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6화 앞마당 전투 (3)
꿈꿔 온 이상향.
타협적 현실.
가능성의 기로에서 그대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 * *
당대의 주검의 영광은 옛 왕의 봉인을 풀기 위해서 목숨을 던졌다.
네 번째 하인은 벨디른 공화국에서 유골룡 사태를 일으키곤 마법계의 신성과 하늘을 베는 검사에 맞서다 서거했다.
세 번째 하인은 세계에 역병을 퍼뜨린 뒤에 동쪽의 대륙에서 성녀에게 심판당했다.
두 번째 하인은 국제 사회에 붙잡혀 가르간트에서 세계 연합장에 의해 처형되었다.
첫 번째 하인은 스스로 부활의 기회마저 저버리며 위대한 주검을 깨우고, 히아레마르 내해 섬의 멸망과 함께 순교했다.
그렇게 옛 왕이 재림하셨다.
마치 신의 권능과도 같은 압도적 사기가 하인들을 되살렸다. 신체의 일부를 남기고 사망한 이들이 다시 생명을 얻었다.
부활할 수 없는 첫 번째 하인을 제외하고, 그리고 영혼이 회복 중인 두 번째 하인을 제외하고, 각 시대의 하인들이 대륙에 돌아왔다.
마침내 주검의 영광이 목적을 이루었다.
현 세 번째 하인────만연(蔓延)의 랑데르크는 기도하듯 턱을 치켜들었다. 눈을 감은 그가 고요하게 입술만을 달싹였다.
아! 희생이여!
빛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 하인들의 죽음에 환희의 갈채를 보냈다.
마치 저주라도 퍼붓듯이.
‘이해는 바라지도 않는다.’
애절하게 소리쳐도, 오직 깨어 있는 자만이 진실에 닿을 수 있는 법이다.
무지하고 몽매한 자들은 죽음의 경계가 허물어져 이제부터 새롭게 펼쳐질 거짓 없는 세상을 무력하게 맞이하리라.
“후후후…….”
랑데르크는 눈꺼풀 위를 더듬는 태양, 높은 자연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그 햇빛을 거만하게 만끽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800년 가까이 봉쇄된 크세리온 제국의 옛 의식장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랑데르크 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듣고 있네.”
“문이…… 개방된 흔적이 있습니다.”
랑데르크가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바로했다.
“심지어 최근의 것입니다.”
봉인 해제를 준비하던 흑마법사들이 의식장 문에서 물러났다. 랑데르크가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 문 앞에 다가섰다.
의식장의 봉인은 흑마법계 마법진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를 푸는 방법은 세 가지다.
첫 번째, 물리력.
두 번째, 빛의 정화.
세 번째, 흑마법.
입구는 물리적으로 파손되지 않았고 흑마법진의 잔흔은 보란 듯이 남아 있으니, 공성 병기급 물건을 휴대하고 다니는 미친 도굴꾼이나 루아스교의 성직자는 범인이 아니다.
‘그렇다면 주검의 영광의 누군가가……?’
이상한 일이다.
주검의 영광이 대륙 곳곳의 의식장으로 향한 건 옛 초월자들의 명령 때문이다. 하인들의 목적지는 저마다 다르니 장소를 착각할 리 없다.
그러므로 이곳 의식장에는 랑데르크 일행이 먼저 도착해야 정상이었다.
“하하하, 초대장을 가진 불청객이라.”
쿠구구구구…….
랑데르크가 입구를 손으로 훑자 의식장이 열리기 시작한다. 내부는 먼지로 가득했다. 그리고……먼지 위에 침입 흔적이 보란 듯이 남아 있었다.
성인 여인의 것인가.
들어가는 발자국은 있는데 나가는 발자국은 전혀 없다. 기만하는 걸 수도 있지만 침입자가 아직 안에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입구에서 의식장까지 사실상 외길이니 서로 간에 간격을 두고 장막을 전개하며 이동하게. 이 낯선 손님이 만에 하나라도 나가지 못하도록.”
랑데르크가 지팡이를 꺼냈다. 다른 흑마법사들도 저마다의 마법적 무기를 꺼내고는 그의 명령을 따라서 의식장으로 신속히 들어섰다.
빛이 들지 않는 공간이 그들을 집어삼키고는 입을 연신 꿈틀거렸다.
일시적으로 폐쇄되는 고대 의식장의 문.
그 직전에 베르덴도 진입했다.
쿵──
* * *
고고한 태양이 말라죽어 가는 이들을 위해서 자비를 베풀었던 적이 있던가?
그것은 공평하게 모두를 비출 뿐이다.
빛은 선함을 대변하지 않는다.
빛의 여신을 숭배하는 루아스교 또한 청렴하거나 결백하지 않을 때가 있다. 탐욕스럽고 부패한 자들이 고위 성직자에 오를 수 있다. 그들마저도 빛을 누리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루아스교는 여러 합리적인 이유를 내세워 기적에 헌금을 부과한다.
간절할수록 씀씀이는 커지는 법.
다른 지역보다 몇 배나 많은 헌금을 요구해도 누가 주교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까? 지역민에게 주교란 그저 감사한 기적이거늘.
한낱 불만 따위를 내뱉는 건 기적을 모욕하는 일로 여겨지니, 이는 지역민으로서 지역을 배신하는 행위와 진배없다.
풍족하지 않았던 부모는 살림살이를 거의 내다팔아 자식의 병을 치료했다. 그 후로 무리하게 일을 하다가 아비는 마차 사고로 죽었고, 어미는 병에 걸려서 끝내 병사했다.
주교는 어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헌금으로 780만 엘크를 제시했다.
자식은 혼자 남았다.
어린 자식은 죽은 부모를 향해 귀찮다는 듯이 대충 성호를 긋는, 그야말로 형식상의 애도만 표한 주교의 얼굴을 기억했다.
자식은 지역을 떠났다.
소년은 흑마법을 배웠다.
사내가 고향에 돌아왔다. 스스로 역병이 돼 돌아온 아들은, 늙고 살찐 채 풍족함을 누리던 주교를 괴저에 잠식시켜 산 채로 썩게 했다.
주교 다수 살해.
대량 학살.
마도의 위험성.
주검의 영광과의 깊은 연관성.
루아스교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내에게 만연(蔓延)이란 이명이자 악명을 부여했고, 처단 목록에 올려 암암리에 추적했다.
저벅, 저벅…….
어둠을 꿰뚫어 보는 <암시>를 유지하며 나아가는 흑마법사들. 석재로 이루어진 고대의 계단과 복도를 지나 지하 공간에 도달했다.
제국의 의식장은 800년 전 옛 왕을 보좌한 첫 번째 하인과 두 번째 하인을 필두로 하여 전 대륙에 걸쳐서 지어졌으며, 주로 언데드를 구축하거나 특수한 마법을 위해 사용된다.
여기는 강대한 언데드를 위한 제단이다.
랑데르크조차 엄두도 내지 못할 수준의 흑마법진이 새겨진 바닥, 그 규모나 원리는 한눈에 봐도 장대하기 그지없었다.
낯선 침입자는 그곳에 있었다.
‘마도사의 기척…… 그런데 기이할 정도로 마력량이 희미하군. 마치 타인이 그 껍데기를 뒤집어쓴 것처럼 부조화스럽다.’
나이는 30대 후반.
피 묻은 의복.
정갈하지 못한 머리카락.
흡사 살해당한 몰골.
랑데르크는 수상하기 짝이 없는 여인을 주시하며 목소리를 냈다.
앞을 겨눈 지팡이에 마력이 실렸다.
“누군데 감히 제국의 재산을 넘보는가?”
“부활한 소감이 어때? 랑데르크.”
“내 이름을…….”
랑데르크가 멈칫했다. 주검의 영광에 몸을 담은 지 어언 수십 년. 세 번째 하인으로서도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가까운 이의 말버릇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그는 둔감하지 않았다.
“루네시카?”
두 번째 하인의 이름을 중얼거리자 흑마법사들이 당황하며 웅성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증오스러운 베르덴에게 처형당했으며, 그 영혼의 파편은 제국에서 수복되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정황상 믿을 수 없었지만 랑데르크는 이미 확신한 상태였다.
익숙한 여인의 눈빛.
다른 건 몰라도 저건 속일 수 없다.
랑데르크가 당장 지팡이를 내렸다.
“어찌 당신이…… 게다가 그런 하잘것없는 시체에 들어가 있는 겐가? 지금 당신 영혼 일부를 아니무스로 저장해 회복시키고 있는데. 잠깐, 설마.”
루네시카가 어떤 마도를 개척했는지는 랑데르크도 아주 잘 알고 있다.
“처형되기 전 스스로 영혼을 쪼갰나? 그 자멸이나 다름없는 짓을?”
“설명할 필요 없으니 편하네. 네 생각대로야.”
“그걸 혼자서 성공해 내다니. 당신의 업적에 찬사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군.”
랑데르크는 진심으로 감탄을 내비치다가 천천히 지팡이를 다시 겨누었다.
입꼬리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하지만 베르덴은 그렇게 허술한 초월자가 아니네. 영혼의 영역이라고 해도 인공 골렘으로 생중계되는 그 처형식에서 탈출할 틈을 주었을 리 없지.”
“그렇게 생각해?”
“예의 검붉은 마력이 처형 도구였으니, 안 그래도 낮던 성공률이 또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했을 터. 그런 확률을 뚫고 영혼을 조각낸다는 건 기적이 아니고서는 설명되지 않네.”
랑데르크는 그런 종류의 기적을 믿지 않는다.
“변절한 것인가, 루네시카.”
랑데르크는 루네시카가 베르덴의 도움을 받았다고 판단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무시무시한 처형장에서 영혼이 빠져나갈 수 있을 리 없었기에.
“역시 넌 눈치가 빠르다니까.”
다섯 개로 조각난 루네시카의 영혼 중 하나가 깃든 여인의 시체가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겉모습은 달라도 루네시카는 루네시카였다.
“하지만 나는 변절하지 않았어. 오히려 배신한 건 크세리온 제국이지.”
“무슨……?”
“아칸드는 우리가 바라던 불멸의 세상을 완성하지 않을 거야.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듣기 좋은 거짓이었으니까.”
루네시카의 애환이 깃든 낯선 눈동자에 랑데르크가 당황했다. 당황의 연속이었다. 그 루네시카가 옛 왕을 폐하라고 존칭하지 않았다.
“다른 길이 있어.”
루네시카가 왼손의 손등을 내밀었다.
“다시 나를 받들어.”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주검의 영광의 창설자 중 한 명이 그 위대한 주검을 배신하라고 하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주검의 영광에 속한 흑마법사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눈치만 보았다.
“다시 나를 받들라…… 하하하.”
랑데르크가 헛웃음을 흘렸다.
“주검의 영광은 무려 800년이라는 시간을 바쳐서 위대한 주검을 부활시킴으로써 마침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네. 그 과정에서 나를 비롯한 많은 흑마법사가 희생을 자처했지. 그리고…… 마침내 과실을 손에 넣을 때가 왔네.”
그가 삿대질하듯 지팡이 끝을 연신 튕겼다.
“그런데 그 모든 걸 버리라는 건가? 우리가 일궈 온 모든 걸 포기하고 길을 돌아가라고? 심지어 크세리온 제국을 배반하라니. 위대한 주검께서 얼마나 강대한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
“이제 와서 돌아가기에는 너무나도 먼 길을 왔다고 생각하지 않나. 이제는 나 하나 감당할 수 없는 당신의 말만 듣기에는…… 우리는 거의 끝에 와 있네. 당신이 이 시점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변절에 대한 충격을 넘어 구역질까지 느껴질 정도네. 배신 또한 그 정도가 있는 법이거늘.”
랑데르크가 눈을 가늘게 떴다.
“크세리온 제국을 분열시키려는 그 의도가 눈부실 정도로 선명하니까 말일세.”
랑데르크가 시선을 보내자 그를 보좌하는 흑마법사 넷이 기다렸다는 듯이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적의가 루네시카를 향했다.
“그녀라고 해도 옛 왕께 반기를 들었으니 처단해야 옳습니다.”
“모든 걸 포기하라니. 웃기지도 않지.”
“죄송합니다, 두 번째 하인이시여.”
“하, 결국 당신조차 불멸의 세상을 거부하는 빛의 주구들과 다르지 않았군. 같잖은 거짓말로 현혹하려고 들다니……!!”
그들에게서 두 번째 하인을 향한 경외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옛 왕에 매료된 새로운 하인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는군.”
랑데르크가 성큼성큼 다가갔다. 날카롭게 지팡이를 든 채로 거리를 좁혔다. 당장이라도 처형할듯이 홀로 루네시카 앞에 마주 섰다.
루네시카는 대답 없이, 여전히 왼쪽 손등을 내밀고 있었다.
“이것이 나의 대답일세.”
랑데르크의 지팡이가 위협적으로 그녀의 머리에 가까워진다. 영혼이 조각나고 또 육신을 잃은 그녀는 그를 감당할 수 없다.
간단한 마법으로도 루네시카의 영혼 조각 하나는 대륙을 떠나리라.
그 순간.
랑데르크가 느닷없이 미소 짓고는 지팡이를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루네시카의 왼손을 잡아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목적과 수단을 혼동해서는 안 되지.”
“라, 랑데르크 님?”
“조용히.”
마도 <재역(災疫)>
“나는 변절자와 대화하는 취미는 없네.”
역병을 실은 바람이 순식간에 방심한 흑마법사들을 지나쳤다. 저항 실패. 반점이 떠오르기 시작한 그들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아아아아아악!!
끄어어……!
생체 조직이 괴사해 버린 시체들이 무너진다. 로브 아래 주검의 영광의 일원이었던 것들이 고체를 벗어나 핏물로 변했다.
“불멸의 세상은 우리의 목적이고, 옛 왕은 불멸의 세상을 위한 수단이네. 그런데 수단에 매몰돼 목적을 외면하다니. 그게 배신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랑데르크는 그들의 흔적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당신을 따르겠네. 내게 목적을 심어 준 당신을.”
루네시카는 처음부터 랑데르크의 행동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충성을 말이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런데 설마 당신이 옛 왕에게서 등을 돌리겠다고 하다니…… 잠깐 안 본 사이 심경에 큰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군.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데, 그전에 이것부터 말해 주게.”
랑데르크가 단호하게 물었다.
“베르덴은 우리의 조력자인가?”
“그 이상이지.”
루네시카의 대답이 아니었다.
두 하인의 시선이 같은 방향을 향했다. 어둠 속에서 존재감이 강해지더니 잿빛의 형체가 의식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랑데르크가 경악한 듯 눈을 부릅뜨며 당장 한 발짝 물러났다.
“베, 베르덴……?!”
“뭐야, 왜 네가 여기에 있는 거지? 세계 연합은?”
“여유가 생겨서 와 봤다. 혹시라도 설득에 난항을 겪으면 개입할 생각이었지.”
루네시카의 영혼 조각 하나가 크세리온 제국으로 향하면, 그곳에서 주검의 영광의 초월자들과 접촉해 분열의 씨앗을 뿌리고.
나머지 네 개의 영혼 조각은 대륙에 뿔뿔이 흩어져 시체에 깃든 뒤 크세리온 제국의 옛 의식장을 이용해 비밀리에 언데드 전력을 갖춘다.
다만, 혹시나 주검의 영광이 의식장에 찾아온다면 루네시카의 판단에 따라 회유하여 내부 분열에 박차를 가한다.
이것이 분열 계획의 개요였다.
루아스교와 다크워튼 마탑에 이어서 주검의 영광 최대의 적이나 다름없는 초월자의 등장에 분위기가 일변했다.
베르덴이 의식장 중앙에 섰다.
“주검의 영광은 내가 계승했다.”
“……계승이라니.”
“루네시카 안테르노아를 따르겠다면 내게 복종해라.”
베르덴이 잿빛 건틀릿을 낀 손을 움켜쥐었다.
마도 <명운>
생명을 폐하는 마도가 의식장을 활성화했다. 그의 마력이 제물을 대신했다. 검보랏빛의 기운이 제단을 통해 허공에서 뭉쳤다.
“이건……첫 번째 하인의 마도……?”
랑데르크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강대한 힘이 시간을 극도로 단축했다.
의식이 순식간에 끝났다.
쿵.
뒤틀린 왕관을 쓴 언데드가 양손으로 붙잡은 검을 반전시킨 뒤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숙인 그것이 베르덴에게 굴복의 의사를 표했다.
[주인을 뵙나이다.]
다루기 아주 어려운 개체라 물리적으로 압도하거나 흑마법적인 작업이 필요했는데, 그런 과정 하나 없이 녀석이 베르덴을 섬겼다.
이해가 따라가지 않아 침만 삼키던 랑데르크가 곧 베르덴과 눈을 마주쳤다.
베르덴이 그를 굽어보며 말했다.
“네 죽음에 가치를 주마, 랑데르크.”
“……!!”
랑데르크가 성녀에게 심판당하기 전 그는 베르덴과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네 죽음엔 가치가 있었나?
살해당할 걸 알면서도 피울음 역병을 퍼뜨린 끝에 초월자들에게 포위당한 랑데르크에게 하는, 베르덴의 질문이었다.
이에 랑데르크는 보란 듯이 답했었다.
───비로소 가치를 얻었지.
그때의 기억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랑데르크의 입이 벌어졌다. 그러고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껴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하나의 깨달음이 온 것처럼.
“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렇게 한바탕 폭소한 랑데르크가 지팡이를 옆으로 던졌다. 루네시카가 팔짱을 낀 채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쿵!
만연의 랑데르크가 당장 서늘한 바닥을 짚고는 머리를 조아렸다.
“따르겠습니다, 폐하.”
준비만 갖춰지면 전 대륙에 역병을 퍼뜨릴 수 있는 당대의 세 번째 하인이, 오늘 자신을 가치 있게 죽여 줄 진정한 주인을 찾았다.
* * *
개전하고 며칠이 지난 현재.
동대륙 남부 토벌군단이 그야말로 막대한 화력으로 언데드를 짓밟으며 밀어낸다.
마스터와 서약자, 그들이 각각의 전장에서 필두에 서니 어지간한 언데드 개체로는 제대로 발목을 잡기도 어려웠다.
이에 사문에서 본 전력이 진격했다.
전쟁을 상징하는 묵시록의 언데드가 유골룡을 타고 마스터의 전장으로.
크세리온 제국의 제6사령관과 제8사령관 루에린이 서약자의 전장으로.
[…….]
루에린이 상공을 응시하더니 한 발의 화살을 쏘아 보냈다.
기분 나쁜 시선이 사라졌다.
* * *
“……감이 좋군.”
유리온이 전장을 크게 우회해 사문 근처까지 보낸 감시형 매직 아이템이 파괴된 걸 느꼈다.
아티슨 마탑에서 특별 의뢰한 거라 국가 재산 중 하나였는데.
“놈들도 본격적으로 온다. 사령관처럼 생긴 언데드 둘이 우리에게 오는 것 같은데.”
“고대 아티팩트의 기동을 미룰까요?”
“그런 걸로 제국의 최고 전력을 잡을 생각 자체가 날로 먹는 거다. 준비되는 대로 적진 한복판에 터뜨릴 준비해.”
유리온은 혼자서 수천이 넘는 언데드를 토벌하며 몸이 완전히 풀렸음을 느꼈다.
“사령관들은 내가 맡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