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7화 네르가
화르르르륵!
거침없이 타오른다.
소울 트리의 크기만큼이나 거대해진 불길이 이제는 산불에 가까워졌다. 잿더미가 되어 가는 소리만 끝없이 들려왔다.
난잡스럽게 꼬인 거대한 뿌리와 가지가 단말마의 비명을 대신했다.
머지않아 금이 간 하늘이 유리창처럼 깨졌다.
하늘의 조각들이 비산하며 소울 트리가 화형당하는 광경을 반사했다. 그에 따라 거울처럼 투명한 일대가 벌겋게 물들었다.
쿠구구구구구구…….
사문이 완전히 폐쇄되면서 세상이 무너졌다. 사문 내부를 유지하던 공간의 틀이 붕괴되고 부유감이 모든 걸 휘어감았다.
죽음의 소울 트리가 추락했다. 망가져버린 근원체 내부에 머물러 있던 영혼들도 솟구치지 못하고 바닥이 없는 불가사의한 암흑 속으로 떨어졌다.
아홉 개의 사문은 첫 번째 세계와 다섯 번째 세계와 연결된 ‘운명의 파편’.
파편은 첫 번째 세계와의 결합이 끊어져 위태로운 균형이 붕괴되자, 한순간에 다섯 번째 세계의 인력에 노출되고 말았으니…….
현실, 그리고 죽음.
사문(死門)은 양쪽에 걸쳐져 있어 한쪽이 부재하면 다른 한쪽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는 본질적인 종속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렇게 와해된 펜드렌호 사문 속 공간이 두 세계의 간극을 통과했다.
세계의 틈새를.
소울 트리와 소울 트리가 흡수한 영혼들이 가야 할 곳으로 떠났다. 틈새의 어둠은 너무나 깊고 거대했기에 그들의 모습은 어느샌가 사라졌다.
오직────사르카논만이 무저갱의 절벽을 붙잡아 죽음을 거부했다.
[……!……!!]
세계의 틈새는 두 번째 사도의 권역.
항거할 수 없는 인과가 끌어당기고 있었지만 그는 운명을 완성하는 사도의 권속이기에 조금이나마 견딜 수 있었다.
사르카논의 머리는 로브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 아래 드리운 어둠 속에는 처절한 사명감만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결국 사르카논이 절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육사도의, 뜻을 위해.]
마검사 다엘에게 오른팔이 깨지고, 저해의 거인과 테아렐의 초위 마법에 의해 전신 곳곳이 거의 무너진 상태였기에…… 남은 왼팔과 오른다리로 작은 균열을 붙잡으며 필사적으로 위로 나아갔다.
다른 묵시록의 권속들이었다면 진즉에 다섯 번째 세계로 끌려갔겠지만 사르카논은 달랐다.
크세리온 제국의 제4사령관.
죽음의 사도의 네 번째 권속.
죽음의 묵시록.
죽음의 권능을 허락받은 존재이기에 자신의 죽음을 지연시킬 수 있었다.
[부디.]
만족스럽지 못한 끝은 감히 납득할 수 없다. 숭고한 사도의 권속으로서 가치를 증명해야만 한다. ‘당신’의 운명을 위해 존재 이유를 입증해야만 한다.
[다시 기회를───]
스스로도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건 권속의 본능 그 자체였다.
* * *
테아렐의 목덜미에서 슬쩍 얼굴을 내민 외눈박이가 베르덴을 올려다봤다.
[……아빠?]
지금의 자신과 인연이 없는 단어에 베르덴은 먼저 당혹감을 느꼈다. 사실 아버지를 뜻하는 그 말보다는 녀석의 존재감이 더 혼란스러웠다.
‘저해의 거인.’
베르덴이 이형체들의 시체와 초위 마법으로 창조한 존재가 이성을 갖고 있다. 단안(單眼)에 지성체 특유의 총명함이 엿보였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초위 마법으로 거인을 설계했을 때 분명 이성적인 부분은 고려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가 생각했던 것은 사문에 출입을 거부당하지 않는…… 운명을 증오하는 순수한 감정체였다.
‘마법 때문이 아니다. 변수로 작용한 건 그보다 더 생리적인…… 설마.’
베르덴이 통찰력을 발휘했다.
신성력.
정확히 말하자면 신의 피.
베르덴도 자세히 알지 못하는 신격이 마법 이론에 어긋난 결과를 초래한 듯했다.
이는 흑마법으로 시신을 이용해 언데드를 구축하는 원리를 벗어나서 아예 별개의 독립적인 인격을 창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대저주: 의식>으로 태어난 거인은 신의 논리에서 비롯되었다.’
흑마력에 완전히 뒤덮여 있어 외부에서는 신성력을 감지할 수 없었으나, 창조주인 베르덴만큼은 녀석의 근원을 간파했다.
신의 힘을 부여받은 존재.
베르덴은 그런 이들을 뭐라고 부르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너는, 나의 사도인가?”
손바닥 크기로 작아진 저해의 거인이 당장 무릎을 꿇고 부복했다.
[저주의 사도. 가. 아버지. 를. 뵙나이다.]
어린아이와 같았던 아까와는 다르게 낮고 성숙한 음성이었다. 동질감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혈연과 같았다.
베르덴이 손을 뻗었다.
저해의 거인은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그의 손에 올라탔다. 다른 사람이 보면 끔찍하다고 느낄, 몸집에 비해 커다란 눈이 깜빡거렸다.
그때 테아렐이 힘겹게 말했다.
“과격, 하긴 했지만…… 얘 도움이 컸어. 없었다면, 잘해 봤자…… 공멸이었을 거야.”
“그런가.”
“게다가…… 인류의 배신자도…… 구별할 수 있고. 과격, 하지만.”
베르덴이 눈을 크게 떴다.
“정말인가?”
[모든. 무가치한. 족속을. 구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해의 거인은 운명의 추종자를 가치 없는 자라고 표현했다. 운명에 대한 경멸과 증오가 안광을 통해서 전해졌다.
어째서 그런 능력을 가지게 됐을까.
원인은 명확했다.
베르덴은 사르카논, 즉 사도의 권속만을 상대하기 위해 운명에 부정적인 자신의 모든 감정을 피와 함께 쏟아 내어 대리인을 창조했다. 본능적으로 세계 연합이 아니라 크세리온 제국을 노리도록.
그 영향을 받아 운명에 종속된 존재를 무작위로 감지할 수 있게 된 것이리라.
“베르덴…….”
테아렐이 그의 옷깃을 잡았다.
“루아스교에…… 추종자가 있어.”
“……!”
“조심, 해.”
그 말을 끝으로 테아렐의 눈꺼풀이 닫혔다. 팔이 축 늘어졌다. 죽은 건 아니었다.
고농축 리산드로의 열매 포션을 복용해서 생명력은 보충됐어도, 정신력과 마력이 바닥까지 떨어진 데다가 시시각각 육신을 좀먹고 있는 극악한 사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루아스교의 신성력이라면 치유할 수 있을 테지만 테아렐은 초월자. 그렇기에 초월자의 생명을 양분으로 삼아 증식하는 이 사기는 기적으로도 어찌할 수 없을 터.’
통찰력으로 판단한 바 초월자의 항상성으로 스스로 극복할 수 있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방치할 수 없다.’
베르덴은 결전을 위해서 준비하던 파멸의 마도를 아주 천천히 개방했다. <오르비스 엔드베일>을 시전한 대가로 마도가 폭주해 강화된 파괴력은 통제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것은 베르덴마저 죽이는 힘이므로.
치직…….
베르덴은 집중력을 끌어올려서 최소 단위로 마력을 조작했다. 검붉은 바다에 손을 집어넣은 다음 필요한 만큼만 퍼올렸다.
어두운 광채가 찰나에 번뜩였다.
<현뢰 - 유전(流電)>
테아렐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간 마도의 벼락이 국소 부위에 쫙 퍼졌다.
검게 죽어버린 피부가 삽시간에 떨어져 나갔다.
잠든 테아렐의 숨소리가 한결 편해졌다.
피부 아래에 감춰져 있던 피하조직이 그의 벽안에 비쳤다. 언뜻 복부가 파헤쳐진 듯 보였으나, 사르카논의 기운이 없어졌으니 이런 상처쯤은 휴식하면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루아스교에 운명의 추종자가 있다면 이단 심문을 통한 배신자 색출은 믿을 수 없겠군. 굳이 신뢰하려고 한 적도 없지만.”
베르덴이 사도에게 물었다.
“누가 추종자였지?”
테아렐이 과격하다고 했으니 저해의 거인이 보인 행동은 여간 과격한 것이 아니었을 터.
[성염의. 대주교. 라고. 들었습니다.]
“죽였나?”
[상체와. 하체를 분리. 한. 다음. 상체를. 짓밟. 아. 으깼. 습니다. 아버지.]
7인의 대주교를 보란 듯이 살해했다.
‘사안이 무겁군.’
모두가 보는 앞에서 교국의 요인을 죽인 것도 아주 큰 문제지만, 교국의 신인들은 부활의 은총으로 죽은 대주교를 살릴 수 있기에 더 문제다.
루아스교에서는 대대적으로 거인을 적대할 것이다. 테아렐은 거인을 옹호했을 테니 훗날 외교적인 부담을 감당해야 할 거고.
‘그나마 다행인 건 거인…… 저주의 사도가 사문이 폐쇄되면서 사라진 걸로 보였다는 것. 녀석의 생존을 들키지 않으면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다.’
베르덴이 전쟁 이후를 머릿속에서 지우고는 현실에 전념했다.
눈앞에 있는 사도에게.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나는 사도를 창조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신성력에 대해서도 아직 모르는 부분이 많지. 그래서 묻겠는데, 네가 어떤 원리에 의해 사도로 탄생했는지 이해하고 있나?”
[사도는. 신의. 본질적인 파편과. 같습니다.]
“파편이라면.”
[저는. 아버지. 의. 근원적인. 감정에. 서. 태어났습. 니다. 역천의. 시작. 반역의 불. 씨. 인체. 실험을. 당해. 죽어 가던. 아버지. 께서. 하늘을. 증오하시. 고. 끝내. 는. 거부하신…… 운명을 향한. 저주.]
거인이 말을 이었다.
[아버지. 께서는. 의도. 하지. 않으. 셨으나. 그 마음을. 제게. 고귀한. 피와 함께. 불어넣으시며. 본질의. 일부를. 부여하셨. 습니다. 하여. 저라는. 저주의. 사도가. 탄생. 한 것입. 니다.]
사도는 신의 일부다. 신에게 힘뿐만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본질 중 하나를 부여받음으로써 그것의 주제를 대표하는 존재와 같다.
“내가 사도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어도, 과정이 그러하니 결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건가.”
[이미. 사도를. 창조한. 적이. 있으시. 기에. 과정이. 자연. 스러웠을. 것입니다.]
“……엘로리스.”
새벽의 사도──엘로리스는 악신의 잔재에 깃들어 부활했다. 그녀의 그릇이 된 악신도 베르덴의 신혈을 머금고 있었다.
“엘로리스에게서 사도 비슷한 느낌은 받지 못했는데.”
[다른 신성력과. 뒤섞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도. 뿐만이. 아니라. 저. 또한. 아버지. 의. 사도로서. 완성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거인의 몸에서 저주의 오라가 피어올랐다.
[아버지의. 신격이. 높아지시면. 아버지. 의. 사도. 는. 비로소. 제. 권능을. 온전히. 다룰. 수. 있게. 될 것. 입니다.]
사도이되 불완전하다…….
베르덴은 녀석의 설명을 이해했다. 덕분에 샛별의 여신으로부터 선택을 받았을 뿐인 엘로리스도 모르는 사도의 탄생 원리를 알 수 있었다.
베르덴이 물었다.
“사문 안에서 가진 힘 대부분을 소진한 것 같은데. 회복 시간은?”
[본신의. 대부분이 죽어. 육신과. 흑마력의. 재생이. 필요. 합니다. 현재. 저의 그릇은. 작아졌기에. 아버지. 의. 힘을 소화할 수 없어. 시간에. 의한. 회복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해의 거인이 저주를 가라앉혔다.
[그러나. 저주의. 형태로. 변화해. 발각되. 지 않고. 은폐할. 수. 있습니다.]
“가령 초월자의 곁이라든가?”
[그렇. 습니다.]
“그럼 당분간은 테아렐과 함께 있어라. 초월자가 항상성으로 회복하는 동안에 외부인의 출입은 거의 없을 테니 너에게도 가장 편안한 환경이겠지.”
베르덴이 호수 저편을 바라봤다.
“가능한 한 엘로리스가 있는 푸른 산맥으로 보내 주고 싶지만, 지금 전황이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군. 너를 데리고 다니기에는 위험하고.”
펜드렌 호수에서의 전쟁은 종결됐지만 전장은 대륙 전체다.
그런데 펜드렌호 토벌군단의 피해가 상당해 다음 전투 속행이 불가능하고, 제4사령관과 더불어 사문의 소실을 인지한 아칸드가 어떤 과감한 수를 던질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한시도 긴장의 끈을 풀 수 없다.
[알겠. 습니다. 아버지.]
“…….”
베르덴이 물끄러미 응시하며 잠시 침묵하자 저해의 거인이 흠칫했다. 그렇다. 원치 않는 자식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삐끗하면 고아원.
서둘러 아빠를 입에 올려 부성애를 자극해야 하나 싶던 순간이었다.
“네르가(Nerga).”
[!]
“네 이름이다.”
가호(加護)를 뜻하는 고대어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저주와 정반대에 가까운 의미지만 그는 일부러 그렇게 작명했다.
자식의 이름을 저주와 같은 부정적인 뜻으로 짓고 싶은 부모는 없을 테니까.
다시 말해 저주의 사도는 베르덴으로부터 존재를 인정받았다. 의도하지 않은 자식임에도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을 얻은 것이다.
[네르가.]
저주의 사도이자 저해의 거인──네르가의 외눈이 똘망똘망해졌다.
* * *
아버지는 나약하다.
인정이 깊기에 연약하다.
무가치한 자들은 아버지의 유약한 부분을 끊임없이 파고들리라.
그러므로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아버지를 방해하는 모든 존재를 저주하는 것.
운명의 추종자도 저항자도 상관없다. 둘 다 무관한 자들도 마찬가지다. 두 세력에 귀찮게 이용당할 바에 멸절시키는 편이 쉬운 길이니.
사도 네르가는 베르덴의 능력을 갖추었으나 지켜야 할 선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선을 지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직 베르덴이 중시하는 지성체의 존엄만 훼손하지 않을 뿐.
네르가는 암살, 공작, 모략이 특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