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8화 제6사도 (12)
상하(上下)가 반전된 시타델의 시가지는 음산하고 무거운 장엄함을 머금은 채로 현실과 유리된 이질감을 자아냈다.
천장을 향해 시선을 높이면 균열로 가득한 폐허의 거리가 보였다. 뭐랄까. 마치 <비행> 없이 거대한 도시 위를 걷는 느낌이었다.
시타델의 추락으로 막 형성된 지하 동굴 곳곳에서 언데드 군단이 확인됐다.
물론 죽은 상태였다. 팔다리를 움직이게 하던 실이 끊어진 것처럼 놈들은 미동도 없이 아무렇게 널브러진 채 시타델의 파괴자를 맞이했다.
건물 창가에 상반신이 걸린 좀비가 중력에 끌려 축 늘어져 있었다. 누가 닫아주지 않는 한 영원히 저 입은 열려 있으리라.
터벅, 터벅, 터벅.
베르덴 일행은 <마력 감지>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수색을 진행했다.
다름 아닌 ‘당신’과 연관된 장소다. 마력이 통하지 않는 특수한 구역이나 모종의 물질이 있다고 상정하는 것이 옳을 터였다.
참고로 지금 당장 의식을 회복하기 어려워 보이는 펠디안느는 입구에 남겨 두고, 라테온과 알데반에게 데려가게 했다.
[탐사 속행.]
알파는 가장 좋아하는 베르덴과 관리자와 모험에 나서게 돼 기분이 좋았다.
본래 예정에 없던 모험이라 베타를 위에 두고 온 게 아쉬웠지만…… 아무튼, 이렇게 관리자를 데리고 직접 미지를 파헤친 적은 처음이었다.
골렘 연구 시설에서나 침묵의 사막에서나 관리자는 지금까지 분신의 존재적 한계로 정해진 구역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으니까.
“설마 누하라를 벗어나실 줄은 몰랐습니다. 생명의 거목에서 제법 오래 멀어지셨는데, 현 신체에 문제는 없으십니까?”
“보다시피 안정적이다. 이제 거목으로부터 마력을 전달받지 않아도 자체적으로 마력을 발생시킬 수 있게 됐으니, 분신일 때처럼 행동 영역을 제한당하는 일은 없지. 물론 그런 식으로 자력으로 움직이려면 약간의 양분이 필수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다.
초월자도 그렇다.
초월자는 신체가 극단적으로 효율적으로 변화해서 생명 유지에 특화됐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섭취하지 않고 장기간 생존할 수는 없다.
그런 뜻에서 관리자는 실체가 더 명확해졌다.
고작 취미 생활이자 오락에 불과했던 음식 섭취가 몸의 근원적인 활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단계에 이르렀으니, 그는 비로소 육체적으로도 어엿한 하나의 생명으로 분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참전이 늦어 이렇다 할 활약을 하지 못한 게 조금 아쉽군. 게다가 가면을 써서 겉모습은 감출 수 있어도, 근원의 마도는 특징이 분명해서 공개적으로 활용할 수 없으니…….”
“이런 와중에 초대 마도왕까지 등장했다면 혼란을 감당키 어려웠을 겁니다.”
베르덴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면 스승님께서 초대 마도왕인 척 활동하는 건 어떻습니까. ‘당신’도, 초대 마도왕 본인도 생각하지도 못한 수인 건 틀림없을 겁니다.”
“뭐? 하하하하하! 그래, 그렇게 하면 아주 난장판이 되겠구나.”
관리자가 크게 웃다가 정색했다.
“농담이지?”
“농담입니다.”
“정말로?”
“…….”
관리자는 본체를 필요 이상 자극하는 것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한때 분신이었던 그는, 본체가 얼마나 두렵고 강대한 존재인지 직감적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르덴 역시 그것을 알았지만, 만약 필요하다면 더 큰 혼란도 일으킬 수 있었다. 누르면 튀어오르는 성질. 그는 반골 기질이 특히 강렬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지 못하고 이미 죽었겠지.
“……알파, 나중에 베르덴이 극도로 위험한 기행을 벌인다 싶으면 만류하거라. 말리지 못해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도록.”
[관리자 당부. 확인.]
알파는 잿빛 머리카락을 잡고는 베르덴 머리 위로 올라갔다.
[알파. 베르덴 폐하. 억제기.]
“그래, 그래.”
그들은 <비행>으로 여기저기 천장에 박힌 건물을 살펴보면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베르덴은 8위계 초월자로서 관리자의 현재 위계를 면밀히 통찰하기도 했다.
이전에 비해 그의 경지가 더 높아졌다.
관리자가 말했다.
“투하르를 재건하는 동안 나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처음으로 한계를 시험하는 것도, 이를 통해 성장하는 것도 참으로 즐겁더군. 그대는 어떤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한 변화를 겪은 것 같은데. 신, 그 이상의 경지에 도달하니 세상이 다르게 보이나?”
관리자는 시타델이 멸망하는 광경 속에서 베르덴의 격을 감지했다. 본체의 기억에서 보았던 고대 신들과 질적으로 다른 존재감.
그것이야말로 ‘당신’과 본체가 걸었었던 절대자에 가까운 위상일 것이다.
“더 많은 것을 인지할 수 있게 됐지만 세상이 크게 변하진 않더군요. 제게 있어 알파는 알파고, 스승님은 스승님입니다.”
“더할 나위 없군. 그만큼 예전부터 올곧은 관점을 가졌다는 증거인 셈이니.”
[알파는 알파. 관리자는 관리자. 베르덴 폐하는 베르덴 폐하입니다.]
알파가 관리자에게 물었다.
[관리자. 자유의 몸. 앞으로의 계획?]
관리자가 수염을 쓸었다.
“글쎄……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다만. 투하르에는 없는, 생소한 대륙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싶은 마음은 있다.”
베르덴은 그 말뜻을 이해했다.
“좋은 레스토랑으로 모시겠습니다.”
“기대되는군.”
관리자는 최고급 육포와 와인 말고도 여러 맛있는 식문화에 관심이 깊었다.
쿵, 후두둑…….
지하 도시는 불안정한 터라 작은 충격에도 잔해가 떨어졌다.
낙하 충격에도 무사한 건물과 그 기반 외에는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아서 위태로운 부분은 보강하며 나아갔다.
스스슥.
그때 뭔가가 또 움직였다.
베르덴이 차분하게 고개를 틀고는 어둠 저편으로 시선을 향했다. 건물의 모서리 뒤에 숨어 얼굴만 반쯤 드러내고 있는 존재.
마치 그림자처럼 보였는데 순간적으로 그것과 눈이 마주쳤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
그 존재는 다시금 신묘한 몸놀림으로 사라졌지만 자취를 남겼다.
“우리를 어딘가로 유도하는군. 혹은 유인일지도.”
“확인해 보도록 하죠.”
‘당신’은 무엇을 바라는가.
함정의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정체불명의 생명체를 추격했다. 공간을 이동했지만 놈의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간격이 좁혀지는 순간 완전히 사라졌다가 어느샌가 또 나타났다.
그렇게 입구에서부터 지하 도시의 약 3분의 2 지점까지 안으로 들어왔을까.
‘크세리온 황성. 그 외곽인가.’
천장이 낮아졌고, 크세리온 황성에서 떨어져 나온 것으로 보이는 어느 건물 한 채의 머리가 바닥에 닿아 있었다.
끼익……끼익…….
망가진 창문 하나가 쇳소리를 내며 흔들거리다가 곧 멈췄다. ‘당신’과 연관된 존재가 저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내가 선두에 서마.”
관리자가 앞장섰다.
파앗!
백색 스태프에서 확산한 마력의 빛이 짙은 어둠을 몰아냈다. 안으로 들어선 순간 코끝을 스치던 종이의 냄새가 확 진해졌다.
“서고인가.”
[이상한 공간.]
시타델은 초토화됐는데 서고는 깨끗했다. 책장은 높았고, 책은 많았다. 건물은 거꾸로 뒤집혔는데 어떤 책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기이한 무결함이 베르덴 일행을 사방에서 옥죄는 듯했다.
베르덴이 책 한 권을 꺼냈다.
백지였다.
책은 어떤 내용도 담지 않았다. 확인해 보니 옆에 있는 책도, 그 옆에 있는 책도, 심지어는 반대편 책장에 있는 책도 마찬가지였…….
툭!
위에서 책 한 권이 떨어졌다.
기척도, 소리도 없이───정확히 베르덴과 관리자 사이에 놓인 정체불명의 서적. 누구에게 더 가깝다고 할 수 없었다.
사제(師弟)는 무언으로 합의했다.
스승이 자처해서 먼저 책을 주웠다. 앞뒤를 자세히 살펴봐도 제목 따위는 없었다. 꺼림칙했지만 무시하고 천천히 책장을 열었다.
“……!”
관리자는 한순간 흠칫했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페이지를 넘겼다. 파락, 파라락. 파라라락. 그 속도가 점차 빨라지다가 첫 번째 페이지로 돌아왔다.
“백지가 아니군요.”
[내용. 궁금.]
“딱 한 문장이 세 절에 걸쳐 쓰여 있다.”
관리자는 책의 상단을 잡아 펼쳐 보였다.
베르덴이 내심 움찔했다.
올다르크는.
당신이.
되려고 한다.
글귀에서 강렬한 힘이 느껴졌다. 베르덴은 단언할 수 있었다. 이것은 다름 아닌 ‘당신’이 보내는 일종의 전언이었다.
알파가 몸체를 기울였다.
[마도왕 폐하는. 당신이. 되려고 한다?]
“모호하군…….”
베르덴이 여러 방면에서 접근해 해석하려고 했지만 답이 명확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모두 네 가지였다.
첫 번째, 명사.
‘당신’을 지칭하는 ‘당신’인지, 듣는 이를 가리키는 당신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두 번째, 단수 명사.
당신들이 아닌 당신.
만약 후자를 암시하는 거라면 베르덴, 알파, 관리자 중 누구를 말하는지 애매했다.
당연하게도 베르덴일 가능성이 높긴 했지만, 책이 베르덴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찝찝함을 남겼다.
세 번째, 문장 본연의 뜻.
올다르크가 당신이 되려고 한다…… 위의 두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얻은 단서만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네 번째, ‘당신’의 목적.
도대체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길래 ‘당신’은 이런 글을 보냈단 말인가.
───베르덴, 우리는 함께할 수 있습니다.
히아레마르 내해의 섬에서 마주했었던, 베르덴의 시간을 낭비시킨 첫 번째 사도, ‘빛을 중심으로 집결한 인류’가 그런 말을 했다.
두 번째 사도, 인간계 최초의 왕은 진심으로 살의를 표출했지만, 일단 ‘당신’이 자신을 회유하려는 정황은 있었다.
‘그렇다면 우호적인 행동인가…… 혹은 제6사도를 처단했으니 적대적인 의도인가.’
마치 선악을 구분하는 것처럼 그조차도 판단하기 어려웠다.
‘과연 신답긴 하군. 함축적인 한 문장으로 이렇게 심란하게 만드는 걸 보면.’
베르덴은 애써 해석에 집착하지 않았다. 경험으로 충분히 배웠다. 단서가 부족하다면, 상상으로 채우는 것보다 다른 단서를 얻는 편이 옳았다.
“아무래도 책의 진의를 당장 알아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구나.”
관리자도 깔끔하게 포기하고 책을 덮었다.
“그래도 전령에게 물어보긴 해야겠다.”
기척을 감지했다.
스윽.
충혈된 눈동자를 가진 놈이 책장을 타고 꼭대기에 있는 문으로 향했다. 공간을 왜곡하려고 했지만 잡을 수 있다고 확신하긴 어려웠다.
마도 <근원(根源)>
그 순간 관리자가 초대 마도왕 특유의 청금색 안광을 번뜩이더니, 청색과 금색이 맞물리며 녹색의 마력이 탄생했다.
눈동자도 이와 같은 색으로 물들었다.
골렘 연구 시설에서 의무적으로 침입자인 베르덴을 처리하기 위해 관리자가 마지막으로 시전했던 고유 마법의 전조, 그 원소의 시초.
관리자가 손끝을 튕겼다.
간이 초위 마법.
<엘 이베로(El Ivero)>
태초의 얼음이 그야말로 찰나에 서고 전체를 뒤덮었다. 베르덴과 알파를 제외하고, 공간을 포함한 모든 것이 절대영도에 완전히 얼어붙어 입자 단위로 정지했다.
[와우.]
“초위 마법을 이런 식으로……?”
“간이 초위 마법이라고 이름 지었다. 본체의 초위 마법은 워낙 사용하기 어려워서 이렇게 임의로 위력을 축소시켰지. 비효율적이긴 하지만 보다시피 활용도는 높은 편이다.”
초대 마도왕이 타고난 마법적 재능은 태초 이래로 정점이다. 그의 분신에서 출발한 관리자의 잠재력도 이에 못지않다.
“제자에게 가르칠 게 있어야 스승 노릇이라도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자, 마법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고.”
태초의 얼음에 저항하지 못한 ‘당신’의 전령이 이내 추락했고.
베르덴이 <염동력>으로 받아 냈다.
“정체부터 밝히지.”
[확인.]
그렇게 셋이 한데 모여 생명 활동과 사고가 정지한 존재를 관찰했다.
“이 외형은…….”
* * *
주인 없는 땅의 산맥을 질주하던 발리온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쾅! 콰앙! 나무를 여럿 박살 내면서도 그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드디어…… 끄아아아윽……!!”
발리온이 엎어진 채 괴로워했다. [운명서]를 읽고 난 뒤 이상한 정보들이 머리를 휘저었다. 말 그대로 뇌가 저며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격렬하게 몸부림치면서도 필사적으로 실험 용기를 지켰다.
베르덴의 혈액.
옛 왕의 혈액.
당초의 목적이었던 베르덴의 생체 정보를 마침내 손에 넣었다. 심지어 옛 왕의 것까지. 그렇게 두 종류의 피를 확보한 발리온은 미친 듯이 글러트니의 근거지로 향했다.
신인류의 완성을 목전에 둔 그의 품속에서 ‘세 종류의 혈액’이 흔들렸다.
* * *
베르덴 일행을 이 서고까지 안내한 존재는 인간의 외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흉터가 많았다.
중성적인 외모. 또한 성별을 명확히 구분할 만한 신체적 특징이 보이지 않았다.
관리자가 말했다.
“내게는 실험체로 보이는구나.”
“저도 그렇습니다.”
전령은 말 그대로 누더기에 가까웠다. 서로 다른 신체를 이어붙여 만들어진 듯한 육신은 생리적인 혐오를 일으켰다.
한편으로는 가련함도 느껴졌다.
베르덴이 깊이 통찰하다 입을 열었다.
“마법을 해제해 주시겠습니까?”
“그러마.”
관리자는 손을 펼쳐 태초의 얼음을 녹였다. 정지된 전령이 곧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가 화들짝 놀라서 발버둥쳤지만 잿빛의 건틀릿에서 감히 벗어날 수 없었다.
“말해라.”
“……!”
베르덴이 물었다.
“넌 누구지?”
전령은 눈을 깜빡이다가 대답했다.
“우…… 아.”
“뭐?”
“우아.”
관리자가 미간을 좁혔다.
“언어 능력이 없는 건가.”
“스승님.”
베르덴의 표정이 굳었다. 전령의 음성을 듣자마자 정체를 간파한 것이다.
“신입니다. 아니…… 신‘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