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2화 강수(強手) (2)
초대 마도왕의 영창 마법을 마도로 보완해 구현한 8위계 초위 마법 <오르비스 엔드베일>은 과연 절륜한 파괴력을 자랑했다.
외계(우주)에서 파멸의 운석을 추락시키는 영창.
순수한 섬멸력만 고려하면 잿빛의 신격을 개방했을 때를 포함해도 현 베르덴의 역대 최대이자 최고의 마법이라고 자부할 수 있으리라.
그렇기에 대가는 필연이다.
외계의 멸성을 다시 시전하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 안에는 재시도도 불가능하다.
게다가…….
마도를 극성조차 넘어선 부작용으로 한동안 파멸이 ‘심화’된다. 심화된다는 것은 파멸의 고유성이 전보다 강맹해진다는 뜻.
이르자면 마도 폭주라고 할 수 있을까.
델하룬의 여제를 상대했을 때 마도 현신의 대가로 베르덴의 육체와 영혼까지도 손상되었다.
마도 폭주는 이의 상위 개념이다.
지금부터 마도 <파멸>을 사용할수록 베르덴 또한 파멸에 노출되고, 그에 비례해 <파멸>의 위력은 더욱 치솟는다.
베르덴이 의도한 결과였다.
‘평소에는 무한의 마도로 대응하고, 필요한 순간 파멸의 마도로 끝장낸다.’
이번에 크세리온 제국은 예상을 벗어난 베르덴의 전력을 경험했다. 그러니 그에 따른 공략법을 마련해 응수할 것이다.
주검의 영광의 초월자 세 명이 단말을 이용하면서 의식 일부를 기꺼이 버려 본체의 파멸을 피한 것처럼 말이다.
그걸…… 마도 폭주로 훨씬 강화된 파멸로 정면에서 되받아친다.
예측을 초월한 예측.
크세리온 제국은 베르덴을 죽이기 위해서 상당한 전력을 쏟아부을 테니, 그걸 파훼하면 세계 연합군의 승리는 기정사실이 된다.
쐐기는 확실하게 꽂아야 하는 법.
베르덴은 제1차 초월자 전쟁처럼 전쟁을 장기화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 * *
개전식(開戰式)은 거창하면서도 압도적이어야 한다.
모든 아군에게 승리의 가능성을 뇌리에 심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대전쟁을 마지막까지 견딜 수 있는 믿음과 기세를 불어넣어야만…… 아주 조금이라도 더 죽이고, 덜 죽을 수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베르덴이 직접 펼친 개전 마법은 안 그래도 루네시카의 처형으로 높아진 연합군의 사기를 한 차원 위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연합장님께서 오셨습니다!!”
경외를 넘어선 경탄.
개전하고 나서 며칠이 지났음에도 세계 연합군의 표정 위로 훤히 드러난 감정은 진정되기는커녕 오히려 심화되었다.
지난 천 년의 인류 역사에서 대부분의 초월자들은 저마다의 기록을 남겼다.
정확히는 시대의 관점으로 기록되었다.
겉모습만큼은 다른 인간과 다름없는 그들이 얼마나 대단하고, 위험하고, 초월자라는 고유 용어에 걸맞은 존재들인지…… 각 시대의 주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의 업적을 묘사했다.
국가 멸망.
대량 학살.
전쟁의 계기.
인명 구제.
구국.
건국.
대륙의 구원.
시대 개척.
사상의 전파.
새로운 개념.
…….
초월자들의 이야기는 마치 공상 소설을 읽는 듯한 기분을 선사했다.
하지만 초월자는 허구가 아닌, 실제로 세계 전역에 여러 격변을 일으킨 존재고, 초월자의 실존을 믿거나 경험한 사람들은 두려워하면서도 전설에 대한 동경과 흥분을 느꼈다.
그리고, 이러한 세간이 인식하는 초월자의 정점은 약 5세기 전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었다.
초대 마도왕, 올다르크 루인 아케나드.
유일무이한 9위계 초월자의 위상은 시간도 훼손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당시의 초월자들도 올다르크에게 도전했다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을 보았다.
종족을 불문하고 사실상 모든 존재가 경외해 마지않은 그는 마법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으니, 그 업적과 위세가 어땠는지는 온갖 미사여구로 표현해도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과거는 멀고, 현재는 가깝다.
초대 마도왕은 과거의 절대자고, 베르덴은 현재의 지배자다. 무엇을 듣고 상상했든 간에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것보다 강렬하고 인상적인 것은 없다.
검붉은 운석에 의한 언데드 대군단 절멸.
그야말로 살아 있는 재해.
베르덴을 향한 만인의 시선은 약 5세기 전의 초대 마도왕이 받았던 그것을 닮아 갔다.
“베르덴 님, 현재 전황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래.”
하이랜디아에 자리한 초월자 연합 본거지.
이곳에는 세계 연합에 관련된 모든 통신과 정보를 주관하는 관제소가 설치되어 있다.
관제소는 제국과 마도국 등 대륙에서 날고 기는 최고위 정보 담당관들이 교대로 상주하며 연합군을 지휘하는 일종의 머리였다.
후우우웅.
베르덴은 각진 모서리를 짚고 3차원의 마법적 세계 지도인 [마테리아스]를 내려다봤다. [마테리아스]에는 정보관들이 직접적으로 갱신한 연합군의 위치 정보가 떠올라 있었다.
에온의 정보관 – 페일이 말했다.
“펜드렌호 토벌군단의 초대규모 함대는 사흘 뒤 사문에 도착할 예정이며, 마경 토벌군단의 지원대는 경로 장악에 착수했습니다. 동대륙 남부 토벌군단과 테르네티아 연방 토벌군단도 계획했던 요충지들을 장악하며 진군 중입니다.”
“교전은?”
“실시간 통신이 불가능한 마경을 제외하고, 아직 조용합니다.”
폴테인 평야 전투가 불과 몇 시간 만에 끝나 버리고 사흘이 지났다. 그동안 토벌군단들은 꽤 많은 거리를 이동했다.
그럴진대 아드리안이 지휘하는 토벌군단 말고는 전투가 발생하지 않았다.
지극히 고요하다.
일반적으로는 대규모 교전이 발생했어도 이상하지 않았으나, 크세리온 제국은 당연하다는 듯이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취하고 있다.
‘단순한 전략인가, 아니면 고도의 책략인가.’
현재로서 시간은 아칸드의 편이다.
사문들이 오랫동안 열려 있을수록 언데드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져 세계 연합이 짊어질 부담이 더 커진다.
아세트로 올딘의 말마따나 가을 중순만 돼도 대륙 절반 이상이 죽음으로 물들 터.
‘크세리온 제국에 있어서 아홉 개의 사문은 반드시 지켜야 할 주 거점이자, 언데드 생산 시설이며, 최대의 전략 무기다. 아칸드의 계책이 사문을 통한 압도적인 수의 폭력이라면…….’
베르덴이 생각에 잠기며 손끝으로 [마테리아스]를 두드렸다.
‘밀도의 집중. 우리가 앞마당으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건가.’
사문 내부는 크세리온 제국의 영역.
연합군에 불리한 전장이나 어떻게든 뚫어 사문의 근원체를 파괴해야 한다.
이 전쟁은 공격받는 쪽이 세계 연합인데 수성전이 아니라 세계 연합에서 반드시 공성전을 감행해야 하는 불합리함의 극치다.
아칸드 입장에선 사문의 영역에서 전투를 치르는 편이 유리하다.
공방의 장점을 모조리 가져갔으니까.
따라서 교전을 최소화해 구축한 전선으로, 사문에 도달한 연합군을 상대로 수성전을 벌여서 시간을 끄는 게 최선일 것이다.
간단하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말이다.
‘문제는…… 아칸드가 합리만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
드라벤의 일생을 읽었다고 해도 아칸드의 대응을 정보 없이 예측하는 건 어려웠다. 그조차 아칸드에게 기만당해 왔으니.
놈의 생각을 직접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베르덴은 언제나 최악을 상정해야 했다.
‘섣불리 움직이는 건 위험하다. 그럼 일단은 관망이 답일까.’
베르덴은 가만히 지도를 주시했다. 페일은 묵묵히 곁을 지켰다. 정보관들은 슬쩍 베르덴 쪽을 보곤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집중력이 극에 달하며 주변의 소음이 흐릿해지는 순간이었다.
‘아니, 내가 먼저 강수를 두었으니 강수로 흐름을 잇는다.’
베르덴이 즉시 [마테리아스]를 조작해 중앙 대륙과 동대륙을 확대했다.
“지금 당장 마렌 왕국에 구축해 둔 사문 포위망을 가시거리까지 좁힌다. 그리고, 델하룬의 사문 토벌도 동시 개시하지.”
검으로 찔러도 반응을 안 한다?
그럼 반응할 때까지 더 깊이 찔러 넣으면 그뿐.
페일이 대답했다.
“델하룬 토벌군단은 지금 즉시 명령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만, 마렌 왕국에 주둔한 병력이 부족합니다. 요충지를 확보하면서 진군하면 족히 두어 달은 걸릴 테지요.”
세계 연합은 모든 사문을 한꺼번에 공략할 수 있는 병력이 없다. 공격을 실행하면서도 방어까지 도모해야 하기 때문이다.
크세리온 제국은 사문과 시타델이 없어도 8세기 전 대륙 절반을 불태웠다.
그런 이유로 긴급 정상 회의에서 우선 폐문시켜야 할 사문들을 정해 둔 것이다.
펜드렌호 사문, 동대륙 남부 제1사문, 마경 사문이 1순위.
프로하스 사문, 테르네티아 연방의 사문, 동대륙 남부 제2사문, 델하룬의 사문은 2순위.
마렌 왕국의 사문은 마지막 3순위였다.
다른 사문과 비교해서 우선도가 떨어진다고 판단해 마렌 왕국 토벌군단은 아직 조직되지 않아서, 주변에 포위망만 갖춰 놓은 상태였다.
“물론 함정을 도외시하고 진격하면 한 달 안팎으로 거리를 확보할 수 있겠지만…….”
페일이 보기에 베르덴은 다음을 생각하고 선택하는 듯했다. 전쟁이 끝난 다음을 말이다. 게다가 베르덴은 지배자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상냥했다.
그러니 시체와 잿더미만 남는 승리 따위는 바라지 않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굳이 말을 끝까지 잇지 않았다.
“그대로 포위 병력만 부딪친다면 그렇겠지. 전멸할 위험도 있고.”
베르덴이 3차원의 지도에 새로운 표시들을 새겼다.
“비대칭 전력들을 투입한다.”
……!!
임무에 열중하면서도 귀를 열어 두고 있던 연합의 정보원들이 숨을 삼켰다.
비대칭 전력이란 무엇인가.
옛 왕과 사룡 등 크세리온 제국의 최고 전력들에게 대응하기 위한 세계 연합의 정점들이다. 그들은 현재 전황을 주시하며 연합군이 감당할 수 없는 적이 오길 기다리고 있다.
아케나드 마도국의 조사국장 – 제렌 체드윌이 다가왔다.
“그럼 마렌 왕국과 델하룬의 사문들을 먼저 닫으실 생각이십니까?”
“우선 순위를 정해 두긴 했지만 결국 모조리 닫아야 할 문이다. 옛 왕이 우리를 기다리겠다면, 그 이상으로 단숨에 밀고 들어갈 수밖에.”
크세리온 제국이 내민 방패를 연합군이 추진력을 더해 밀어붙인다.
놈들이 힘에 밀려 중심이 무너지도록.
“수왕은 델하룬에, 그리고 레프라기움 마탑주는 마렌 왕국에 투입.”
“예, 연합장님!”
정보원들이 일제히 대답하고는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통신 장치를 켰다. 알파와 베타가 애써서 구축한 독자적인 연락망은 마치 생기가 넘치는 신경 조직처럼 움직였다.
“크세리온 제국에서 언제든, 어떤 식으로든 반응할 수 있다. 특히 동대륙 군단장에게는 델하룬의 사문이 폐문될 때까지 조심하라고 전하도록.”
* * *
델하룬 남부와 북부의 경계면.
마울러 – 가레스 시릴리아드는 토벌군단장으로서 주둔지에 머무르고 있었다. 다크워튼 마탑주가 직접 봉인해 둔 사문을 중심으로 토벌군단은 거의 완벽한 포위망을 이루었다.
“이쪽 사문부터 공략하겠다고? 하,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가레스가 통신 장치를 손목에서 떼어 내곤 천막에서 나왔다. 델하룬의 근위전사장인 미라셀이 능숙하게 통신 장치를 받았다.
“진군입니까?”
“옛 왕이 별 반응을 안 보이니 더 자극하겠다는군.”
델하룬 사문은 나중에 처리할 거라며 조심성 많은 듯 예민하게 굴더니, 기회가 보이니 즉시 사정없이 물어뜯으려고 한다.
“미친 새끼.”
세계 회의와 정상 회의를 경험한 가레스에게 이미 베르덴은 모든 초월자를 통틀어서 가장 미친 초월자로 분류되어 있었다.
“전군, 전투 태세. 짐승 놈 올 때까지 끝내라.”
“수왕이…… 예, 즉각 하달하겠습니다.”
미라셀이 예를 갖추고 토벌군단에 진군할 준비를 갖추라며 명령했다.
종이 울린다.
생각한 것보다 이른 전투 개시였지만 곧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더니 이 주둔지 전체가 무장하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그 짐승을 이쪽에 보내? 좆같군.’
가레스는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아는 초월자였기에 마음에 들지 않아도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래도 언데드 새끼들을 때려 부술 수 있으니 스트레스는 좀 풀리겠지.
히아레마르 내해의 섬에서 꺼드럭거리던 옛 왕은 수왕 이상으로 좆같은 놈이었다.
꾸구국──가볍게 몸을 풀었다.
델하룬의 사문은 죽음으로 봉인되어 있어 출입이 불가하기에, 가레스 정도의 실력자가 외부에서 봉인을 부숴야 진입할 수 있다.
‘또 다른 세계라.’
가레스는 다크워튼 마탑주가 묘사한 델하룬 사문 내부의 광경을 떠올리고는, 상황에 따른 여러 전략을 곱씹었다.
델하룬 토벌군단장이기 전에 델하룬의 대왕인 그는 전쟁에도 제법 일가견이 있었다.
“……?”
가레스가 척추를 받치고 상체를 젖혀 스트레칭을 끝내려던 순간이었다.
하늘로 향한 그의 눈동자에 뭔가가 비쳤다.
‘뭐지? 운석 같은 게─’
그것이 가레스의 감지 영역에 들어온 순간 표정이 굳었다. 거리가 너무도 먼 터라 가레스만이 물체의 정체를 인지한 상황.
설명할 시간이 없다.
“물러나라!!!!!!”
가레스의 함성이 주둔지를 뒤흔들었다.
땅이 크게 패일 정도로 힘껏 각력을 폭발시킨 그가 수직으로 솟구쳤다. 연한 파란색의 기운이 건틀릿을 비롯해 전신을 뒤덮었다.
저마다의 직선으로 나아가는 비행체와 가레스가 이내 충돌했다.
콰아아아아아앙!
막대한 충격파가 번졌다.
주둔지의 건물들이 무너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델하룬 특유의 황폐한 지형에 첨예한 폭풍이 몰아치는 것처럼 표면이 갈려 나갔다.
미라셀 옆으로 거구가 내리꽂혔다.
“대왕이시여!”
“비켜.”
가레스가 피가 섞인 침을 뱉으며 몸을 일으키고는 앞을 응시했다.
토벌군단의 주둔지 바깥으로.
쿠우우웅.
이윽고 검은색의 형체가 언덕을 가라앉히며 지상에 도착했다.
“과연 편리하군.”
대기와의 마찰로 뜨거워진 갑옷이 식는다.
거대한 검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공간 이동이라는 건.”
베르덴이 전장에 나선 것처럼 옛 왕, 아칸드가 직접 출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