여러 하늘을 무릎 꿇린 그 심경은?”
드라벤은 인생에 미련이 많은 존재임을 드러내는 듯 추잡하게 비아냥거렸다. 자신을 살해한 자에 대한 공허한 원망이라도 푸는 것처럼, 그의 처참한 과거를 지적했다.
“분풀이라도 하고 싶나?”
“내 처지를 이해한다. 나는 이제 상품으로서 네게 예속되겠지. 그러니 노예로서 주인을 물어뜯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시한부 실험체였던 네가, 제 주인의 숨통을 끊어 버렸듯이.”
초월자는 전부 반항적이다. 초대 마도왕이 만든 개념답게 저항이 심하다. 자신이 인정하지 않은 이가 감히 위에서 내리찍으려 한다면, 죽든 말든 들이받아 버린다.
이런 부분을 보면 드라벤에게 초월자의 고유성이 아직 남아 있는 게 분명했다.
‘영혼의 예속이라.’
베르덴은 이렇다 할 감정을 내비치지 않은 채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가 부활시킨 옛 왕이 완전히 깨어났다. 이제 전쟁이 코앞이지. 내가 원하는 것은 재림한 크세리온 제국의 전력 정보와 대륙 곳곳에 있는 사문을 없애는 방법이다.”
“그리고, 내 영혼을 임시 육체에 가두어 폐하를 상대할 전력으로 삼을 생각이겠군. 너희에게 부족한 것은 정보만이 아니니까.”
“전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그런데 아까부터 뭔가 착각하고 있군. 내 삶을 조금이라도 이해했다면 알 텐데.”
이는 베르덴의 진심이었다.
“나는 널 노예로 부릴 생각이 없다.”
“…….”
“필요한 건 정보뿐이다.”
“하.”
드라벤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놈의 지성체의 존엄 때문인가? 내게도 지켜야 할 존엄이 있다고? 초월자 전쟁을 포함해 800년 동안 이 내가 직간접적으로 살해한 인명은 가히 셀 수 없을 지경인데, 존엄성? 웃기지도 않는군.”
“지금 네 모습을 봐라.”
베르덴은 히아레마르 내해의 섬에서보다 훨씬 더 강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드라벤, 너는 죽었다.”
“…….”
“내가 죽였지.”
드라벤의 손이 움찔거렸다. 초위 마법 <멸절>에 격중당해 소멸했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마저 조각내는 압도감…… 이내 주먹을 쥔 드라벤이 피식거렸다.
“죽었으니까 끝이다? 죽었음에도 나는 여전히 네 앞에 있다. 명확한 실체를 가진 채 존재하지. 그런데 이용하지 않겠다니, 설마 죽었으니 내 죄를 용서라도 하겠다는 건가.”
“책임은 언제나 남겨진 자들의 몫이지.”
책임의 비수가 드라벤을 찔렀다.
“너는 용서받을 자격도 없고, 과오를 돌이킬 수 있는 기회도 없다. 너는 그냥 내 질문에 대답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가야 할 곳으로 떠나라.”
베르덴이 단언했다.
“수습은 우리가 하겠다.”
베르덴의 감정은 극도로 절제됐다. 죽은 자와 산 자의 영역을 그은 것이다. 드라벤을 더 이상 증오하지 않되, 그가 부활해 이미 엎지른 물을 주워 담게 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자비이자 심판이었다.
‘비참한 말로군.’
호스트에게 진실을 들었을 때만큼이나 드라벤은 참담했다. 이제 잘못된 길을 걸었다는 걸 깨달았으나 되돌아갈 수 없었다.
더 이상 드라벤이 현실에서 직접 할 수 있는 일은 전무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명확해졌다.’
드라벤은 어깨를 들썩였다. 머리를 뒤로 젖히며 크게 웃었다. 호스트의 서고가 후련한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그래, 역시 이게 유일한 답이겠지.”
드라벤이 고개를 바로 했다. 베르덴에게 익숙한 시선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스스로 선택을 내린 자의 눈빛이었다.
“……가져가라.”
“뭐?”
“네가 전부 가져가라.”
드라벤이 이상을 바라는 초월자로서 무게를 담아 확언했다.
“네가, 주검의 왕이 되어라.”
* * *
마법계 초월자를 굳이 분류하자면 테아렐은 7대 마도왕이나 다크워튼 마탑주보다는, 베르덴에게 더 가까운 초월자였다.
그녀는 천부적인 재능을 기반으로 삼아 험난한 모험에서 경지를 쌓았다.
죽을 뻔했던 경험만 수십 차례다.
흑요 등급에 도달하기 이전에 맞닥뜨렸던 특수 개체에게 파티가 전멸당할 뻔하기도 했다. 자만심이 무너진 순간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난관들을 극복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초월자가 될 수 있었다. 모험가 길드의 최고 전력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그런 테아렐의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괴물.’
인간형보다 드래곤의 모습에 한층 더 가까워진 블러디아가 거대한 날개를 폈다. 그야말로 위압적인 거체였다.
다수의 드래곤이 한 몸에 뒤섞인 것처럼 색깔을 비롯한 특징이 뒤죽박죽이었고, 그런 기괴함이 위협감을 더했다.
드래곤 피어.
순수한 존재력만으로 테아렐이 구현한 해일들이 무너진다. 식은땀이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지금까지 토벌한 특수 개체들과는 아예 결이 달랐다. 개인이나 파티가 어찌해야 할 범주를 넘어섰다.
‘강대국이 통째로 나서도…… 죽일 수 있나? 이 말도 안 되는 걸?’
공식적인 전력만을 고려했을 때 전 세계가 전부 나서지 않는 이상은 절대로 토벌할 수 없다는 직감이 들었다.
블러디아가 어떤 존재인지 아직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단언컨대 호스트처럼 운명의 사도임이 틀림없을 터.
베르덴은 이것과 접전을 벌였다.
둘 다 전력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할지언정 무려 근접 거리에서 맞섰다는 것 자체가 8위계급 경지의 증명이었다.
‘정황상 옛 왕도 아마 사도겠지. 그러니 베르덴이 극도로 경계하는 거고. 대체 ‘당신’이란 존재 아래로 사도가 몇이나 있는 걸까.’
테아렐은 여러 단서를 들었고, 그를 통해 세상이 어떠한 흐름에 속해 있다는 걸 인지했다.
하지만 결국 그뿐이었다.
초대 마도왕과 ‘당신’의 전쟁? 한 명은 책으로만 접해 봤고, 한 명은 들어 본 적도 없다. 어째서 운명을 두고 죽고 죽이는지도 알지 못한다.
베르덴이 왜 운명 파괴자라는 이명으로 불리는 건지도 모른다.
문득 세상이 낯설었다.
뭐가 진실일까.
테에렐에게 해답을 줄 수 있는 존재가 옆에 있다. 블러디아와 호각으로 전투에 임하는 데우스가 녹색 안광을 흘렸다.
‘기만자.’
섭리자는 레프라기움 마탑주로서 신비주의자로 여겨졌다. 베르덴이 아니었다면 그의 이름조차 아직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레프라기움 마탑을 승계했는지 알려진 적도 없었다. 그저 경지를 보여 마탑주이자 초월자의 자격을 증명했을 뿐이다.
섭리자────데우스 위덴은 분명히 마법전도 고상하게 벌일 것이다. 여태껏 보여 준 근엄한 모습이 그러했으니까.
테아렐도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 반대였다.
데우스는 생각보다 훨씬 거친 사내였다. 다치는 것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전략을 아무렇지 않게 썼다.
사선을 경험한 자의 움직임.
테아렐과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역경을 넘은 것이 분명했다. 이런 일면을 감추고 있었다니, 지독한 기만자가 아닐 수 없다.
테아렐이 드래곤의 형태를 거의 갖춘 블러디아를 가리키며 물었다.
“호스트와 쟤를 비교하면 어때?”
“못하지는 않지.”
“그걸 나보고 죽이라는 거구나. 그 초대 마도왕이 멋대로 정한 사도의 대적자로서.”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대체 무슨 계산이 깔린 거야?”
테아렐 자신이라고 해도 7위계의 경지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존재다. 한계가 있는 그녀를 사도의 대적자로 지정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답하기엔 이르다. 일단 현재에 집중하도록 하지.”
“지금쯤이면 애셔는 이미 아르카디옴의 끝에 거의 닿았겠지. 이제 와서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더 싸울 필요 있어?”
블러디아는 베르덴을 추격하려고 했고, 테아렐이 블러디아를 막아섰으며, 그런 테아렐이 죽지 않도록 데우스가 블러디아를 상대했다.
더 이상 베르덴을 뒤쫓을 수 없다.
그러므로 테아렐은 블러디아를 굳이 막을 이유가 없으며, 테아렐이 자리를 뜨면 데우스가 블러디아를 감당할 명분이 사라진다.
쿵.
데우스가 하얀 스태프로 땅을 짚었다.
“그래, 더 이상의 전투는 의미 없다. 하지만 굳이 전투를 피할 것도 없지.”
“……무슨 소리야?”
“기약 없이 기다리는 것조차도 여러모로 지치는 일이더군. 오랜 계획이 틀어진 기분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지만…… 내심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막대한 마력이 끓어올랐다.
“물러나 있도록.”
데우스는 오랜만에 만끽하는 진한 자극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테아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역시, 데우스는 기만자였다.
[날 자극제로 삼겠다? 올다르크의 영향을 깊게 받은 존재답게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아르카디옴이 끝나면 이 순간도 끝이겠지.”
데우스가 앞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와라, 도마뱀.”
[건방진.]
블러디아가 앞발로 땅을 짚으며 광대한 숨결을 내뱉었다. 테아렐의 시야 전체가 절멸을 연상케 하는 색으로 변했다.
그 힘에 정면으로 맞선 데우스가 고유 마법진을 전개했다.
초위 마법───
현 마법계의 최강자와 네 번째 사도가 진심으로 충돌하니, 심해 속 모형 정원의 천지(天地)가 일순간 역전됐다.
* * *
“……주검의 왕?”
베르덴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드라벤이 건넨 제안의 의미를 곧장 머릿속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정도로.
“호스트에게 폐하의 실체가 무엇인지, 또 폐하가 나를, 우리를 속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추구하는 세상과 폐하가 이루려는 목적이 완전히 정반대라는 것을…….”
드라벤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가 목숨을 바쳐 충성했던 왕에게, 그는 루아스교를 향한 것 이상의 증오를 내보였다.
베르덴도 생각지도 못한 변화였다.
호스트가 대체 어떤 진실을 속삭였길래 드라벤의 충성심이 무너졌을까.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나의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목적지는 틀리지 않았다. 그저 잘못된 길을 걸었을 뿐이지. 그러니 올바른 길을 다시 찾아 걸을 수밖에 없지 않나. 초월자로서.”
“설마 그 길이 나라는 거냐?”
“너무 멀리 돌아왔다.”
드라벤이 일어섰다. 그리고 벽난로 옆쪽에 있는 책장에 다가선 그가 손을 올렸다. 책장을 빼곡히 채운 책 중 어느 한 권의 책등을 당겼다.
“히아레마르 내해의 섬에서 너는 암월의 마도를 완벽하게 다루었다. 다른 마도를 그런 식으로 모방한 사례는 전례가 없는데. 베르덴, 넌 그 명제가 틀렸다는 걸 보란 듯이 증명했지.”
드라벤이 큰 보폭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암월의 마도를 제 것으로 만들었다면, 다른 마도사의 마도도 다룰 수 있는 게 아니냐고. 그래서 네 일생에 대한 지식을 찾아봤다. 어떻게 타인의 마도를 터득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그가 책을 내밀었다.
“이것은 내 모든 삶의 기록이다. 읽어라. 그리고 마도 <무한(無限)>으로 가져가라.”
드라벤의 눈에 광기가 서렸다. 그렇다. 초월자의 성정은 죽지 않았다. 그저 이상을 향한 집착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뿐이었다.
“나의 마도 <명운(命殞)>과 내가 창설한 주검의 영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