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4화 앞마당 확보 (3)
베르덴이 테르네티아 연방 토벌군단을 지원한다는 소식은 아드리안과 레온하르트처럼 군단장급만 알고 있었다.
물론 그 베르덴이 본체가 아니라는 건 아드리안만 인지했다.
“베, 베르덴?”
“지원군이 연합장이었다고?”
예기치 않은 베르덴의 난입은 토벌군단에게 경악을 선사했다. 긴장감은 승산으로 바뀌었다.
갑작스러운 희소식과 같이 긍정에서 비롯된 환희의 경탄이었다.
“끄, 학……!!”
관통당한 복부를 기점으로 상하가 분리된 마법계 초월자 인형은, 그런 와중에도 마도를 끌어내 반격을 도모했으나──시야가 온통 어둠으로 물들며 생소한 작열감에 휩싸였다.
후두두두둑!
이성(理性)이 허무하게 소멸됐다.
소나기처럼 주변으로 쏟아진 육편과 혈액이 흑염의 소재가 돼 타올랐다.
베르덴의 얼굴에 떨어진 붉은 핏방울 하나하나까지 거칠게 집어삼키며, 순간이나마 존재했던 흔적도 일절 남기지 않게.
무한의 마도로 <투명화>의 마법 구조를 세분화해 밀도를 끌어올리고 차폐력을 강화한 베르덴의 기습이 죽음마저 앗아 갔다.
정신체인 터라 8위계의 경지를 발휘하지 못하는 걸 드러내지 않고도 그에 걸맞은 위상을 보였으니…… 착각에 빠지는 것은 필연.
피식자들은 본능이 앞섰다.
투확────!
무투계 초월자 인형 둘이 온 힘으로 절기의 전조를 터뜨렸다. 토벌군 간부들을 내려다봤던 오만은 생존에 대한 열망으로 변질됐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초월을 상실한 인형들은 이상이 아니라 오직 삶을 향한 집착으로 가득했다. 인육을 탐하는 인생이라도 놓지 못하는 것이다.
도마 위의 생선을 자르듯…… 예민한 감각이 시간을 나누는 흐름 속에서 마력을 장작 삼은 망화의 불길이 삽시간에 번졌다.
<여화광(黎火光)>
소멸이 일대의 빛을 집어삼켜 전장 한편을 어둡게 밝혔다. 적의 모든 위력을 일정 수준 이하로 감쇠하는 암월의 영역.
찰나가 스쳐 지나가며 어두워진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피해는 없다.
감각도 온전하다.
다만 절기에 담긴 기운의 절반이 사라지며 초월자 인형들은 당황했고, 그렇게 흔들려 버린 마음은 신체의 경직으로 이어졌다.
발밑에서 칠흑의 화염이 솟구쳤다.
베르덴이 마도를 세밀하게 조작해 놈들의 행동을 제한시켰다.
“라테온.”
라테온이 기다렸다는 듯 당장 돌진했다. 구구절절 설명을 들을 것도 없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를 정도로 라테온은 아둔하지 않다.
망화는 아군을 멸하지 않을지니.
베르덴의 영역에 진입했다. 육중한 방패를 위에서 아래로 휘둘렀다. 무게가 온통 앞으로 쏠리며 검 끝에 전력이 실렸다.
채애앵!
초월자 인형의 도끼는 기운이 제대로 실리지 않아 라테온을 물리치지 못했다. 머리를 기울였다. 칼날이 목을 얕게 뜯고 지나갔다.
그대로 몸통으로 들이받으며 라테온이 완력만으로 인형의 허리를 붙들었다.
인형이 도끼로 내리찍었지만 라테온의 전신갑옷은 전설적인 드워프의 작품. <여화광>의 영향을 떨쳐 내지 않는 이상 무너뜨릴 수 없다.
하물며 행동에 나선 사람은 당연하게도 라테온만이 아니었다.
마탑의 장로들이 정밀한 마법 시전으로 인형의 손, 손목, 전완, 어깨를 동시 타격해 반격을 봉쇄, 도끼를 놓치게 했으며.
콰아아아앙!
수인 대부족의 산왕이 큼지막한 염소뿔로 창백한 이마를 강타했다.
세계 회의에서 수왕과 성녀를 말리려는 베르덴을 도발했다가 꼴이 사나워졌지만, 그는 수인족으로서 초월적인 강함에 닿아 있는 강자.
인간으로 비유하면 극점에서도 결이 높다.
“크헉!”
라테온에게 고정당한 상태라 충격을 거의 흘리지도 못했다.
초월자 인형의 목에서 좋지 않은 소리가 났다.
사혈死血
레이라의 혈검이 정신을 못 차리는 인형의 가슴을 관통했다. 칼날을 비틀어 쳐올린 뒤, 라테온이 낸 목의 상처를 따라 검을 빼냈다.
후두두두두두둑!
결코 좋지 않은 냄새를 풍기는 피가 라테온의 몸을 적셨다.
초월자 인형의 표정이 비틀렸다.
“각성도 경험하지 못한, 범인(凡人)들이……!”
“하아아아아아아아압!”
라테온이 함성을 내지르며 근육을 쥐어짜 허리를 크게 젖혔다. 부유감이 엄습했다. 허공에 붕 뜬 초월자 인형의 정수리가 망화가 득실거리는 지면에 수직으로 처박혔다.
초월을 잃었다는 건 초월적인 저항력과 항상성까지 함께 사라졌다는 의미.
우드드득!
인형의 목이 부러졌다.
그렇다고 해도 방심할 수 없다.
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푹!
라테온이 검을 역수로 잡아 훤히 열린 몸통을 연신 내리찍었다. 레이라도 합세했다. 심장과 폐를 비롯한 장기에 여러 구멍이 뚫렸다.
산왕은 포효하며 발굽으로 초월자 인형의 안면을 세 번이나 강하게 짓밟았다.
팍!
머지않아 초월자의 시체에서 탄생한 개체의 머리가 수박처럼 터졌다.
발버둥 치던 놈의 팔다리가 축 늘어졌다.
“하아, 하아…….”
“후우…….”
온몸에 피칠갑을 한 그들이 격한 흥분으로 가득 찬 호흡을 반복했다.
마침 다른 무투계 초월자 인형도 최후를 맞이했다.
성율성단 소속의 최고위 이단 심문관과 흑요 등급 모험가, 타국의 국가급 전력이 완벽하게 저항할 틈을 막아 버리자───헬리온 마탑주, 트리톤이 급강하해 스태프로 골통을 쪼개버렸다.
콰자자자자작!
전선전쟁(前線戰爭)이라는 이명이 뒤따를 정도로 전투에 능한 그의 파괴력은 인형의 두개골을 압쇄하는 걸 넘어 상반신 절반을 뭉갰다.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상당한 피해를 생각했는데, 그 어떤 손실도 없이 초월자 인형 세 명을 침묵시켰다.
놈들이 다시 움직일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걸 아주 확인하고 나서야, 연합군 간부들의 시선이 베르덴에게 모여들었다.
트리톤이 묻는다.
“본부에 계시지 않고 어찌 여기에?”
“크세리온 제국의 동향은 볼 만큼 봤다. 저놈들이 집 안에서 결판을 보고자 하는데, 굳이 문 밖에 오래 머무를 이유가 없지.”
아주 멀리서 아티슨 마탑이 제작한 비행정 특유의 울림이 전해졌다.
북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지상과 상공에서 현대 병기들을 짊어진 수송대가 도착한 것이다. 그들의 진형 앞엔 베르덴의 비행정인 아르시스가 자리했다.
“앞장서마.”
베르덴이 전진했다.
“이대로 앞마당을 차지한다.”
* * *
적진을 파고들고, 또 파고들어 사문까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다다랐다. 정상 회의에서 생각과 판단을 쥐어짜 구축한 경로에 군단이 바로 섰다.
앞마당 확보, 성공.
마법사들이 즉각 거점을 건설했다. 그리고, 마침내 원거리 병기들이 설치됐다.
그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이 헬리온 마탑의 마력 입자포였다.
트리톤이 오랫동안 연구했으나 가장 중요한 마력을 입자화하는 실험을 성공시키지 못해 완성하지 못하고 있던 전쟁 병기였는데…….
마도 축제에서 에온에서 선보인 대마력, 쌍둥이가 마력 입자를 다루는 것을 보고 마침내 부족한 부분을 채워 넣은 것이다.
쿠웅, 쿵! 키이잉! 키이이이잉! 쿵!
비행정들이 운송한 부품들이 곧 마법과 손재주로 조립되기 시작한다. 헬리온 마탑의 장로들만이 아닌 트리톤까지 가세했다.
젊은 마법사보다 늙은 마도사들이 훨씬 능숙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 열정이 청춘을 압도했다.
마법사는 늙을수록 강해진다.
헬리온 마탑은 실전을 중시하는 10대 마탑. 그렇지 않고 책상에 머무르는 마법사들은 진즉에 헬리온 마탑 내에서 도태되었다.
마력 입자포가 점차 두각을 보였다.
미스릴 합금으로 이루어진 프레임.
33.3m에 이르는 포신.
360도 회전이 가능한 선회축.
연한 청록색을 띤 마력 입자포는 그 자체로 하나의 구조물이었다. 불과 3시간 만에 거점의 좌우로 두 대의 설치가 완료되었다.
물론 아무나 사용할 수 없다.
마력 입자포가 곧 전신의 마력회로라면, 대마력의 마법사는 마력이 깃든 심장이자 연산 작용을 담당하는 뇌와 같으니.
헬리온 마탑의 걸작품은 에온이 있어야만 비로소 완벽해진다.
후우우웅.
마지막으로 베르덴이 마력 입자포의 설계 도면을 보고 난 후 창조한 마법진이 인과의 전도의 손에 의해 프레임에 서서히 안착됐다.
다인용 마력 입자포.
헬리온 마탑과 에온의 기술이 합쳐진 끝에 완성된 마법적 병기의 명칭이다. 시연할 여유는 없었던 터라 실험은 실전에서 진행한다.
“부디.”
트리톤이 기대감에 물든 얼굴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마법사들이 공손히 길을 텄다.
본래 대마력을 부여받은 에온의 마법사단이 곧바로 다룰 예정이었으나, 당장 베르덴이 있기에 첫 시범은 자연히 그가 맡았다.
‘트리톤이 자신하길,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꿀 신형 병기.’
마력 입자포 앞에 선 베르덴이 해당 동력부에 손을 얹었다. 베르덴은 초월자로서 항상성이 강해 대마력에 적응할 수 없는 신체지만, 물론 대마력의 이적을 전부 발현할 수 있다.
대마력은 에온을 위한 마력 운용법이고.
베르덴은 에온 그 자체이므로.
화아아아아아아악!
대마력의 고유한 마력 밀도에만 반응하는 마법진, 그를 경유한 마력이 집중돼 반경 1m가량의 입자체를 형성했다.
사실 여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려야 정상이지만, 초월자의 마력 출력이 워낙 강해서 그 과정 대부분이 생략되었다.
프레임이 안내하는 경로를 따라서 입자체가 선으로 움직였고, 중심 내부에 도달하자 기체 전체에 마력의 빛이 명멸했다.
발사 준비가 됐다는 신호.
베르덴이 <염동력>으로 입자포를 조작해 남쪽으로 정확히 방향을 맞추었다. 시야의 끝에서 어슬렁거리는 언데드 무리를 향해.
“마력 입자.”
베르덴이 동력부의 윗부분에 자리한 버튼에 손끝을 올렸다.
“사출, 개시.”
사전에 고지한 대로 주변 이들이 충격에 대비하고 있던 그때였다.
파앗─────────!
푸른 광채가 시야를 메웠다.
구체형 입자가 사출구를 지나는 순간 광선이 되어 뻗어 나갔다.
자연의 마력에 간섭을 받아 왜곡 현상이 발생해 미세한 곡선을 이루었지만, 타격 지점에서 빗나가는 일은 없었다.
언덕의 일부가 소실되었다.
뒤늦게 폭음이 번졌다.
물리적인 충격파와 고열이 피격된 언데드 무리를 일거에 지워 버렸다.
6위계 중위에서 상위급.
상당한 파괴력이다.
이 정도면 현존하는 공성 병기 중에서 최상급으로 분류해도 좋을 정도…… 하지만 마력 입자포의 진정한 위력은 다른 데 있었다.
“성공이군요.”
트리톤 마르투스는 흉터가 많은 험악한 인상에 어울리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로써 연합이 간격을 장악했습니다.”
마력 입자포의 유효 사거리는 어떤 공성 병기조차 감히 대적할 수 없다. 이론적으로는 이곳 앞마당에서 사문까지 닿는다.
마법의 시대.
전례 없는 초장거리 포격이 역사에 오르며 전쟁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 * *
“동대륙 남부에서 그러했듯 이곳에도 두 명 이상의 사령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예의 네 마리의 언데드 중 하나 또한.”
베르덴은 아드리안과 레온하르트를 데리고 거점 주변을 거닐었다. 그들의 시선은 이미 사기에 오염된 대지를 향했다.
다수의 언데드가 지나간 자리는 풀 한 포기조차도 자라지 못하는 불모의 땅으로 변했다.
레온하르트는 참담함에 한숨을 내쉬면서 베르덴을 바라보았다.
‘왠지 압박감이 덜한데. 격을 억누르신 건가?’
레온하르트는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경험이 부족한 감각으로는 이그나시아의 정신체를 간파하는 건 무리였다.
베르덴이 말했다.
“앞으로 최대한 전력을 보전해라.”
베르덴은 긴급 정상 회의에서 세계 연합 설립과 연합장 임명을 거론하며 가장 앞에 서겠다고 한 말을 실천했다.
“길은 내가 열겠다.”
델하룬에서처럼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베르덴은 사문에 진입할 수 없으니, 결국 사문을 폐쇄해야 하는 것은 군단의 몫.
혼자서는 승리할 수 없는 전쟁에서 기꺼이 승리를 위한 발판이 되리라.
“예, 주군.”
아드리안이 단언했다.
“사문은 제가 닫겠습니다.”
레온하르트도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입술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끼어들기에는 베르덴과 아드리안의 유대가 너무도 깊었기에.
그는 성검을 의식하며 말없이 행동으로 각오를 내비쳤다.
* * *
테르네티아 연방의 사면 섬멸 작전이란 말 그대로 동쪽, 서쪽, 남쪽, 북쪽에서 진군하여 크세리온 제국을 압도하는 걸 의미한다.
이는 그간의 정보를 토대로, 테르네티아 연방에서 확인된 사문이 언데드 규모에 특화되어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마련한 것이었으며.
그 가설은 전쟁이 개시되고 연방 토벌군단에 의해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북쪽에서는 연방 토벌군단.
동쪽에서는 엘프.
서쪽에서는 인간과 드워프.
남쪽에서는 인간.
앞마당을 확보한 세계 연합의 대공세가 시작됐다.
* * *
베르덴이 출진했다는 소식은 제국 사령관을 통해 시타델에도 전해졌다.
“이 시점에서 베르덴이 최전선으로…….”
옛 왕──아칸드가 생각에 잠겼다.
베르덴이 무슨 수를 두었는지 단번에 파악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