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6화 펜드렌 호: 사문 (3)
‘과거 대악마의 군단을 토벌한 성율성단이 현대에 재창설되며 이단심문관의 광기가 다른 성직자에게도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서서히, 그러나 깊게.’
사문의 근원체를 앞둔 인원 중 6할이 그 자리에서 살해당했다.
불가해한 참격이 팔라딘과 성직자를 비롯해 인간의 영혼을 지키고, 전쟁의 희생자들을 부활시키려고 했던 이들의 몸을 사선으로 양단했다.
‘팔라딘 에오로크는 감정적일지언정 타인에 대한 존중을 잃는 일이 없었다. 그런 그가 내게 검을 겨눈 건 잠시 신앙적 광기에 물들었기 때문이겠지. 혹은…… 이 전쟁의 광기에 빠진 걸지도.’
멀리 뻗어 나간 핏방울이 로브를 적셨다.
‘뭐가 됐든 이렇게 죽을 사내는 아니었다.’
상하로 분리된 이들의 눈에서 빛이 꺼졌다.
콰드드득!
동시에 사문의 근원체에 검이 박혔다. 이곳 세계에 거대한 파동이 퍼져 나갔다. 세계의 종말이 임박한 듯 불온한 전조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모두.’
은휘의 대주교가 달려들었다. 교국의 제련 기술로 제작된 은검이 휘둘러졌다.
그러자 대주교의 시체가 팔라딘의 대검을 발로 차 위로 띄우더니 물 흐르듯이 잡아 은휘의 검을 강하게 받아 냈다.
쩌어엉!
쇳소리와 함께, 검을 쥔 대주교의 손아귀가 터지듯 찢어졌다.
“브란토르 대주교에 이어…… 이들까지. 본부에서 보낸 존재가 어째서 제국만이 아니라 연합까지 적으로 여기는가.”
서로 맞댄 검날이 잘게 떨렸다.
“어째서 그들을 죽였는가!”
[무가치. 하니까. 그리고. 방해. 되니까.]
거인이 즉답했다.
[너는. 후자다.]
“망언을!”
거인이 죽은 팔라딘의 검을 기울여 은검을 옆으로 쓸어 냈다. 대주교가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검날을 붙여 외력에 저항했다.
둘의 검이 맞닿은 채로 순식간에 원을 그리는 순간 대주교의 늑골이 부러졌다.
“크헉……?!”
[이해. 시키고. 싶어도.]
대주교의 가슴 부근을 짓누르듯이 거인이 주먹을 비틀었다.
[기다릴. 인내심조차 없으니.]
눈 깜빡하기도 전에 대주교의 턱과 흉부에 충격이 꽂혔다. 이토록 패도적인 권격은 처음이었다.
강인한 정신력으로 의식을 붙잡은 대주교가 함성과 함께 어깨에 무게를 실으며 신성력을 끌어모아 은검을 내리쳤다.
쩍───
그대로 오른팔이 절단된 대주교의 복부에 앞차기가 작렬했다. 늙었으나 단련된 몸뚱이가 날아갔고, 마침 경로에 있던 류왕이 엉겁결에 받아 냈다.
“대주교님!”
“끅…… 끄으…….”
“어서 치유의 기적을 발현하게!”
대주교를 따르는 몇몇 성직자들이 서둘러 기적을 일으켰다. 팔라딘 에오로크와 다른 결정을 내린 고위 성기사가 두려워하면서도 맞서려고 했으나 더 이상의 전투는 없었다.
[사문.]
거인이 역원뿔의 수정을 가리켰다. 그가 박아 넣은 검으로 인해 수정엔 무수한 금이 가 있었다. 근원체의 파괴를 선택한 이들이 몇 번이고 온 힘을 부딪친다면 부술 수 있을 정도로.
[폐쇄해.]
그 말이 끝나자마자 멀리서 폭음이 들려왔다.
거인의 흑마력이 흩어졌다. 상반신 형태를 이루던 저주가 허물어지고, 하반신만 남은 성염의 대주교가 풀썩 쓰러졌다.
마법이 끊긴 것이다.
소울 트리 바깥에서는 함대의 공세.
그 바깥에서는 사령관과의 전투.
또, 그 바깥에서는 군단과 이형체 간의 전쟁.
혼잡한 세계에 퍼지는 은휘의 대주교의 고통 어린 신음 소리.
류왕이 시선을 높였다.
펜드렌호 전쟁을 마무리할 열쇠가 코앞에 있었다.
* * *
멀리 소울 트리가 있는 방향에서 거인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정확히 무슨 상황인지는 알 수 없으나…… 유추할 단서는 충분했다.
루아스교 측이 가져간 성염의 대주교의 시신 일부.
통신 장치 너머에서는 전투가 일어날 듯한 급박한 소란이 사라졌다.
‘거인이 명령을 거부한 자들을 전부 죽였구나.’
본래 테아렐이 거인과 몰래 합의한 계획은 이것이 아니었다. 둘이 자기 희생을 담보로 삼아 가장 앞에서 사르카논을 억제하여 사문의 근원체가 파괴될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이 요체였다.
그리고 그를 위한 마법이 마침내 거의 준비가 끝난 참이었다.
‘……설마 처음부터.’
거인은 교묘한 마법적 수법으로 성염의 대주교의 시신에 미리 마법을 숨겨 놓고 때를 기다렸다. 그러곤 테아렐의 선택에 따라서 거인은 행동했다.
테아렐이 희생을 자처하자 거인도 곧바로 희생을 자처했고.
테아렐이 근원체의 파괴를 결정하자 거인은 곧장 내분을 종식시키고 사문의 폐쇄에 임했다.
전부, 거인이 짜 놓은 판.
무수한 변수에 대비하여 그 흐름의 주도권을 잃지 않으려는 태도, 다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장 빠른 길을 택하는…… 역시 거인은 선이 존재하지 않는 베르덴이다.
[훼방을……!]
사르카논이 처음으로 격분에 가까운 감정을 보이며 잔상을 흩뿌렸다. 테아렐이 눈을 움직였다. 몇 번 보니 저 잔상에도 익숙해졌다.
촤좌좌좍!
수면에서 뻗어 나온 태해의 쐐기가 사르카논 본체를 관통했다. 뼛가루가 더 떨어졌다.
그럼에도 놈은 무시하고 거인에게 직행했다.
────────────!
저주와 권능이 교차했다.
[근원. 체. 손상.]
저해의 거인이 이내 핏발이 잔뜩 선 외눈에서 피를 폭포처럼 쏟아 냈다. 자그마한 백골의 손아귀가 거대한 상반신의 중심을 꿰뚫은 것이다.
[폐쇄가. 임박했다.]
푸화아아악!
전신의 상처에서 피가 분출하며 거인의 몸이 뒤로 기울었다. 쿠우웅. 왼손이 잘리고 온몸이 만신창이인 몰골은 끔찍할 정도로 참혹했다.
마치 거대한 산맥이 드러누워 피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수면이 넘실거리며 발목을 간질인다.
투명하기에 완전히 핏빛으로 물든 그것에 산 자와 죽은 자가 비쳤다. 테아렐은 계속해서 마도를 유지해 고요히 수류를 조작했다.
쿠웅!
사르카논이 추락했다.
[……!!……!!!]
그의 손뼈가 격하게 떨렸다.
거인은 무력화됐다.
사실상 육신이 죽었으니.
그러나 사악한 저주가 중첩되고 중첩돼 사르카논도 온전치 못했다. 권능의 절반 이상이 마비됐다. 심지어 저항력도 약화된 상태.
그래도 바다의 초월자를 포함한 나머지를 죽이기에 부족함은 없다.
둥─────────!
사문의 근원체에 충격이 가해지면서 공간 전체가 전율했다. 류왕 일행이 미친 듯이 근원체에 박힌 검을 강타하고 있는 것이다.
사르카논이 손가락뼈를 굽히려는 찰나 소름 끼치는 시선이 그에게 쏟아졌다.
저해의 거인이 쓰러진 채 사르카논을 응시했다.
[나는. 두 마리. 토끼. 다 잡아.]
[발악하는가. 네 육체는 한계에 다다랐다.]
[한계?]
거인이 오른팔을 들었다.
[아버지께선. 무한하다.]
물밑에서 붉게 물든 흑마력이 폭발하듯 모든 이를 잠식했다. 사르카논이 시선을 내렸다. 핏물에 미묘한 경계가 쳐져 있었다.
[……!]
그제야 주변 일대를 의식했다. 피의 농도가 특히나 높은 선들이 거대한 마법진을 구축하고 있다. 이것은 초월자의 짓이었다.
둥─────────!
마법사는 준비하는 자.
테아렐만이 아니라 저해의 거인 또한 마법사일지니, 거인이 일러 준 대로 마법진의 기틀을 완성한 테아렐의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거인이 손목을 비틀어 피를 제물로 삼아 흑마법의 조건을 갖추었다. 사르카논이 방해했지만 이미 준비된 마법은 막을 수 없다.
초위 마법.
<대저주: 의식>
저해의 거인을 창조하신 아버지(베르덴)의 마법이 이번에는 순수하게 대상을 해하는 불행과 재앙을 위해 발동되었다.
핏빛이 일순간 사라졌다.
힘을 다한 거인의 팔이 떨어졌다.
쩌저저저적.
사르카논의 온몸에 금이 갔다. 작게 균열이 나 있던 손뼈가 쩍쩍 갈라졌다. 대부분이 그대로였으나 나머지 하나만이 변화했다.
저항력이…… 한 차원 약화됐다.
‘이건, 최후의 저항자가 아니다.’
사르카논은 일련의 흐름을 경험하고 나서야 거인의 창조주가 진정 누구인지 깨닫고 말았다. 이 집요함은 올다르크와 성질이 달랐다.
‘운명 파괴자.’
사르카논은 오싹한 기분과 함께 비로소 거인에게서 베르덴을 인지했다.
콰과아아앙!
콰아아앙!
살아남은 토벌자들이 기회를 포착하고 남은 전력을 쏟아부었다. 초월에 도달하지 못한 마법임에도 그에게 명확한 손상을 주기 시작했다.
그렇다는 것은 무투계의 일격도 이전처럼 간단하게 막을 수 없다는 의미였다.
둥─────────!
세계도 격하게 흔들렸다.
그러니…….
<죽음: 선고(宣告)>
거리를 좁혀 오는 인간들 사이를 가로지른 죽음이 가장 큰 위협을 지목했다. 바로 초위 마법을 준비하는 테아렐을.
‘안 피해.’
테아렐은 방어를 도외시하고 초위 마법에 모든 걸 걸었다. 그녀가 놈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않으면 저들이 죽을 테니까.
생명체라면 공포에 질려 당장 몸을 빼내야 했지만 초월자의 기질이 모든 생존 경고를 무시했다.
초위 마법이 완성되어 가는 동시에 거대한 낫 같은 예기가 느껴졌다. 테아렐은 끝까지 움직이지 않았고, 그 탓에 선고가 이루어졌다.
죽음이 찾아왔다.
초아아아아아아아악!
육신이 찢어 발겨지면서 피가 분출했다. 테아렐의 온몸이 붉게 적셔졌다. 심해가 깃든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파란만장한 삶에 화려한. 최후. 역시…… 따라오길 잘했다니까. 자, 내 모험은 여기까지.”
유르발이 쌍검을 교차시킨 채로 테아렐의 정면을 지켰다.
그가 살짝 뒤를 돌아보며 윙크했다.
“너는 모험을 계속하라구, 테아렐.”
유르발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유르발을 이루고 있던 피부와 근육, 그리고 장기가 테아렐을 덮었다.
적발의 유르발.
쌍검 사용자로서 항상 흑해 파티의 전위를 맡았던, 흑해 파티에서 가장 유쾌하고 쾌활한 테아렐의 동료가 사망했다.
묵시록의 죽음마저도 유르발의 동료애를 억누르지 못했으니, 그는 예전부터 의미 있는 죽음을 바란 대로 동료를 위해 희생했다. 향년 71세였다.
눈가를 적시는 것은 친구의 피인가.
아니면, 친구를 위한 눈물인가.
“잘 가, 유르발.”
테아렐은 피눈물을 흘리며 초위 마법에 마침표를 찍었다.
───! ─! ──! ────! ──!
메리사의 마나 광선이 폭발하고 다레도르의 권격이 사르카논의 로브 안쪽을 강타했다. 라에틸라의 대검이 로브를 찢으며 뼈를 손상시켰다.
사르카논이 다시금 광선을 일으켜 팔을 휘둘렀지만 위력은 전에 비해 반의반 이하로 떨어져, 다리가 잘린 다크워튼 마탑 장로를 포함해 생존자 중 다섯 명밖에 죽이지 못했다.
유르기엔의 보조를 받아 다엘은 마도를 집중시킨 검격을 번개처럼 내리꽂았다.
사르카논의 팔뼈가 깨졌다.
“숙, 여.”
“……!”
다엘이 당장 엎드렸다.
콰아아앙!
메드란트가 마력 방패로 사르카논을 강타하곤 그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사기에 잠식당해 죽어감에도 그는 에온의 위상이었다.
사르카논이 금방 힘으로 메드란트의 봉인을 부수고 나왔지만…… 이미 거인의 혈액으로 물든 사문 세계의 바다는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미력한 힘으로 감히…….]
“죽어.”
테아렐이 강하게 양손을 말아 쥐었다.
망각의 해연(海淵)
<모르바스크(Morvask)>
어떤 빛조차 존재하지 않는 심해의 암흑이 죽음을 집어삼켰다. 잔잔해진 심연 아래에서 기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콰드드드드드드드드득.
곧이어 해진 로브의 일부분과 뼛조각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 * *
죽은 건가.
죽인 건가?
명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르카논이 토벌군을 몰살하지 못할 정도로 무력화된 것은 사실이다. 테아렐은 계속 초위 마법을 유지하며 때를 기다렸다.
사문에 내려앉은 석양이 곧 사라지더니 밤도 오지 않은 채 다시 날이 밝았다. 이곳에서는 밤이 존재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둥─────────!
세계가 격동했다.
푸른 하늘이 삽시간에 갈라졌다.
무슨 상황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통신 장치를 통해 류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군단 전체에 보고했다.
───근원체를, 파괴했다.
토벌군단이 목적을 달성했다.
테아렐이 말했다.
“근원체 파괴 확인. 전군, 즉시 후퇴해.”
“즉시 퇴각하라!”
“사문 입구로 어서!”
사문의 근원체가 파괴되는 순간부터 입구가 닫히기 시작한다.
갇히면 다시 나올 수 없다.
물론 이만한 대규모 함대가 빠져나가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기에 전부 탈출하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으나.
그 점은 이미 긴급 정상 회의에서 논의되어 대책이 마련되어 있었다.
공간 계열에 특화된 마법사들이 먼저 사문 근처에 도착했다.
후우우우우우웅!
세계 연합에서 완성한 공간 조작의 연계가 사문의 폐쇄를 늦추기 시작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아티슨 마탑에서 특수 제작한 휴대용 마법진을 통해 공간을 고정하는 마법진들이 사문 주변에 새겨졌다.
콰과가아아아아아아앙!
어토리움의 폭격에 직격당한 죽음의 소울 트리가 화마에 휩싸였다. 고통스럽다는 듯이 뿌리와 가지를 휘두르는 영역에서 근원체를 파괴한 이들이 다급하게 빠져나왔다.
넓게 장벽을 이루고 있던 해상 함선들이 시시각각 이형체를 뭉개며 방향을 전환했다. 비행정 함대도 곧 반대로 돌아 대륙으로 향했다.
에온, 제국, 마탑, 모험가 길드 등 각 세력에서 당장 사르카논을 상대했던 토벌자들을 부축하여 함선으로 옮겼다.
가능하면 시신도 최대한 수습했다.
“테아렐, 어서 비행정으로!”
“나는 마지막으로 갈게. 너희 먼저…….”
[나는, 묵시록의 죽음.]
해연의 너머에서 반신(半身)이 파괴된 사르카논의 실루엣이 떠올랐다.
[운명은 정해져 있다.]
중압감이 사문 전체를 짓눌렀다.
콰과과과과과과……!
모든 함선이 동력을 최대한으로 활성화했음에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권능이 그들을 붙들었다. 그와 함께 이형체들이 비명을 질렀다.
근원체를 기점으로 하여 가까운 곳에서 먼 곳까지 놈들이 연쇄적으로 폭사하기 시작했다.
“보호막이 못 버팁니다!”
“난간에서 물러나!”
“아, 안 돼……!”
중첩된 폭발을 견디지 못한 함선이 반파되어 이내 기울었다. 비행정에서 그들을 돕기 위해 마법 폭격을 날려 이형체들을 먼저 죽였지만, 숫자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이대로는…….’
테아렐은 사르카논이 나오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고작이었다. 저 흐름을 막을 방법은 없다. 다만 피해를 줄일 방법은 있었다.
한 번 눈을 감았다 뜬 테아렐의 눈동자는 시리도록 차가웠다.
위계 돌파.
암월의 꿈은 마법계 초월자도 꾸었다. 특유의 연산 방식에 의해서 그 마법적 역량이 본래의 경지를 잠시 넘어섰다.
테아렐이 손을 내리쳤다.
광해(狂海)의 섬박.
<운다바르크(Undavark)>
두 개의 초위 마법을 동시에 운용하면서 유지하는 건 전례 없는 부담을 초래했다. 테아렐의 눈과 코에서 격한 출혈이 발생했다.
뇌가 저며지는 듯한 아픔에 잠시 놓은 의식을 곧장 붙들었다.
성난 해일들이 솟구쳐 충돌하면서 분리와 합일을 반복한다. 그녀에게서 촉발된 태해의 파도가 함대를 밀어내었고, 또한 사르카논이 잡아 둔 심연의 해연을 뒤덮었다.
[초월자!]
권능이 정지되며 모든 함대가 해방됐다.
이형체들에게 가로막힌 해상 함대는 거대한 해일에 실려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로 사문을 향해 쏘아지더니 머지않아 1열, 2열…… 십수 척씩 대륙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테아렐!!!”
동료들이 그녀에게 손을 뻗었지만 파도는 그들을 멀리 떨어뜨렸다.
비행정에서 연락이 왔다.
───지금 하강하겠습니다, 군단장님.
“내가, 없으면. 사령관이 풀려나. 그럼 너희도 나갈 수 없어.”
테아렐이 숨을 내쉬었다.
“그냥 가.”
───……무운을.
해상 함대에 이어서 비행정 함대도 사문 바깥으로 나가고 있다. 육신이 죽어가는 저해의 거인도 밖으로 밀려나긴 했으나 사문까지는 한참 멀었다.
“너는 무거워서…… 보내 줄 수 없네. 미안.”
[내가. 나간다면. 좋지. 않을 텐. 데?]
거인은 이유가 있다고 하지만 아군을 거리낌 없이 살해했다. 전쟁 도중에는 잠잠해도 그 이후에 어떠한 상황이 발생할지 가늠할 수 없다.
거인의 존재를 옹호한 테아렐은 특히나.
“내, 선택이야.”
[…….]
“어차피…… 대륙으로 다시, 못 가겠지만.”
시간이 흘렀다.
테아렐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초위 마법을 이어 나가 사르카논을 억압했다. 저해의 거인은 조용히 그녀를 관찰했다.
시간이 더 흘렀다.
테아렐이 무릎 꿇었다. 그녀의 머리가 점차 앞으로 기울었다. 마력은 사실상 바닥을 드러내었다. 이제는 서 있을 힘도 없었다.
사문의 폐쇄도 더는 미룰 수 없었다.
마지막까지 남은 마법사들은 테아렐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가 이내 참담한 심정과 함께 사문의 균열로 사라졌다.
……철퍽.
테아렐이 엎어졌다.
복부를 파고든 사르카논의 사기가 장기를 오염시킨 상태다. 탈출에 성공했다고 해도 아마 생존 가능성은 낮았을 것이다.
‘사문이 폐쇄되면 우리는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테아렐은 마지막까지 마법사다운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그녀는 거인의 핏물에 잠겼다.
쿵.
갑자기 사문의 폐쇄가 멈췄다.
그리고.
무한한 마력으로 발현된 무지막지한 인력이 거인과 테아렐의 존재를 끌어당겼다.
* * *
리산드로의 열매 포션이 살짝 열린 입술 사이로 흘러들어간다. 자연의 생명력이 죽어 가는 초월자의 생명을 지탱했다.
“근원체가 파괴된 이후부터는 사문 특유의 성질이 서서히 약해지는 모양이더군. 여전히 직접 들어갈 수 없었지만, 마법은 닿았다.”
테아렐이 천천히 눈을 떴다.
“베르덴……?”
“잘했다, 테아렐.”
베르덴은 가면을 쓴 흑마법사의 모습으로 테아렐을 안고 있었다. 물론 다른 이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은폐했다.
그의 정체를 감춰야만 했으므로.
테아렐은 회복을 도운 다음 보내면 된다.
“사문은 폐쇄됐다.”
베르덴의 시선을 따라 펜드렌 호수를 내려다보자 불길하고 거대한 균열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델하룬에 이어 두 번째로 사문이 닫혔다.
세계 연합의 승리였다.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테아렐은 군단장으로서의 책무를 다했다. 그녀는 깊게 숨을 내쉬는 것만으로 감정을 표현했다.
“그런데.”
베르덴이 조심스럽게 테아렐의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겼다.
“너는…….”
테아렐의 머리카락 사이에 숨어 있던 저해의 거인이 움찔 떨었다. 녀석의 몸체는 손바닥 크기로 축소되어 있는 상태였다.
베르덴이 테아렐과 함께 거인의 존재를 끌어당겼을 때 자연스럽게 그런 형태로 변화했다.
몸집에 비해 커다란 눈망울이 베르덴을 마주했다.
저해의 거인은 생각했다.
‘무섭다.’
베르덴의 본질이 두렵기도 했지만 가장 큰 공포는 거인의 본질에서 비롯되었다. 거인은 베르덴의 피와 감정에서 태어났지만, 단연코 그가 의도한 존재는 아니었으니.
다시 말해…… 원치 않는 자식.
거인은 운명에 관련된 베르덴의 기억을 일부 갖고 있다. 인간 사회에서 원치 않는 자식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었다.
저해의 거인은 고아원에 버려지기 싫었다.
그렇기에 거인────저주의 사도는 살기 위해서 선택을 내렸다.
[……아빠?]
부성애를 자극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