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7화 본질 (1)
유리온이 입을 벌렸다.
“흑마법. 아니, 흑마도라고?”
베르덴이 개척한 마도가 원소계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여기에 없었다. 그래서 말문이 막혔다. 마도사는 단 하나의 마도만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다.
물론 베르덴은 망화…… 암월의 마도도 다룬다고 알려지긴 했지만, 베르덴의 마도를 정확히 모르니 두 개의 마도를 가졌다고 학계가 공식적으로 단정하기는 어려웠다.
어쨌든 검붉은 번개나 칠흑의 불꽃이나 겉보기론 원소계의 한 갈래니까.
그런데, 지금 베르덴은 그 추측에 쐐기를 박았다.
흑염, 흑적뢰, 사기(死氣).
어떤 폭넓은 마도를 개척했다고 할지언정 고작 마도 하나로, 저 세 개의 고유성을 아우를 수는 없을 테니까.
“다양한 길을 개척한 마도사…….”
유리온은 아주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가정이 사실이었군.”
다원(多元) 마도사.
하이랜디아의 마법사들이 베르덴의 사고방식과 행적, 그리고 마법 등을 연구하며 세운 가설을 토대로 창조한 ‘학명(學名)’이었다.
그것은 이제 베르덴만을 가리키는 새로운 마법계 용어가 될 터였다.
베르덴이 보인 흑마도에 시선을 떼지 못하는 건 유리온뿐만이 아니었다.
벤디에 또한 마찬가지였다.
‘본질 자체는 다른 듯 하나, 흡사한 부분이 너무 많다. 내가 경험한 그 흑마도와 결코 다르다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리온은 히아레마르 내해의 섬에 없었기에 처음 봤겠지만, 벤디에는 아니었다. 벤디에는 초위 마법을 연계해 여러 마도를 구사하는 드라벤에게 쉴 새 없이 살수를 퍼부었다.
드라벤의 숨통을 몇 번이고 끊었다.
항상성을 깨부쉈다.
죽음을 거부하는 다른 마도가 아니었다면 진즉 죽였으리라.
벤디에는 당시 전투를 상기했다. 드라벤의 초위 마법을, 그녀의 초월기로 파훼하는 순간까지 모조리 감각을 되살렸다.
베르덴이 지금 개방한 마도의 정체를 확실하게 단정 짓기 위해서.
초월적인 직감이 확신했다.
“첫 번째 하인의 마도군요.”
“첫 번째 하인? 주검의 영광의 수장?”
유리온은 그제야 마도의 정체를 깨닫고 흥미롭게 상황을 지켜봤다.
이보다 흥미로운 것도 드물 것이다.
첫 번째 하인을 처단한 초월자가 첫 번째 하인의 마도를 터득하곤 두 번째 하인에게 집단의 수장임을 주장하는 상황이니 말이다.
“……말도 안 돼.”
루네시카가 입술을 잘게 떨며 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거짓은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지쳤어도 명운의 사슬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판단력이 무뎌지진 않았다. 그래, 전부 다 사실이었다.
“어떻게……?”
“육체가 죽었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라는 건 잘 알 텐데.”
“네가 드라벤의 영혼을 만났다고? 말이, 말이 안 되잖아? 드라벤이 죽고 시간이 흘렀어. [아니무스]로 보관한 것이 아닌 이상 이미 떠난 영혼을 다시 만나는 것은 불가능해. 하물며 드라벤은 폐하의 봉인을 풀기 위한 대가로 부활을 포기했고!”
루네시카는 베르덴이 죽은 드라벤과 조우했다는 걸 직감으로 확신했지만, 그런데도 억지로 부정하며 머리로도 납득할 수 있는 답을 요구했다.
“심지어…… 드라벤의 영혼은 네 마법으로 진즉에 망가졌을 거야. 지금 내 영혼이 산산조각 나기 직전에 몰린 것처럼.”
“이미 파괴됐다면 모를까, 나로 인해 망가져 가는 영혼은 수복할 수 있다. 지금 내가 네 영혼을 고칠 수 있는 것처럼.”
“그렇다고 해도 드라벤의 영혼을 붙잡을 수단이 없어.”
“내 말을 믿으면서도 다른 증거를 요구하는군.”
베르덴이 즉각 에스티리아 왕국의 국보로 [그링 아르카넘]을 소환했다.
“[아니무스]가 전부는 아니지.”
“뭐야, 그 책.”
벤디에와 유리온은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낀 게 전부였지만, 루네시카는 영혼의 서의 정체를 한눈에 간파했다.
[아니무스]에 못지않다.
그 안에 저장된 수많은 영혼들에 그녀의 영혼이 반응했다.
“웁……!!”
베르덴이 준 마석으로 영혼의 파멸을 잠시 늦춘 게 고작인 루네시카는 결국에 반동을 견디지 못하고 구역질을 해 댔다.
사실상 먹은 게 거의 없어 위액만 입가에서 뚝뚝 떨어졌다.
베르덴이 책을 거두었다.
“이런, 흉하구만.”
유리온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루네시카는 그를 흘기며 확 잡아챈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차분하게 심호흡했다.
억지로라도 베르덴을 의심하고 싶었으나 이제 더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 네가 드라벤을 만났다는 건 틀림없어 보이네. 그런데? 그래서 뭘 원하는데?”
루네시카가 애써 조소했다.
“드라벤이 나한테 유언이라도 전해 달래? 무슨 수를 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대가로 드라벤한테 마도와 지식이라도 받은 거니?”
“마도는 문자 그대로 마도사의 길이지. 마법계 초월자는 그 길을 따라 고유한 이상을 추구하고. 그럼 내가 드라벤의 마도를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베르덴이 상체를 숙여 팔꿈치를 무릎에 얹었다.
시선이 가까워졌다.
루네시카가 움찔하며 긴장을 삼켰다.
“너도 알다시피 드라벤 르마르크는 모든 영혼이 고통받지 않기를 바랐다. 아칸드에게 충성을 바친 건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켜 줄 제왕이자 유일한 도구로 판단했기 때문이지. 루네시카, 너도 그와 거의 비슷한 이유로 아칸드에게 충의를 다했다.”
“…….”
“영혼이 고통받지 않는, 생명의 개념이 사라지고 죽음만이 남은 불멸의 세상을 위해.”
베르덴의 푸른 마력은 검보라색으로 물들었으나 일반적인 사기와 사뭇 달랐다.
단언컨대 흑마법계에 종사하는 존재라면 누구도 이 찬란하고도 순수한 죽음을 불쾌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애초에 기만이었다면?”
“무슨 의미야.”
“너는 아칸드를 어디까지 믿지?”
루네시카는 인상을 구겼다가 실소했다. 어디까지 믿냐니? 크세리온 황제를 향한 그녀의 충성심은 지금 보여 주고 있는 만큼 숭고하다.
“전부.”
“드라벤도 그랬지.”
베르덴이 손을 뻗어 루네시카의 머리를 부드럽게 잡았다. 엄지는 이마를 짚었다. 나머지 네 손가락은 관자놀이를 덮었다.
“뭣.”
“직접 봐라.”
<기억 공유>
“이게 진실이다.”
아르카디옴에서 드라벤의 영혼과 나누었던 대화, 그 기억이 루네시카에 전해진다. 주검의 영광을 잇는 새로운 수장이 탄생하는 그 순간이.
───그래, 역시 이게 유일한 답이겠지.
그리운 목소리가 뇌리를 울렸다.
───네가 전부 가져가라.
끝없이 높은 책장으로 둘러싸인 서고.
장작 없이 타오르는 벽난로.
───네가, 주검의 왕이 되어라.
드라벤 르마르크가 바로 맞은편에 앉아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고 있다. 루네시카는 기억 속에서 베르덴이 되었다.
* * *
베르덴 일행과 다른 감옥으로 안내받은 그하룬이 대충 바닥에 앉아있다. 그 앞에는 물리적 및 마법적 구속구로 행동이 제한된 드워프가 발로 박수를 치며 웃고 있었다.
“으하하하하하! 누가 날 찾아왔나 했더니, 그래. 한눈에 알아보겠군! 하기야 자네도 상당히 궁금했을 테지. 응당 위대한 드워프라면.”
주검의 영광이 [아니무스]의 권능으로 부활시킨 드워프────그림멜 그롬파르가 포로에 걸맞은 행색으로 눈을 빛냈다.
“드워프 최후의 왕을 본 기분이 어떤가? 절개를 지닌 망치, 그하룬.”
“지상 최악의 난쟁이라더니.”
그하룬이 특유의 안목을 발휘했다.
“거들먹거리고 다닐 만은 한 것 같군.”
그하룬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지만 내심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재주가 심상치 않다.
자신을 제외하고 이만한 재능을 타고난 드워프는 처음 봤다.
‘대학살의 수인이란 놈과 폭사하면서 동대륙과 중앙 대륙을 잇는 두 개의 육로 중 하나를 파괴했다고 베르덴에게 들었는데, 과연.’
그림멜의 행적과 사고방식은 조금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드워프로서의 압도적인 재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하룬이 덥수룩한 수염을 쓸었다.
“그나저나 내가 누군지 알고 있을 줄이야. 나한테 관심을 기울일 정도로 여유가 있었나 본데, 그 몰골로 이렇게 잡혀 있으니 우습기 짝이 없구나.”
“으하하핫, 이거 할 말이 없구먼.”
그림멜은 양손이 잘려 있었다. 그림멜을 추격한 베르덴에게 절단된 흔적이었다. 손이 없는 드워프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시간과 자원만 충분했다면 나의 기계 장치들로 이 시대를 풍미했을 텐데. 전성기의 세력만 갖췄어도 그때 베르덴을 죽일 수도 있었는데. 기껏 얻은 생명을 이렇게 낭비하게 될 줄이야.”
“병신같이 만약에 만약을 거듭하면 마음이 좀 편해지나?”
“아쉬움만 더 커지지! 그래도 이리 잡혀서 심문도 받고, 혼자 계속 시간을 보내다 보니 생각은 정리됐네. 확실히 난 베르덴에 졌어. 이렇게 두 손이 날아가 버린 이상 재기 불능이지.”
아무리 섬세한 의수라고 할지언정 드워프 본래의 손재주를 재현할 수 없다. 신경 말단 하나하나가 그의 고유성이기 때문이다.
전성기로의 회복 가능성은 없다.
솔직히 그림멜은 절망하기도 했지만 그런 감정은 이미 극복했다. 계속 지랄해 봤자 현실은 전혀 바뀌지 않으니까.
“하지만, 난 살고 싶네.”
“미친 새끼. 도시 하나를 통째로 날려 먹고도 살길 바라나? 지상 최악의 난쟁이라는 이명답게 넌 처형장행이야.”
“손을 잃은 드워프가 어디 드워프인가? 이르자면 난 지금 지상 최약의 드워프인 셈이네. 물론 무상으로 살려 달란 말은 아니네. 사법 거래랄까?”
“하! 베르덴이 잘도 들어주겠군.”
“내가 제안하고 싶은 대상은 자네일세, 그하룬.”
그하룬이 인상을 찡그렸다가 [끝없는 술병]으로 독한 술을 들이켰다.
두꺼운 팔뚝으로 수염을 닦았다.
“나한테 제안이라고?”
“자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확신했네. 그림멜과 그하룬. 우리는 위대하지만 서로 추구하는 방향이 정반대라는 걸!”
그림멜이 연설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현재 드워프 종족에게는 왕조가 없으며, 양산을 금지하는 전통이 있다더군. 바로 나로 인해서 후대에 전해진 여파지. 내가 지배하는 왕조가, 내가 양산한 기계 장치로 동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며 중앙 대륙과 전쟁을 벌였으니. 그 시대의 드워프들은 그런 역사가 반복되기를 바라지 않았기에 전통이란 굴레를 후손들에게 씌운 것이네.”
“자랑이냐?”
“나는 무차별적인 양산을 사랑해. 반면에 자네는 전통주의자로서 양산을 절대적으로 거부하고 자격을 갖춘 이에게만 무구를 제작해 주지. 이렇게 대척점인 관계는 보기 드물 거야. 하지만! 서로 반대편에 서 있기에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기도 하지!”
그하룬이 본론만 말하라는 듯이 부리부리한 눈에 힘을 주었다.
“이보게, 그하룬. 자네도 짐작하고 있지 않나? 그 베르덴 옆에 있으니 말이야. 과연 옛 왕과의 전쟁이 끝일까? 끝나면 평화가 올까?”
그림멜이 입가를 비틀었다.
“거대한 전쟁이 시작될 걸세.”
“…….”
“그러니 제안하는 바이네.”
지상 최악의 난쟁이가 절개를 지닌 망치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나의 기계 장치 설계도를 갖고 싶지 않나? 필시 베르덴에게 큰 도움이 될 전력을.”
* * *
베르덴의 <기억 공유>에 휩쓸린 루네시카의 초점이 흐려졌다. 몸은 반응하고 있으나, 그 정신은 깊이 침잠했다.
벤디에가 중얼거렸다.
“대체 무엇을……?”
“루네시카를 설득하는 데 굳이 너희들이 참관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내 비밀 중 하나를 드러내야 하니 혼자 내려왔어야 했지.”
베르덴은 <기억 공유>를 유지한 채 병렬 사고를 발휘하며 말했다.
“그런데도 동행을 허락한 건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서다.”
유리온이 물었다.
“보여 주고 싶은 거?”
“그래.”
베르덴이 시선을 바로 했다.
“초월자의 본질을.”
의도치 않게 이상과 어긋난 길을 걸은 초월자는 어떻게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