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9화 명운(命殞)
거대한 파충류와 기기괴괴한 초목을 비롯한 원시 시대의 동식물이 형체를 잃고 바다의 물거품이 되어 흩어졌다.
창공과 대지의 격변이 난 듯 붕괴됐다.
발아래는 이제 망망대해로 뒤덮였고, 얼마 남지 않은 땅은 각각 조각배처럼 그 위를 떠다니며 허무로 들어찬 심해를 유랑했다.
힘과 힘이 충돌한 결과였다.
호스트의 실제 거처와 가장 가깝다고 추측되는 무저해의 모형 정원이 파괴됐다. 누구도 이 풍경을 더는 정원이라 부르지 못할 것이다.
“……하늘 밖의 하늘.”
테아렐은 물에 흠뻑 젖은 몰골로 아주 작은 섬에 누워 있었다. 가장자리에 대충 허리를 걸쳤다. 다리는 차가운 심해에 잠겼다.
바다 위에 안개가 짙게 내리깔렸다.
해무(海霧)였다.
그녀는 투명한 푸른색을 띤 공허한 상공을 향해 뻗은 손을 툭 떨궜다.
여태까지 마법적 경지가 부족하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초월자의 재목은 광활한 사막에서 모래 한 줌 정도밖에 없고, 그중에서 초월자로 각성한 천재는 알갱이로 셀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주관을 떠나서 테아렐은 실제로 강했다.
특히 물에서는.
바다를 근원으로 삼은 이 모형 정원은, 테아렐이 바다의 초월자로서 최대의 마법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런데도 블러디아의 움직임을 일부 ‘억류’하는 게 고작이었다. 토벌 불가. 데우스가 없었으면 테아렐은 분명히 죽었다.
“마음에 안 드네.”
세상이 알지 못하는 이면에서 거대한 두 집단이 기나긴 전쟁을 벌여 온 모양이었다. 세력명은 각각 운명과 저항자였다.
테아렐은 모르는 세계였다.
불쾌했다.
무대 바깥을 모르는 인형이 된 것 같아서 심기가 불편했고, 실제로 초대 마도왕의 뜻에 의해서 사도의 대적자라는 역할을 부여받은 인형이라는 소리를 들은 이후로 계속 부아가 치밀었다.
외력에 대한 반항심은 초월자의 본질.
성질 같아선 초대 마도왕을 죽이거나, 그 계획을 망치고 싶지만 솔직히 허황된 충동이었다. 8위계급의 진정한 위력을 보니 상상력이 닫혔달까?
역사적으로 단 한 명밖에 도달하지 못한 9위계의 경지가, 초대 마도왕을 상징하는 그 강함이 생각으로 그려지지 않았다.
“진심으로 마음에 안 들어.”
“…….”
데우스는 스태프를 땅에 꽂고는 가볍게 어깨를 풀었다.
백색 로브 곳곳에 전투의 흔적이 역력했으나, 공간 자체를 망가뜨려 놓고도 그냥 몸이 어느 정도 풀린 기색이 전부였다.
데우스가 시선을 높였다.
“아르카디옴이 끝났군. 아직 대륙으로 나갈 수는 없지만, 호스트가 간섭할 테니 더 이상 블러디아가 손을 쓰지는 못할 거다. 이곳에서는.”
대립하던 블러디아와 데우스가 두 번째로 숨결과 초위 마법을 부딪친 순간 모형 정원은 끝을 맞이했고, 블러디아는 사라졌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저 문어 대가리부터 찢어 죽였거늘. 쯧.]
이런 말을 남기고 말이다.
“나갈 채비를 갖춰라.”
“따로 갖출 채비도 없어.”
테아렐이 누운 채로 눈동자만 위로 올렸다.
“그런데 호스트도, 블러디아도 사도잖아. 왜 둘이 견제해? 같은 편 아니야?”
“호스트는 중립자니까.”
“중립자?”
“선악의 구애를 받지 않고, 전적으로 누구의 편을 들지도 않기에 중립자다. 호스트의 모든 행동 원리는 새로운 지식 외에는 존재하지 않지. 호스트를 머리로 이해하려 하지 마라. 그는 우리와 달리 개념적 존재에 가까우니.”
테아렐이 그건 뭐냐고 물으려고 하자, 데우스가 제지했다.
“이번 아르카디옴에서 너는 너무도 많은 정보를 들었다. 소화할 시간을 가져라. 단계를 밟지 않으면 혼란만 가중될 뿐이다.”
직설적으로 해석하면 더 이상 정보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선생 노릇은 여기까지라고 선을 그은 듯했다.
“항상 ‘금기’에 유의해라. 금기에 관한 것은 베르덴에게 물어보도록.”
아르카디옴이 정말로 막을 내렸는지 데우스는 세 번째 주빈의 권한을 쓰지 않고 애셔가 아닌 베르덴의 이름을 직접 발음했다.
이제 어딘가로 떠나려는 데우스를 향해 테아렐이 말했다.
“초대 마도왕한테 전해.”
“…….”
“언젠가 대가를 치를 거라고.”
이유가 뭐든, 초대 마도왕은 테아렐이 추구하는 이상에 개입했다. 물론 이상을 부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나, 그렇다고 자신을 멋대로 조종하려 했던 것을 넘어갈 생각도 없다.
데우스는 초대 마도왕에 한없이 가까운…… 필시 최측근의 저항자일 터.
그에게 분노하진 않았다.
증오할 대상은 초대 마도왕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모험가 출신인 테아렐은 그런 구분을 잘했다.
“……그분께서는 원망을 감수하겠다고 하셨지만, 훗날 모든 진실을 알게 되면 너도 생각이 변화할지도 모르지.”
“그럴 일은 없어. 너는 꼭두각시가 된 기분이 뭔지도 모르잖아.“
“일천한 경험으로 세상을 한정하지 마라.”
데우스가 백색 스태프를 회수하고는 살짝 고개를 틀었다.
“나도 ‘사도의 대적자’다.”
“……!”
데우스는 그대로 날아올라 안개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마력의 잔향이 희미해졌다. 이내 존재감이 없어졌다.
아르카디옴을 당장 나가지 못한다면서 어디로 가는 걸까.
“쟤도 대적자였구나.”
추적할 생각이 없었던 테아렐은 데우스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팔을 들어 다섯 손가락을 펴 보였다.
“그럼 누가 또 대적자인 거지?”
테아렐이 인지한 사도는 호스트, 블러디아, 옛 왕뿐이다. 데우스를 블러디아나 옛 왕과 연결해 보았다.
뭔가 맞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옛 왕은 언데드 쪽이니까 루아스 교국의 신인 중 하나가 대적자인가? 블러디아는 드래곤이니까…… 드래곤…… 어? 드래곤?’
테아렐이 멈칫했다.
손가락을 접어 가며 블러디아의 대적자가 누군지 가정해 보았다. 블러디아의 대적자에 가장 어울리는 존재가 뇌리를 스쳤다.
* * *
테아렐이 있는 땅보다 조금 더 큰 섬이 잔잔한 파도에 떠밀려 움직인다.
네 번째 귀빈 – 펠디안느는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시간을 보냈다. 그는 육지로 나가자마자 참석해야 할 정상 회의를 생각하고 있었다.
“네 번째 사도와 이렇게나 부딪치지 않아도 그냥 넘어갈 수 있었을 텐데. 하마터면 구경 왔다가 그대로 죽을 뻔했습니다.”
데우스가 해무 너머에서 등장했다.
“따라오지 말았어야지.”
“이런 진귀한 광경이 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호호. 어쨌든. 데우스 님이 후련하신 것 같아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펠디안느가 기지개를 켰다. 머리를 쓸어 넘겼다. 대지가 산산조각 나면서 바다에 한 번 빠진 터라 그도 온몸이 젖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베르덴 님이 드라벤의 영혼을 손에 넣게 되었군요. 뭐,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으로 만족할 만한 결과입니다. 드라벤에게서 얻은 정보는 베르덴 님이 옛 왕과의 대전쟁에서 필시 유용하게 활용하실 테니까요.”
아르카디옴의 끝에 도달한 것은 베르덴이지만, 세 번째 게임은 무승부로 종결되었으니 서로 지식을 빼앗길 일은 없었다.
어떤 의미로는 최선에 가까운 결말이었다.
옛 왕에게 불리한 모든 정보는 운명을 적대하는 베르덴에게 넘어갔으나, 그는 금기로 봉인된 지식을 손에 넣지 못했고.
블러디아도 정보 은폐를 위해 드라벤의 영혼을 확보하려 했으나 실패했으니까. 호스트의 이기적인 지식욕이 이번에는 저항자 측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셈이다.
“베르덴 님은 본질적으로 결코 운명과 어우러질 수 없으니, 에온에 힘을 실어 주는 게 저희에게 이로울 테지요. 단기적으로나, 장기적으로나…… 베르덴 님은 ‘방주의 선장’이기도 하니까요.”
“잊지 마라.”
데우스가 충고했다.
“베르덴은 아직 마지막 선택을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운명을 거절한다면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지요. 설령 이상을 유지한 채 신격을 터득해 진정한 신의 길을 걷는다고 해도.”
펠디안느가 과장스럽게 한 팔을 들어 하늘을 떠받쳤다.
“운명이 없는 세상에선 오직 최후의 저항자만이 ‘유일한 대안’이니.”
운명의 사도를 비롯한 존재들이 미쳤다고 해도, 펠디안느는 운명전의 패배에서 돌아온 올다르크의 사상(思想)을 열렬히 지지했다.
* * *
생명은 죽되 멸하지 않는다.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
육체는 썩어 문드러질지언정 몸에 깃드는 존재의 넋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비물질적 실체는 흩어지지 않고 그 너머에서 영원을 영위한다.
천국은 없다.
천국은 없다.
천국은 없다.
전쟁의 징조에 휘말린 시골 마을에서 드라벤이 가르치던 아이들이 희생당했다. 드라벤을 선생님으로 불러 준 제자들이었다.
그는 망연자실하면서도 루아스교의 정십자가에 기도하며, 아이들이 루아스의 곁에서 편안한 안식을 누리기를 바랐다.
하지만 ‘운명적’으로 얻은 영혼을 다루는 욕망 – 아니무스를 통해서 진실을 보고 말았다. 제자들은 루아스의 곁으로 가지 못했다.
아이들은 차마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죽음 너머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천국은 없다.
천국은 없다.
천국은 없다.
루아스교의 교리가 거짓임을 깨달은 그는 절망이 아니라 분노로 머리가 가득 찼다. 순진하고도 무구한 아이들조차 천국에 가지 못했는데, 그 누가 천국을 갈 수 있단 말인가?
아니무스의 공능으로 본인도 몰랐던 흑마법의 재능을 파악했다.
새로운 초월자의 시작이었다.
처음엔 그의 제자들처럼 무고한 자들을 학살하는 종자들만 죽였다. 신선한 시체는 그의 좋은 흑마법적 실험체가 되었다.
재능, 경험, 그리고 공부가 더해지니 마도사가 되었다. 마도의 깨달음은 이상의 편린이 되어 그의 마음에서 망설임과 윤리를 앗아 갔다.
변방을 전전하며 살인을 거듭했다.
정체를 감춘 채 전부 죽였다.
존엄은 사치였다.
급진적으로 강해지려면 수많은 죽음을 폐해야 했다. 죄책감을 느꼈다. 죄책감에 짓눌려 무너질 것 같을 때마다 진실을 되뇌었다.
천국은 없다.
천국은 없다.
천국은 없다.
흑마법을 터득하기 전부터 이성과 본성은 줄곧 단 하나의 목적을 향했으니, 드라벤은 불과 십수 년 만에 각성하여 초월자가 되었다.
영혼의 해방을 꿈꾸는 이상주의자.
불멸의 세상을 이룩하려면 혼자가 아닌 거대한 세력이 필요하다는 걸 이해했고, 그 길로 크세리온 ‘왕국’으로 넘어갔다.
서대륙, 중앙 대륙, 동대륙으로 세 개의 초월자 세력이 나뉘어 전쟁할 때 크세리온의 1왕자가 이웃 국가를 상대로 연승을 거듭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성장하는 국가.
드라벤이 둥지를 틀기에 꽤 적합했다. 크세리온 왕국을 배후에서 지배해 난세에서 세력을 확장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크세리온 1왕자 – 아칸드 리니게아 타인 크세리온을 만났다.
처음 본 순간 이해했다.
이길 수 없다.
주변의 아둔한 자들은 아칸드를 용맹한 1왕자로 평가했지만, 드라벤에게 아칸드는 그야말로 죽음의 집행자였다.
아칸드라면 불멸의 세상을 완성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충성을 약속했다. 드라벤은 아칸드를 이상의 도구로 삼기로 했다.
초월자 전쟁의 서막이었다.
천국은 없다.
천국은 없다.
천국은 없다.
드라벤은 직접 대륙을 전전하며 루네시카와 같은 인재를 영입했고, 크세리온의 영광으로서 아칸드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필했다.
그렇게 크세리온 왕국이 마침내 크세리온 제국이 되고, 아칸드는 그동안 감춘 송곳니를 초월자들에게 박아 넣었다.
초월자 전쟁이 전개됐다.
산 자가 흘린 피가 강을 이루었고, 시체는 산이 되었다. 드라벤이 구축한 언데드 군단이 무고한 자의 머리를 잘라 전시했다.
선생님과 부모들을 부르짖던 아이들의 반쯤 뜬 눈이 허공을 바라봤다.
천국은 없다.
천국은 없다.
천국은 없다.
천국은 없다.
천국은 없다.
드라벤은 주저하지 않았다. 아칸드가 조각나서 봉인되었어도 멈추지 않았다.
제국이 멸망한 이후로 아칸드가 없으면 이상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했고, 그를 이상의 대리인으로 여기기로 했다.
800년이 지나고 나서야 아칸드를 부활시켰다.
파멸의 마도를 바로 앞에 두고도 기꺼이 목숨을 내던졌다. 초월자의 이상을 맡긴 것이다. 아칸드가 불멸의 세상을 완성해 모든 영혼을 해방해 줄 거라고 신뢰했기에.
천국은 없다!
의로운 인생을 살고 죽어 봤자 영원토록 고통받을 뿐이다.
지금의 명맥은 무가치하다.
그래서 드라벤은 만인의 생명을 빼앗았다.
의미 없는 삶을 전부 거두어 영혼들이 고통받는 그 세계를 지울 수 있다면, 비로소 모든 생에 확실한 의미가 생길 테니까.
드라벤은 현실의 절망을 양분으로 삼아 미래의 희망을 구축하려 했다. 그렇게 하여 자신이 행했던 수많은 죄업을 만회하려 했다.
대륙에 극심한 피해를 야기한 초월자는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이타적인 존재였다. 이기적으로 모든 존재를 구원하려 한 구도자였다.
생명을 폐하자.
이 세상을 위해서.
그것이 드라벤이 걸어온 길이었다.
<무한 - 명운(命殞)>
베르덴의 무한한 마력이 어두운 보랏빛으로 화했다. 생명을 거절하는 힘. 그러나 그건 드라벤의 마도와 본질적으로 달랐다.
‘한없이 순결하다…….’
드라벤이 타락이라면.
베르덴은 정화(淨化)였다.
이렇게나 찬란한 흑마법의 마력을, 드라벤은 본 적이 없었다. 삶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만약 베르덴이 800년만 일찍 태어났어도, 드라벤은 아칸드가 아니라 그를 왕으로 삼았으리라.
“정말로 가능할 줄이야.”
드라벤은 전율에 휩싸인 채 크게 웃었다. 마지막 기회다. 운명도 저항도 관여하지 않은 온전한 자신의 선택이 부디 올바르기를.
“나의 삶을 이해했으나, 아직 깊이가 부족하기에 마도 자체의 경지는 불안정하군. 더군다나 흑마법을 배우는 것이 처음이니.”
“필요한 건 시간뿐이지.”
“하지만 여유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너는 반드시 루네시카에게 내 마도를 완벽하게 재현해야 되니.”
드라벤이 거짓된 육체로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마도 <명운(命殞)>
호스트에게 받은 몸뚱이에 부하가 걸리면서 점차 훼손되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마도를 더욱더 강화했다.
“그럼…… 시작하지.”
명운의 마도가 공명한다.
두 명의 영혼이 서로에게 반응했다.
“마법의 전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