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1화 강수(強手) (1)
대기권 바깥에서 날아온 것이라고 추정되는 검붉은 메테오가 물질계를 초토화했다.
화상 골렘이 생중계하던 폴테인 평야는…… 언데드 군단 중심부에서 살아서 경험하지 못한 대규모 폭발이 발생한 직후, 섬뜩한 노이즈가 발생해 통신과 영상이 동시에 중단되었다.
동대륙 남부로 이어진 에카첸 산맥.
동대륙 남부 제1토벌군단과 제2토벌군단이 가만히 입을 벌리고 서 있다. 수정체가 마를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마다 반사적으로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
“…….”
“…….”
베르덴 선배에 대해 나름대로 잘 안다고 자부하는 유니아와 카인도, 전직 워 로드 출신인 오스가르도, 베르덴을 숭배하는 알데반도 뭐라고 해야 할지 생각이 멈춰 버렸다.
“허.”
실리스 여왕과 에스퍼렌사 공작가 일가, 칼리아와 그녀를 태운 드레드미어도 괜스레 입술만 뗐다 붙였다 여운에 압도되었다.
화산섬의 마탑과 다크워튼 마탑은 정신적으로 아주 큰 충격을 받았고, 수인 대부족의 비왕, 묘왕, 영왕은 털이 곤두선 채 얼어붙었다.
그들은 상식을 웃도는 힘을 접해 보았으며 충분히 이해도 하고 있었지만…… 크세리온 제국과의 개전을 알리는 베르덴의 초위 마법은 상상력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은 마법 재해였다.
언령의 기사단을 위시한 하이랜디아 최정예군과, 그들 한 명 한 명이 국가급 전력의 범주에 도달해 있는 템플의 제자들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더니 촉촉한 지면에 톡 떨어졌다.
루아스 교국에서 온 성기사들과 성직자들, 그리고 이단심문관들은 저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기도문을 읊었다.
마스터, 벤디에 카에나르.
서약자, 유리온 하이로스.
교황, 로마누스.
초월자들의 깊은 침묵까지 감도는 와중에 유리온과 로마누스의 통신 장치에 빛이 들어왔다. 토벌군단장을 향한 연락이었다.
“……아, 그렇군. 알겠다.”
“……예, 알겠습니다.”
에온의 정보관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두 군단장이 고개를 들었다.
페일이라고 했던가.
유리온이 뒤를 돌아봤다.
“메테오의 충격파로 인해 마력 흐름과 공간 자체가 비틀리는 바람에 영상 송신이 먹통이 되어 버렸다는군. 연합이 계획한 대로 개전됐다는 소식이다. 뭐, 폴테인 평야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어차피 결과야 뻔하겠지.”
“…….”
“이거 참.”
유리온이 유쾌하게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세계 연합장이 우리가 대충 알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한 모양이다. 옛 왕이고 시타델이고 뭐고 저거 한 방 맞으면 끝나는 거 아닐까? 안 끝나면 그것도 말이 안 되는 건데.”
“…….”
“어쨌든.”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승산은 가시적이다. 그렇지?”
유리온은 하이랜디아의 군주다운 갑옷차림으로 로마누스를 향해 턱짓했다.
아직 운석 충돌로 인한 파멸을 뇌리에서 잊지 못한 로마누스가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다른 대륙은 알아서 잘할 거라고 믿자고. 그러니 우리만 잘하면 된다.”
군왕의 마갑을 착용한 백색의 군마에 탄 유리온이 검을 빼 들었다.
“나, 서약자! 유리온 하이로스!“
그의 목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하이랜디아의 왕이자, 동대륙 남부 정화의 지휘를 맡은 제1토벌군단장으로서 선포한다! 이 시간부로 옛 왕과의 전쟁이 시작됐다! 목표는 산 자를 언데드로 타락시키는 사문의 폐문!”
울부짖으며 앞다리를 들어 올린 유리온의 군마가 남쪽으로 몸을 돌렸다.
“전진한다!”
유리온이 신호하자 벤디에가 격을 드러내며 모두의 사기를 한층 더 키웠다.
함성과 자신감이 토벌군단을 지배했다.
동대륙 남부 제2토벌군단장인 로마누스가 성호를 그었다.
“무구한 광명을 위해.”
세계 연합이 타락의 땅으로 진군했다.
* * *
아르나크 제국의 영토에 닿아 있는 펜드렌호의 가장자리에서도 폴테인 평야에서의 첫 전투가 어떻게 개전됐는지 보고 있었다.
모험가 총동원령에 응한 흑요 등급 모험가들.
대형 함선에 탑승한 적발의 유르발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곤란할 때마다 하는 습관이었다.
“미친, 8위계 초월자란 건 저렇게까지 강한 거냐? 아니, 강함을 논하는 수준이 아닌데? 거의 뭐 신이나 다름없잖아.”
“루아스교가 있는데 신을 논하는 건 조금 그렇지 않아요?”
“초월자라고 할지언정 정도를 벗어나긴 했습니다. 테아렐도 저런 거 할 수 있습니까?”
“아니.”
흑해, 테아렐이 당당하게 고개를 저었다.
“7위계 초위 마법으로는 어림도 없어. 8위계는 잘 모르지만, 저런 파괴력을 지닌 초위 마법은 아마 거의 없을 거야.”
“8위계 중에서도 특별하다는 건가! 하하! 그렇다면 이 시대는 전설로 일컬어지는 시대로군! 역사에 우리 이름을 남기려면 열심히 토벌해야겠어.”
“……그러게.”
과거에 흑해의 리더였던 마검사 다엘이 길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는 마침 통신 장치로 영상 송출이 끊어진 폴테인 평야의 자세한 상황을 보고받은 테아렐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지휘를 부탁해, 테아렐.”
“알았어.”
서대륙 남부.
펜드렌호 토벌군단장으로 임명된 테아렐이 바람에 이는 호수의 물결을 반전시켰다. 자연스럽게 함선들이 호수의 중심부로 나아갔고, 그것은 개전이 선언됐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언데드 토벌. 시작.”
해상 함대와 비행정 함대.
아르나크 제국과 모험가 길드, 마탑들, 그리고 여러 국가로 구성된 대규모 토벌군단이 물가를 떠나며 깊은 수역으로 나아갔다.
대륙에서 두 번째로 거대한…… 죽음으로 오염된 호수를 향해.
* * *
중앙 대륙과 마경을 구분하는 경계선.
“하하하하! 과연, 개전 마법으로 저보다 인상적인 광경은 없겠군!”
아르나크 제국의 워 로드, 레그리트 나르실리아가 아주 마음에 든다며 웃었다. 그녀는 이자벨라와 아예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둘이 언제 그런 친분을 쌓았는지 의문 어린 시선이 쏟아졌지만, 그들이 특별한 의미에서 같은 종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거의 없었다.
“당연하지, 가주가 누군데.”
이자벨라는 자랑하듯이 대답했지만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8위계 초월자의 베르덴이 보여 줄 수 있는 최대의 마법을 두 눈으로 실제로 목격한 것은 처음이었기에.
이자벨라가 슬그머니 레프라기움 마탑 쪽에 눈길을 향했다.
과연 초대 마도왕 측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예상대로, 그리고 예상 이상으로 대행자, 메이아의 표정 변화는 다채로웠다. 상공에 머물러 있는 그녀의 눈에서 경악을 읽을 수 있었으니.
메이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남자가, 기어코…… 기어코 재현했어.’
지난 마도 축제에서 베르덴이 퍼포먼스를 위해서 우주의 유성체를 불러내는 영창 마법을 외웠을 때 그 특유의 압도감을 느꼈다.
그것은 베르덴이 ‘태초의 영창 마법’을 쓸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의미였다. 그 대가를 견딜 수 있는지 없는지는 무관하게 말이다.
하지만…… 설마 태초의 영창을 재해석해 자신만의 초위 마법으로 재구축할 줄은 몰랐다. 그걸 8위계에 도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지금 시점에 성공적으로 구현할 줄도 몰랐다.
통신 장치에 빛이 들어왔다.
다른 토벌군단과 마찬가지로 임무를 시작하라는 연락이었다.
‘원형과 같은 유성체를 불러낸 건 아니었어. 규모는 그보다 작았지만…… 부족한 부분을 마도로 보완했다. 파괴력만큼은 충분히 신화 시대의 그것과 거의 다르지 않아. 게다가, 베르덴은 그 영창 마법의 부담을 온전히 감당하는 데 성공하기까지.’
메이아가 여운을 삼켰다.
‘아무리 발끝이라 해도…… 태초의 마법사께 닿아 있다……!’
섭리자, 데우스 위덴은 마력이 부족해서 우주에서 유성체를 불러내지 못한다.
베르덴은 그걸 무한한 마력으로 가능케 했다.
마탑의 동력원.
새로운 저항의 핵심체.
메이아는 마법계 초월자이지만 몸에 선지자의 피도 흐르고 있다. 앞날을 예측하는 것은 그녀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제멋대로 절대자의 길을 걷고 있는 베르덴의 미래는 한 치 앞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출발…… 하지…….”
마의 공포, 데미안이 성대가 녹아 달라붙은 것 같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진군을 종용했다. 그도 베르덴의 마법에 정신이 팔리긴 했지만, 그보다도 마경에 대한 관심이 우선이었다.
메이아가 표정을 지우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마경의 고유 환경은 토벌군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불리하게 작용한다.
더군다나 마경의 사문은 시체를 순식간에 언데드로 만드는 영향력을 발산하고 있으니 최대 및 최적의 효율을 고려해야 했다.
피해는 최소화.
전력은 극대화.
마경 토벌군단은 다른 군단의 본대에 비해서 아주 적었지만, 초월자나 초월자에 필적하는 강자가 다수 포진되었다.
부족한 숫자로 인한 필연적인 단점은 뒤에 쫓아올 지원대가 보완할 것이다.
“마경 토벌군단, 지금 진입합니다.”
생명과 죽음이 넘쳐 흐르는 미개척 지대.
메이아는 잡스러운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며 현재 역할에 집중했다.
기생의 대악마.
적룡 사르칸드라.
‘그 둘이 제대로 간섭할 틈이 생기기도 전에 사문을 파괴해야 한다.’
자칫하면 귀찮아진다.
* * *
쿠우우우우우…….
폴테인 평야.
나크텔의 단말이 혼란 속에서 비틀거리며 육체를 일으켰다. 한쪽 팔뚝과 두개골의 4할이 날아가 버린 상태.
의식이 점멸했다.
당장 앞에 보이는 것은 평야가 아닌 무지막지한 크레이터였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세계 연합의 개전 마법에 약 10만의 언데드 군단이 궤멸했다. 전쟁의 시작에 불과해 최고위 언데드들은 거의 투입하지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잃어버릴 만큼 가벼운 규모는 결코 아니었다.
무엇보다 세 명의 초월자가 합동해서 전개한 초위 마법 <움브리움>이 마법적인 상쇄는 커녕 순식간에 짓눌리다니…….
“……?!! 꺽, 끄극.”
영혼이 으깨지는 것 같다.
그렇다.
예의 그것이다.
루네시카의 영혼을 파괴한 그 마도의 개념.
나크텔과 티아즈라 모튼의 단말은 군단의 서쪽과 동쪽 끝에 자리하고 있었기에 가까스로 단말의 파괴는 면했지만…….
남쪽에 있었던 르카리아의 단말은 검붉은 운석에서 확산한 열과 압력에 가루조차 남지 않았다.
본체가 이곳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여지 없이 죽었으리라. 옛 왕의 권능으로 얻어 낸 삶이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그는 오판을 인정해야만 했다.
‘베르덴은 그냥 8위계 초월자가 아니다.’
다른 건 몰라도 직전의 초위 마법을 다시 전개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
영창 같은 게 필요해 보이니 약점은 존재할 터.
나크텔이 훗날, 다른 전장을 위해서 전략을 구상한 그때였다.
“……!”
정면에서 원소의 빛무리가 번쩍였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광!
세계 연합의 마법 폭격이 크레이터 주변부에 남은 언데드들을 휩쓸었다. 이미 전열이 무너진 시체들의 숫자가 빠르게 감소했다.
‘제법, 위력적이군.’
마도 <암리>의 장막으로 포격을 막아내며 그나마 현대의 마법군단의 수준을 가늠하려던 나크텔이 이내 흠칫했다.
자색의 광채가 가까워진다.
판단을 하기도 전에 그것은 이미 거의 목전에 닿아 있었으니, 나크텔이 즉석에서 사기의 창을 구현하여 휘둘렀다.
쩌엉!
충돌에서 밀려난 나크텔이 상대를 인식했다.
“천검…… 아드리안.”
“암리의 주인, 나크텔. 흑마법의 이치를 조작하는 초월자라고 들었는데.”
베르덴의 개전 마법이 떨어진 대지에 아드리안이 가장 먼저 도착했다.
“고작 너희만으로도 주군께 대적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그것도 단말 따위로.”
아드리안의 모습이 사라졌다. 나크텔은 움직임에 반응했다. 마력과 기운. 마법과 광검이 서로 맞닿으며 대기가 진동했으나, 잠시 동안 이루어진 교전은 그저 일방적인 공방이었다.
쩍!
나크텔의 단말이 수직으로 절단됐다. 직후 무수한 검기가 그 언데드를 조각내어 본체와 단말의 연결을 완전히 끊어 버렸다.
“나크텔의 단말, 처리했습니다.”
베르덴에 곧장 보고한 아드리안이 마저 서쪽을 정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쪽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콰아아앙!
콰과광!
콰과아아아앙!
티아즈라의 단말이 상체가 거의 반파된 모습으로 <시체 폭발>을 연달아 일으켰다. 빛의 보호막을 두른 레온하르트가 그 모든 충격을 무시하고 부패의 잔향을 파고 들었다.
‘이 검붉은 마도…… 닿는 순간 스며들어 영혼까지 손상을 주고 있습니다. 대체 어떻게 이런 마도가 있을 수 있는 거죠? 불합리한, 마치, 주검의 영광의 천적과 같은……!’
상상했던 것보다 고통이 심하다.
“끅.”
“하아압!”
티아즈라의 의식이 온전히 견디지 못하고 중심을 잃었다. 쩌억! 성검이 날아들어 단말의 상체와 하체를 분리했다.
‘아직…….’
그 순간.
티아즈라의 단말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쓸 수 있을 때까지 단말을 쥐어짠 것이다. 이는 정보 하나하나가 중요한 전쟁이므로.
난부(爛腐)의 골렘.
[그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주변에 널린 언데드 시체들이 한데 모여 썩은 시체 골렘을 만들었다.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사물을 부식시키는 마도의 언데드.
“루아스시여!”
<정화>
레온하르트의 기적이 난부의 골렘을 억제, 동시에 마법 폭격과 초월자로 압도된 전장에 연합군의 전위가 도착했다.
핏빛검, 레이라.
군림자, 라테온 오프니엘.
둘은 각각 골렘의 다리를 절단하고 방패 돌진으로 몸체를 쳐부쉈다.
“크하하하핫!”
전쟁을 처음 경험하는 도살자 갈리아크가 [훼월]을 힘껏 내던졌다. 언데드 골렘의 머리에 깊이 박힌 그걸 빼 들곤 짜릿짜릿한 전투의 흥분과 쾌감에 언데드들을 도살했다.
파아아아아앗!
레온하르트가 성검을 지면에 꽂아 흑마법의 영역을 지워 버렸다.
수십 미터 안팎의 모든 언데드와 시체를 남김없이 터뜨리려고 했던 티아즈라의 발악이 꽃을 피우기도 전에 무로 돌아갔다.
“……성검은 비극의 결핍을 채운다.”
무력화된 티아즈라의 단말이 성검 [루엔스]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속삭였다.
“루아스가 아니고서야 누가 그 비극을 당신에게 주었을까요. 어린 성자.”
“당신들의 말은 들을 생각─”
“레온하르트.”
베르덴이 공간 이동을 통해 직접 전장 한복판으로 넘어왔다.
티아즈라가 동요했다.
‘그 정도의 초위 마법을 구사하고도 벌써 아무렇지 않게 움직인다고……?’
베르덴의 그림자가 상체만 남은 티아즈라의 단말에 드리웠다.
“휘둘릴 것 같으면 대화는 삼가라.”
“……죄송합니다, 연합장님.”
“적의 수를 무력화하는 건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과도하게 주의를 기울이며 집착할 필요도 없다.”
티아즈라의 머리뼈에 발끝이 닿았다.
“기회를 포착했으면, 죽여라.”
콰자자자자작!
육체의 힘이 티아즈라의 시야를 짓누르는 것과 동시에 현뢰가 작렬했다.
* * *
터엉───!
단말이 파괴됨과 동시에 티아즈라 모튼의 머리가 뒤로 확 젖혀졌다. 엉덩방아를 찧은 그녀가 가슴께를 부여잡더니 시뻘건 피를 토했다.
시타델의 알현실에 피 웅덩이가 생겼다.
“허억, 헉…….”
티아즈라는 식은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볼에 붙은 채 고개를 들었다.
먼저 단말을 잃어버린 나크텔과 르카리아가 앞에 있었다. 그들 또한 로브와 입가에 토혈을 한 흔적이 있었다.
티아즈라가 말했다.
“폴테인 평야, 패배. 전멸했습니다. 반면에 세계 연합의 피해는 전무하고요. 특히나…… 베르덴은 그런 초위 마법을 시전하고도, 으레 따라야 할 반동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야말로 규격 외로군.”
나크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세분화하고, 육체를 대신할 더미(Dummy)를 마련하도록 하지. 검붉은 마력에 노출되는 순간 해당 부위를 버리는 것. 그렇게 해야 우리 또한 정면에서의 대립이 그나마 성립할 테니.”
베르덴을 직접 상대해 보니까 존재 자체가 얼마나 위협적인지 확실히 깨달았다.
‘파훼법은 단 하나뿐.’
파멸적 마력이 손가락에 닿으면 손가락의 주인까지 죽을 수 있다. 그러니 손가락을 자른다. 또한 손가락을 많이 만들어 둔다.
마치 제물을 바쳐 파멸을 피하는 것처럼.
베르덴을 상대하면서 즉사를 면하려면 그게 최선의 방법일 터였다.
사실 이번 전장에서 증명된 셈이다.
언데드 단말에 의식을 부여할 당시 의식의 일부를 절단하듯 분리해서 본체와 단말의 연결성을 최소화한 결과로…….
이들 세 명은 정신력이 영구적으로 조금 손상되는 대가로 비교적 온전히 살아남았으니.
만약 본체의 의식을 그대로 단말에 넣었다면 당장 죽었으리라. 그 파괴적인 개념은 분신 너머의 본체를 멸할 수 있으니까.
특히 초위 마법에 직격당한 르카리아는 시타델에서 흔적도 없이 소멸됐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애초에 패배를 상정하기는 했지만 무참하기 짝이 없는 패배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나크텔, 르카리아, 티아즈라 모튼이 왕좌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실망시켜 드려 죄송합니다, 폐하.”
“운명 파괴자라는 위업에 걸맞은 마법이었다.”
시타델의 옥좌에 앉아 있는 아칸드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의 앞에는 전 대륙 지도가 펼쳐져 있었고, 수백 개의 기물이 아직 놓이지 않은 채 가장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세계 연합의 수장임에도 본진이 아니라 최전선을 자처한다, 과연. 일회성에 그치는 것이 아닌 전략이자 신념의 발로인가.”
탁. 탁. 탁.
아칸드가 직접 기물을 지도 위에 놓았다.
아드리안 기물, 레온하르트 기물, 메이아 기물 등, 모든 기물은 저마다 초월자들과 각국, 또 다양한 주요 인물을 상징하고 있었다.
“강수(強手)를 두는군.”
아칸드가 크세리온 제국에 속한 기물을 천천히 집어들었다.
“그렇다면 나 또한 강수로 응하지.”
전쟁의 시계가 움직인다.
대륙 전체를 무대로 베르덴과 아칸드의 잔혹한 수싸움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