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3화 올다르크 – 2
‘당신’의 권역.
그곳은 첫 번째 세계와 분리되어 있지만 연계되어 있는 세계이며─────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영원한 굴레에서 ‘처음의 과거’를 상징하는 단 하나의 시간대를 의미한다.
운명이 완성되면 세계는 재편되고, 그녀의 권역에서 시작해 미래의 한계 시간을 넘는 순간 그녀의 권역에서 재시작하니.
문자 그대로 ‘미래가 될 과거’.
그 순환의 초입에는 운명전을 기다리는 존재들이 있었다.
“신의 뜻이다! 제물을 모아라!”
“아아아아아악!”
“끄아아악!”
신도들이 내지른 창이 살점을 파헤쳤다. 올가미에 걸린 아이들은 질질 끌리면서 피부가 벗겨졌고, 목조 건물들은 활활 타올랐다.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녹색의 의복을 갖춘 사제가 땀을 닦았다.
“겨우 다 잡았군.”
“하마터면 신벌을 받을 뻔했습니다.”
“이번에는 영혼들을 너무 멀리 보내셨어. 신께서도 참 짓궂으시지.”
신도들은 영혼의 개념이 담고 있는 의미만이 아닌 영혼과 운명의 상관관계도 알고 있었다.
‘당신’에게 투항한 신들.
그들은 그 신 중 하나를 숭배하며, 그에 귀속된, 운명전을 경험한 신앙자들이었기에.
“놀이는 이쯤 하고. 위대한 신탁이 예정되었으니 서둘러 제물들을 챙겨서 돌아가지.”
“운명이 재건된 걸까요?”
“그렇다고 본다. 더 나아가 운명전에 대한 말씀이 있을지도.”
“오, 드디어……!”
사제는 사제의 운명을 약속받은 존재로서 입가를 비틀었다.
더 훌륭한 운명이 예정된 존재에겐 별것 아닐지도 모르지만, 노예의 운명을 받은 자들에게 비하면 더할 나위 없는 삶이었다.
“수레에 태우지 못하는 건 전부 태우도록.”
“예, 사제님.”
그들의 신은 자신에게 배정받은 영혼들을 흩뿌린 다음, 신도들을 풀어 사냥하거나 포획하여 자신의 제단에 한꺼번에 제물로 바치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게 죽은 영혼들은 다시 신에게 돌아오고 위의 과정을 반복한다. 운명전이 재개될 때까지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한 용도로.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 아악!!”
“이 년은 매번 팔딱거리는구만. 이번 회차에는 못 따먹는 게 아쉽지만…….”
그리고 희생당한 영혼은 죽으면 죽기 전의 기억을 망각하기에 항상 반응이 격할 수밖에 없으니, 그것이 사냥이 질리지 않는 이유다.
아버지가 불타는 집에 던져진다.
머리채를 잡힌 소녀가 절규한다.
수백, 수천, 수만 번, 그 이상 죽임을 당한 소녀가 이번에는 서슬 퍼런 검에 목이 쑤셔지려는 순간 검 끝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
동시에 신도의 몸이 끌려 내려갔다.
<중압>
사제를 제외한 신도들이 중력에 짓밟혔다. 죽지는 않았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폐에서 공기가 모조리 빠져나갔다.
“까, 깍……!!!”
“꺽……!!”
불길이 일제히 꺼졌다.
아버지를 잿더미로 만들 것 같은 화염이 사라지고, 머리를 붙든 손아귀가 확 떨어지자 소녀는 깜짝 놀라 주저앉았다.
사제가 당황하며 뒷걸음쳤다.
“이, 이 무슨?!”
“너희는 무슨 신을 숭배하지?”
마을 한가운데에서 나타난 베르덴이 늙은 사제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여기서 뭐 하는 거냐.”
잿빛과 벽안.
사제는 바로 눈앞에서 감히 대항할 수 없는 거대한 위엄을 느꼈다.
‘신……?!’
‘당신’ 휘하의 신들을 돌이켜봤지만 그러한 특징에 부합하는 신은 없었다. 자세히 보니 신격도 분명하지 않았다. 혹시 새롭게 운명에 투항한 신인가 싶었지만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렇다고 해도 자신들을 위협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제는 깍듯이 예를 갖추었다.
“저는 즈크타 신을 모시는───”
<기억 공유>
베르덴이 사제의 머리를 붙잡아, 사제가 가장 먼저 떠올린 기억을 확인했다. 어떤 신을 숭배하고, 어째서 학살을 벌인 것인지 단번에 이해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제물로 붙잡은 존재들이 어디로 이송되는지도 말이다.
‘운명전에 참전한 신의 주구들이라니.’
‘당신’의 권역이 무엇인지 대충 이해했다.
‘왜 초대 마도왕께서 나를 이 권역으로 인도했는지 알겠군.’
베르덴이 눈을 가늘게 뜨고 등을 돌렸다.
사제가 안도했다.
‘뭐,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구나.’
콰지지지지지지지직!
사제와 신도들이 수직으로 막대한 무게에 짓눌려 즉사했다.
그들의 영혼이 [그링 아르카넘]에 저장됐다.
베르덴이 마을을 둘러봤다.
타다 남은 시체들은 널브러져 있었고…… 살아남은 소녀와 아버지, 그리고 포박된 주민들은 급히 무릎을 꿇으며 베르덴을 두려움에 가득 찬 눈동자로 조심스레 올려다보고 있었다.
‘조잡한 그릇에 갇힌 영혼들.’
영혼들은 준비된 육신에 갇힌 채로 사냥당해 신의 장난감으로 쓰였다.
이대로 가면 길어도 수개월 내에 붕괴되고 영혼만 남아 다섯 번째 세계로 갈 것이다. [그링 아르카넘]의 저장도 방법은 방법이겠으나 베르덴은 다른 해결책을 선택했다.
세계수의 권능.
지면을 뚫고 나온 녹색의 줄기가 굵어지더니 작은 나무로 급성장했다. 나무가 발산하는 순수한 마력이 주민들을 품었다.
어?
그들의 영혼과 몸이 아주 조금씩, 느리게 안정되기 시작했다.
“이 나무가 살아 있는 한 너희 또한 존속할 것이다.”
“…….”
“더 이상의 사냥은 없다.”
베르덴이 떠나려고 하자 목이 잘릴 뻔한 소녀가 다급하게 물었다.
“시, 신님이신가요?”
이들은 신들과 밀접한 시대에 태어난 영혼들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베르덴을 마법사라고 불렀을 테니까.
베르덴은 연민을 느꼈다. 이들의 처지도 악마들과 다르지 않았다.
운명의 희생자들.
잿빛의 건틀릿이 소녀의 머리를 쓸었다.
“앗…….”
“언젠가 데리러 오마.”
베르덴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이내 그대로 자취를 감추었다. 마치 꿈처럼. 그러나 신도들의 시체와 작은 나무가 꿈이 아님을 증명했다.
생존자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아버지의 품에 안긴 소녀가 자애로운 미소를 기억했다.
“신님…….”
* * *
[운명의 수레바퀴가 재건되었다───!]
석조로 이루어진 피라미드 위에서 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222개의 계단 위에서 신격이 요동치니, 피라미드 주변에 집결한 천 명의 신도들이 두 무릎을 꿇고 팔을 높이 들었다.
[운명 파괴자에 의해 내가 염원하던 영원은 잠시 미뤄졌지만, 결국 필연. 이제 머지않아 운명전이 다시 시작될 터.]
여섯 개의 눈.
두 개의 팔.
네 개의 다리.
즈크타라고 불리는 인간형의 고대 신이 신도들을 향해 신탁을 전했다.
보통 신탁은 신의 뜻을 신앙자가 매개해 전달하는 것이지만, 이곳에서의 신탁은 달랐다. ‘당신’의 뜻을 전달받은 신들이 곧 매개자였으니.
신 중 신.
‘당신’은 신들이 숭배하는 신이나 다름없었다.
[우리는 최후의 저항자와 운명 파괴자를 ‘당신’께 바쳐 운명을 완성한다! 영원한 순환! 종말에서 벗어나 영원토록 존재하기 위해! 영원성을 위해!!]
“와아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
[제물을 올려라!]
수백 명의 영혼들이 한꺼번에 바퀴가 달린 감옥에 넣어진 채로 옮겨졌다.
즈크타 신에게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내가 소유한 영혼들을 다시 ‘당신’께 환원하노니, 승리의 끝에서 나는 더 높은 운명을 부여받아 무한한 굴레를 영위하겠다.]
즈크타! 즈크타! 즈크타! 즈크타! 즈크타! 즈크타! 즈크타! 즈크타! 즈크타! 즈크타! 즈크타! 즈크타! 즈크타! 즈크타! 즈크타!
[‘당신’이여, 지켜봐 주소서!]
조잡한 육신에 갇힌 영혼들이 겁에 질려 벽에 붙자, 신도들은 창살 사이로 창을 찔러댔다. 비명과 절규가 난무했다.
신도들이 그것을 보며 웃어댔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영혼은 죽여도 다시금 영혼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작은 영원을 경험한 신도들에게는 더 이상 지켜야 할 선이 남아 있지 않았다.
반복되는 윤리와 도덕의 파괴에 그들은 악의만이 남았다. 그들의 신은 신도들을 보살피되, 그 외의 것의 존엄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쿠구구구구……!
즈크타가 신성력을 집중시켰다.
[운명을 숭앙하는 이 즈크타의 기적을!]
손에 맺힌 녹색의 구체가 쇄도했다. 직후에 공간이 비스듬히 갈라졌다.
기적이 반으로 쪼개져 허공에서 폭발했다.
[……?!]
“신이 신을 숭배한다.”
제물들이 들어간 감옥 앞에서 베르덴이 즈크타를 응시했다.
“추하군.”
[네놈은 누구…….]
“닥쳐라.”
베르덴이 스태프를 기울였다. 마력이 집중되는 걸 본 즈크타가 눈을 부릅뜨더니 그에 맞서 고위 기적을 발현했다.
마도 <파멸>
검붉은 광채가 번뜩였다.
투확!
파멸의 광선이 기적을 지워 버리고 즈크타의 몸을 관통했다. 그 뒤에 있던 피라미드의 최상층부가 함께 소거됐다.
[어……어…….]
즈크타가 비틀거리다가 왈칵 피를 뿜으며 권좌를 짚었다. 신성력으로 회복하려고 했지만 힘이 모이지 않았다.
‘그, 근원이 파괴됐다.’
여섯 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마…… 설마.]
어느샌가 베르덴은 222개의 계단 꼭대기에서 즈크타를 노려보았다. 즈크타가 부들부들 떨다가 발악이라도 하듯이 팔을 내질렀다.
쩌엉!
충격파에 대기가 일렁였다.
베르덴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 제6사도와의 전쟁이 종결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전력이 아니었지만, 격의 차이가 압도적이었다.
신기 [아인베르]는 즈크타 따위의 일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콰아아앙!
스태프에 강타당해 머리의 절반이 으깨진 즈크타가 바닥을 기었다.
[파, 파괴자가 왜…… 여기에……!!!]
간신히 계단에 손끝이 닿았다. 베르덴이 발끝으로 놈을 뒤집고 그대로 지르밟았다.
콰드드드드득…….
힘이 실리자 즈크타의 신체(神體)가 가슴부터 점차 뭉개졌다.
“너 따위도 신이라니.”
[살려, 살려 주시───아아아아아아아악!!!]
“보아라.”
베르덴이 즈크타의 신도들이 보는 앞에서 스태프를 휘둘렀다.
“이게 너희가 믿는 신이다.”
파멸의 창날이 뇌성을 터뜨리며 즈크타의 머리를 참수했다. 쿵, 쿵, 쿵! 신의 머리가 굴러떨어져 감옥에 부딪친 뒤에야 멈췄다.
즈크타의 목에서 확 뿜어져 나온 피가 계단을 타고 흘러내렸다.
신이 죽었다.
사방이 무거운 정적에 휩싸이더니 제사장이 얼굴을 손톱으로 찢으며 비명을 질렀다.
즈크타의 죽음이 사실임을 느낀 것이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즈, 즈크타시여!!!”
“내 운명이…….”
이를 기점으로 신도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신을 잃은 자들의 말로였다. 허나 베르덴은 그들을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곧바로 [인테리스]를 역수로 잡아 즈크타의 시체를 수직으로 꿰뚫었다.
콰르르르릉!
현뢰가 신을 통해서 아직 신성력이 사라지지 않은 신도들에게 작렬했다. 근원을 부수는 파멸과 전도되는 벼락의 특성.
천 갈래로 갈라진 뇌격이 삽시간에 즈크타 신앙을 멸절시켰다. 그들은 단말마의 비명도, 시체도, 작은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오직 영혼만이 [그링 아르카넘]에 깃들었다.
영혼도 파괴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베르덴 자신의 계명을 어기는 일.
‘즈크타만이 아니라 즈크타가 가진 영혼들도 함께 기록되는 건가.’
제물로 잡히지 않고 죽임당한 영혼들은 다시금 즈크타에게 돌아갔으나, 즈크타가 죽으면서 베르덴의 책으로 넘어왔다.
이제 이곳에는 제물로 쓰일 예정이었던 영혼만이 남은 상황.
베르덴은 촌락에서 했던 일을 되풀이했다.
마력을 발산하는 나무를 급성장시켜 그들의 육신을 유지할 방도를 마련해 주고, 촌락의 위치를 알려주는 등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뒤 떠났다.
피라미드에 남은 영혼들은 우왕좌왕하다가 나무를 향해 기도를 올리며 안정을 찾았다.
“잿빛의 신이시여…….”
* * *
콰과과과과과!
폭포가 세차게 떨어지는 밀림 어딘가에서 베르덴이 말했다.
“이만 나오시죠.”
+어땠는가, 그녀의 권역은+
올다르크는 계속 옆에 있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기분이 더럽더군요.”
+운명으로 세상이 재편되면 그들은 모든 기억을 잃고 주어진 운명을 반복하게 된다. 선인의 운명을 부여받았다면 선인의 삶을 살게 되지. 과거에 무슨 짓을 저질렀든+
올다르크가 물었다.
+그대는 납득할 수 있는가+
“……의도는 알겠습니다. ‘당신’의 이상이 얼마나 숭고하든, 지성체의 존엄을 중시하는 제가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신 거겠죠.”
+그것이 그녀의 타협이다. 모두를 위할 수 없으니 선별했지. 결국 누군가는 잔혹한 삶을 영원히 반복할 수밖에 없고, 운명에 쓰인 영혼들은 그저 한낱 재료로만 여겨질 뿐+
“…….”
베르덴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초대 마도왕께서 보이신 행동에도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베르덴이 물었다.
가슴속에 품은 그 질문을.
“알파는 왜 버리셨습니까.”