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8화 죄인들의 개전 (2)
이자벨라가 행운의 선율가로서 활동할 때 마부를 자처했던 클린턴이 아내와 딸을 데리고서 거대 도시, 가르간트로 이주했다.
대대적인 피난 권고를 받아들인 것이다.
피난민 거주 구역에서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부대껴 살아가기에는 가족이 걱정됐는데, 다행히 이자벨라가 도와준 덕분에 그 가르간트에서 상당히 괜찮은 집을 구할 수 있었다.
딸, 마릴린이 거리가 훤히 보이는 창가에서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아빠, 우리 여기서 살아요? 우리도 이제 거대 도시 사람이에요? 와아아!”
“이자벨라 씨에게 너무 민폐를 끼치는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여보…….”
아내, 웨나가 최고급스러운 소파를 신기한 듯이 꾹꾹 누르면서 우려를 표했다.
클린턴도 그 마음을 아주 잘 알았다.
이형종의 맹독에 죽어 가던 아내와 딸을 연금술로 치료해 주고, 평범한 마부라면 상상조차 못 할 여유로운 삶을 누릴 돈도 벌게 해 주고, 피울음 역병이 만연할 땐 걱정이 된다며 돌봐 주고…….
이번 전쟁은 특히 위험하다고 안전한 가르간트에서 지내라며 집까지 마련해 줬다.
부채감을 느끼는 게 당연했다.
클린턴 가족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그녀가 늘 입버릇처럼 말해도.
‘언젠가 빚을 갚을 때가 오겠지.’
클린턴은 목걸이로 만든 행운의 금화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행운의 목걸이는 웨나와 마릴린도 언제나 몸에서 떼어 놓지 않았다.
이자벨라가 음악가로서 은퇴할 때 클린턴 가족에게 하나씩 선물한 것이었으므로.
───와아아아아아!
바깥에서 큰 소리가 들린다.
그렇다.
오늘은 가르간트에서 전쟁에 관련된 중요한 심판이 내려지는 날이다. 그는 국제 신문을 자주 챙겨보기에 나름대로 소문에 빠삭했다.
“웨나, 잠시 나갔다 올 테니 여기서 마릴린을 잘 보고 있…….”
“저희도 같이 나가요.”
거실에 신문이 나뒹구니 웨나도 국제 정세에 대해 모르지 않았다.
“어리다고 눈을 가리기만 해선 안 되잖아요. 물론 아이가 볼 광경은 절대로 아니지만…… 그래도 알아야 할 건 알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부모로서요.”
“……그렇지. 맞는 말이야.”
손바닥으로 햇빛을 가린다고 해서 태양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게 현실이다.
어렵게 가져온 짐은 대충 정리하고 다시 나갈 채비를 갖췄다. 인파가 엄청날 것이다. 클린턴 부부는 마릴린을 사이에 두고 손을 꼭 잡고는 혼잡한 거리에 발을 디뎠다.
“늦게도 나오네.”
“엇.”
로브로 전신을 가린 여인이 벽에 기댄 채로 클린턴 가족을 기다리고 있다. 후드의 그림자가 얼굴을 아주 가리고 있지만 그녀가 누군지 착각할 리는 없었다.
“이렇게 빨리 재회할 줄은 몰랐소. 여비를 준다고 해도 단호하게 거절하고, 다시는 볼일 없을 거라는 듯 떠나길래…….”
“난 이 도시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거든. 기왕이면 아는 사람이 안내해 주면 좋잖아? 나 혼자서 하나하나 알아보는 건 시간 낭비고.”
“안녕하세요, 엄청 아름다운 언니!”
“안녕, 꼬마야.”
“거처는 구하셨나요? 못 구하셨으면 저희와 같이 지내셔도 되는데요.”
“됐어. 당장 지낼 곳 하나 구하는 게 뭐 어렵다고. 너희에게 신세는 졌지만 홀몸으로 화목한 가정 사이에 껴 있는 거 답답해.”
클린턴이 헛웃음을 지었다.
“안내야 쉬운 일이지. 지금 광장으로 가는 길이니 가면서 설명해 주겠소.”
”알아서 따라갈 테니까 뒤돌아보지 마. 가족끼리 느긋하게 지내.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볼게.”
“그렇게 하겠소.”
“근데 아까 말했던 여비는?”
“부족하면 말하시오.”
여인의 손에 쥐어진 지폐 뭉치.
클린턴 가족은 여인이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그녀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자벨라도 은퇴할 때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험은 쌓여 익숙함이 되었다.
터벅, 터벅.
여인 – 델하룬의 여제, 히스릴 델 로하룬은 지폐를 챙기고 클린턴을 따라갔다. 그녀는 자부하는 미모를 철저하게 감춘 채 눈동자만 굴렸다.
‘이 기척…… 여기도 감시 구역. 오늘 특별한 행사가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이런 거대한 도시를 상시 통제해? 영역에 미친 초월자인가?’
동대륙 남부에서 베르덴에게 진 히스릴은 사문으로 겨우 도망쳤으나, 곧 통로에서 튕겨 나가 중앙 대륙에 불시착했다.
기는 완전히 고갈되고 온몸은 만신창이.
클린턴이 리산드로의 열매를 희석한 포션을 선의로 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다시 걷는 데만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을 것이다.
물론 겉으로만 괜찮아 보이지 내상은 아직 심해서 전투는 무리였다. 클린턴의 포션은 아드리안의 것보다 약효가 훨씬 약하기도 했다.
그래서 히스릴은 클린턴의 도움을 받아 가르간트로 들어왔다. 방해받지 않고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라고 판단한 것.
도시에 입성하자마자 클린턴 가족과 작별한 그녀는 자유를 만끽할 궁리부터 했다. 돈? 그쯤은 뒷골목에서 수십 명쯤 처리하면 벌 수 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생겼다.
여기, 가르간트.
사방에서 흐릿한 기척이 느껴진다.
투명한 마법적 안개가 도시에 자욱한 것처럼.
만약 히스릴이 반사적으로 존재감을 밑바닥까지 끌어내리지 않았다면 대응할 겨를도 없이 발각됐을 터였다.
직감이지만 아무래도 초월자에게 특히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듯했다.
이래서야 무력 행사는 불가능.
대도시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뒷골목 범죄 조직을 쓸어버려서 벼락부자가 되고자 했던 히스릴의 계획이 시작부터 어그러졌다.
결국 남은 것은 존재감을 드러낼 수 없는 아름다운 초월자가 한 명. 당장 눈에 띄지 않고 살려면 클린턴의 용돈이 필요 불가결했다.
뭐, 같이 지낼 생각까지는 없다.
여관이나 길바닥에서 자면 되니. 그녀는 그 정도로 염치가 없지 않았다.
‘계외, 이그나시아라고 했었지. 공을 들였다고 해도 이만한 권역을 통제 영역으로 구축한 능력. 내가 아는 정신계 초월자들과는 꽤 다르네. 지금은 마주치면 안 되겠어.’
히스릴은 한여름에 한겨울 옷을 입은 것처럼 격을 은폐했다.
이따금 질문하며 클린턴 가족을 졸졸 따라다니다 보니 가르간트의 성문에서 대광장으로 곧게 이어진 대로에 도착했다.
좌우로 갈라져 구경하는 수많은 군중.
군중을 억제하는 실력자들.
‘축제가 따로 없군.’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 연합을 찬양하는 사람들의 함성이 잦아들었다. 고요해진 분위기. 조용한 도심에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길게 울려 퍼지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였다.
‘과연. 분위기는 잘 잡았네, 베르덴.’
히스릴은 아는 얼굴을 보며 입술을 핥았다.
‘전쟁에 앞서 사기를 최대로 끌어올리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희생양이야.’
철컹…… 철컹…….
호송 마차 위에 얹힌 금속 감옥이 살아 있는 것처럼 미세하게 진동했다.
그 안에 갇힌 초월자가 천천히 눈을 떴다.
루네시카 안테르노아.
주검의 영광이 자행한 모든 악을 상징하는 죄인이 처형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 * *
제1차 초월자 전쟁에서도 이런 방법으로 초월자를 처형하지는 않았다.
크세리온 제국이 발호하기 전에도 그러했다.
다른 뜻을 추구하는 초월자 세력들이 동대륙, 중앙 대륙, 서대륙을 각각 지배하면서 서로 간에 몇 번이고 충돌해 피를 봤지만, 초월자를 죽이면 죽였지 생포한 경우는 사실상 없었다.
적대 초월자는 할 수만 있다면 그 자리에서 죽이는 게 올바른 기조였다.
살려 두면 무엇을 할지 모르니까.
후환이 될 수 있으니까.
완전히 구속했다고 해도 안심할 수 없으니까.
초월자가 얼마나 끈질기고 집요한지 그들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상대로부터 어떤 대가를 받더라도 초월자 하나를 제거하는 편이 더 이득이었기에 애초에 포로 협상은 고려하지도 않았다.
철컹…… 철컹…….
‘하인에서 죄인.’
주검의 영광의 두 번째 하인, 영혼을 노획하는 자, 루네시카 안테르노아가 조소하며 바닥을 향해 있던 시선을 높였다.
하늘은 화창했다.
햇빛이 따스한 날씨였다.
‘세상이 다르게 보이긴 하네.’
모든 것이 허망하면서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런 모순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어떠한 망설임도 없었다.
“교국의 성소에서 학살을…….”
“역병 때문에 우린…….”
“내 고향이 언데드에게…….”
군중은 저마다의 비극을 속삭일 뿐 힘껏 토해 내지 못했다. 루네시카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대부분 원망이 아니라 공포에 질려 있었다.
무력화되었어도 그녀의 존재 자체가 가진 압도감을 일반인은 이겨 내지 못했다.
다 죽어도 초월자다.
여전히 살아 있는 초월자.
초월자의 힘을 아는 사람들은 오히려 일반인보다도 긴장이 역력한 상태로 죽음으로 나아가는 루네시카를 감시하듯이 노려봤다.
‘몽매한 것들.’
루네시카는 그들의 목에 하나같이 걸려 있는 황금빛 정십자가를 경멸했다.
철컹!
정지한 호송 마차.
관성이 사라지자 자동으로 개방되는 문.
탁.
루네시카는 홀로 걸어 내려와 맨발로 가르간트를 밟았다. 그녀를 안내하는 이도, 윽박지르며 끌고 가는 이도 없었다.
타인의 침묵과 함께 그저 홀로서서 드넓은 광장을 바라보다가 이내 나아갔다.
낮과 대조적인 검은 로브.
거슬릴 정도로 호화롭지는 않았지만 얕보일 정도로 허름하지도 않았다.
카르륵…… 카르르륵…….
루네시카는 손목을 한데 묶고, 발목을 각각 장식한 특수한 구속구를 차고 있었다. 구속구에 달린 사슬이 발길을 따라 길에 질질 끌리며 날카롭고 소름 끼치는 소음을 자아냈다.
사람들의 침묵은 더더욱 깊어졌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도 어떠한 감정조차 내비치지 않는 비인간적인 면모는 나약한 인간 따위가 재단할 것이 아니었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초월자의 위상을 드높였다.
“…….”
광장 중앙에 당도한 그녀가 적당한 속도로 계단을 올랐다. 이 영광스러운 죄인은 비로소 처형대에 올라 사형집행인을 직면했다.
루네시카는 세계가 바라보는 공간에서 베르덴과 마주했다.
‘비장한 얼굴. 영악하긴.’
짤막한 소감을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루네시카가 처형대 한가운데 섰다.
정면을 응시했다.
빛에 중독된 무지한 인파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파아아아아아아앗.
동서남북에서 시작된 네 개의 마력 광선이 상공을 가리켰다. 베르덴이 아닌 고층 건물 옥상에서 시작된 빛이었다.
갑작스러운 인위적인 마법적 현상에 시민들이 웅성거렸다.
“대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갑자기 마력이라니?”
“위상들께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에온에서 벌인 일인 듯싶은데.”
광장과 이어진 사실상 모든 거리가 사람으로 꽉 찬 터라 미동에도 거대 도시 전체가 들썩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현재 이곳에 모인 구경꾼의 수는 가르간트의 세계 회의를 방불케 했다.
누군가가 처형대의 하늘을 가리켰다.
“잠깐! 모두 저길 보게!”
“저건…….”
네 개의 마력의 광선이 굴절되고 분리되어 수많은 빛으로 쪼개졌고, 그것들이 빠르게 기하학적인 형상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감도. 오차 범위 이내. 수신 양호.]
[확인했습니다. 통신 장치를 연결하겠습니다.]
알파와 베타가 새롭게 발명한 합작품, 기억 골렘의 통행 형태───화상(畫像) 골렘.
기억 골렘은 기록된 장면을 반복해 보여 주지만, 화상 골렘은 현재의 장면을 다른 화상 골렘을 통해 외부에 투영해 공간의 제약을 초월한다.
화아아아아악.
광장 부근에 몰린 대중 전부가 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해진, 마력으로 짜여진 처형대의 광경이 고스란히 재현되었다.
심지어 실시간으로 움직이는 베르덴과 루네시카의 모습까지 반영됐다.
가르간트뿐만이 아니다.
이 처형대의 현장은 ‘대륙 각지의 주요 도시’에서도 전개되고 있다. 그야말로 세계가 루네시카의 죽음을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마법 기술…….”
취미든 일이든 매직 아이템을 제작하는 마법사들이 감탄했다.
에온으로부터 사전에 고지를 받았던 국제 신문사의 기자들은 흥분으로 덜덜 떨리는 손으로 메모장과 펜을 꽉 붙들었다.
저 기술이 상용화되면 정보의 속도는 과연 얼마나 빨라질 것인가!
그러나, 놀라운 정경임에도 불구하고 처형대를 찾아온 사람들의 신경은 여전히 루네시카에게 무게를 두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신기술의 등장으로 번졌던 소란이 사그라들 무렵이었다.
베르덴이 말했다.
“평화는 무너졌다.”
옆 사람의 심장 박동 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정적이 깔린 가르간트, 그 거대하고도 적막한 호수에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
베르덴의 목소리는 통신 장치를 통해 타 대륙에도 전달됐다.
베르덴이 재차 강조했다.
“평화를 빼앗겼다.”
“…….”
“함께 식탁을 나누던 이웃은 서늘한 주검이 됐고, 사랑하는 가족의 자리에는 낯설고 공허한 흔적만이 남았다. 우리의 일상은 사라졌다. 영혼이 떠난 육신이 잠든 무덤조차 더는 안식처가 아니니, 우리의 침묵은 묵념이 되었고, 우리의 비명은 유언이 되었다.”
“……”
“질서를 잃어버린 이 대지 위에서는 그 누구도, 그 어떤 생명도 안전하지 않다. 8세기 전 초월자 전쟁에서 대륙 절반을 불태운 크세리온 제국의 정복자, 옛 왕이 돌아왔다.”
쿵.
베르덴이 한 손에 쥔 [인테리스]로 처형대를 짚어 둔중한 울림을 퍼뜨렸다.
“그리고, 여기. 옛 왕의 하인이 있다.”
무수한 시선이 하나로 모여들었다.
“주검의 영광.”
“…….”
“두 번째 하인, 루네시카 안테르노아.”
“…….”
“제1차 초월자 전쟁의 학살자, 피울음 역병의 배후, 성소 학살의 주모자, 신성한 봉인을 파훼하고 옛 왕을 부활시킨 장본인. 현재에 이르러 제2차 초월자 전쟁을 야기한 크세리온 제국의 초월자.”
베르덴이 루네시카의 죄업을 나열했다.
“루네시카 안테르노아는 우리의 안온을 도살하고 세상을 전란으로 몰아넣었다. 이에 나, 에온의 베르덴. 한 명의 초월자이자 세계 연합의 수장으로서 만인의 의지를 대변하여 선고한다.”
작은 불씨가 붙은 기세를 걷잡을 수 없이 키우는 데 긴말은 필요 없다.
오직 실체적 증명만이 답일지니.
휘몰아치는 광대한 마력.
“그 판결은 내 손으로 처단한 첫 번째 하인, 드라벤 르마르크와 다르지 않다.”
쿵!
처형장이 단호하게 흔들렸다.
“루네시카 안테르노아, 사형.”
초월자의 죽음이 공식적으로 명시됐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들으니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사람들은 마음속에 거대한 바위가 떨어진 것 같은 압도감에 전율했다.
처형장을 중심으로 이는 회색빛 폭풍.
검붉은 광채가 명멸했다.
“두려워하되 굴복하지 마라.”
베르덴이 처형을 함께하는 모든 이에게 목소리를 높여 선언했다.
“옛 왕은, 반드시 멸절된다.”
마도 <파멸>
폭풍의 눈에서 추락한 파멸의 벼락이 [인테리스]에 깃들었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 절대적인 파괴의 개념이 가르간트에 현현했다.
군중은 여파에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도 감히 눈을 떼지 않았다.
안도감이 공포심을 극복한 것이다.
세계 연합과 초월자들이 얼마나 강대한지 피부로 느끼며,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을 지켜 준다는 확신에 이윽고 저도 모르게 함성을 터뜨렸다.
그제야 루네시카를 증오하며 그녀의 죽음을 바라는 소리 또한 들려왔으니.
콰르르르릉…….
메아리치는 천둥 소리.
루네시카는 등 뒤로 현뢰가 겨누어졌다. 베르덴은 망설이는 사내가 아니었다. 루네시카도 그걸 아주 잘 알고 있다.
‘지난 약 800년 동안 끝없이 나아갔는데…… 비로소 시작이네.’
크세리온 제국 분열 계획의 시작은 이러했다.
베르덴의 마도가 루네시카의 영육을 꿰뚫는 순간 완전히 사멸하는 척 영혼을 총 다섯 개로 조각낼 것이다.
본래 혼자서는 성공률이 1할조차 안 되는, 심지어 경지마저 극도로 손상되는 자살행위이지만 그녀에겐 그걸 가능케 할 유일한 조력자가 있다.
드라벤이 개척한 명운의 마도와 그 숙련도를 전부 이어받은 새로운 흑마법계 초월자…… 위대한 주검의 왕, 베르덴이.
‘단장이었으면 이럴 때 뭐라고 했으려나.’
루네시카가 깊게 숨을 내쉬면서 영연계의 마도를 개방할 준비를 갖췄다.
‘아칸드. 네놈도 절망을 느낄까?’
함께 길을 너무 오래 걸어서일까.
루네시카는 우연히도 드라벤이 베르덴에게 마도를 계승했을 때 떠올렸던 것과 같은 생각을 하며 고개를 바로했다.
정적은 그녀의 취향이 아니다.
죽어도 그냥 죽을 마음은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닌 루네시카 안테르노아 자신의 죽음이니.
빛이 선이라면 마지막까지 악답게.
흑마법사라면 흑마법사답게.
“여신을 향한 믿음이 언제까지 갈까?”
루네시카가 빛의 루아스를 모독하며 입꼬리를 쭉 끌어 올렸다. 그야말로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 어린 비웃음이었다.
“거짓말투성이.”
루네시카가 천국을 꿈꾸는 인류를 저주했다.
동시에 베르덴이 스태프를 비틀었다.
“처형.”
“빛은 너희를 구원하지 못해.”
“집행.”
콰드드드드득!
파멸의 창날이 뒤에서 루네시카의 살아 있는 심장을 관통했다. 내부로 파고드는 불합리한 마력. 울컥 피를 토한 그녀가 확 고개를 쳐들었다.
벌어진 눈과 입, 코, 그리고 귀에서 검붉은 광휘가 뻗어 나왔다.
마도 <명운>
마도 <영연계>
찰나에 두 개의 마도가 교차한 순간 눈부신 섬광이 폭발했다.
꺄아아아아아악───!
칼처럼 날카로운 단말마의 비명이 도시 전역으로 확산했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
검붉은 빛의 기둥이 솟구쳐 대기를 강타. 태양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도심은 그와 같은 색으로 물들었다.
세기말의 풍경이었으나 사람들은 그것으로부터 질서와 희망을 보았다.
“이야…….”
고층 건물 옥상에서 구경하고 있던 이그나시아가 탄성을 흘렸다.
“진짜 제대로 죽였네. 무서워라. 베르덴도 아주 작정했나 봐.”
이그나시아는 영혼을 느끼지 못하기에 루네시카의 영원한 침묵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육체와 정신이 사라진 이상 죽는 게 당연했기에.
하지만.
이그나시아 옆에 자리한 다크워튼 마탑주, 라인델 넥스레온은 가르간트에서 어떤 작은 죽음도 감지하지 못했다.
그가 파괴가 요동치는 하늘을 응시했다.
파멸로부터 보호받은 루네시카의 영혼이 곧 다섯 갈래로 찢어지더니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게 아주 어렴풋이 보였다.
“…….”
라인델은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진실이야 어떻든─────베르덴이 직접 집행한 루네시카 안테르노아의 처형 장면은 어떤 왜곡도 없이 국제 사회에 생중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