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4화 신하(神下) (4)
호스트의 거처와 연결된 통로에서 영혼의 서로 변화한 [그링 아르카넘].
아르카디옴에서 돌아오자마자 운명의 추종자의 근거지를 습격하고, 긴급 정상 회의에 참석해야 해서 직접 열어 보지는 못했는데…….
‘책에 영혼들이.’
지금 책장 사이에서 광채가 안개처럼 일렁이며 흘러나오고 있다. 새하얀 빛이었다. 투명할 정도로 희미하기도 했다.
아아아아…….
여러 감정이 뒤죽박죽 섞인 옅은 영혼의 절규가 귓가를 간질였다.
오스가르는 온몸의 털이 삐죽 서는 듯했다. 소름 끼쳤다. 그들만이 아니라 바르그논조차도 베르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경직됐다.
그때, 베르덴이 손이 움직였다.
달칵.
책장이 넘어갔다. 공기가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링 아르카넘]과 현세가 일시적으로 연결된 것이다.
그 순간.
촤르르르르르륵!
감히 숫자를 셀 수 없는 무수한 페이지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장 육안으로 보이는 [그링 아르카넘]의 쪽수는 기껏해야 1, 2천에 불과했는데 어느새 수만 페이지가 뒤집힌 것이다.
책장은 아직도 끝을 보이지 않았다.
기현상은 이제 시작이었다.
파아아앗.
[그링 아르카넘]에서 뻗어나온 백색광이 연구실 천장을 조사했으니, 일견 알파가 제작한 기억 골렘이 마력으로 새긴 영상을 재생하는 것과 비슷한 광경이 펼쳐졌다.
천장에 인영(人影)들이 영사되었다.
수많은 사람이 그 안에 있었다. 인간, 수인, 엘프, 드워프 할 것 없었다. 빛이 일렁일 때마다 움직이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는 그들의 눈동자가 하나둘씩 연구실 내부를 응시했다.
정신계가 발칵 뒤집혔다.
“악……!”
“으윽!”
가장 먼저 유니아가 짧은 비명을 지르고는 벽에 등을 부딪쳤다.
배교의 무나딤이 주저앉았다.
피부가 창백해진 위상들이 죄다 경악한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지럽다.
폭풍이 이는 바다 위에 떠 있는 기름막처럼 속이 울렁거린다.
그하룬은 자기 내면을 타인이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에 인상을 찡그렸고, 이자벨라의 형안엔 조금씩 핏발이 섰다.
‘경계 너머에 있는 인간의 형체들…… 흐, 흡사해. 마도왕의 성채 센트럼에서, 형안을 통해 처음 영혼을 인식했을 때와 같아……!’
이자벨라는 형안이 비추는 영혼들의 너무도 많은 존재감에 어금니를 깨물었다. 목젖을 찌르는 구토감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아드리안은 미간을 좁힌 채 굳건히 서 있었다.
알파와 베타도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영혼들을 응시했는데, 알파와 베타가 외눈을 빛내더니 구석에 자리한 엘프의 영혼을 함께 가리켰다.
[아는 얼굴.]
베르덴만이 그 뜻을 이해했다.
‘르위엔델.’
아르카디옴의 두 번째 게임, 태고의 모험극에서 마주한 엘프.
게임에서 엘프 역할을 부여받은 아홉 번째 귀빈, 모르텔란에게 속아 헤르사온 왕국 수도를 공격했던 인간 혐오 엘프.
베르덴을 세계수의 화신으로 착각한…… 옛적에 사망한 엘프.
멍하니 반쯤 눈을 뜬 르위엔델은 이내 빛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또 다른 영혼들이 현상됐다.
‘……모험극에서 살아 움직이는 존재들은 전부 호스트의 수중에 놓인 영혼들이었다. 아르카디옴의 귀빈과 하객처럼.’
베르덴은 [그링 아르카넘]을 지탱하는 손아귀에 힘을 실었다.
‘호스트가 갖고 놀던 영혼을 해방시켰군, 바로 이 책 안에.’
그렇다.
그래서 [그링 아르카넘]은 영혼의 서였다.
영혼을 ‘저장’하는 세계 금서.
다시 말해──태고의 모험 속에서 오랜 역사를 재현하던 영혼들이 이제 베르덴의 손아귀에 들어온 셈이었다.
‘문제는 호스트의 진의인데.’
대체 이 영혼들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영혼의 서로 변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과 악신의 잔재와는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문득 눈가를 움찔거렸다.
‘설마.’
베르덴은 천장에서 바르그논으로 시선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이자벨라, 영혼을 확인해라.”
“……!”
이자벨라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형안에 마력을 집중했다. 누구의 영혼을 확인하라는 건지는 물어볼 것도 없었다.
그녀가 악신의 잔재를 꿰뚫어봤다.
“텅, 비었어.”
악신의 잔재는 영혼이 없었다. 본신이 파멸당한 신의 파편에 불과했다. 영혼 없이 본능대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인형인 것이다.
영혼이 깃든 서적.
영혼이 없는 신체(神體).
이토록 보완적인 관계가 또 있을까.
탁.
베르덴이 [그링 아르카넘]을 닫자 영혼들의 눈이 사라졌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명확해졌다.
“묻겠다.”
악신의 잔재를 주시하는 벽안.
“너는 지성체인가, 아니면 무지성체인가.”
* * *
일격에 맞은 베르덴의 분신이 마력으로 화했다.
‘내가 움직임을 놓쳤다?’
베르덴의 혈액 덕분에 한낱 찌꺼기에서 본체에 가까운 지성까지 갖게 된 바르그논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라렸다.
‘분명, 설익은 신격일진대.’
몸이 천 갈래 만 갈래 조각나도, 그렇게 사고마저 할 수 없게 되어도 신앙의 존속 의지는 무엇도 침범할 수 없다.
신성력은 잔존한다.
신의 파편은 세계를 이루는 근원 입자와도 같아 손상되어도 어느 순간 절대로 파괴되지 않는 구간이 존재한다.
그래서 고위 신은 멸하지 않는다.
하지만 눈앞의 어린 신은 신의 명제를 보란 듯이 무너뜨렸다.
기억을 다시 짚었다. 시야만이 아니라 파편으로 나뉘어진 본신이 느꼈던 최후의 감정까지 되살렸다. 사막에 묻혀 있던 본신이 결국에 어떻게 사멸했는지 다시 보았다.
검붉은 마력…….
바르그논이 활동하던 태고의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은 개념이다. 진정한 의미의 세계수는 그런 마력을 가질 수 없다.
저것은 생명과 반대되기 때문이다.
잠깐.
‘신격은 미완성이나, 신을 웃도는 힘……?’
바르그논의 본신이 가장 두려워했었던 존재들의 형상이 시신경을 스쳤다.
올다르크와 ‘그녀’.
신이 아닌데도 신을 압도하는 괴물과 세계수보다 평화를 사랑하는 다정한 신.
[어?]
그녀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기억에 있으나 끄집어낼 수 없다. 마치 세상이 허락하지 않은 것처럼 사고의 흐름이 가로막혔다.
‘이, 이건 금기의 작용이다. 금기가 존재 자체를 은폐하고 있다니. 이렇게 강대한 금기는 처음이다.’
바르그논의 신경 다발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본신이 찢어발겨진 대분기, 그리고 마침내 본신에 가까운 사고 작용을 되찾은 현 시대.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괴리가 신의 정신을 압도했다.
낯선 위화감.
출처를 알 수 없는 책 안에 바글거리는 존재들의 형체도, 이 세계도.
지나간 시간만큼 무척이나 생소했다.
“묻겠다.”
그때였다.
“너는 지성체인가, 아니면 무지성체인가.”
벽안이 바르그논을 들여다본다.
낯익은 위화감.
바르그논은 그제야 본신이 일생에 한 번 느꼈던 위화감을 깨달았다.
대분기에서 보았던 ‘그녀’의 얼굴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고대 신 세력은 신이라고 취급할 수 없을 정도로 약자들을 보살피고, 또 희생하는 ‘그녀’를 경시하거나 혐오했다.
하지만.
바르그논은 ‘그녀’에게서 헤아릴 수 없는 심계를 인지했다.
자비로우나, 광기 어린 미소.
다정하나, 왠지 모르게 섬뜩한 태도.
무엇보다…… 신들을 신이 아닌 먹잇감으로 보는 듯한 깊은 눈빛.
바르그논은 베르덴에게서 올다르크와 ‘그녀’가 뒤섞인 듯한 존재를 감지했다. 그리고, 그중 ‘그녀’의 일면이 더 강하게 엿보였다.
앳된 신이 들고 있는 책에서 흘러넘친 기이함이 바르그논의 의심에 강한 확신을 더했다.
단언해야만 한다.
무릇 세계에 귀속된 개체라면.
너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
[───아아아아아아아!!!!!!!!]
엄습하는 공포가 서린 약자의 비명이 메아리치며 바르그논이 촉수를 휘둘렀다. 스스로 지성체가 아닌 무지성체임을 증명하듯이.
시시각각 생체 조직이 재구성되면서 날카롭게 공기가 갈라졌다.
쩌어어엉!
광검 [실렌다르]에서 불꽃이 튀었다.
“제압하겠습니다, 주군.”
아드리안이 한 발짝 전진하며 상체를 숙인 순간 바르그논의 사지가 반쯤 절단됐다. 예상을 뛰어넘는 검속이었다.
하나 재생 속도도 그만큼 빨랐다.
신혈이 채 뿜어져 나오기도 전에 절단면이 붙은 바르그논의 동공이 확장됐다.
[왜, 네놈에게 올다르크의 흔적이……?]
초월자.
초대 마도왕이 만든 개념에서 비롯된 존재들을 지칭하는 것일 테지만, 바르그논의 시대에는 초월자 개념이 없었다.
그러니 당황할 수밖에.
<염동력>
[큽……?!]
바르그논의 무릎이 무너졌다. 전신이 밑바닥으로 끌려 내려가는 듯이 짓눌렸다. 육신에 파고든 마력이 신체의 제어권을 앗아 가고 있다.
왼쪽 눈동자에 형안을 개안한 이자벨라의 침식의 마도였다.
[뭔, 말도 안 돼. 올다르크와, 세계수의 잔흔을 한 몸에 품었, 다고?]
마족.
세계수와 초대 마도왕이 합작해 탄생시킨 새로운 종족. 이 또한 대분기가 완전히 끝나고 생긴 개념이니 바르그논은 알 턱이 없었다.
[올다르크, ‘그녀’, 세계수……! 네놈들은 도대체 무슨 짓을──]
신격으로 구속력을 깨려고 하자 주변에서 공세가 몰아쳤다. 알더니스의 폭풍과 그하룬의 거대 망치가 바르그논의 안면을 강타했다.
발광하는 바르그논이 수십 개의 촉수로 내보내 주위를 휘쓸었고, 이에 아드리안을 필두로 위상들이 대응했다.
카가가가가가가가가가강!
보랏빛 검기가 촉수들을 절단했다.
레바나가 이자벨라를 도와 바르그논의 통제에 무게를 더했다.
콰아아앙!
메드란트의 다중 마력 방패에 보호받는 라테온이 방패로 촉수를 내리찍고 검으로 절단, 그대로 돌진해 어깨로 악신을 들이받았다.
더럽게 무겁다.
제대로 밀리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즉각 발등을 가르며 시선을 끌었다.
콰득! 콱!
카인의 마검과 그레이브이 소검이 근육을 꿰뚫고 사선을 그었으며, 그와 함께 멜라드와 알데반이 고유 흑마법으로 재생을 잠시나마 저해.
오스가르와 유니아가 악신의 좌우에서 서로 반대 방향으로 회전했다.
쩌어어어엉!
두 스태프의 타격 지점에서 중첩돼 버린 중력파가 폭발했다. 중심이 무너진 바르그논이 바닥을 짚다가 이자벨라의 마도에 억눌렸다.
[한낱 미물 따위가 감히!]
양팔이 절단됐다. 바르그논의 신경 다발의 몸이 엎어졌다. 다리만이 아니라 주요 관절이 광검에 의해 눈 깜짝할 사이에 분리됐다.
그 빈틈을 이자벨라가 집요하게 파고들어 악신의 잔재를 태반 이상 장악했다.
“제어 끝났어.”
“확인.”
푹!
아드리안이 역수로 쥔 광검을 악신의 목덜미에 단단히 꽂아 넣었다.
제압 완료.
“위험하기는 하나, 생각보다는 약하군요.”
“신이라고 해서 다 막강한 건 아니라더군. 평균을 산출하면 초월자가 월등히 위에 있다고. 본신이 없는 파편은 더더욱 그렇겠지.”
베르덴은 [그링 아르카넘]의 표지를 어루만지며 영혼의 감각을 끌어올렸다.
그러면서 머리만 하늘로 쳐든 악신의 잔재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않았다.
[너는, 뭐지?]
바르그논이 부들부들 떨며 가까스로 머리를 위로 들었다.
큼지막한 눈동자에 베르덴이 반사됐다.
[세계수, 올다르크, ‘그녀’가 합작해 창조한…… 신이라도 된단 말인가? 어째서 네게 그 셋이 동시에 보인단 말인가…….]
“나는 나일 뿐이다.”
베르덴의 손끝이 책장을 파고들었다.
“가공된 바르그논의 신경 다발. 너는 지성체가 아닌 그저 본능만 남은 껍데기에 불과하나. 그럼에도 원한다면 마지막 말을 들어주마.”
[…….]
악신의 잔재는 차분했다. 살려 달라고 발버둥치지 않았다. 본신이 사멸된 파편은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으며 신은 애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분기에서 평화를 주창하던 네놈들의 모습이 선하다. 선과 악을 구분하며…… 크라켄이 늘상 하던 말이 떠오르는군. 선악은 관점이 차이라고.]
크라켄───생전에 호스트와도 몇 번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있는 바르그논의 일부는 이내 나지막이 조소했다.
베르덴 너머로 보이는 세계수, 올다르크, 그리고 ‘그녀’를 향해서.
[너희는 대륙을 파괴하려고 했던 우리보다 더한 혼돈이다.]
투확!
눈동자가 꿈틀거리더니 수정체를 부수며 촉수가 튀어나왔다. 그것이 베르덴에게 닿기 전에 호스트의 책이 다시 개방됐다.
“[그링 아르카넘].”
베르덴이 시동어를 외웠다.
“공허한 그릇을 채워라.”
[그링 아르카넘]에서 터져 나온 빛무리에서 하얀 불꽃이 하나 튀어나왔다. 영혼. 하나의 영혼이 악신의 잔재에 깃들었다.
꽈드드드드드드드드드득.
신경이 붕괴된다.
붕괴된 조직은 다시 합쳐진다.
빨갛고 질척거리는 신경 다발이 뼈, 장기, 근육, 피부로 하나둘 재구성되는 광경은 마치 인간 자체를 처음부터 빚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릇이 채워졌다.
라테온이 중얼거렸다.
“……여자?”
헐거벗은 아름다운 여자가 눈을 감은 채 연구실 바닥에 누워 있다. 베르덴은 아공간에서 큰 담요를 꺼내 그녀를 덮었다.
“영혼이 신체에 완전히 안착하려면 조금 시간이 걸린다. 아마 새벽에 깨어나겠지. 그때까지 유니아, 네게 맡기겠다.
“아, 알았어.”
유니아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조심스럽게 낯선 여인을 가리켰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는 못했지만.
“근데…… 이 사람 누구야?”
“이름은 엘로리스.”
새벽녘의 기사, 엘로리스.
다른 종교들에 의해 몰락한 샛별의 종교의 최후 지도자이며, 태고의 모험에서 자신의 죽음을 자각한 샛별의 여신의 사도.
호스트는 [그링 아르카넘] 안에 그녀의 영혼까지 저장해 두었다. 그리고, 베르덴은 그녀의 영혼을 꺼내 신의 육신에 부여했다.
“옛 종교의 신인(神人)이다.”
“신인? 그럼…….”
“굳이 말하자면 성녀라고도 할 수 있겠지.”
……!
레바나는 찢어질 듯이 눈을 크게 뜨며 잠에 빠진 엘로리스를 바라봤다.
“다른 종교의…… 성녀?”
이 사실이 밖에 알려진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도 어렵다.
루아스교는 유일신을 표방하기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오스가르가 입을 뻐끔거렸다.
“그럼 실험은 이걸로 마치겠다. 수고했다.”
그렇게 악신의 잔재 실험은 충격과 경악 속에서 끝이 났다.
* * *
베르덴의 비밀스러운 실험이 끝나고 심층의 전 격벽이 열린 그때였다.
바깥에서 연락이 왔다.
───폐하, 죄인들이 이송이 끝났습니다.
“그리로 가지.”
프로하스에 갇혀 있던 그림멜 그롬파르와 루네시카 안테르노아가 초월자 연합의 감옥으로 운반이 완료됐다.
이제 두 번째 하인을 만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