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mit Breaking Genius Mage Chapter Raws 1036

1036화 아르카디옴의 끝 (4)

짙은 안개가 만연하다.

아주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 베르덴과 드라벤, 두 초월자 사이를 갈랐다. 뿌연 안개 너머에서 그림자로 존재하는 드라벤은 목소리만 냈을 뿐이지 본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실체감이 옅다.’

본인이되 본체는 아니다.

저것은 드라벤의 의지를 투영하는 어떤 매개체일 것이다. 답은 하나다. 안개 호수는 아르카디옴의 끝이 아닌, 끝으로 이어진 외길.

드라벤의 그림자는 안내자이고, 만찬회의 결말에 도달하는데 아직 마지막 여지가 남았다…… 베르덴은 상황을 그렇게 이해했다.

“주검의 영광의 수장답게 미쳐 날뛸 줄 알았는데, 호스트의 상품으로 전락한 것치곤 멀쩡해 보이는군. 처지를 받아들였나?”
“받아들이고 말 것도 없다. 내가 부정한다고 해도 현실은 현실이니.”

드라벤의 그림자는 마음껏 비웃어도 좋다는 듯이 자조했다.

“……그래, 이게 내 현실이지.”

히아레마르 내해의 섬에서 필사적으로 옛 왕의 부활을 꾀했던 아집도, 아르카디옴의 저택에 들어와 호스트에게 분노를 표출했던 충동심도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체념, 혹은 포기?

정신을 조작당한 것 같진 않은데, 대체 호스트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진 모르겠지만 초월자들 특유의 성정이 무척 희미했다.

‘영혼만 있는 상태면 초월자의 격을 서서히 잃어 가는 건가. 뭐, 초월자는 영혼과 육체를 통해 각성하니 일리는 있을지도.’

베르덴이 의아한 시선을 보내든 말든 드라벤의 그림자는 말했다.

“지식의 만찬회의 상품으로써 제공하는 호스트의 전언이다. 무저해(無底海)의 안개에 발을 디딘 모든 존재에게 아르카디옴의 종점으로 직결되는 단서를 전하라더군.”
“단서?”
“시생(始生)의 고동과 적멸(寂滅)의 정적을 잇는 길손의 항해(航海). 나그네의 진심에 상응(相應)하는 하해(河海).”

그의 형체가 점차 흩어졌다.

“……만상(萬象)과 만유(萬有)는 서사의 시(始)와 종(終)으로.”

베르덴은 혼자가 됐음을 지각했다.

바다 내음이 서린 안개가 천천히 흘렀다. 투명한 호수는 하얀 안개가 품은 청량한 고독마저 고스란히 비추었다.
데우스, 블러디아, 테아렐이 있는 전장의 폭음이 멀리서 들려왔다.

‘간단한 수수께끼군.’

단서로 주어진 두 문장을 한 번 곱씹은 베르덴이 턱을 당겼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그를 둘러싼 상황과 단서의 의미를 결부시키면 자연스럽게 해답이 나왔으므로.

시생은 시작, 적멸은 끝, 항해는 흐름.

세상 만물은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흘러가며, 어떻게 끝나는가?

‘그것을 정하는 주체는 바로, 나 자신이다.’

베르덴은 밑으로 눈길을 향했다. 티끌 한 점 없는 호수의 표면에 베르덴이 담겨 있다.
잿빛 머리카락과 벽안은 안개 속에서도 존재감이 강했다.

우리의 세계란…….

자신의 탄생으로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가 비로소 발아하고, 자신의 인생으로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가 흘러가며, 자신의 죽음으로 자신이 누려 왔던 세계는 종말을 맞이한다.

‘주관(主觀)은 곧 만물과 서사의 시작이며 끝.’

베르덴 자기 자신이 아르카디옴의 끝으로 향하는 통로였다. 블러디아가 있으면 블러디아도, 데우스가 있으면 데우스도 통로였다.
각자의 존재 자체가 곧 오직 각자만 지날 수 있는 외길이었다.

통로를 지나는 방법 또한 이미 제시됐다.

나그네의 진심에 상응하는 하해.

진심이란 감추는 마음이 없어야 온전히 드러나는 것이다. 또한 무저해의 안개 호수는 하해처럼 깊이를 알 수 없다.

베르덴은 [인테리스]를 역소환했다.

저항력을 극도로 낮추었다.

블러디아가 기습이라도 한다면 치명상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호수와 같이 투명해진 베르덴은 소리 없이 그를 반영하는 심해의 거울을 직시했다.

후웅.

베르덴을 중심으로 파문이 퍼졌다.

수면 위에 맞닿아 있는 베르덴의 두 다리가 점차 가라앉는다.
무언가에 붙잡혀 바다로 빨려 들어가는 선박과 같이 느릿하게, 또 빠르게…… 육체가 잠길수록 거울 속의 베르덴도 함께 잠긴다. 마치 베르덴이 베르덴을 통과하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머리까지 호수 아래로 사라져, 호수 위에 정적이 찾아오는 순간에 붕 떠 있던 베르덴의 감각이 반전됐다.

베르덴은 저택의 긴 복도에 서 있었다.

{모든 이야기는 자신에게서 개시된다. 그 아무리 하찮은 존재일지라도 개체인 이상 각자만의 이야기를 노래하기 마련.}

검은색 리본이 특징인 턱시도가 아니라, 우주의 일면을 그려 놓은 듯한 찬란한 로브를 두른 호스트가 옆에 있다.
이전보다 본체의 위압감이 물씬 묻어난 인간형의 호스트였다.

{조금 걷지.}

* * *

{여흥으로는 괜찮았나? 아르카디옴은.}

베르덴과 호스트가 나란히 보이지 않는 복도를 나아간다. 호스트가 툭 던진 물음에, 베르덴은 느낀 대로 말했다.

“본인이 옛적에 죽은 것도 모르고 지식을 탐하는 지식인들, 타인의 지식을 강탈하는 수단을 섭식으로 지정해 사실상 식인을 종용하는 법칙, 그 지식인들을 장난감처럼 게임으로 가지고 노는 주인의 악취미…… 이 모든 것에서 지성체의 존엄이라고 할 만한 도덕은 찾아볼 수 없었지.”

베르덴은 경멸과 혐오에 찬 눈초리로 호스트를 대했다.

“그럴진대 내게서 불쾌하다는 말 이외의 대답이 나올 거라 생각하나?”

{모든 것은 아니지.}

마실을 나온 듯이 여유롭게 뒷짐을 진 호스트는 정면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으며, 대화 속에 약간의 웃음을 섞었다.

{루자크 팔테인처럼 예외가 있지 않나? 모험에서 생전의 기억을 되찾아, 어릴 적 자신을 보살펴 주었던 샛별의 종교를 위해 희생을 자처한 것처럼. 그 죽음은 루자크가 루자크이기 전의 죽음과 흡사했다. 이것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는 어느 본질의 존재를 증명하는 사례로 남겠지.}

“그래서.”

베르덴이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세 번째 게임이 끝나자마자 루자크는 지식인을 잡아먹는 지식인들을 직접 처단했다. 살생 금지라는 아르카디옴의 규칙을 위반했으니, 루자크는 지식의 망령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호스트의 의지에 따라서.

{지금처럼 운명이 존재하지 않는 태고의 세상은 뜻밖의 연속이었다. 루자크가 본 자아를 찾는 것은 내 계산에 없었지. 사도, 저항자, 너. 셋이서 혈투를 벌일 거라고 기대하기도 했으나, 너는 너무도 쉽게 이곳에 도달했다. 허무한 결말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즐거운 법이지.}

“결론이나 말해라.”

{그렇게 무언으로 나를 압박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루자크를 벌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으니. 그에게는 되레 상을 주어야 마땅할 터.}

“……무슨 의미지?”

{규칙이란 규칙을 정립한 주인의 본의와 대상이 규칙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문을 열지 말라는 간단한 규칙은 꽤 좋은 예시가 되겠지. 문을 열지 말라는 것은 그저 문고리를 돌리지 말라는 것일까, 그렇다면 문을 일부 부수어 그 너머를 보는 것은 합법인가? 문을 열지 말라는 것은 그 너머를 감추기 위함인가, 아니면 그 행위 자체를 금하는 것인가?}

호스트가 한 팔을 펼쳤다.

{루자크는 대부분의 지식인이 이미 죽은 자라는 아르카디옴의 진실을 깨달았다. 망자는 다시 죽여도 망자이니, 루자크는 누구도 죽이지 않았다. 누구도 죽이지 못했지.}

지적인 목소리가 나지막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내 규칙이 그렇게 정의했으니까.}

“루자크가 깨닫지 못하고 다른 지식인을 산 자로 알았다면 처벌 대상이었다는 건가. 위반자의 관점에 따라 규칙이 아예 적용되지 않는다니, 느슨하기 짝이 없군.”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인식’은 강한 힘을 갖고 있다.}

호스트의 턱에 자리 잡은 촉수들이 부드럽게 꿈틀거렸다.

{너는 여러 단서를 손에 넣어 이미 운명의 원천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실질적으로 풀이는 끝났으나, 답을 정의하지 않은 상태지. 사고의 흐름을 단절해서 억지로 진실을 인식하지 않았으니. 이 앞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는데 애써 외면하여 앞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굴고 있지.}

“…….”

{그걸 안다고 정의해야 할까, 모른다고 정의해야 할까. 내가 심판자였다면 전자를 택했다. 나는 필요한 과정을 전부 알고 있다면, 이미 답에 도달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나, 신이 세상을 대상으로 제정한 금기는 그렇지 않다. 금기는 항상 결과만을 따지지.}

그가 가느다란 손가락 하나를 곧게 폈다.

{구구절절 부연하지 않는 것이 금기의 원칙, 이는 신의 성질을 반영한 결과다. 그렇기에 신만이 금기를 제정할 수 있다. 왜? 그게 금기의 개념이니까. 금기는 네가 진실을 모른다고 판정했다.}

호스트의 발걸음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베르덴은 속도를 맞추었다.

{이렇듯 인식은 ‘당신’의 금기마저도 비껴 나가게 한다. 절대성에 도전하지 않는 경계선에서 그에 가장 가까워질 수 있는 수단이랄까.}

“시간마저도 말인가?”

절대적인 개념을 한 손에 꼽자면 반드시 시간이 포함된다. 그 어떤 누구도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
히안테.
그녀는 어디에나 있다.

{세상은 편의를 위해서 초, 분, 시 등으로 시간을 구분했지만, 단위를 뭐라 규정하든, 모든 존재는 같은 시간에 속해 있다.}

“그럼 아르카디옴의 시간 배율은 뭐지?”

{인식을 이용한 고도의 속임수다.}

호스트가 관자놀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문어의 머리인지라 그 부위를 관자놀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히아레마르 내해의 섬 지하에서 첫 번째 사도는 어긋난 시공간으로, 옛 왕의 부활을 저지하려는 네 발목을 잡았었지. 그것은 실제로 시간을 비트는 것이 아니다. 그 공간에 있는 존재의 시간 감각을 왜곡하는 일종의 환상에 불과하지.}

“그러니까…… 내 인식을 현혹하여 시간이 흐르는 속도를 온전히 느끼지 못하게 했다?”

{1초의 사고를 3초로 늘리고, 네가 이를 인지하지 못하게 했다고 하면 답이 되었을 터. 방금 말했다시피 인식이란 절대성의 경계선에 가장 가까워질 수 있는 수단이다. 같은 시간이 흘렀으나, 네가 시간이 가속된 것처럼 느꼈듯이.}

“이번 아르카디옴의 시간 배율인 1 : 3.76도 그와 같은 원리겠군.”

베르덴이 내심 멈칫했다.

“그럼…… 그 반대는 어떻지?”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다고 경험했듯이, 시간이 느리게 움직인다고 느낄 수도 있을까. 이에 호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1초의 사고를 0.1초로 줄일 수 있다면 남들보다 10배는 느린 시간을 살 수 있다. 물론 그런 사고력을 갖춘 자의 경우에 한해서는. 모두가 느리게 사고하는 것은 가능해도, 빠르고 정확하게 사고할 수 있는 것은 극소수이니. 또한, 무엇보다 그것이 가능한 시공간이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호스트가 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둘은 복도 끝에 도달해 있었다.
베르덴이 맞닥뜨린 하얀 벽에는 단 하나의 문이 자리했다.

{아르카디옴에서 1: 3.76의 배율로 흐른 시간이 이 너머에 있다. 안으로 들어선 순간 너는 만찬회에서 소모한 시간을 보상받게 되는 셈이지.}

베르덴이 아르카디옴에서 1초를 보내는 동안에 밖에선 3.76초가 흘렀다. 매초마다 2.76초가 허무하게 증발하는 것이다.
호스트는 그렇게 사라진 시간을 돌려주겠다고 말하고 있다.

{아르카디옴의 끝에 도달한 자의 특권이다. 여기 ‘상품’이 있으니 수령하도록. 네가 가진 중급 질문권 하나와 하급 질문권 하나는 그 이후에 문답을 갖도록 하지. 아르카디옴에 막을 내리는 것도.}

문을 열면 호스트의 상품…… 드라벤 르마르크의 영혼이 있다. 블러디아와 데우스를 제치고 베르덴의 승리를 거머쥐었다.

문고리를 잡았다.

베르덴이 이내 손목을 비틀기 전에 호스트에게 물었다.

“인식의 개념, 시간 가속의 진실. 그 잠깐 사이에 네게서 들은 게 많은데. 지식을 무상으로 넘기지 않는 것이 아르카디옴의 규칙 아니었나?”

{나는 지식을 무상으로 전하지 않았다.}

호스트가 단언했다.

{무엇이 가치 있는진 어디까지나 주관에 달려 있을 뿐이지.}

베르덴에게 지식을 전한 것 자체가 호스트에게는 어떠한 이득이다…… 베르덴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고, 그게 진실일 것이다.

끼익.

기분 나쁜 문어 대가리를 잠시 뒤로하고 문을 개방했다.

* * *

다소 따뜻한 공기가 넘실거리는 방으로 거침없이 발을 디뎠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여긴…… 서고인가?”

사방은 대부분 어두웠다.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저 수많은 책장 사이에서 아른거리는 불빛을 향해 다가갔다.
거기서 베르덴은 그가 직접 살해한 초월자를 정식으로 다시 만났다.

“생각보다 태평해 보이는군.”
“그래 보이나.”

드라벤은 장작이 없는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를 옆에 두고, 그야말로 온통 책에 둘러싸여 있었다.
게임이 끝날 때까지 독서라도 한 건가. 이상하진 않았다. 드라벤도 마법사니까.

“앉을 텐가? 아니면, 네가 죽인 자와의 대담은 꺼려지나?”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베르덴은 거리낌 없이 드라벤의 맞은편 소파에 체중을 실었다. 아늑한 공간…… 그래서인지 현실감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증오와 분노를 갖고서 죽이고 죽인 상대와 이런 식으로 마주했다는 것 자체가.

그때였다.

“이곳은 호스트의 서고다. 보다시피 셀 수 없이 많은 지식이 보관되어 있지. 그야말로 지식의 보고(寶庫)……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로 가득하더군.”

책장을 바라보던 드라벤의 시선이 베르덴에게로 옮겨졌다. 에메랄드 눈동자가 벽난로의 빛을 받아 은은한 안광을 머금었다.

“베르덴, 너에 대한 정보까지도.”

드라벤이 한마디 덧붙였다.

“보헤미른 마탑의 비공식 77번 실험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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