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8화 본질 (2)
아칸드 리니게아 타인 크세리온.
타고난 초월자.
뿌리는 인간에 얽혀 있어 각성 초월자들과 달리 종족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 약점은 불사의 의식으로 극복했다.
존재하지 않는 항상성은 불사(不死)로.
평범한 인간의 수명 한계와 노화 속도는 불로(不老)로.
그는 불로불사가 되어 완벽해졌다.
어떤 초월자가 와도 가장 위대한 정복자를 막을 수 없다. 모든 대륙이 불타리라. 세계가 다시 연합을 조직한다고 해도 잿더미만 더 쌓이겠지.
죽음의 제왕은 이 거짓된 하늘을 초석으로 삼아 진실된 세계를 구축할 것이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사라진, 육체와 영혼이 구분되지 않는, 그래서 영혼이 고통받지 않는 불멸의 세상이 목전에 다다랐다.
루네시카는 진심으로 기뻤다.
당연히 일절 후회는 없었다. 그 800년의 헌신이 마침내 빛을 보게 되었으니, 드라벤과 함께 목숨마저 희생한 보람이 있었다.
이렇게 끝을 보지 못한 채 스러질지언정 이상은 완성될 터. 만족한다. 그녀의 본질 역시 저항자이자 초월자의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게…… 뭐야.’
루네시카가 받은 정신적 충격 또한 초월자이기에 감당해야 하는 것이었다.
───아칸드가 전 세계를 불태워도 불멸의 세상은 오지 않는다. 아까 말했듯 아칸드가 원하는 이상향은, 잔인하리만치 주검의 영광이 추구한 이념과 정반대에 위치해 있으니까.
───이런 아칸드의 진실을, 주검의 영광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베르덴이 핵심만 짚어 편집한 기억이 루네시카의 내면 속 망막에 투영됐다. 드라벤. 영혼? 드라벤의 영혼이 열변을 토하고 있다.
폐하에 대한 충성심은 뚜렷한 증오심으로 변모해 분노를 표출하며.
───나의 마도를 재현해 정통성을 증명하고, 주검의 영광의 수장으로 등극하라. 그리고, 무지한 하인들을 ‘계몽’시켜라.
베르덴을 바라보는 드라벤의 눈빛에 적의 따위는 없었다. 본래 아칸드 폐하에게 향할, 아니 그보다 더 강렬한 믿음이 있었다.
───루네시카에게 명운의 마도를 보여 주고 진실과 함께 나의 전언을 속삭여라. 그렇게 하면 루네시카는 널 수장으로 받들 거다.
드라벤의 영혼이 단언했다.
───네가 추구하는 이상향에, 내가 바라는 세상이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베르덴에게 향한 말이었으나. 마치 루네시카에게 하는 말 같았다. 드라벤의 유언으로 진실을 속삭이며 새로운 믿음을 종용했다.
그것으로 짧은 기억이 걷혔다.
“다시 묻겠다.”
베르덴은 루네시카의 이마에서 손을 거두며 재차 질문했다.
“너는 아칸드를 믿나?”
“……흐.”
애석하게도 영연계(靈連契)───영혼과 영혼을 잇고 결속하는 마도를 개척한 루네시카는 이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베르덴의 기억에서 본 드라벤의 영혼은 가짜가 아니었다. 그리고, 드라벤은 베르덴에게 모든 것을 넘겼다.
어째서일까?
이유야 자명했다.
사실 그것밖에 없었다.
그 드라벤 르마르크가 충성심을 저버리는 길은 유일했다.
‘폐하께서 우리를 기만했다.’
루네시카는 사실을 깨달은 드라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드라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눈앞에 선했다.
“쟤, 눈이…….”
유리온이 운을 뗀 순간이었다.
거울에 금이 갔다.
거울에 비친 루네시카도 함께 조각났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정돈되지 않은 손톱들이 신체의 피부를 사정없이 긁어 댔다. 살점이 뜯어졌다. 유리온이 건넨 손수건이 삽시간에 피로 물들었다.
아칸드의 거짓을 깨달음과 동시에 이상과 반대가 되는 길을 걸었던 대가가 찾아온 것이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업을 너무도 오랫동안 쌓아 온 만큼 그 충격은 절규가 되어 쏟아졌다.
육체적 고통으로 정신적 격통을 피하려고 했다.
연약해진 몸뚱이는 그 발버둥만으로도 부서지고 있었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가느다란 엄지가 오른쪽 안구에 걸렸다.
“말리겠습니다.”
“아니.”
베르덴은 팔을 뻗어 벤디에의 앞을 막았다.
“그냥 지켜봐라.”
루네시카는 정신병자처럼 있는 힘껏 그대로 손을 쳐올렸다.
눈동자가 찢어졌다.
비명과 난도질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베르덴이 단호하게 제지하고 있는 탓에 벤디에와 유리온은 루네시카가 자기 자신을 망가뜨리는 참상을 보고 있어야만 했다.
불과 수십 초 만에 사방이 붉게 물들었다.
루네시카가 쓰러졌다.
베르덴을 등진 그녀는 자신의 피로 물든 바닥에 머리를 기댔다. 비탄은 잦아들었지만 절망은 오히려 깊어졌다.
애써 내면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루네시카의 정신은 붕괴했다.
베르덴의 얼굴에도 피가 튀었다. 그럼에도 그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실이 끊어진 인형과 같은 그녀를 굽어볼 뿐이었다.
“쯧, 좋은 구경 하는군.”
유리온이 혀를 찼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상대가 누구든 이런 식의 고문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확실히 초월자의 정신이 완전히 망가지는 꼴은 나도 처음 본다. 그런데 이게 초월자의 본질하고 무슨 상관이 있지? 뭐, 우리도 이상을 잘못 추구하면 이리 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싶은 건가?”
“신성의 의도는 그것만이 아닐 겁니다.”
“그래도 거북한 건 마찬가지야. 차라리 정신이 끝장나기 전에 죽이지 그랬나.”
유리온은 베르덴이 주검의 영광을 이어받았음을 밝힌 것이 루네시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짓이기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업보는 천참만륙을 내어도 모자랄 정도였으니.
이는 자연스러운 사고의 흐름이었다.
유리온의 관점에서 현재 루네시카는 더는 회생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서 그들이 얻은 정보는 항상성을 자랑하는 초월자가 이렇게까지 망가질 수도 있다는 사실 외에는 없는 듯했다.
그때였다.
“유리온, 길을 잘못 들었다면 넌 어떻게 할 거지?”
“뭐? 그야…… 돌아가서 다시 길을 찾겠지.”
“초월자란 족속이 그렇다. 착각이든 뭐든 이상과 정반대로 나아가 후회할지언정 결국 제자리에 멈춰 서는 법이 없지.”
베르덴이 뺨에 묻은 루네시카의 피를 아무렇지 않게 훔쳤다.
“이상은 변하지 않는다. 방향이 틀렸다면 올바른 방위를 찾으면 된다.”
루네시카가 피로 얼룩진 감옥을 짚었다.
“그게 우리의 본질이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루네시카가 다시금 의자에 착석했다. 보기 흉한 몰골이었다. 짐승에게 난자당한 듯 성한 데가 거의 없었다.
“내막은 이해했어. 드라벤이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알아들었고.”
루네시카가 한껏 기지개를 켜곤 턱을 괴며 미소 지었다.
직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유리온이 흠칫했다.
‘정신이…… 멀쩡하잖아.’
분명히 의식이 아예 손쓸 수 없을 정도로 파탄이 났다고 직감했는데, 마치 다른 사람으로 변해 버린 것 같았다.
“그래도 네 입으로 직접 듣고 싶네.”
루네시카가 진득한 살의를 노출했다.
“아칸드, 죽여 줄 수 있어?”
“……!!”
그녀는 더 이상 옛 왕을 폐하라고 부르지 않았다.
옛 왕을 부활시킨 두 번째 하인이 도리어 충성의 대상에게 적의를 향했다. 평범한 적개심이 아니었다. 그건 증오처럼 짙었다.
대륙을 위협한 적이 느닷없이 아군으로 돌변하는 기묘한 분위기에 벤디에와 유리온의 눈길은 자연히 베르덴에게 모였다.
“당연히.”
“대답 한번 시원하네.”
루네시카가 손을 뻗었다. 베르덴이 포션을 하나 건넸다. 으깨진 눈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 외 더럽고 옅은 상처에 살점이 차올랐다.
“아칸드의 자만심을 찔러 크세리온 제국에 내부 분열을 일으킨다…… 뭐, 성공하면 그보다 효과적인 모략도 없겠지. 문제는 내가 어떻게 어떤 의심도 받지 않고 아칸드의 측근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돌아가냐는 건데.”
그녀는 평소의 드라벤을 대하듯이 베르덴에게 물었다.
“구체적인 계획이 뭐야, 단장?”
베르덴이 공유한 기억은 중요한 장면만 붙여서 요약적으로 전달한 거라, 어찌 제국을 분열시킬지는 루네시카도 아직 알지 못했다.
“네가 탈옥하게 되면 세계 연합은 전쟁 시작부터 혼란에 직면하게 된다. 세계 연합장인 나는 지배력을 상당히 잃을 거고. 그러니 너를 풀어주는 방법은 하책 중 하책이지.”
“으흠.”
“연합의 사기를 높이는 것과 아칸드가 의심하지 못하게 하는 것. 네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는 이 둘을 함께 도모해야 한다. 여기서, 나와 드라벤의 결론은 일치했다.”
베르덴은 양손을 겹쳐 무릎에 얹었다.
“루네시카, 미련없이 죽어라.”
육체가 걸림돌이라면 버리면 그만.
영혼만이 해답이다.
* * *
“…….”
“…….”
벤디에와 유리온은 여전히 황당함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지하 감옥을 나섰다.
서로 죽고 죽인 베르덴과 루네시카가 전쟁의 판도를 바꿀 계획을 논의하는 모습은 다시 생각해 봐도 이해의 범주를 넘어섰다.
“루네시카가 내부에서 얼마나 큰 분열을 일으킬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수는 분명 아칸드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할 거다. 물론 주 전력이 아칸드에게 닿을 수 있도록 전쟁에서 최소한의 승기를 잡는 게 우선이겠지만.”
베르덴이 마지막으로 지상으로 올라왔다.
“궁금한 게 여러 가지 있을 줄 알았는데 아까부터 조용하군. 질문이 없다면 해산하지.”
“질문이 없는 게 아니라 어이가 없어서 그래.”
유리온이 양 허리를 잡고는 턱을 쭉 올렸다. 고대 유적의 구조물 사이로 하얀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이 눈동자에 반사됐다.
“그러니까 대충 정리하자면…… 사실 알고 보니 옛 왕은 주검의 영광이 추구하는 이상과 반대되는 세상을 추구. 그게 원인이 되어 너는 드라벤의 영혼을 통해 주검의 영광의 새로운 수장이 됐고, 루네시카는 그걸 인정. 그리고 이제 루네시카는 제국으로 들어가 부활한 주검의 영광을 계몽시켜 옛 왕을 배신하게끔 한다는 거지?”
“정확하다.”
“정상 회의에 왜 이렇게 늦었나 했더니, 이런 걸 준비하고 있었나. 생각지도 못한 흐름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납득은 했다. 뭐…… 납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기도 하지만.”
유리온은 하나하나 따져 묻는 대신에 베르덴이 주도하는 기류에 순응했다.
‘어째서 베르덴이 그렇게 세계 연합장이 되려고 했는지 알겠군. 왜 배타적인 루아스 교국을 악착같이 휘하에 두려고 하는 건지도.’
베르덴이 연합을 지휘하지 않으면 가진 재원을 온전히 활용하기 어려워진다. 루아스교나 지휘부를 설득하는 것 자체가 고역이고 낭비일 터.
정보 유출과 효율을 감안하여, 베르덴이 반드시 세계 연합의 정상에 서야 하는 목적과 근거가 너무도 자명했다.
벤디에가 말했다.
“일전에 대륙은 외적에 직면해 있다고 했었죠.”
동대륙 남부에서 여제와 충돌하고 아드리안을 구해 낸 뒤, 이 초월자 연합 본부에서 베르덴이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인물이 벤디에와 유리온이었다.
“그 외적이, 루네시카를 통해 보여 준 초월자의 본질과 관련이 있습니까?”
벤디에가 이야기의 중점을 짚었다.
베르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초월자는 각자의 이상을 추구하기에 본능적으로 외력에 저항한다. 이상에 방해가 된다면 죽어도 결코 굽히지 않지.”
“그게 초월자니까요.”
“만약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알 수 없는 혼돈이 도래한다면 내 말을 떠올려라.”
베르덴은 감옥문을 잠갔다.
“그나마 등을 맡길 수 있는 것은 스스로 각성한 자들뿐이다.”
각성한 자는 초월자를 의미했고, 스스로 각성한 자란 신물을 통해 초월자가 된 교국의 신인을 배제한 초월자를 뜻했다.
“알겠습니다.
“일단 명심해 두지.”
두 초월자는 그 말을 무겁게 받아들였다.
대화가 잠시 더 오가고 세 명의 초월자는 그렇게 해산했다.
베르덴은 감옥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다른 쪽 입구가 열렸음을 인지했다. 주먹에 피가 좀 묻은 그하룬이 술을 들이켜며 걸어왔다.
“때렸나?”
“헛소리하길래 아가리를 두드려 줬지. 네 말대로 머리가 돌아 버린 난쟁이이긴 하더군. 근데 역시 놈의 재능은 진짜였다.”
그하룬은 목이 마르지도 않는데도 괜히 술병을 연거푸 머금었다.
베르덴이 팔짱을 꼈다.
“녀석에게 이용 가치가 있다고 보고 있군.”
“……없지는 않지.”
“그럼 그림멜의 신병은 네게 맡기겠다.”
그하룬이 얼굴을 찡그렸다.
“맡기긴 뭘 맡겨? 귀찮게. 그러다 저 새끼 풀리면 지랄 난다. 그냥 처형해 버려.”
“그건 네가 결정해야 할 몫이지.”
베르덴은 마치 물 흐르듯이 그하룬에게 그림멜의 생사여탈권을 넘겼다. 그가 그하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하룬이 그 뒷모습을 응시했다.
“녀석, 제멋대로 굴기는.”
마음 같아서는 망치로 그림멜의 머리통을 완전히 부수고 싶다. 그림멜은 그의 드워프 정신을 정면으로 모독하는 놈이었기에.
만약 예전의 그하룬이었다면 한마디 말조차 붙이지 않고 보자마자 죽였으리라.
하지만, 사정이 조금 달라졌다.
그하룬은 고민했다.
여태까지처럼 그 누가 뭐라고 하든 간에 전통을 중시하며 살아갈지, 아니면 신념을 훼손하는 한이 있더라도 주변을 지켜야 할지.
과연 쑥대밭으로 변한 세상에서 그하룬의 절개는 계속해서 의미를 가질 것인가?
“……정이란 게 뭔지.”
그하룬은 아직 답을 내릴 수 없기에 술로 대답을 미루었다.
* * *
주검의 영광───백골의 비올라.
“……저기가 어레인인가.”
옛 왕의 전령이 주인 없는 땅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