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8화 영혼 – 2
아칸드와 거리를 두고 땅바닥에 앉아 있는 안티아스 옆으로 베르덴이 등장했다.
그 직후 남서쪽에서 다른 그림자가 드리웠다.
크세리온 제국의 제4사령관, 사르카논.
동대륙 남부에서 아드리안과 마주쳤고, 회담에서는 아칸드를 호위했으며, 오늘날 라인델과 마법전을 치른 언데드가 아칸드의 우측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곧장 사르카논을 따라 라인델도 황무지에 도착했다.
집요한 죽음이 아른거리는 전투의 흔적.
둘 다 상대에게서 비롯된 사기(死氣)에 신체 일부가 물들어 있다. 지금 이 순간조차 적에게 단호한 죽음을 선고하려 하고 있다.
저항이 먼저 무너진 쪽은 단말마의 비명을 뿌리며 즉사할 것이 자명했다.
‘옛 왕을 여섯 번째 사도로서 떠받드는 네 마리의 언데드. 과연 하나하나가 현대의 정점들을 실질적으로 위협할 만한 수준이다.’
어렴풋이 짐작하던 크세리온 제국 최고 전력들의 경지가 상당 부분 확인됐다. 오늘 얻은 경험적 자료를 통해 아칸드가 보유한 총전력 현황은 보다 정밀하게 규명될 것이다.
‘그리고…….’
베르덴은 사르카논에 이어 가레스에게 발목을 잡힌 두 마리의 언데드 사령관들을 지나 아칸드에게 눈길을 향했다.
약간 금이 간 칠흑의 갑주.
치명상과 거리가 먼 미세한 혈흔.
‘안티아스가 예상보다 선전했군.’
델하룬 지역 특유의 삭막한 숲이었을 이곳은 힘과 힘의 대립에 의한 여파를 버티지 못하고 지형 자체가 일그러진 상태였다.
당대의 수왕은 운명의 사도에게 대적할 수 있음이 증명되었다.
베르덴이 물었다.
“소감은?”
“더할 나위 없지.”
아칸드와의 전투는 어땠냐는 물음에 안티아스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주먹에 맞아 부러졌던 이빨은 이미 절반쯤 새롭게 자라나고 있었다.
앉은 채로도 안티아스의 눈높이는 베르덴의 키보다 훨씬 높았다.
“이 따분하기 짝이 없는 세상이 즐거워졌다.”
“흠.”
라인델은 그 기분을 진심으로 이해한다는 듯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금속음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힘의 발현에는 상응하는 대가가 수반되는 법이지. 한데 그만한 개전 마법을 전개했음에도 여전히 징후가 보이지 않는군. 아니면, 억지로 부담을 감추고 있든지. 뭐든 훌륭하다, 베르덴.”
용검을 라크디온에게 맡긴 아칸드가 일어나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네가 난입할 확률은 희박하다고 보았건만, 그래도 당초의 의도는 관철되었구나. 이로써 전선은 대륙으로 확대되었다.”
“그래서, 만족하나?”
두 사람에게서 아른거리다가 뻗어나간 기와 마력이 물리적인 형상을 띠었다.
쿠웅───!
베르덴과 아칸드의 격이 충돌했다.
패도적인 기운이 강제로 감각을 짓누르듯이 일깨워 육신을 압제한다.
인류에게 기를 깨우치게 한 인간계 최초의 왕과는 다른, 죽음의 기운과 조화를 이룬 기력(氣力). 거기서 베르덴은 진정한 신을 느꼈다.
‘……‘당신’.’
타고난 용력은 아칸드의 것일지언정 죽음의 권능은 ‘당신’에게서 비롯됐으니, 운명의 수레바퀴를 구축한 존재가 사도를 통해 베르덴을 의식하고 있다.
침묵의 사막에서 조우한 ‘당신’의 표층의지가 아닌 그 본체의───
두근.
백설(白雪)처럼 새하얗고 거대하다는 것 이외에는 인식할 수 없다.
그런데도 베르덴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예전과는 다르다.
침묵의 사막에서 표층의지에 전율하고 압도당했던 그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경지는 아직도 부족할지언정 베르덴 또한 자유를 포기하고 고유한 이상을 추구하는 신이다.
두근.
현세의 소음이 멀어지고 붉은 심장이 규칙적으로 박동하는 소리만 맴돈다. 베르덴의 심장만이 아니라 ‘당신’의 심장도…… 진정한 신들의 심장이 공명하기 시작했다.
이 세계를 지배하는 ‘당신’이 천천히 움직인다.
그런 것 같았다.
거의 식별할 수 없는 형체에서 머리의 실루엣만 감각에 잡혔다.
가늘고 작게 눈을 뜬 ‘당신.’
그건 표층의지를 통해 접한 ‘당신’의 ‘일부’ 따위가 아니었다. 세계수, 초대 마도왕, 잿빛의 드래곤과 같은 시대에 군림했던 ‘당신’ 그 자체.
두근.
‘당신’의 눈동자는 사도의 존재 너머에서 한 번의 미동조차 없이 베르덴을 주시했다.
초대 마도왕과 전쟁을 치르고 겨우 승리에 가까운 결과를 쟁취해서 구축한 운명의 수레바퀴를 제멋대로 부수었기 때문일까.
그 형언할 수 없는 눈빛에는 원망이 조금 섞여 있는 듯했다.
두근.
과거를 덧씌우는 신의 감각.
베르덴은 침묵의 사막에서는 알지 못했던 ‘당신’의 감정을 보다 선명하게 느꼈다.
그녀는 생각했던 것보다 인간적이었다.
‘당신’의 투정 같은 원망은 장작 없는 불씨처럼 곧 사그라들었다.
그 자리에는 다른 감정이 차올랐다.
가까워지는 온기.
어느샌가 ‘당신’의 손길이 베르덴의 가슴에 닿았다. 감히 규모를 가늠할 수 없는 존재감과 다르게 그 손의 무게는 평범한 여인과 다르지 않았다.
=세 번째 선택지는 없어요=
진정한 ‘당신’이 속삭인다.
=진실을 깨닫는 순간 당신의 운명은 둘 중 하나로 귀결되겠죠. 모든 걸 버리거나, 타협하거나. 우리가 그래야 했던 것처럼=
베르덴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리고, 올다르크가 아니라 내가 옳다는 걸 알게 되겠죠=
“판단은, 내가 한다.”
베르덴이 억지로 목소리를 냈다. 압도당해 꿈쩍도 하지 못했던 그 한계는 이미 초월했다. 그는 ‘당신’을 똑바로 직시했다.
파괴자가 말한다.
“대답을, 듣고 싶다면. 진실을 말해.”
창조주가 말한다.
=낙원(이상)의 다른 이름은 희생. 이 가혹한 길을 걷는 자가 다시 없길 바랐는데=
‘당신’이 부드럽게 손끝을 세웠다.
=세계수는 세계를 지탱하기 위해 탄생했습니다=
슬픔을 내비친 ‘당신’이 베르덴의 심장을 두드렸다. 보헤미른 마탑의 동력원을 흡수한, 무한한 마력으로 채워진 새로운 근원을 자극했다.
=가장 가엾은 운명이죠=
* * *
바로 앞까지 닿아 있던 ‘당신’의 존재감이 한순간에 멀어졌다. 아니, 멀어진 것이 아니라 베르덴이 밀어낸 것이었다.
‘마력이……?’
[인테리스]를 시동한 것처럼 출력 한계를 벗어난 마력량이 사방으로 범람했다.
쿠구구구구구구구구!!
밀도가 극한에 다다른 푸른 마력이 대륙의 마력을 위압했다.
심장이 쉴 새 없이 박동했다.
순수한 힘의 격류에 세계 일부가 움직였다. 단순한 파괴가 아니었다. 마치…… 세계가 베르덴에게 동조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들이 있는 공간을 제외하고 지각 변동이 일어나 지축이 뒤흔들렸다. 시시각각 일대의 풍경이 변화에 변화를 거듭했다.
하늘에 떠오른 지상의 잔해.
“……!”
“……?!”
적과 아군의 구분 없이 아칸드, 안티아스, 라인델, 라크디온, 사르카논, 제7사령관의 양 어깨가 동시에 짓눌렸다.
안티아스가 압박감을 느낄 정도였으나 기이하게도 그들이 딛고 있는 땅덩어리는 온전했다.
머지않아 이변은 잦아들었다.
쿵…… 쿠궁! 쿵! 쿠구구궁……!
상공에 멈춰 있던 파편들이 새로운 땅에 하나둘씩 낙하해 흠집을 남겼다. 크고 작은 굉음이 퍼지는 와중 라인델이 변화의 결과를 목도했다.
“……생태의 재구성.”
아칸드와 안티아스로 인해 황무지로 변한 그라세림 숲이 다시 채워졌다.
어디를 봐도 황폐한 땅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그 흔적은 있었다.
수많은 풀과 나무에 산산조각 나거나 생체 조직이 와해된 부분이 존재했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 완전히 죽기 직전 조직 하나하나가 이어 붙은 덕에 재생력이 작용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이미 죽어 버린 식물은 돌아오지 못했지만, 죽어야 했을 유기체의 명을 연장시켰으니, 그건 마치 부활에 가까웠다.
마법의 범주에 속하지 않은 이능.
‘이건 세계수의 권능이다. 엘프들의 세계수가 아닌 내 심장에서 촉발된…….’
베르덴은 여운을 놓치지 않으려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당신’이 그의 심장을 건드린 영향. 대체 그녀의 의도는 무엇인가.
그와 함께 동력원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증이 더 커져 갔다.
짹짹.
모든 동물이 떠나간 숲에 새들이 돌아왔다.
격이 상쇄된 탓일까.
베르덴의 어깨만이 아니라 아칸드의 어깨에도 새가 지저귀며 내려앉았다.
“…….”
아칸드가 팔꿈치를 접었다. 새를 압착하여 터뜨릴 거라는 안티아스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는 건틀릿 위로 새를 유도했다.
어두운 금속으로 덮인 검지에 올라선 새가 특유의 몸짓으로 날개를 손질했다.
“마법계의 등가교환 원리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은 하나를 내주면 반드시 하나를 되돌려받는다. 그리고, 그 작용은 연쇄적이지. 육신이 썩어 문드러지고 영혼이 소실되어…… 존재의 쓰임이 다할 때까지.”
아칸드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르카논이 하얀 손뼈로 허공을 어루만졌다.
통신망을 차단하고 있던 고유 마법이 해제됐다.
통신 장치가 특정 패턴으로 점멸했다.
베르덴은 아칸드를 마주하며 팔찌를 작동해 통신을 연결했다. 알파와 베타가 이번에 신설한 연합 전용의 채널로.
───긴급 보고! 현 포르메네 자유국 아덴 백작령! 언데드가 출현했다는 긴급한 연락입니다! 엘더 리치가 확인됐습니다!
───이데라트 연맹국의 미레디올 부근에서도 언데드 다수 포착. 이 자식들, 뭔지 모르겠지만 공간 이동으로 넘어왔네……!
───아르나크 제국령에서 데스나이트 세 기 출현 확인.
───연합 본부입니다. 현재 전 대륙에서 언데드 군단의 다중 전이가 발생하고 있는 듯합니다. 가급적 교전은 피하고, 공간 방어 체계 활성화. 적의 총규모와 경로 등 정보 수집에 집중하십시오. 반복합니다. 연합 본부입니다. 현재 전 대륙에서 언데드 군단의 다중 전이가 발생…….
정보관 페일이 공용 채널을 통해서 각국에 속보와 대응책을 전달하고 있다. 베르덴이 부재한 상황이니 알파와 베타가 내린 판단이리라.
“전쟁은 광기의 집합체.”
아칸드의 등 뒤로 어두운 균열이 발생했다. 그것은 방금 파괴된 델하룬의 사문보다 작았지만, 본질만큼은 동일했다.
베르덴이 정상 회의에서 말한 바 있다, 아홉 번째 사문은 옛 왕 그 자체라고.
“전쟁을 체득해라, 베르덴. 서로의 최후를 위해.”
제국의 사령관들이 차례대로 사문 너머로 자취를 감춘다.
필시 시타델로 이어져 있을 터.
베르덴은 진입할 수 없다. 델하룬의 사문과 같은 경우가 아니면, 저 경계는 베르덴의 존재를 거부하고 배척하니까.
반면 안티아스와 라인델은 저들을 뒤쫓아 크세리온 제국의 심장부에 다다를 수 있다. 그 둘은 베르덴에게 결정을 맡겼다.
‘미련한 역습이다.’
베르덴이 고개를 저었다.
저 뻔히 보이는 함정을 돌파하기에는 아직 제국의 전력이 온전하다. 시기상조다. 또, 제국의 전력 약화와 더불어 베르덴이 동행할 수 없으면 여러 돌발 상황에 정확히 대처하기 어렵다.
“허를 찔렸다는 건 인정하지. 이런 식으로 사문을 희생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으니.”
베르덴이 경고했다.
“다음은 없다.”
동일한 수법에 다시 당해 줄 생각은 없다.
만약 아칸드가 같은 방식으로 또다시 습격한다면, 베르덴은 이미 대비해 반격할 것이다. 그리고, 그곳은 아칸드의 무덤이 되리라.
“나는 네 선택을 존중한다.”
아칸드가 웃으며 등을 돌렸다.
“다음을 기대하지.”
일순간 구름이 드리웠다. 그늘이 졌다. 그늘이 금방 사라지며 사문과 함께 아칸드가 떠났다. 공간 좌표의 흔적은 역시 쫓을 수 없었다.
적막이 찾아왔다.
안티아스가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뭐, 어쨌든 이걸로 일단락이군. 그런데 아칸드가 저런 식으로 사문을 넘나들면 붙잡을 방법이 없는 것 아닌가?”
“제약이 있을 거다.”
“근거는.”
“제약이 없었으면 이미 날뛰었을 테니까.”
제2차 초월자전쟁에서 처음으로 아칸드를 직면한 하루가 마저 흘러간다. 라인델은 베르덴에 의해 다시 구성된 숲을 관찰하고 있었다.
베르덴이 남쪽으로 고개를 향했다.
“델하룬 토벌군단부터 재정비하지.”
아칸드를 확실하게 죽이기 위한 비수는 준비되지 않았다.
오늘은 종전의 날이 아니다.
* * *
가르간트에서 처형당한 루네시카 안테르노아의 영혼은 다섯 개로 쪼개졌다. 그중 하나는 아니무스에 의해 시타델로 옮겨졌지만, 나머지 넷은 대륙 각지로 흩어졌다.
골목에 널브러진 신선한 시체.
전쟁이 아니더라도 죽음은 흔한 개념이다.
“……허억.”
주검의 영광의 두 번째 하인───루네시카의 영혼 조각이 들어간 시체가 숨을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